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28화
181. 티오니스에서 있었던 일
머릿속으로 사고의 처리속도가 따라오지 못해 굳어버린 일리나를 보며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 돌아섰다.
“꺄아아악!! 잠깐! 잠깐!!”
비명을 지르며 그녀가 뛰어와 내 등 뒤에 안기듯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나를 잡아당기며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는 소리쳤다.
“황족이 참…….”
“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비명을 지르며 벌게진 얼굴로 어쩔 줄 몰라 소리치는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그곳에는 언제 왔는지 륀느가 낭랑한 얼굴로 양손의 검지와 엄지를 직각으로 하여 사각형을 만들고 있었다.
“륀느, 매우 높은 화질의 영상 저장능력을 우수하게 평가해.”
“륀느, 지워라.”
“페르 님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보고.”
그녀의 말에 나는 아공간에서 작은 사탕을 하나 꺼낸다.
“지우면 주마.”
“륀느, 빠른 삭제 능력을 높게 평가.”
후다닥 뛰어와 사탕을 받아 입에 쏙 밀어 넣은 그녀가 혀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리며 즐거워한다.
맹한 얼굴인데 어째서인지 매우 기뻐하는 느낌이었다.
그래. 륀느는 이런 녀석이었다.
그녀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들었다 해도 지금에 와서 변하는 게 있을 리가.
“그래서. 어쩌다가 남의 집무실에 혼자서 남이 아끼던 술병을 깨뜨리고 스트립쇼를 하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면 이 사태를 모조리 네 오라비에게 전하는 수가 있을 거다.”
내 말에 그녀가 당황한 듯 허둥지둥거렸다.
“그…… 그게…….”
그녀의 말에 나는 잠자고 하는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해명은 이러했다.
리인 포스 알파에서 온 비밀서신과 팔란 제국에서 그녀를 통해 내게 건네준 서신을 가져다 놓기 위해 내 집무실을 찾은 그녀는 의도하지 않게 뜻밖의 침입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암살자.
워낙에 내가 대륙에 저질러 놓은 일이 많았던 탓에 암살시도가 있어도 이상할 건 없다지만 이렇게 대놓고 암살을 저지를 거라곤 사실 예상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암살자는 일리나에게 적발되자마자 입을 막기 위해 그녀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기어검의 묘리까지 서서히 깨우쳐가는 일리나에게 기존의 암살자가 이긴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암살자가 저항하는 과정에서 드워프 장로, 골다 장로가 가져다 놓은 드워프제 199년산 독주가 깨졌고.
그것이 일리나의 몸에 튀었다.
피와 독주로 인해 옷을 못 쓰게 되어버린 일리나는 뒤늦게 소란 소리를 듣고 찾아온 에이미에게 대신할 옷을 부탁한 뒤 옷을 벗고 있었다.
설마. 이리 갑작스레 내가 돌아올 거라곤 생각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말 없이 아공간에서 여분의 로브를 꺼내 그녀에게 건네준 뒤 물었다.
“암살자라고?”
“응. 널 노린 것 같은데.”
“내가 부재중이라는 걸 몰랐나?”
“에이미 영지대리인이 일단은 그 사실을 함구했거든. 넌 영지의 영주가 함부로 영지를 비운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지?”
유별나게 내가 많이 나돌아다니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나라는 존재가 특이한 것이지 실질적으론 정상적인 행동거지는 아니었다.
“일리나 황녀님, 여벌의 의복을…… 앗! 저하!!”
나를 발견하자마자 눈을 크게 뜨고 달려온 에이미가 나를 바라본다.
“고생했어. 그동안.”
“아니에요! 저하! 어디 다친 곳은 없으세요?!”
“그래.”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내 옷 곳곳은 이실디와의 싸움으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제야 사태를 깨달은 에이미와 일리나가 기겁하며 소란을 피워댔지만 나는 애써 그들을 진정시켰다.
“됐고, 푹 쉬고 싶은데 암살자라니 재수가 없는 것도 정도껏 이지. 그놈은?”
내 물음에 에이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그게…… 지하감옥에 유폐시킨 뒤 몬미더 근위상장께서 배후를 캐고 계세요.”
“근위상장?”
의외의 명칭에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녀가 헤헤 웃어 보였다.
“잊으셨나요? 얼마 전에 잠시 돌아오셨을 때 그를 승진시키셨잖아요.”
“아, 그랬나?”
헛웃음을 흘린 나는 복잡한 얼굴로 나를 보는 일리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 어디서 싸우고 온 거야?”
“일단은.”
“그…… 기괴한 괴물이야?”
감이 좋은 것 같으니.
“비슷해.”
“다친 곳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아프면 아프다고 소리를 지를 거다. 걱정 마. 그보다 아카데미 생활은 어때.”
“네 안배대로 일단 다수의 국가에서 귀족 학생들이 입학하긴 했는데. 역시 전쟁고아 출신의 평민 아이들과는 묘한 선이 있더라.”
“그래?”
그렇다면 모두가 하나의 인간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주는 수밖에.
그 전에.
예상은 가지만 정확히 어떤 놈이 암살시도를 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그럼 바로…… 지하감옥으로…….”
“아니. 피곤해서 움직이는 것도 귀찮으니 이리로 데려와.”
그 말을 끝으로 그녀가 떠난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던 일리나가 재빠르게 에이미가 건네준 의복을 받아 나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다친 곳은 없어?”
“응? 나?”
“여기 너 말고 누가 있냐.”
“아…… 응…… 없는 것 같은데.”
빨개진 얼굴로 나를 보며 그녀가 떨떠름하게 말한다.
“그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심드렁하게 륀느를 불렀다.
“륀느, 얘 잡아.”
“륀느, 명령 인수.”
동시에 총알처럼 날아든 륀느가 일리나의 다리를 걸어 그녀에게 올라타 그녀를 제압한다.
“꺅?! 무슨?!”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그녀가 나를 보자 나는 말 없이 그녀의 로브 일부분을 쿡! 하고 찔렀다.
“아윽!!”
“호오, 마스터 급 수준의 암살자라.”
“…… 어떻게…… 알았어?”
“주변 보면 답이 나오지. 로브 벗어. 치료해줄 테니까. 륀느. 가서 페르세르크를 데려와 줘.”
“…… 명령인수.”
짧게 말하며 창문 밖으로 튀어나가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그녀의 로브를 벗겨냈다.
기겁하며 당황하는 그녀였지만 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그녀의 새하얀 살이 드러나는 등을 바라보았다.
곳곳에 작지만 자잘한 상처들이 나 있었다.
“흉터 없는 게 다행인 줄 알아.”
정작 나조차 복부 쪽엔 상당량의 흉터가 있으니까.
없애라면 없앨 순 있지만, 지금까지 만난 어떠한 적들은 흉터를 지우지 못할 정도로 깊은 상처를 남기기도 했었다.
“…… 너. 결혼까지 한 주제에 다른 여인의 맨살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야?”
“정작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외간남자에게 맨살을 드러내는 게 더 쪽팔린 일이겠지.”
물론, 의사와 환자의 관계라면 그딴 건 관심 없는 부류일 뿐이다.
“넌 정말 신기하네…… 어떨 땐 정말 속물이고, 어떨 땐 정말 변태 같은데…….”
말끝을 흐린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기대하게…….”
“뭐?”
“아무것도 아니야.”
“기대는 무슨 기대.”
내 말에 그녀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 침묵했다.
자잘한 상처에 약을 바르고는 붕대를 감아주자 그녀가 의아한 듯 묻는다.
“회복마법은?”
“신성력을 좀 써서 당분간은 회복기야. 그리고 저급의 힐링 마법은 네 체력을 소진하니까. 별로 의미는 없고.”
리스토어 같은 마법을 쓴다면 어느 정도 땡길 순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어느 계통이든 불가능하다.
“자연 치유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넌 알 필요가 있어.”
“데이비, 암살자라니?”
“왔어? 이것 좀 봐줄래?”
내 내가 일리나를 가리키며 말하자 그녀는 일리나가 반나체의 상태인 것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다가왔다.
그리고는 아직 붕대를 감지 않은 자상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꽤 높은 실력자 같은데.”
“그렇지? 예상은?”
“그대가 어디 좀 원한을 사고 다녔는가. 볼티즈 왕국부터 팔란의 황자도 죽였지.”
확실히 암살기도를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둘 중에 하나일 가능성이 높나?”
“아니면 라스트위스프일지도.”
그 말에 일리나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아니, 그게 무슨.”
“가능성은 염두에 두는 게 좋을 테니. 아직 데이비가 중앙장로들을 죽이지 않지 않았는가.”
사실상 그들이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
그들을 지키던 전력들이 모두 그들에게서 등을 돌린 상황이니까.
하지만 머릿속에서 아예 배제하는 건 멍청한 행동이었다.
“저기…… 언니.”
그때 일리나가 붉어진 얼굴로 페르세르크에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모양인 게야?”
“언니는 제가 이런 꼴로 데이비의 옆에 있어도 상관없는 건가요?”
그녀의 질문에는 묘한 느낌이 가득했다.
이에 페르세르크가 쿡쿡 웃어 보인다.
“어디 할 수 있다면 데이비를 유혹해보라지.”
“아…… 아니 유혹이라뇨! 전 그런 건 아니고…….”
“그럼 괜찮은 게야.”
키득거리며 놀리듯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며 일리나는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보였다.
애초에 그녀가 내게 묘한 감정을 품었다는 건 눈치가 아예 없지 않은 이상 직감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녀의 생활 전반에 내가 끼어 있었을 뿐 호기심과 연정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내 판단이었다.
에이리아 알 린디스와 그녀는 다른 경우니까.
“저하. 놈을 데려왔습니다.”
이윽고 근위상장으로 승진한 몬미더가 복면을 덮어씌운 한 사내를 끌고 온다.
이에 나는 그의 복면을 휙 벗겨냈고. 눈을 가늘게 떴다.
“자결할 가능성이 있어 제압해두었습니다.”
“풀어줘. 뒤지고 싶어도 못 죽을 거니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그것을 풀어냈다.
“푸후!! 하아……하아…….”
여기저기 맞았는지 몰골이 심한 꼴을 보며 나는 그에게 다가가 몸을 쪼그리고는 물었다.
“어디서 왔나.”
대뜸 돌직구를 던지자 그가 침묵한다.
“아무 말도 안 해?”
“…….”
“흐음…….”
곰곰이 침묵한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몬미더.”
“예…… 예 저하!”
“암살자가 여길 들어오게 막지 않고 뭐했나.”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군 생활 끝나?”
내 싸늘한 물음에 그가 움찔 떨었다.
“정신 안 차려!?”
버럭 소리 지르자 그가 급히 몸을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나는 상관없다. 다만 암살자가 에이미와 마주쳤다면? 다른 수인 시종 시녀들과 마주쳤으면 어쩔뻔했나.”
“…….”
내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네 임무는?”
“영지의…… 수호, 치안의 안정입니다.”
“명심해 몬미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는 없어야 할 거야. 네 태만은 곧 가족의 부상, 죽음, 슬픔을 불러온다. 알겠나?”
비록 원한을 산 건 나라고 할지라도.
몬미더의 책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런 사실을 알면서 내게 충성을 바친 것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주지.”
묵묵히 답하는 그를 보며 내가 다시 암살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는 네가 누군지 몰라.”
“…….”
“네가 누군지도 관심 없고.”
그렇게 말한 나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으며 그대로 꺾어버렸다.
“끄아아아아악!?”
“하지만 네가 내 가족을 노린다면.”
휴가고 나발이고 없는 거다.
“너는 물론, 너를 부린 놈들을 모두 찾아낸다.”
“…….”
“그리고 찢어버릴 거야. 알겠어?”
섬뜩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 쏟아지자 그의 눈이 부릅 뜨여지며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드래곤이 내뿜는 드래곤피어라고 공기에 약을 타는 게 아니라는 사실.
그 원리 자체는 포식자가 피포식자를 겁먹게 하는 것과 같다.
호랑이 한 마리를 보며 수십 마리의 사슴이 겁을 먹고 덜덜 떠는 것처럼.
맹견이라도 개장수를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리는 것처럼.
“내가 지금 기분이 별로 안 좋아. 곱게 죽고 싶으면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딱딱 소리를 내며 이를 부딪치는 그를 보며 페르세르크가 나를 제지했다.
“데이비.”
“내가 멍청했어.”
인간을 너무 정 있는 시선으로 봤으니까.
“본보기는 필요하겠지.”
건드리면 어찌 되는지. 보여줄 필요가 있다.
시도야 할 수 있겠지.
그런데 시도를 하면 무슨 짓을 하건 파멸만이 기다린다는 걸 직접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것이 내가 있건, 부재중이건.
“보…… 보보보…… 볼티즈…… 후작…… 렘버스…… 후작님이…….”
“그게 끝이야?”
“저…… 저는 모릅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한 그가 어렵사리 말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뭐, 파고들면 또 답이 나오겠지.”
기괴한 심문 행각에 일리나가 기가 막힌 지 나를 본다.
“저게 거짓말이면?”
“진실이야.”
페르세르크는 사람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연가시 때처럼 그녀의 감각을 속일 수도 있겠지만, 심연이라고 해서 마냥 능력을 편하게 남발할 순 없다는 것이 내 판단이었다.
그렇기에 직접 확인해보면 될 일이었다.
그가 범인인지 아닌지.
“하지만 볼티즈 왕국은 현재 괴뢰왕정 상태야. 네가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할 권한도 없거니와 항복한 이들을 치는 건…….”
“내가 전에 말했던가?”
내 말에 일리나가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들키지 않으면 암살이야.”
그리고, 만약에라도 렘버스 후작이라는 자가 정말로 그런 짓을 한 게 맞다면.
그땐 항복정부, 괴뢰정부 같은 건 방패막이 될 수 없을 거다.
거대 프로젝트로 티아라와 에디손 기술고문이 만들고 있는 것을 써먹을 때가 오는 것이다.
“나도 양심이 있어, 근데, 그놈들이 자꾸 이렇게 나를 기만하면.”
마, 그땐 성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되는거야.
이제 중원에서의 일을 끝냈다.
신목의 성지로 먼저 간 이실디의 상태도 체크해야하고, 케인에게 절대보옥의 파편을 맡겨 상황을 알아보아야 했다.
무엇보다!
페르세르크와의 신혼생활이 이 망할 심연 때문에 계속해서 방해를 받고 있다.
“일단 오늘은 재우지 말아야겠어.”
담담하게 중얼거린 내가 페르세르크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든다.
그런 그녀의 표정이 귀여워 씩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간 나는 몬미더에게 암살자를 치우라 고갯짓을 했다.
이에 의아한 듯 나를 보던 그는 곧 암살자가 언제 죽었는지 굳어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라며 급히 나갔다.
“데이비. 잠깐…… 읍!”
이윽고 상황이 미묘함에 따라 도망치려던 페르세르크와 입을 맞춰버리자 곁에서 보던 륀느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더니 손가락 틈 사이를 살짝 벌려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 쪽에 있던 일리나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