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9화
발작하듯 그가 소리질렀다.
“김 실장! 너 알고 있지! 그 빌어먹을 알프 운영진에 아는 사람 있다고 했잖아!”
“그…… 그렇긴 합니다만. 그 사람도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없다고…….”
“찔러! 가서 돈 찔러주고 그 새끼 신상 구해와!”
“세상에 알려지면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딴 건 내 알바가 아니야!! 그걸 막는 게 너희들의 일 아냐?!”
빠악!!
격하게 소리친 그가 손에 쥔 것을 던지자 김 실장이라 불린 양복 사내가 비틀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재떨이가 그의 이마를 찢은 것이다.
순간적으로 놀란 표정들이 나왔지만 김 실장은 묵묵히 피를 닦아내고는 고개를 숙여보였다.
“알겠습니다.”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아! 그 새끼 찾아. 찾아서 반드시 내 앞에 끌고 와.”
섬뜩하게 중얼거린 그가 분노에 찬 눈을 했다.
“대한민국 땅에서 돈으로 안 되는 거 없어. 개자식아. 그 빌어먹을 꼰대가 다른 건 몰라도 돈 하나는 많으니까, 넌 내가 반드시 죽여 버릴 거다.”
쓰읍!!
그렇게 말하며 그는 근처의 서랍을 거칠게 열어 그 안에 있던 병에 든 약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 * *
[마가] 한유나는 평소와 같은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평시에 그녀는 성격이 개차반으로 유명하다.
아니. 본래부터 그러진 않았다. 제법 부드러운 마음씀씀이와 예쁜 말투로 인해 주변에서 애정을 받아온 게 사실이었다.
하지만.
한 인간이 그녀의 인생을 망쳐 놓았다.
좀 전 만났던 그 빌어먹을 최악의 인간 쓰레기. 고성 그룹의 젊은 재벌 2세. 고진석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상류사회의 파티에서 그를 만났고, 말끔한 인상과 호감 가는 말투에 빠져 그와 사랑을 했었다.
급격하게 빠져들 정도로 그는 매너가 좋았고, 멋진 남성이었기에 한유나는 그와의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와의 관계가 점점 깊어가던 중이었다.
그녀는 우연스레 고진석의 외도를 눈치챘고, 그의 진실을 직접 목도할 수 있었다.
그런 주제에.
고진석의 생일을 맞아 선물을 사들고 찾아온 그녀의 앞에서 그는 다른 여인을 안은 흔적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네가 자꾸 비싸게 구니까 내가 이러는 거야.
대체 왜? 어째서?
돈도 많고 아쉬울 게 없는 인생에서 저런 삶을 살 이유는 없을 텐데.
그녀도 성격이 개차반이라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잘한 히스테리일 뿐 이렇게 누군가의 인생을 일부러 망가뜨리며 희열을 느낀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에 대한 애정이 대번에 식는 건 물론이요 배신감까지 느껴졌다.
그 이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은 그녀는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그녀의 주변 몇몇을 제외하곤 지독하리만큼 개차반 같은 성격을 보여주었다.
그 탓에 산소의 동생 수소 녀석의 경우 그녀를 볼 때마다 이중인격이냐며 혀를 내둘렀지만 이미 그녀의 날이 선 성격으로 많은 이들의 미움을 산 후였다.
누구도 쉽게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오랜 시간 같이 게임을 즐겨온 산소와 바깥에 있는, 그녀와 비슷하게 부잣집이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친구를 제외하곤 모두에게 경계심을 내비쳤다.
“마가야!”
이윽고 저 멀리서 그녀를 발견한 산소가 화들짝 놀라며 뛰어온다.
그리고 그녀를 발겨한 마가는 언제 표정이 찡그러져 있었냐는 듯 미소를 환하게 지으며 뛰어갔다.
“산소! 산소 산소! 이 언니 안보고 싶어써?”
그녀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달려가 산소를 끌어안았고, 그 말투에 산소가 키득키득 웃더니 꺅꺅 거렸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소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마가 누님. 오랜만입니다.”
“어, 그래. 오랜만.”
평소와 다를 바 없다.
이에 그 뒤에서 나타난 청년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소개할게! 큰 도움을 주신분이야. 이름은 데이비.”
산소의 말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인 마가는 곧이어 그녀가 소개시켜준다던 사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반가워요. 마가라고 해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고 사내를 바라본 그녀가 곧바로 굳는다.
그리고 그녀를 본 청년 또한 인상을 찌푸린다.
“…….”
“…….”
뭔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는 청년, 데이비와.
경악한 듯 청년을 보는 마가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왜 그래?”
“저기…… 산소야. 네가 소개시켜준다는 잘생기고 따뜻한 사람이 설마 이 사람…….”
그녀의 말에 산소는 뭔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아…… 미안해. 좀 너무 황당한 사람이 나와서 놀랐지?”
“물론, 그 소개 받는 남자가 품절이 아니라고 한 적도 없고요.”
뒤에서 수소의 쓸데없는 사족이 붙었지만 마가는 거기엔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티오니스 성자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얼굴도 몰랐다.
그가 티오니스 성자라는 특수 상위 엔피씨라는 소식은 나중에 들은 사실이니 말이다.
소개시켜 준다는 게 자아가 있는 상위 엔피씨에 그것도 그녀에게 삥을 뜯은 전례가 있는 인간이라니.
그녀가 데이비를 보고 경악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가 고진석과 실랑이를 벌일 때 갑자기 난입해 주변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린 장본인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뭘 멍하니 보나. 초면도 아닌데.”
“초면이 아냐? 혹시 두 사람 어디서 만났었어요?”
“뭐긴 내가 좀 도와줬지.”
“…….”
기가 막힌지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갑자기 난입해서 난장판을 만들고 남의 전 재산을 털어 가놓고?”
그녀의 말에 산소와 수소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자 데이비가 씨익 웃으며 주머니에서 커다란 돈주머니를 꺼내 짤랑짤랑 흔들었다.
“덕분에 제법 챙겼다.”
그 말에 수소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어디서 만난건지.
황당할 따름이었다.
“아 몰라! 산소! 나 갈 거야!”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지만 그 대가로 전 재산을 털려버린 그녀였기에 데이비에 대한 호감도는 바닥 그 자체였다.
그와의 소개라니. 잘생겨도 사양인데 따뜻하긴 커녕 양아치 같다는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자…… 잠깐 마가야!”
“아 몰라! 저 인간하고 있으면 쓸개까지 털릴 거야!”
일없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벗어나는 그녀를 향해 내가 말했다.
“그놈. 확실히 보내줄까?”
데이비의 말에 그녀가 멈칫했다.
“뭐?”
“보아하니 재밌는 사이인 것 같던데.”
“당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왜? 너희 기준에 npc인 내가 이런 말을 하니까 이상한가?”
“…….”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졌다.
“그놈 확실하게 박살 내 줄게. 우리 서로 도울 건 돕자고.”
그렇게 말한 데이비가 계약서를 내밀었다.
“대신 넌 이 게임 안에서 네가 가진 스킬만 좀 활용해주면 돼.”
“무슨 소릴…….”
“마침 물질변환사가 필요했거든.”
그렇게 말한 데이비는 흉신 굼다의 심장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거 가공할 수 있겠나?”
그의 말에 마가는 멍하니 그것을 받아들었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어보였다.
“뭐야 이거. 60레벨급 소재잖아?”
“가능해? 안 돼?”
“안 돼. 이딴 걸 어떻게 가공하라는 거야. 랭킹 1위 물질 변환사도 그건 안 되겠다.”
그녀의 말에 데이비는 그녀에게서 빼앗은 돈주머니를 그녀에게 다시 건네주었다.
“지원금이다.”
“장난해? 그거 원래 내 돈이었잖아.”
“내가 받았으니 내 돈이지.”
“아니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니들 기준으론 npc야.”
“산소! 솔직히 말해봐. 이 인간, npc인 척하는 인간이지? 그치?”
“그…… 비슷해.”
자세한 설명은 애매한 탓에 그녀가 그렇게 설명하자 마가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봐요. 머리에 이름도 안 뜨는데 상위 엔피씨인 척하고 다니면 좋아요?”
“그건 네가 신경 쓸 게 아니고. 그래서 제안은?”
“웃기는 소리 말아요. 여기선 당신이 더럽게 강한지 모르겠는데 고진석 그 개자식 그렇게 보여도 엄청 악랄하고 독한 놈이에요. 지금 당신 신상 털겠다고 난리일걸?”
“뭐. 신상을 털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기겁하는 산소의 말에 마가는 움찔하더니 침묵했다.
‘그 일을 알리긴 싫은가보지?’
내 물음에 그녀는 움찔하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내 예상이 맞으면 고개만 끄덕여. 알리긴 싫은 거지.’
내 말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신상까지 털어서 갑질을 해대는 부잣집 도련님이 혹시나 산소에게 까지 해코지를 할까봐. 맞아?’
그 말에 그녀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어떻게 알았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척하면 척이지.
사실 페르세르크의 힘이 한몫했다는 건 비밀이었지만 말이다.
마가, 한유나. 재벌가 차녀.
대충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이미 들은 후였다.
어떻게 이토록 쉽게 파고들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의 정신 상태는 현재 다른 인간과 다르게 너무 극심하게 뒤틀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얼마나 충격을 받아야 사람의 정신력이 이토록 무너져 있을 수 있는지 놀라울 정도였다.
‘난 네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무서운 인간이야. 그깟 재벌가의 망나니 하나 처리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
‘다만 내가 그놈을 먼저 아작내 버린 건 내 와이프를 건드린 탓이니까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다.’
내 말에 그녀는 침묵했다.
여기서 지식은 어차피 경험치일 뿐이다.
포도맛처럼 그저 레벨을 올리고 싶다는 욕망이 그득그득한 게 아닌 이상 그녀가 열심히 활동하게 만들려면 게임의 경지보다는 현실적인 대안을 제공하는 게 더 좋아보였다.
‘어때. 복수하고 싶나?’
복수는 불가능하기에 도망치는 것으로 자신을 억누른 그녀에게 나는 달콤한 제안을 했다.
성자가 아닌 악마 같은 제안을.
이미 마왕이니 마족의 제안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리라.
‘선택은 네 자유야 네가 원하는 바를 들어주마. 대신 넌 노가다를 해주면 된다.’
[음음 아아. 들려요? 좋아요. 그 X새끼…… 아주 매장시켜주세요. 다만 죽이진 말아요. 꿈자리 사납긴 싫으니까…… 그렇게 해주면…… 당신이 해 달라는 거 까짓것 해 드릴게.]
에오니샤 이후로 세 번째 노가다 자원이 내 손에 굴러 들어왔다.
내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어린다.
“좋아. 계약은 성립됐으니 잘해보자고.”
그땐 몰랐다.
이 마가 한유나라는 여성이 극도의 호의를 보이고 있는 또 하나의 친구가 누구인지를 말이다.
상류사회는 생각보다 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