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6화
“하 씨…… 쫄리네.”
몸을 파르르 떨며 흑풍 길드의 한 길드원이 중얼거렸다.
남들을 괴롭히던 입장이었던 그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근본이나 다름없는 이 게임의 캐릭터를 삭제하는 페널티가 걸린 길드전은, 그것도 다른 이도 아닌 티오니스 성자를 상대로 한 싸움은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레벨 초기화라 생각하면 되지 뭘 쫄고 x랄이야. x랄이.”
거친 욕설에 고개를 돌린 그가 짜증스레 쏘아붙이며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인다.
애초에 인성을 보고 받는 길드원이 아니다.
오로지 전투에 미쳐버린.
남들을 짓밟고 올라가는 이들만이 들어오기에 끼리끼리 모인다는 말을 제대로 실감해주는 그들이었다.
“근데, 이 새끼 왜 안 와?”
분명히 위쪽에선 놈이 내성으로 진입하는 순간 안쪽으로 유인하라고 말했는데.
올 시간이 되었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놈의 행동에 모두가 의아해하던 찰나였다.
“야. 너 왜 피 깎이고 있냐?”
그때 같은 파티에 있던 힐러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다른 길드원이 피식 웃어 보였다.
“어디서 개 짓 하다가 피 까먹은 거 아녀?”
“좀 닥쳐.”
싸늘하게 쏘아붙인 유저는 곧 자신의 hp가 조금씩 깎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무슨.”
그리고.
당황한 이들의 눈이 급속도로 크게 확장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주 티끌처럼 빠져나가던 hp가 급속도로 증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끄…… 끄아아악?!”
그리고.
그중 가장 방어력이 낮은 한 명이 갑자기 새하얀 화마에 휩싸여 온몸을 버둥거리다가 그대로 hp가 제로가 되어 시체가 되어버렸다.
“…….”
싸늘한 침묵이 감돈다.
가슴속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느낌을 받는 그들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할 것도 없이 반사적으로 hp 회복 포션을 사용하기 시작한다.
“야!! 약 빨아!!”
반사적으로 도핑과 회복. 그리고 버프 마법을 둘러보지만…….
“미친! 데미지가 점점 세지잖아! 대체 뭔데!!”
“화상! 화상 디버프다!”
“야!! 튀어!! 그 x끼! 지금 내성 밖에서 성 전체에 불 질렀어!!”
“뭐?! 뭘 질러?! 불?!”
“미친xx!!”
직접 불이 붙은 것도 아니고. 성을 불태우는데 화상을 입을 정도라면…….
그 온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는 훤한 일이었다.
화르르르륵!!! 챙그랑!!
이윽고 일그러진 유리가 화염의 고온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져 나가자 유저들의 hp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애초에 그가 이곳 내부로 들어오지 않으면 어떤 대처도 할 수 없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가능한지 조금 의심스러운 견제사격 정도가 전부였다.
“일단 원딜들 싸그리 모아서 첨탑으로 가! 그 새끼 쏴 죽여!”
“미친! 잘도 죽이겠다! 아오!!”
비명을 지르면서도 유저들은 필사적으로 첨탑을 향해 달렸다.
안 그랬다간 손도 못 대고 전멸할 위기였으니까.
생각했던 계획이 꼬여 당황하는 와중에도 바깥에 서 있던 데이비는 마치 춤이라도 추듯 팔을 부드럽게 흐느적거리며 휘두른다.
콰앙!!!!!!!
거대한 폭음과 함께 새하얀 타원의 도너츠가 하늘에서 고속회전하며 쏟아져 내성 일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어버렸다.
핑!! 피피피피피핑!!!
물론 적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첨탑에 자리를 잡은 유저들은 각기의 스킬을 모조리 사용해 데이비를 향해 공격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눈치챈 데이비가 발을 강하게 구르자 거대한 충격파와 함께 지면에서 튀어나온 십여 미터의 거대한 백색 호랑이가 포효를 흘린다.
파바바바바박!!!
동시에 마치 지면이 살아 있는 것처럼 손이 뻗어져 나와 공격들을 낚아채거나 막아내 버렸다.
“미친?!”
비명을 지르는 유저들을 향해 데이비는 손을 강하게 흔들었고 뒤이어 하늘에서 생성된 새하얀 타원의 폭염 도너츠가 첨탑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공성전의 승리 조건.
내성 내부에 있는 거대한 돌을 파괴하거나 유저들을 모두 상대측을 전멸시키면 끝이 난다.
이미 수백의 유저 중 과반수가 사망 처리된 흑풍과 다르게 연꽃 쪽은 아직도 한 명도 죽은 이가 없다.
모두가 예상했으면서도 놀라운 결과가 나온 것이다.
데이비가 선택한 것은 내부의 유저들을 굳이 찾아내지 않고 모조리 태워죽이는 것.
내성이 그들을 보호해주곤 있다지만 역시나 현실고증이 어느 정도 박힌 게임답게 열기를 통한 공략은 제법 효과가 있었다.
만약 그게 되지 않았다면?
크고 강력한 해머를 휘두르는 수밖에.
당황하고 혼란스러워하는 비명이 울려 퍼진다.
정예라고 해봐야 아직 유저들의 수준은 그리 높은 편이 아니었다.
계속되는 열기의 압박에 내성은 이미 새하얀 불로 휩싸인 불바다로 변해버렸고 마지막 고열의 폭염 타원이 추락하는 것을 끝으로 데이비는 다시금 해머를 꺼내 들었다.
코로나 디스트로이어.
물론, 그들도 방어를 하긴 했다.
공성전 메리트인 방어 버프를 떡칠한 뒤 화염 저항 버프까지 받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데미지 10을 줄여주는 방어막도 11짜리 마법에야 효과가 있지 100의 효과가 있는 마법을 견뎌낼 순 없었다.
아무리 퍼센트로 깎아본들.
불지옥이라는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다면 차라리 저항이라도 하겠다.
그런 마음이 들었는지 결국 통제가 뒤틀려버린 유저들은 하나둘 내성에서 튀어나와 데이비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벌레 박멸할 때 가장 먼저 할 것은 서식처에 연기를 쏟아서 놈들을 끌어내는 건데. 몰랐나 들?”
애초에 놈들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걸 말이다.
훙! 쩌엉!!!!!
누군가가 반응하기도 전에 거대한 풍압이 마치 수천 톤의 무기라도 된 것처럼 날아들어 한 유저를 일격에 보내버렸다.
[유르그 식(式) 군중제어기]
[한방에 주님 곁으로.]
“여흥에 불과한 새끼들이.”
데이비에게 이번 길드전은 사실상 여흥에 불과했다.
아직 유저들이 저항하기엔 그 수준이 너무 낮았고. 굳이 데이비가 이들을 박멸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게임만 즐긴다면 누가 뭐라 할까.
하지만 지금의 흑풍처럼 겁도 없이 덤벼온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 * *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순식간에 길드원 대부분이 전사해버리자 흑풍 길드 마스터가 이를 악물고 소리 질렀다.
그의 곁엔 흉신 레오라라 불리는 푸른 피부에 대머리가 인상적인 존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항을 못 하는가. 인간.”
“이…… 이익!”
“쓸모없는 장기 말이군.”
“저 미친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이기라고!! 애초에 뭐냐고 저거!! 네가 이길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 눈에 비친 그는 무리하게 강해 보이려고 애를 쓰는 아이처럼 보인다만.”
그의 말에 흑풍 길드 마스터가 코웃음을 쳤다.
“그럼 x발!! 가서 저거 처리하고 오던가!!! 지면 당신도 나도 다 끝장이야. 알아?!”
악다구니를 쓰는 그를 보며 레오라는 침묵했다.
“뭐라도 말이라도 해보시지!!”
“네놈은 같은 인간을 적대하는 주제에 원래 적대 상대인 흉신에게 도움을 바라는가?”
“뭐?”
“의미 없는 말싸움이었군. 난 목적을 대부분 이루었으니 이제 네놈은 볼일 없다.”
그리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이이! 한낮 데이터 쪼가리 새끼가!!!”
반사적으로 흑풍 길드 마스터가 공격을 해온다. 흉신이라는 설정이 있기에 유저가 감당할 수 없는 적인 것을 알면서도 그의 분노는 그런 것을 잴 여유를 주지 않았다.
콰앙!!!
이윽고 흑풍 길드 마스터의 날카롭고 묵직한 돌진기가 그에게 충돌한다.
하지만 그의 공격은 레오라가 펼친 장막에 완전히 막혀버렸다.
“끄억!!”
고통은 없지만 제동감은 그대로 전해져 온다.
바닥에 꼴사납게 넘어지는 그를 보며 흉신 레오라는 서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적을 함부로 믿으면 안 되지 않겠나.”
“엿이나 처먹어 개자식아.”
“판을 깔아준 건 고맙게 생각하지. 덕분에 포식하게 생겼으니.”
스르륵…….
그리고. 그의 몸이 서서히 액체처럼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몸 전신에서 물 파장 같은 것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파장 속에서 기괴하게 생긴 괴생명체가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가거라. 가서 둘을 잡아라.”
키리리리리릭!!!!
기괴한 울음소리를 터뜨린 머리카락으로 걷는 괴물은 날카로운 침이 달린 긴 꼬리가 달린 존재로 언뜻 보면 4족 보행을 할 것 같으면서도 두 발로 서있었다.
날카롭고 깡마른 주제에 가시가 돋아있는 팔은 근육질 같은 갑각으로 뒤덮여있었고 손가락은 손톱과 함께 가늘었다.
순식간에 흩어지는 괴물을 뒤로한 채 푸른 피부의 존재. 흉신 레오라가 다시금 움직였다.
그리고.
그가 내성 밖으로 나갔을 때 본 것은 이미 시체가 된 후 부활 가능시간이 지나 잿더미가 되어버린 유저들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데이비가 보였다.
말없이 다가간 레오라는 조용히 그를 직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의 존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군.”
“초면이야.”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너지? 이번 길드전을 부추긴 놈.”
“…….”
“내성 안에 뭔 함정을 쳐놨는지 느낌이 싸하더라고.”
빙그레 웃어 보인 그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그래서? 적대관계인데 굳이 할 말이라도 있나?”
데이비의 물음에 흉신 레오라는 조용히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주변 공기가 묘하게 변한다.
“넌 얼마나 알고 있지?”
그의 질문에 데이비는 길게 답하지 않았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이.”
“아틀란티스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흉신의 종족?”
데이비의 말에 레오라는 침묵했다.
“제법 흥미로운 힘을 지니고 있구나.”
“네가 꼴에 데이터 조각이 아닌 건 봐서 알겠고.”
“…….”
데이비의 느긋한 말에 레오라는 조용히 그를 향해 다가간다.
“나와 손을 잡자. 프리아의 종복이여.”
그의 말에 데이비가 멈칫했다.
“손을 잡아?”
“그렇다.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능력이 충분하다.”
“그런데 손을 왜 잡아. 멍청이냐?”
빈정거리는 데이비의 물음에 그가 눈을 꿈틀했다.
“넌 내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뜸을 들인 그의 눈에 강력한 증오와 광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밖에 있다는 것. 인간. 네놈은 이 세계가 애초에 왜 존재하는지 알고 있는가?”
“내가 어떻게 알아.”
“이곳은…… 누군가를 가두기 위한 감옥이다.”
짧게 씹어뱉은 그가 입을 열었다.
“우리를 꺼내다오 인간. 그리하면 네놈이 넬타리드를 끝장내는 걸 내가 도와주마.”
그의 제안에 데이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네 힘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야.”
말을 끊은 데이비가 완전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를 향해 코로나 디스트로이어를 들이밀며 물었다.
“본론만 말해라. 혓바닥 놀리지 말고.”
“너의 힘을 우리에게 넘겨라. 넌 힘을 쥐고 있는 어린아이와 같다. 그 힘을 우리는 더욱더 대의 있고 높은 목표를 위해 사용할 수 있다. 그토록 정순한 힘은…….”
말을 흐린 그가 눈을 번뜩였다.
“상위종족에게 허락되어야 할 힘이다. [홀른] 같은 하위 종족이 가질 힘이 아니라는 소리다.
“요새 내 귀가 잘못됐나…….”
“이미 모든 것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거부하면 좋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말한 레오라가 스산한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놈과 함께 온 두 존재는 너에 비하면 미약하기 그지없더군. 이곳의 인간에겐 강할지 모르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주변으로 2족 보행형의 기괴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둘 또한 너와 같이 이곳의 인간들이 가진 죽음 면역의 힘은 없다.”
인질을 잡고 있으니 살리고 싶으면 말을 들어라. 이 소리였다.
레오라의 말에 데이비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아주 순간적으로 파고든 그가 홍단이를 휘두르자 붉은 검기가 섬뜩한 기세를 풍기며 그를 베어버렸다.
아니. 베어버리려 했다.
정확히는 그가 만들어낸 장막에 막혀있었다.
“굼다를 제압한 네 힘은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이미 이곳엔 우리의 준비물이 펼쳐져 있다.”
그 말과 함께 데이비의 전신에 투명한 밧줄 같은 것이 반투명하게 흐릿한 잔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네 힘은 곧 봉인 당할지니. 그 대단하디대단한 고룡족도 견딜 수 없는 힘이다.”
그의 말에 데이비는 말없이 밧줄을 이리저리 당긴다.
어지간해선 끊어지지 않을 듯싶었다.
“시간이 흐르면 네 힘은 우리에게 빨려들 것이다. 목숨은 살려줄 테니 얌전히 기다려라.”
레오라의 말에 데이비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치 포기하는듯한 모습.
하지만 데이비를 아는 이들이라면 입을 모아 말했을 것이다.
야단났다…… 라고.
“야.”
이윽고 눈을 감고 있던 데이비가 천천히 눈을 뜬다.
섬뜩한 기세가 서린 붉은 안광에 레오라의 눈이 살짝 크게 뜨여졌다.
뿌드드득!!!!
동시에 그의 몸과 연결되듯 묶여있던 밧줄들이 뜯겨 나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힘은 아니었다.
다만.
분명 그의 몸에 걸었던 모든 제약이 한순간에 뜯겨 나가버렸다.
마치 완전히 단절된 것처럼 말이다.
반사적으로 그는 좀전의 검기를 막듯 장막을 펼치려 했다.
“네 그 개자식들이 페르를 찾지 못한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다.”
안 그랬다면 곱게 못 죽었을 테니.
“무슨?!”
쩌억!!!
분명 어마어마한 방어력을 지닌 방어 장막이지만.
그가 이번에 휘두른 푸른 검은 그딴 건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찢어발겨 버렸고 그의 몸을 정확히 양분해버렸다.
몸이 갈려 나가면서 레오라는 자신의 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힘을 제약시켰던 데이비가 어떻게 힘을 발휘하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대…… 대체 어떻게 금제와 절대방어를…….”
그런 그를 향해 데이비는 서늘한 얼굴로 그의 목을 가볍게 잘라내 버리고는 민머리를 손으로 낚아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전설템 개 x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