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5화
상제가 가지고 있던 소녀가 건네준 구슬은 더더욱 강렬한 빛을 내뿜는다.
마치 망망대해에 홀로 떠 있는 등대처럼 환하면서 특유의 파장을 퍼뜨렸다.
다른 이들은 모르지만.
단 한 명에게만큼은 확실한 신호였다. 그리고, 그것은 기적을 향한 첫 단추가 되고 있었다.
-그르르…… 샤아아아아악!!!
머리가 떨어져 나가자 주춤거린 악마종 리퍼는 곧이어 비척비척 걸어가 떨어져 나간 머리를 천천히 주워들었다.
그리고는 머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가져다 붙이며 섬뜩하게 물었다.
-네년…… 우리의 의지를 배신하는 것이냐.
“배신?”
싸늘하게 말한 그녀의 손에 검은색의 기검이 생겨났다.
폭이 8센티 정도 되는 기검은 비교적 넓은 폭을 지닌 도에 비해 얇은 검을 쓰는 중원인들의 무기 문화와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이실디는 그 검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다루었다.
최상위 심연의 공주, 이실디.
그녀의 전신에서 심연과 흡사하지만, 청명한 기운이 흘러나온다.
“너 때문에 나는…….”
말끝을 흐린 그녀가 이를 빠득 깨물었다.
[천금의 이름을 걸고 내 장담하마. 세상엔 많은 이들이 얽혀 살아간단다. 때로는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때로는 참 행복한 일도 많은 법이란다. 이 사부와 네 인연이 닿은 것처럼 말이다.]
[사부님! 감자가 맛있어요! 같이 먹어요!]
[허허허, 이름을 가지고 싶다고? 그래. 기쁨이 가득한 세상을 보라는 의미에서 기쁠 희 자를 써서 희령이 어떠하냐. 널 데려온 부인의 성을 따서, 윤희령. 허허 예쁜 이름이로구나.]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여기서 좀 더 허리를 숙이거라!]
[사부님! 그럼 화를 안 내요?! 그놈들이 사부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막말을 했단 말이에요!]
[세상사 타인의 생각을 어찌할 수 있다고 자만하는 건 오만이란다.]
껄껄 웃는 남자와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바라보며 뺨을 부풀리던 한 소녀.
거칠고 힘든 수련을 거쳐 내공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무공을 배웠으며, 섬을 나서서 무림을 구경하고 함께 웃고 즐거워했던 기억.
[사부님. 오늘은…….]
[그래. 부인의 기일이란다, 그리고 너와 내가 만난 날이기도 하지, 희령아. 약속해줄 수 있겠느냐. 네게 무슨 사연이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이 사부가 네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고 사랑해주었듯, 너 또한 이 세상을 사랑하고 지금처럼 웃어주려무나. 그리고, 너와 함께 어우러져 사는 이 세상을 조금만이라도 아껴주겠느냐.]
그때 당시엔 그게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이 깨어난 뒤 알 수 있었다.
과거 천중원에서 일어난 대참사.
다섯 명의 절대 오성 중 둘을 죽이고 천금의 부인까지 죽였던 희대의 마인이 누구였는지를.
이실디는 이곳에 오자마자 학살을 자행했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부인이었을 한 여인의 목숨을 거두었고, 그녀를 잡기 위해 찾아온 절대 오성들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다.
하지만, 이곳으로 넘어오던 당시, 성격이 거친 슬리지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이실디는 그녀의 함정에 빠져 불안정한 차원을 횡단하고 말았고, 그 여파로 기억을 잃고 힘이 방출되어 잃어버렸다.
세상을 파괴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던 그녀는 힘이 사라진 여파로 작아져 버렸고, 이실디에게 패배해 도망치던 천금의 눈에 띄었다.
당시의 천금은 기억을 잃고 퇴화해버린 윤희령을 이실디라고 생각하지 못했고 그녀를 이 난리 통에 휩쓸린 피해자라고만 생각했다.
그가 그녀의 정체를 깨달은 건 그보다 한참 뒤의 일이었다.
윤희령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삶은 이실디의 삶에 비하면 한없이 짧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실디의 모든 기억을 통틀어 가장 강렬하고 씁쓸함을 가져다주었던 기억은 윤희령때의 기억이 전부였다.
약속했는데.
본능이 깨어난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지금이야 윤희령으로써의 기억이 있어 제어가 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녀는 티오니스 대륙의 베르단데처럼 심연의 공주가 가진 본능을 억눌러줄 무언가를 모두 잃어버렸다.
본능이 그녀를 완전히 잠식하면, 과거 마인처럼 닥치는 대로 이 세상을 부숴버릴 것이다.
-크윽?!
“너 때문에 나는 중요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단 말이다!!”
격하게 소리친 그녀의 분노가 터져 나온다. 그녀의 감정에 기인한 듯 말도 안 되는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고 이내 그녀는 검은 기검으로 놈을 짓밟은 뒤 마구잡이로 찔러넣었다.
-기어이……배신을…….
“닥쳐…… 닥치라고!!”
-크윽!! 큭…… 네년의 힘을 부활시킨 건 오에돈의 큰 실수였구나…….
“그래. 실수했어. 깨워선 안 될 것을 깨웠으니까. 그러니까 죽어, 개자식아!!”
싸늘하게 말한 그녀는 리퍼의 머리통을 끝내 밟아 터뜨려버렸다.
그리고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놈의 시신이 있던 자리에 무릎을 꿇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대체 왜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인가.
오랜 심연의 공주의 삶에 비해 이곳에서의 삶은 짧았다.
하지만.
‘가장 건조하지 않은 기억이었다.’
심연의 공주로써 느껴보지 못한 감정.
단 한 명이 나누어준 부정에 그녀. 아니, 그녀를 이루는 수억의 사념체들이 그녀가 느낀 아주 찰나의 행복에 동화되어버린 것이다.
그 탓에 그녀는 기억과 힘을 되찾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었다. 이미 돌아와 버린 기억은 다시 사라질 리 없었고, 그녀를 계속해서 본능으로 이끌어 이 세상을 파괴하라는 지시대로 움직일 터였다.
“그대는…….”
몸을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상제가 천천히 다가오자 윤희령은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이곳을 떠나.”
“뭐라?”
“이 땅은 중원과 다르게 불안전한 차원이야. 프리아 여신이 만들어낸 차원, 그렇기에 슬리지아의 힘을 지닌 리퍼의 힘에도 그렇게 쉽게 부서져 내린 거겠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듯 상제와 수호자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이 선계는 물론, 중원 땅까지 모조리 파괴될 거야. 그러니 이곳을 떠나. 이곳에서 떠나서 당신들이 말하는 하계로 도망가.”
“마치 이곳에 남겠다는 듯한 말투로군.”
“맞아, 난 여기 남아서 길목을 부술 거야.”
약속은 어기고 말았지만 그 후에도 사부님이 사랑했던 이 세상을 부수지 않도록.
이곳에 남아 선계와 하계, 즉 천중원의 연결통로를 완전히 끊겠다는 소리였다.
두 세계의 연결이 모두 끊어지면 선계의 파괴 여파가 중원까지 퍼지진 않게 된다.
하지만 그 말인즉슨 부서지는 인공 차원과 함께 휩쓸려 차원의 틈새에 빠지고 죽겠다는 뜻과 같았다.
틈새에서 멀쩡할 수 있는 건 이미 죽어버린 슬리지아를 제외하곤 존재하지 않으니 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마라!! 상제께서도 불가능한 일을 일개 하계의 인간인 네가 어떻게…….”
그렇게 소리치려 했지만, 윤희령과 눈을 마주친 수호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방금 전 수호자들은 물론, 선계의 힘의 상징인 상제조차 찍어누른 괴물을 그녀가 어떻게 이겼는지 봤기 때문이었다.
“죽고자 하는가.”
“내 본능을 억눌러 주는 것들이 모두 사라졌으니까. 이대로라면…….”
그녀의 말에 상제는 침묵했다.
“그러니까, 내가 사부님께 할 수 있는 유일한 사과를 할 수 있게 떠나.”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기검을 허공에 대고 그어버렸다.
데이비가 만들어놓은 틈새로 인해 약해진 그 경계가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힘에 의해 찢겨져 벌려지기 시작했다.
“상제님! 고향을 등지고 떠나라니요!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방법이 없는 겁니까?!”
“…… 모두가 나의 불찰이다. 나의 과오요, 업보일지니…….”
몸을 가까스로 회복한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진짜 불왕의 옥새를 빼앗기지만 않았다면 이 붕괴를 막았을 수도 있겠지만…….”
이미 그 옥새는 그 악마종이라 불리던 붉은 괴물이 먹어치워 버렸다.
폭주하고 부서지기 시작한 선계를 제어할 힘이 없어졌다는 소리였다.
상제의 참담한 말에 수호자들은 급기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합류한 대신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윤희령이 전신에 검은 힘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어찌하여 나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그것을 잃어버렸단 말인가…… 죽어서 선조들의 넋을 어이 볼꼬…….”
상제의 울분이 섞인 중얼거림에 윤희령이 짜증스레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윽?!”
몸을 비틀거린 그녀의 표정에 순간적으로 광기와 살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심연의 공주로서의 본능과.
윤희령이라는 한 인간 소녀의 감정이 충돌하기 시작한 것이다.
동화되었던 수억의 사념체의 근원은 타나토스 신.
당연히 오래갈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윤희령으로써의 이성이 아직 남아 그녀를 계속해서 제어했다.
“제발…… 가라고…….”
“옥새만…… 옥새만 있었다면…….”
수호자 중 하나가 고향을 등지고 떠나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옥새를 부르짖었다.
반대로 상제는 정리를 생각을 정리한 듯 다급히 소리쳤다.
“시간이 없다! 수호자들은 어서 돌아가 이 땅의 존재들을 모두 피신시켜라!”
이에 수호자들이 눈물을 머금고 움직이려던 찰나.
상제가 가지고 있던 구슬이 어마어마한 빛을 내뿜으며 빛의 줄기 같은 것을 넘실넘실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명의 청년을 그 속에서 불러냈다.
“뭐야. 여기 왜 이래.”
느긋한 청년의 목소리.
그 청년의 정체를 대번에 깨달은 상제가 눈을 부릅떴다.
다름 아닌 그가 바로 불왕의 옥새 진품을 돌려준 하계의 이방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대는…….”
“아주 난장판인데? 얼씨구? 쟤는 또 왜 여기 있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듯 능청스레 말하는 모습이지만 상제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이 상황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실제로 그러했다.
케인을 통해 악마종에 대한 정보를 들은 데이비는 곧바로 선계로 향하는 틈 사이를 잡아 벌려 그도 지나갈 수 있게 그 크기를 늘린 후 이곳으로 진입하다가 방향을 틀었다.
중원으로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놈을 쫓아왔는가. 이미 늦었네. 이미 놈은 죽었고 이 땅은 붕괴하기 시작했어. 진짜 불왕의 옥새마저 유실된 지금…….”
툭!
그때였다.
심드렁하게 걸어 나온 청년, 데이비가 손에 쥔 것을 그에게 던져주었다.
“음?!”
“필요한 거 아닙니까? 쓰시라고.”
그의 말에.
모두의 얼굴에 경악이 서린다.
데이비가 던진 것.
그건 다름 아닌 악마종 리퍼가 먹어치웠던 불왕의 옥새였다.
데이비가 준 것은 독고준이 구현해낸 진짜이며 가짜인 불왕의 옥새이며, 진짜 불왕의 옥새는 독고준이 중원 어딘가에 숨겨놓았었다는 것을 아는 이는 없었기에 나온 결과였다.
“악마종은 단순히 죽인다고 죽는 게 아닐 텐데. 늦게 온 내가 멍청이지.”
“너…….”
“됐고. 내가 어렵게 각성을 막아놨더니 그새를 못 참고 눈을 떴나?”
내 질문에 윤희령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왜 여길 온 거야!! 네가 있으면 더 버티기 힘들어진다고!!”
그녀의 불벼락 같은 외침에 데이비는 그저 웃어 보였다.
“뭐해요. 빨리 제어 안 하고,”
“이건…… 진짜 옥새가 아닌가! 분명 내가 가진 옥새는 그 괴물이 먹어치웠을 텐데!”
“그것도 진품이니까 의심하지 말고 쓰시라고.”
기가 막힌 상황이었다.
분명 이 파괴상황을 제어할 수 있는 진품 불왕의 옥새를 먹혀서 희망을 잃어버렸는데.
대체 어디서 진짜 불왕의 옥새가 또 나온 것이란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향해 데이비는 어깨를 으쓱였다.
“대체 어떻게 옥새가 둘이나…… 이걸 어디서 구하였단 말인가!”
“오다 주웠습니다.”
“…….”
“그 옥새라는 거, 제법 흔한 물건인가 봅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헛소리하지 말라며 소리 지르고 싶지만, 상제는 또다시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상황이 되었건, 이 선계와 하계 전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택해야 한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불왕의 옥새를 쥐었고 이내 빛으로 화하며 수호자들과 함께 사라지기 시작했다.
불왕의 옥새를 다시 한번 상제와 연결시켜 이 땅을 제어하려는 것이다.
수호자들과 상제가 사라진 이후 남은 것은 데이비와 윤희령이 전부였다.
“차원의 붕괴가 아니면 날 죽일 수 없어, 넌 지금 실수한 거야.”
윤희령은 데이비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 말대로 차원의 틈새가 아니면 그녀 정도의 심연의 공주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죽이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녀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치명상은 먹일 수 있으리라.
하지만. 깨어나기 시작한 그녀의 본능이 그걸 두고 볼 리가 없다.
즉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그녀를 죽이기 위해선 이 선계를 폭탄 삼아 그녀를 아예 차원의 틈새로 날려버려야 한다는 소리였다.
“도망친 악마종 놈을 대신 처리해준 건 고맙다고 하지 않으마. 어차피 너희 심연 놈들 목숨줄 질긴 건 다 아는 사실이니까.”
“…….”
“그래도 호의를 그냥 넘기면 쓰나.”
빙그레 웃으며 데이비가 손가락을 튕긴다.
투웅!!!
동시에 본능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던 윤희령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명백한 이상 현상이었기 때문이었다.
“끝내주지? 네 친구 힘, 쩔더라?”
그렇게 말한 데이비가 윤희령에게 다가온다.
“네 몸에서 물의 기운과 내공을 빼앗을 때.”
그의 말에 윤희령이 지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아무 짓도 안 한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나.
씨익 웃으며 그가 청단이와 홍단이를 뽑아 들고는 말했다.
“디버프 걸고 내가 지면 접싯물에 코 박고 뒈져야지.”
본능을 내가 억눌러주마.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죽는다던데.
그런 생각이 드는 데이비였다.
하지만. 이미 베르단데라는 변수도 만든 마당에 인간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심연의 배신자 하나 더 살린다고 뭐가 달라질까.
쿠웅!!!!
데이비의 말에 윤희령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그녀의 본능.
슬리지아에 버금가는 압도적인 힘을 지닌 최상위 심연의 공주의 힘이 모조리 폭주하듯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콰아아앙!!!!
동시에, 초단이로 융합시킨 데이비의 검과 윤희령이 만들어낸 새카만 기검이 충돌한다.
“베르샤의 저주로는 나를 약화시키지 못해. 후회할 거다. 인간.”
결국, 본능이 깨어나 버린 윤희령, 아니 이실디가 참담함을 참지 못하고 피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거야 대보면 아는 일이고, 쫄리면 뒈지시던가.”
그녀는 한가지는 몰랐다.
현재 데이비의 몸은 혼과 육신이 동기화된 것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