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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622화 (621/1,559)

제 622화

사신수들은 보통 고집이 대단한 편이다.

분노조절 장애를 가지고 있던 주작 불닭이는 사실 나의 앞에서만 분노조절 잘해로 변할 뿐 본성이 어디 가는 건 아니었다.

그 탓에 과거 귀쟁이들과의 전쟁에서 삼조관의 직책으로 숲을 나왔던 에밀리아를 습격해 잡아 왔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사고를 쳤다.

청룡 쿠릉이도 마찬가지였고 말이 통하지 않는 마이웨이를 달리는 나머지 둘의 신수도 마찬가지였다.

황룡이라고 다를까.

그렇기에 제 고집을 못 이겨 날뛰는 놈들에겐 절대적인 진리를 들이대야 하는 법이다.

예로부터 매가 약이라고 했다.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았다고 해도, 단 하나로 해결이 가능하다.

황룡은 자신을 구현, 소환해낸 이가 설마 시작부터 이렇게 거칠게 나올 줄은 몰랐는지 당황한 눈치였지만, 자신의 힘을 믿고 당연히 뻗대는 반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녀석은 두 머리가 괴성을 내지를 때까지 내게 맞고 나서야 본능적으로 알아챈 듯했다.

나는 단순히 자신의 힘을 믿고 까불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녀석의 힘은 정령왕의 이상급.

비명을 지를 정도의 힘을 아무렇지 않게 때려 박으려면 힘을 조금 써야 하지만 투자라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이행했다.

그리고 굴종해 버린 녀석에게 나는 한 가지 경고를 뼛속 깊이 심어 넣었다.

결벽증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겠지만. 적당히 선을 지키라고 말이다.

황룡은 직접적으로 내게 의지를 보여줄 순 없지만 내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다.

거절하면 죽도록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황룡은 두 머리의 목뼈가 부러질 때까지 고개를 끄덕였고.

일단은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런데.

이놈이 환나라의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눈이 돌아버린 것이다.

결벽증으로 인한 광기.

오염의 근원을 지우다 못해 아주 일대를 소멸시켜버릴 때까지 날뛰는 녀석에게 내가 달려들어 다시 한 번 악몽을 되새겨 주려 하자, 추가로 정화광선을 꽂으려던 녀석이 움찔거렸다.

내가 놈을 제지하기가 무섭게 녀석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도 지금은 깔끔하게 지워진, 타락한 늪이 있던 곳을 계속해서 흘끔거렸다.

이미 수차례의 정화광선이 쏟아져 흔적도 없이 늪이 사라져버렸지만, 녀석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물론, 그런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이들에게 황룡의 출현은 그야말로 경악스러웠던 모양이었다.

후우웅!!!

큰 체격을 움직여 지상으로 내려오는 황룡의 크기는 놀라울 정도로 거대했으며, 이내 커다란 궁을 빙그르르 감싸듯 천천히 내려섰다.

“세상에…… 황룡이라니!! 내 살아생전에 중앙 신수 황룡을 보게 되다니!”

누군가의 경악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유나라의 대신인 제갈묵이었다.

현재 이번 일과 사후 문제를 논하기 위해 옥화 공주 수윤을 포함한 다수의 유나라 관리들이 도착해있었다.

애초에 내가 유도한 것이니 별로 놀랄 것도 없는 일이었다.

“두 개의 머리! 저 찬란한 비늘과 거대한 몸! 놀라울 정도로 정순한 힘까지! 아아…… 세상에 노부가 살면서 사신수와 황룡까지 보게 될 줄이야!”

그는 이곳이 황제가 있는 장소라는 것도 잊은 채 침을 튀기며 열정을 드러냈다.

“아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구나!”

“크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누군가의 헛기침 소리에 그는 황급히 물러나며 시선을 회피했다.

“크흠…… 시…… 실례했습니다.”

정중한 그의 사과에 환나라의 황제, 월곤이 손을 휘저었다.

“신경 쓰지 말라. 놀란 것은 그대뿐만이 아니니.”

그런 그의 태도에 사방에서 놀란 기색들을 보였지만 월곤의 시선은 내게 꽂혀있었다.

“그래, 갔던 일은 잘 되었는가.”

“다 처리되었습니다. 다만, 아직 늪은 남아있지요.”

“그렇군. 이미 각지에서 급보가 올라오고 있네. 늪의 존재와 그 확산속도가 그대가 말한 것 이상으로 빠르다더군.”

주인 잃은 힘은 두 가지 양상을 띤다.

폭주하거나, 사라지거나.

하지만 심연의 공주, 델라와 다르게 멜트의 힘은 주인을 잃고 폭주하는 쪽을 택한 듯 보였다.

“걱정 마시오. 하계의 황제여, 그 일은 우리 선계에서 다 해결할 터이니.”

나를 대신하여 나선 천둥 대신이 나와 말을 맞춘 대로 대답하며 나섰다.

“오오…… 선계의 존재이시군. 보는 것만으로도 이리 청명한 기분이 드는 건 처음이오.”

월곤이 천둥 대신을 올려다보며 말하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모든 것이 선계를 다스리시는 상제의 은덕이오.”

본래라면 천둥 대신은 물론, 구름 대신조차 이렇게 황제랍시고 예의를 차려줄 작자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매질이라는 게 꼭 황룡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지시켜주고 나니 모든 것이 잘 해결되었다.

“그보다 놀랍군. 선계의 신수라 불리는 황룡의 힘이 이토록 정순할 줄이야. 그 끔찍한 늪을 이리 단번에 증발시켜버리다니.”

비록 그 과정에서 황룡의 고질병이 드러나 일대 영역에 파괴 흔적이 남았다지만 아예 못 쓰는 공간이 될 바에 조금 파괴되더라도 깔끔하게 지워버리는 게 나았다.

나는 안절부절못하겠는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고 있는 황룡을 흘끗 보며 천천히 손을 휘저어주고는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소곤거렸다.

“가서 싸그리 지우고 와. 대신 사람 죽이지 말고, 오늘 안에 끝내.”

여타 신수도 그렇지만 영험한 신수라 불리는 존재라 해서 그들이 자비로운 것은 아니다.

그르르르르…….

내 말에 녀석의 얼굴에 화색이 돋는다.

하지만 곧이어 내 말뜻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물론 그 불만을 어딘가에 터뜨리진 못하고 그대로 날아올랐지만 말이다.

황룡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곧이어 정신을 차린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후의 일은 사실상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결벽증에 환장한 황룡은 그 특유의 감각으로 멜트의 흔적인 타락한 부패의 늪을 하나도 남김없이 정화시키기 시작했다.

그 수가 무려 백여 곳이 넘었지만 상관없었다.

이후 추가적인 국가 협상을 위해 옥화 공주 수윤과 환나라 황제 월곤이 이동하고 나는 환나라의 국빈각을 통째로 빌리는 기염을 토해냈다.

굳이 필요 없다고 말하였으나 황제의 목숨을 살린 자. 그 공헌은 나라를 구한 것과 진배없다며 말하던 월곤의 선택이었다.

그 어떤 국가의 귀빈도 이토록 큰 대접을 받진 못하리라.

물론, 두 명의 대신 또한 나를 따라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지만 말이다.

“이봐. 팔신시의 옥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나는 천둥 대신과 구름 대신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무슨 소리오.”

“팔신시의 힘치고는 황룡의 힘이 너무 강해서 말이지.”

정화작업을 이렇게 날름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곤 전혀 생각지 않았었다.

하지만 황룡이 품은 힘은 내 생각 이상으로 방대하고 강력했던 탓에 늪의 정리가 생각 이상으로 빨라지고 있었다.

“팔신시는 선계의 영험한 존재요. 그런 팔신시의 힘을 100여 년간 응축시킨 팔신시의 옥을 흡수한 저 신수라는 황룡이 강해지는 건 당연…….”

“아니, 내가 그 다리 여덟 개의 늑대를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야.”

내 말에 대화를 나누던 천둥 대신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파…… 팔신시를 직접 본 적이 있으시오?!”

“어쩌다 보니 알게 됐지. 그러니 알고 있는 거야. 팔신시의 옥만 가지곤 저토록 강한 힘을 낼 수 없어.”

내 설명에 구름 대신이 침묵했다.

“전부터 의문이었소만…… 당신과…… 저 소저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오?”

나는 연못 근처 바위에 쪼그리고 앉아 비단잉어를 내려다보며 시선을 좁히고 있는 륀느를 바라보았다.

어느덧 황룡이 황궁을 떠나고 시간이 흘러 날이 어두워졌지만, 륀느는 눈에 빛을 머금어 비단잉어들을 유인하고는 그것들이 움직이는 걸 구경하고 있었다.

“사람이야. 당신들이 하계라 부르는 곳의 인간.”

“하지만 당신은 이곳의 사람은 아니지 않소?”

“그렇지.”

“……하면 대체 당신은 어디서 온 것이오.”

두 대신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대답했다.

“글쎄, 어디서 왔을까.”

“…….”

“약속은 약속이오.”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불왕의 옥새를 그들에게 완전히 건네주었다.

“조심히 다뤄. 그거 위험한 물건이니까.”

약간 낡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어린다.

진품은 외려 진짜처럼 보일 필요가 없다는 말이 있다.

너무 깨끗한 그림과 약간 지저분한 그림이 있을 때 어느 쪽이 진품인지 구분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이 불왕의 옥새 또한 마찬가지였다.

본능적인 경배를 불러일으키는 힘이 느껴진다.

나의 경우엔 그저 힘이 조금 응축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불왕의 옥새를 왕의 상징으로 여기는 두 명의 선계인들에겐 다르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받아. 가서 상제에게 전해. 약속은 지킨다고.”

“크흠. 내 곧바로 선계로 돌아가야겠소.”

불왕의 옥새를 받아든 구름 대신이 황급히 몸을 돌린다.

“나 또한 따라가 보겠소. 이곳에 공주님이 남을 테니 필요한 게 있다면 공주님께 직접 말씀하시오.”

“당신들이 할 건 없어. 그냥 이 땅의 흐름을 감시해주면 돼. 그리고, 항마봉사진을 유지시켜주고. 그리고 내 말 상제에게 잘 전해. 지금처럼 눈치껏 간섭하는 건 내가 그냥 놔두겠지만.”

짧게 말을 끊은 내가 그를 직시했다.

“과거처럼 바보 같은 짓은 삼가라고.”

“…… 일단은 전하리다.”

항마봉사진은 이 땅에 혹시라도 존재할지 모르는 심연의 존재를 추적하는 힘도 되고, 그들의 힘을 방해하는 결계이기도 했다.

비록 오에돈을 포함하여 세 마리의 심연의 존재와 두 명의 심연의 공주는 모두 죽었다지만 미묘하게 한 가지 사실이 걸렸다.

악마종.

그들이 언급했고, 과거 하인스 영지에서 울드 자매가 내게서 탈취하는 데에 성공한 존재가 걸렸다.

애초에.

아무리 둘이 합쳐서 심연의 공주 한 명에서 한 명 반 정도의 몫밖에 못 한다지만 멜트와 델라가 어떻게 이 땅에 올 수 있었던 것일까.

“애초에 이실디가 이곳에 있는데 말이야.”

베르단데의 정보대로라면 이 땅에 심연의 공주는 넘어올 수 없다.

슬리지아라도 살아있거나 그녀의 힘의 일부를 빌려 쓰는 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 말이다.

“데이비. 고민하지 마.”

선계의 존재들을 돌려보내고 여유로운 복장으로 환나라의 자랑거리인 용화청주라는 것을 음미하던 나는, 내 뒤에서 포옹하는 부드러운 감촉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페르세르크.”

“본녀의 다리…… 좀 봐줄 수 있어?”

언뜻 들으면 약간 야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후유증이야?”

“그런 것 같은데…….”

하늘거리는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자 새하얗고 미끈한 느낌을 주는 가느다란 그녀의 다리가 드러났다.

하지만 나머지 한 쪽 다리는 조금 달랐다.

아킬레스건부터 종아리의 중앙 부분까지 검은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남은 게 있었네.”

분명 사령 마나를 이용한 마법들로 지워버렸을 텐데.

나는 아공간에서 세안용 그릇을 하나 꺼내든 후 여분으로 챙겨두었던 성수를 뿌렸다.

“부인, 다리를 내놓으시지요.”

내 장난스런 말에 페르세르크가 꺄르륵 웃으며 변색된 다리를 내밀었다.

이에 나는 천천히 그녀의 다리를 소중하게 붙잡고는 성수를 담은 세안 그릇에 담갔다.

“읏…… 차가워.”

찰랑! 거리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물이 그녀의 피부에 닿자 페르세르크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전투가 끝난 천중원은 너무도 평온했다.

풀벌레 우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한 이 거대한 궁 안엔 사실상 륀느와 나, 그리고 페르세르크, 그 외에 선계의 공주가 전부였다.

본래 이곳에는 천열문의 대사저인 윤희령을 포함해 여러 인물이 머무르고 있었으나 현재 사후 처리 문제로 각 무림맹은 정신없이 바빴고, 윤희령도 현무대 단장을 내려놓고 자성과 지희를 데리고 천열문으로 돌아간다고 하니 남은 건 우리뿐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내게 고맙다고 말한 뒤 돌아서는 윤희령의 뒷모습이 쉬이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있어서가 아닌 불안함 때문이었다.

괜히 물가에 내어놓은 아이 같았다.

지금의 자성이라면 엄한 놈이 그녀를 헤치지 못하게 막을 수야 있겠지만 세상만사 모든 게 생각대로 되진 않는 법이다.

챠륵! 챠륵…….

고요한 물소리와 함께 나는 처마에 걸터앉은 페르세르크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변색된 다리에 성수를 뿌리고 신성 마법을 계속해서 발현했다.

“이 정도는 보석 쓰지 않고도 가능하니까 너무 걱정 마.”

“읏…….”

“아프면 말해.”

“괘……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부드럽게 휘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전혀 봐주지 못했고.

페르세르크는 그런 내게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나를 불렀다.

“데이비.”

“응?”

고개를 들자 그녀의 미소가 보인다.

너무 아름답고 환한 미소였다. 그런 그녀의 너무 예쁜 미소에 잠시 침묵했을까.

그녀의 다리를 잡고 있던 나는 곧이어 다가오는 그녀의 얼굴과 입술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녀가 주도한 입맞춤에서 달콤한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묘한 흥분이 오르는 이 상황 속에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떼어내는 그녀를 향해 물었다.

“그렇지. 우리 신혼이었지.”

이곳에 온 이유도 사실상은 반쯤 신혼여행 때문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너무 소홀했다는 생각이 들자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일의 경중은 본녀도 잘 알아. 그대는 이 정도면 충분히 잘해 주고 있는 게야.”

“…….”

“만약 그대가 본녀에게만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면 외려 실망했을 테지.”

그렇게 말한 그녀의 손이 내 뺨을 쓸어내린다.

“그렇기에 본녀가 그대를 연모하는 것일 테고.”

환하게 웃으며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괜한 미소가 지어졌다.

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날이 어두워 주변을 비추는 건 연등과 달이 전부였다.

이 시간이 되었음에도 황룡이 날뛰고 있는 것일까.

저 멀리 하늘에서 거대한 정화광선들이 쏟아지는 게 보인다.

결벽증에 미쳐버린 녀석에게 잠 따위 중요할리 없다.

기감이 닿는 곳에 타락한 늪이라는 이물질이 존재한다는 걸 그냥 넘길 순 없을 테니까.

무슨 이유로 황룡이 생각 이상의 힘을 내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사실 그게 나쁜 결과는 아니었다.

본래라면 벌써 뻗었을 텐데.

다리 여덟 달린 늑대. 즉 선계의 영물이 백여 년간 쌓아온 힘의 정수를 흡수한 탓인지 아주 지칠 줄 모르는 건전지가 되어있는 황룡이었다.

“결과적으로 보옥은 못 찾은 게야.”

다시금 그녀의 다리에 성수를 끼얹으며 발을 씻겨주기 시작하자 그녀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남은 곳은 페스레사 대륙이었지?”

“그럴 테지.”

“당분간은 가지 말자.”

피곤한 표정을 지어 보인 나였다.

“나도 이쯤 되면 좀 지친다.”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에 페르세르크는 그저 말없이 나를 다독였다.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자. 다 됐다.”

그녀의 몸은 인간과 다르게 여러 면에서 장단점이 존재한다.

특히 질병에 관해선 직접 약이나 치료, 수술 등을 통해야 하는 인간과 달리 매우 간편하게 고칠 수 있었다.

그녀의 몸에 남은 병증을 모조리 죽이는 데에 성공한 나는 이 이상 재발할 가능성이 없는지 확인한 후 새하얀 피부로 돌아온 그녀의 다리를 꼼꼼하게 수건으로 닦아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허벅지와 등을 받쳐 천천히 들어 올린 후 말했다.

“들어가자.”

이곳에서 느끼는 오랜만의 평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연과 연관이 되면 거의 폭주 기관차마냥 달려왔으니 말이다.

며칠 정도.

나는 옥화 공주 수윤과 월곤이 치열하게 협상을 벌이는 와중에도 느긋한 일상을 즐겼다.

오로지 페르세르크만을 눈에 담았으며 그 외엔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전쟁과 분열이 없는 공존이지, 자잘한 국가의 손익은 관심 밖의 일이니까.

이틀 내로 끝내라곤 했지만 역시나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

황룡의 정화 작업과 항마봉사진의 유지가 사흘째.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이었다.

페르세르크를 무릎에 앉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고 쏟아지는 빗소리를 감상하던 나는 급히 나를 찾아온 선계의 공주의 말에 인상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항마봉사진을 치고 있던 선계의 존재가.

단 한 명에게 단번에 몰살당했다는 소식이었다.

하계의 존재가 선계의 존재를 살해했다?

그럴 리가. 애초에 하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항마봉사진을 펼치기 위해 하강한 이들이 어느 정도 무력인지 알고 있는 나로선 이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너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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