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5화
성벽의 방어력은 어마무시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어떤 수준인가 하면 기본적으로 방어력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데미지를 퍼센트 단위로 가감해버리는 무식한 방어력에 있었다.
아무리 강한 힘이라도 사실상 공성 섬멸전에서의 성벽을 부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
하지만.
이변이 발생했다.
코로나 디스트로이어.
데이비의 손에 쥐어진 거대한 해머가 파르르 떨리는 기분이 든다.
그의 체격으로도 조금 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묵직해 보이는 무기지만 한번 휘두르는 것으로 거대한 풍압을 일으킨다.
이후 코로나 디스트로이어에서 방출된 거대한 풍압은 성벽을 한차례 후려쳤고 기이한 문양을 새겨놓고는 사라졌다.
어지간한 유저라면 대번에 끔살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력이지만 성벽은 굳건히 버텨냈다.
물론, 거기서 데이비는 멈추지 않았다.
똑같은 휘두르기.
하지만 풍압은 이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쿵!!!!
거대한 진동 끝에 또 한차례 문양이 새겨지지만, 성벽은 굳건히 버텨냈다.
하지만.
마지막엔 달랐다.
세 번 타격 시 모든 방어력을 완전 파괴하고 방어 불가 상태의 디버프를 부여한다.
즉, 모든 데미지가 고정데미지로 가감 없이 적용된다는 소리였다.
방어요소가 1이라도 존재하는 이상 상당한 데미지 감소를 일으키는 이 게임의 특성을 따졌을 때 방어력 0은 그 어떤 스펙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공포적인 아이템 그 자체였다.
세 번째 타격 끝에 성벽에 거대한 깨진 방패문양이 드러나자 비명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네가 할래?”
데이비의 말에 곧이어 페르세르크의 반대편에서 걸어 나온 일리나가 천천히, 그리고 묵묵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동시에 그녀가 쥔 강화된 칼디라스가 황금빛 기운을 끌어내기 시작한다.
칼디라스가 제대로 본신의 힘을 발휘했으니 그녀의 전력은 못 해도 몇 배는 상승했으리라.
우우웅…….
방어력이 완전히 날아가 버린 성벽을 향해 고고하고 절도있게 검을 뽑아 든 그녀가 검을 직각으로 가슴께에 붙이듯 높이 세웠다.
천천히 눈을 뜨는 그녀의 얼굴 반절이 검에 가려졌지만 진중한 표정이 반절 남아 드러난다.
후웅!!!
그리고 짧게 심호흡을 마친 그녀가 검을 튕기듯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칼디라스를 잡은 그녀의 눈동자가 더욱더 찬란하게 빛나는 느낌을 전해주었다.
“온다!! 막아!!”
비명을 지르며 유저들이 급히 반격 마법을 준비하여 쏘아내려 하지만 양손을 높이 들어 검을 치켜든 일리나의 움직임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한 발을 내디뎌 강력한 진각을 밟은 그녀의 손에 힘이 가해진다.
그리고. 금빛 섬광이 어마어마한 중량을 담고 내리그어졌다,
[중검]
[태산 쪼개기]
쩌억!!!
비명을 지르던 유저들을 포함해 성벽 일부가 일순간 베어져 사라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거대한 성벽을 잘라내다 못해 거대한 여파를 미쳐낸다.
급수로 따지면 7서클 광역 파괴마법의 뺨도 후려칠 정도의 파괴력에 일리나의 표정이 벙찐 듯 굳었다.
“뭐야?”
“쓸만해?”
“아…… 아니 쓸만하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거 뭐야?!”
그녀는 자신이 해놓고도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확실히 성벽 일부를 잘라내려고 휘두른 검기가 성벽을 뭉텅이로 증발시켜버렸으니 당황할 수밖에.
“뭐가 문젠데.”
“아니…… 너무 잘 맞아서 그러지…… 방금 봤어?! 꺅! 지금 내가 저걸 저렇게 만든 거야?!”
자신의 경지가 눈에 띌 만큼 강해졌다는 사실에 그녀는 순수한 기쁨을 드러냈다.
어차피 이곳의 인간들이 진짜 피륙으로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라 특수한 힘으로 만들어진 아바타라는 것쯤은 이미 들어 알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그게 원래 칼디라스의 힘이야.”
괜히 신검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물리 법칙 비 물리 법칙을 베어내는 청단이 홍단이에 비해 칼디라스가 밀림에도 수르트의 역작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이게…… 칼디라스가 가진 본래 힘…….”
내 말을 되새기며 검신을 쓸어내리는 일리나의 볼에 발그레한 홍조가 서린다.
이후 데이비는 완전히 박살 나버린 성벽을 바라보며 걸음을 옮겼다.
“뭘 생각하고 도발했는지 모르겠다만. 니들 생각대로 쉽게 안될 거다.”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는 언제 꺼내 든 것인지 모를 방울 가지와 섭선을 펼쳐 들며 방울을 딸랑 소리 내 흔들었다.
동시에 허공이 찢어지며 거대한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남쪽의 불의 신수. 주작 불닭이.
북쪽의 물의 신수 현무 기우제.
좌의 뇌의 신수 청룡 쿠릉이.
마지막으로 우의 지의 신수 백호 흰둥이까지.
“렙업하고 와라.”
거침없이 녀석들을 풀어놓은 데이비가 거대한 해머를 어깨에 걸치며 천천히 진입하기 시작했다.
“노…… 놈은 혼자다!! 아무리 잘난 존재라도 레이드가 아닌 길드전인 이상 대처법이 존재한다! 놈을 막아!”
그렇게 외치는 흑풍 길드원들은 아직 전의가 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러면 이제 한 단계 더 보여주는 수밖에.
쿵!!!
완전히 날아가 버린 성벽을 향해 걸어가는 내 발이 닿은 곳부터 지면이 검게 타올라 잿더미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가 지나친 자리에서 지면이 갈라지며 무언가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새하얀 뼈로 이루어진 거대한 스켈레톤 분대였다.
“뭔데!! 전사 아녔어?!”
“마검사는 봤지만, 저 소환수들은 대체 뭔데!!”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향해 데이비가 소환한 수천의 뼈 군단과 4신수가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 * *
불지옥이 펼쳐진다.
뼈 군단의 힘은 사실상 어느 정도 스펙이 된 유저라면 대처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 수가 너무도 많았다.
뼈 방패를 든 스켈레톤 군단과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형 스켈레톤 군단이 도열하여 진군하고 그 뒤를 이어 활을 든 스켈레톤과 마법을 손에 머금은 스켈레톤이 포격을 가한다.
다수의 적을 상대로 큰 타격을 주기 쉽지 않지만 반대로 저들이 아무것도 못 하게 발을 묶는 건 우스운 수준이었다.
“죽어라!!”
흑풍 길드도 어느 정도 나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는 이상 마냥 존버와 닥돌만이 답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것일까.
일정 지역에 진입하기가 무섭게 다수의 마법진이 일어나며 나의 움직임과 마나의 활동에 방해를 가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법 정예로 보이는 이들이 순식간에 파고들어 나의 목숨을 노리고 파고든다.
녀석들이 노리는 건 이 알프 온라인 내에 존재하는 변수 시스템인 크리티컬 부위.
한 번이라도 허용하는 순간 위력 차가 거대해도 굉장한 데미지를 입을 것이다.
놈들이 일차적으로 노리는 건 그것이었다.
거대한 방패를 들고 돌진하는 흑풍 길드원 하나의 전진에 나는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손에 쥔 코로나 디스트로이어를 휘둘렀다.
“뼛속까지 좀 시릴 거다.”
쩌엉!!!!
방패를 들이미는 놈이지만 성벽 같은 경우엔 데미지 감소가 압도적이었기에 그냥 넘어간 것이었을 뿐이다.
유저가 막아내기엔 방어력이 있어도 충분하지 않으리라.
게다가 놈들의 멘탈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무기의 옵션은 방어파괴뿐만이 아니었다.
[속성 추가 데미지]
해머에 서린 속성 데미지가 증폭되면 일격에 놈들의 방어가 무력화되고 hp가 대번에 증발한다.
쩌엉!!!
[9999999!!]
9백만이 넘는 맥스 데미지가 또 한 번 터진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시체가 되어버린 유저는 기가 막힌 모양이었다.
[아니 xx 이걸 무슨 수로 이기라고;;]
채팅이 올라오자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야, 밟지 마. 밟지 말라고 이 xxxx!!]
검열된 채팅이 올라오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녀석을 발판삼아 다음 길드원들을 향해 움직였다.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분노조절 장애에 발동이 걸려버린 불닭이는 거센 흑풍 길드원들읙 공격에 부상을 입으면서도 화염으로 변해 사방을 불바다로 만들었고, 그건 다른 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 명대 세 명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쪽에서 물량으로 밀어붙인다면…….
절로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서린다.
“이쪽은 더 큰 물량으로 간다.”
어디 추가공격도 막아봐라.
[스트렝스]
[하이퍼바디]
[스톤스킨]
[레노바티오]
[세인트 글로리아]
화아아악!!!
신성력까지 가세하며 뼈 군단을 강화하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죽는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으악!!! 딜 미쳤다!”
“경직 사라졌으니까 빨리 빼요!”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공성전은 아무리 봐도 일반적인 공성전과는 달랐다.
압도적인 힘 앞에 수백에 달하던 흑풍 길드원들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나는 그런 난장판을 뒤로한 채 공성전의 끝인 성의 중심에 있는 핵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핵을 부수면 길드전은 이쪽에서 승리할 테니 말이다.
다만. 한 국가도 아니고 전 세계에서도 이름을 날리는 거대 길드가 이런 상황 하나 예측하지 못했을까.
성벽을 밀지 못해도 반드시 나는 이곳을 돌파해 들어올 거라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이놈들 정예 멤버가 단 한 명도 나온 적이 없었다.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전장을 돌파하고 더 이상 제지하는 인원이 없는 내성까지 들어오는 동안 나를 방해한 것은 곳곳에 설치된 자잘한 함정이나 마법 트랩이 전부였다.
다만 아직 그 수준이 낮은지 마법 트랩은 사용하기도 전에 모조리 디스펠 당해버렸고 트랩은 어렵지 않게 피해냈다.
그리고.
내성의 입구에 닿았을 때.
나는 말 없이 굳게 닫힌 내성을 바라보았다.
핑!!
그때 마치 나를 도발하듯 내성의 안쪽 어딘가에서 날카롭고 작은 볼트가 날아든다.
순식간에 잡아채 바닥에 던졌지만, 독이라도 발려있는지 손에서 끈적한 느낌이 들었다.
“흠…….”
명백한 유인책이다.
즉 흑풍 길드는 내가 이 내성으로 빨리 진입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존버를 탄다는 건 노림수가 확실할 땐 제법 효과가 있는 전술이다.
하지만.
그것도 봐가면서 했어야지.“
“공자 가라사대. 초가삼간 다 태우면 벌레도 별수가 없다.”
그렇게 말한 내 양손에 거대한 힘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동시에 순식간에 구체로 모여든 화구들이 내 주변을 배회하기 시작했고 내 손끝을 따라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니들이 뭔데 오라 가라야. 필요하면 너희들이 나와.”
[8서클 역회전]
[폭염계 파이어 볼]
[화이트 노바]
오로지 내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함정을 파고 버티고 버틴 놈들에게 진짜배기 불지옥 세례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애초에 놈들의 장단에 내가 맞춰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새하얀 화염이 사방에 붙고 내성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계속 숨어있어 봐. 누가 이기는 지보자.”
* * *
데이비가 바깥에서 백색의 화염 타원을 만들어내고 있을 그 시각.
흉신 레오라의 조력을 받은 흑풍 길드 마스터는 곧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스산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정공법으론 그를 이길 수 없다.
하지만.
그가 내성의 문에 발을 들이미는 순간 공성전은 자신들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다.
이건 싸움이라기보단 시합에 가까우니까.
제아무리 현실 같은 게임이라도 게임적인 요소가 반드시 존재한다.
그리고 그는 레오라를 통해 알게 된 이 게임의 버그 같은 뒤틀림 부분을 원 없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패배하면 아이디가 삭제가 될테니까.
단순히 여기기에 변수가 많은 이런 무식한 도박을 그가 하는 이유는 실상 간단했다.
레오라가 내세운 보상은 물론, 흉신 굼다의 보상과 여러 가지 이점이 그의 욕심을 자극한 것이다.
무엇보다.
‘나도 이제 강하다.’
흉신 레오라와의 단기 계약으로 그의 스탯 상태는 현재 같은 레벨 대 유저는 어림도 못 낼 만큼 압도적으로 상승해있었다.
기간이 정해진 도핑이라지만 그는 자신의 힘을 맹신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이 싸움을 받아들인 이유.
그것은 조건에 있었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진다.
즉 그는 이번 싸움에 이김으로써 데이비라는 그 정체불명의 NPC가 가진 모든 것을 얻어갈 생각이었다.
능력, 아이템, 그 외에 많은 것들까지.
꿈은 클수록 좋다고 하였던가.
“놈이 곧 온다.”
조용히 뇌까린 그는 어서 들어오라며 자리에 앉아 손가락으로 테이블 팔걸이를 툭툭 두드렸다.
이미 고기 방패로 내세운 길드원들은 되자 쓰러졌다는 소식을 받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어차피 머릿수만 채워놓은 놈일 뿐인데.
그때. 그의 시야로 내성의 입구까지 진입한 데이비가 보이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은 이곳이 제 무덤인 줄도 모르고 들어오겠지.”
어서 들어오라며 낄낄거리던 도중이었다.
“어?”
놈이 내성으로 진입하다 말고 멈춰 서더니 이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양손에 새하얀 빛의 타원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어쩐지…… 주변 공기가 뜨거워진 기분이 드는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