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7화
“신목의 성지라는 곳에 너와 같은 심연의 공주가 하나 더 있다. 거기서 지내.”
내 말에 그녀가 눈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베르단데의 힘으로 분리해내는 건 좋았는데 네 상태를 유지하려면 그녀의 힘이 계속해서 필요해.”
베르단데의 힘은 마술이다.
마술은 즉 눈속임, 보는 이를 현혹하여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만든다.
갑자기 사람이 사라진다든지. 사람의 육신이 떨어졌다가 붙길 반복한다든지.
본래 마술이란 그저 도구와 손놀림을 통해 만들어낸 트릭일 뿐이지만.
현실왜곡의 힘을 지닌 베르단데의 마술은 단순한 마술사들의 기술과는 다르다.
그녀의 힘이 곧 왜곡이며, 현혹이다.
그 원리는 나조차 알 수 없지만, 그녀의 설명대로라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심연의 존재는 악마종 리퍼를 제외하고 모두가 심연의 신 타나토스에게서 흘러나온 잔재들이다.
당연히 신의 권능이 스며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소리였다.
굳어버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지친 그녀를 어깨 위에 둘러매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 거대한 여파 속에서도 고고한 균열이 열려있다.
단순한 힘이 아닌 신의 상위 신성력으로 만들어진 균열.
그 안에서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름다운 여인을 바라보았다.
털썩!
“꺅!”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아버린 이실디가 나를 노려본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기다리고 있던 아름다운 여인에게 말했다.
“데려가.”
“정말 신기한 놈이지.”
혀를 쯧쯧 차며 그녀가 물었다.
“나와는 달라. 만약에 조금이라도 마음을 달리 먹으면 그녀는 네 적이 될 거야.”
“힘들걸?”
내 비웃음에 아름다운 여성, 베르단데가 이실디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실디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베르단데?!”
“오랜만이야. 이실디.”
“네가 어떻게 여기에…….”
“그런 쓸데없는 질문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는데.”
그녀의 말에 이실디가 다시 나를 본다.
“데려가. 페르세르크와 륀느만 데리고 곧바로 티오니스로 돌아갈 테니까.”
“심연의 움직임이 심상찮아. 악마종을 깨웠다지? 타나토스 신을 모시는 존재는 악마종뿐만이 아니야.”
“됐고, 당분간은 파업할 거다.”
신혼을 달콤함에 젖어있어야 할 새신랑을 이렇게 굴리게 둘 생각은 없었다.
“자…… 잠깐!! 이대로 간다고?! 어디로?!”
“따라와. 네 주변의 이들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면.”
“베르단데. 너 겁이 많이 없어졌구나?”
“반푼이인 넌 과거만큼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말한 베르단데가 그녀의 손을 잡고 사라지려 하자 그녀가 급히 내게 소리쳤다.
“하다못해 소식이라도! 자성이…… 자성이와 희아가 아직 그곳에 있다고!”
그녀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안돼.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다.”
내 말에 그녀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아직 천중원엔 하지 못한 일들이 있다.
하지만 베르단데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면서 차원 열쇠가 힘을 다한 것인지 이제 이곳에 체류할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갑작스레 내가 사라져버린 꼴이긴 하지만 내가 없다 해도 이 땅이 무너지는 건 아닐 터.
옥화 공주 수윤은 평화를 원했고, 환나라 황제 월곤도 내 요구에 따라 평화를 선택했다.
이 이상의 분쟁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는 소리였다.
남은 건 선계의 존재.
나는 베르단데가 이실디를 데리고 사라져버리자 다시 공간을 빠져나와 선계의 상제가 머무르는 궁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불왕의 옥새를 제어하며 이 땅의 파괴를 막고 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창백하게 질린 모습, 지친 표정.
아무리 봐도 그는 금방이라도 죽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자…… 자네는…….”
“하계가 밉나?”
내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선계가 박살 날뻔했으니까. 과거에도 그랬지. 선계의 존재는 하계를 질투했으니까.”
천마 독고준이 있던 시절, 선계라는 불안정 차원의 존재들은 완전한 차원인 천중원을 시기했다.
하지만 이제 와선 의미가 없었다.
“과거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라 했던가.”
그래서 선계의 존재는.
하계를 부수고 그들의 힘을 자신들에게 끌어오려 했다.
자신들이 완전해지기 위해서.
문제는 선계의 출현 여부가 하계의 인간들 때문이었다는 소리였다.
원인 제공은 하계가 했고, 분노를 터뜨린 건 선계.
그렇기에 선계는 천중원에 있어 불편한 이웃이며 의도하지 않은 침략자였다.
“…….”
“서로 공존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적당히 간섭하는 것으로 당신들도 이 차원의 구성원이 되는거야.”
내 말에 그는 침묵했다.
“불왕의 옥새는 둘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는 당신들이 천마에게 빼앗긴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천마 독고준이 만들어낸 거다.”
만들어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만 그는 반론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벌어진 모든 일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 투성이였으니까.
“나는 곧 죽게 되겠지. 하지만 다음 대의 상제가 나오려면 아직 멀었네.”
그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선계엔 상제라는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상제가 사라진 선계는 다시금 무너질 터.”
그의 말에 나는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그렇지.”
“이런 마당에 내가 왜 선택을 내린 것 같나.”
“과오를 반성하는 그런 미지근한 선택은 아닐 테고.”
“날개가 달린 청은발의 소녀가 나타났었다.”
그 말에 나는 침묵했다.
“그녀는 내게 두 가지 물건을 건네주었네.”
하나는 팔신시의 옥에 담아 내게 보냈고, 하나는 그가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떠나기 전 그렇게 말하더군.”
기적은 없는 것이 아니라고.“
은발의 소녀. 그게 누구인지 깨달은 나는 짜증을 부렸다.
“떠나기 직전까지 부려먹는구먼. 환골탈태 스택 많이 안 챙겨주면 파업이라도 해야겠어.”
청은발의 소녀. 프리아 여신이 분명하다.
그녀가 어떻게 이 땅에 강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째서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이곳에 온건, 프리아 여신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의심이 든 것이다.
그 말인 즉. 그 녀석은 지금 내 곁에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건데.
그걸 묻는 건 포기해버렸다.
“그래. 기적을 바란다고?”
“그녀는 내게 그렇게 말하더군.”
[신의 아래에서 태어난 이들은 모두가 같은 존재.]
“진기가 고갈된 당신을 치유하라는 소리였구만.”
진기는 수명이다.
그런 수명을 버린 그를 되살릴 방법이 있을 리 없다.
단 한 가지 방법을 제외하곤.
“수지타산이 전혀 안 맞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보석의 남은 파손율 중 일부를 활성화했다.
그리고는 그에게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기적을 두 번 바라진 마.”
다프네식 9위계 최후 성 마법.
하지만 이건 단 한 명에게, 단 한 번만 사용 가능한 진기 회복마법이다.
그리고.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나는 대량의 힘을 대가로써 바쳐야 했다.
“그래. 이정도는 까짓거 내어드리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어야 한다.
비록 내 힘을 빼앗아가는 프리아 여신의 행동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받기만 하고 주는 게 없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기적과도 같은 빛이 쏟아지며 내 몸에서 신성력의 최대치가 상당수 줄어들기 시작했다.
혼과 육신을 동기화시킨 상태의 기준으론 그리 많은 양이 아니지만, 이정도 양이면 9위계 성 마법 한번을 쓰고도 남을 정도의 양이었다.
합리적인 투자.
그래. 보상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방대한 양의 신성력이 쏟아져나와 그의 몸에 스며든다.
“당신은 대체…….”
내 존재에 대한 혼란으로 그가 조심스레 물어왔다.
“정체가 뭡니까.”
경어체로 바뀐 그 물음에 나는 픽 웃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다른 이들에게 미련이 있을 리 없다.
중원에 올 수 있는 게 이번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를 찾아 헤매던 백염검성 곽도영의 손녀, 곽미영이나 나와 얽힌 전례가 있던 이들에게 간단한 작별을 고한 이후 나는 천열문을 찾았다.
사저가 사라져버린 이후 우울함이 가득 차 있던 천열문에 도달한 나는 어둡게 가라앉은 분위기로 가득한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궁상을 떨고 있는 자성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리고는 윤희령의 서신을 건네주며 전언을 남겼다.
다음에 올 때 최소 화경 중상이상급의 경지에 올라 있으라고.
그에게 가르칠 건 이미 서책을 통해 전부 넘겼으니 더 이상 내가 손댈 것은 없었다.
내 말에 당황한 듯 나를 바라보던 그는 곧이어 떨리는 손으로 윤희령의 서신을 읽었다.
그 후 눈물을 흘리며 내게 무릎을 꿇고 구배지례를 올리는 그를 뒤로한 채 차원 열쇠를 활성화 시킨 나는 놀란 얼굴로 나를 보는 그를 뒤로한 채 페르세르크와 륀느를 데리고 중원을 떠났다.
다만 그건 생각지 못했다.
내게 기적을 받아낸 상제가 내 예상 이상으로 파격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을.
공간의 문을 열고 사라지는 나를 보며 자성이 나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퍼뜨렸는지를 말이다.
맹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륀느를 바라보던 나는 그녀가 의아한 듯 나를 보자 물었다.
“데이비 님, 륀느에게 질문이 있다고 판단해.”
“질문…… 그래. 질문은 있지.”
그렇게 말한 나는 그녀에게 지나가듯 물었다.
“네 이름은 륀느냐?”
“…… 륀느의 명칭, 륀느. 다른 명칭은 없다고 보고해.”
그녀의 담담한 말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굳이 물어서 손해 볼 질문은 하지 않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후 완전히 돌아온 티오니스.
나는 영주성에 도착한 뒤 둘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들어섰다.
피곤함이 몰려와 어렵게 구해둔 와인을 마시고 싶다는 생각만이 가득 들었다.
마침 영주성에 199년산 이롱데라는 최고급 독주가 들어와 있을 터.
그거라도 마시고…….
나름대로 소소한 행복에 젖어 들어온 그 순간.
나는 볼 수 있었다.
바닥에 끈적끈적한 무언가와 마찬가지로 바닥에 떨어져 깨져있는 최고급 독주의 병.
근처에서 상의를 벗고 있던 일리나를 말이다.
평소엔 어깨 이외엔 보기 힘든 그녀의 상의의 뽀얀 살결이 보인다.
고요한 침묵이 일었다.
“…….”
착잡하게 식은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본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데…… 데이비?!?”
“백금화 80개. 변상해라.”
그녀의 속옷 차림보다.
그녀가 쏟은 것으로 추정되는 진귀한 술이 더욱 중한 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