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47화
187. 신의 일면
순식간에 죽어버린 녀석은 굼다와 마찬가지로 흉신이라는 타이틀을 지닌 존재였다.
흉신 레오라.
이 알프 온라인 내엔 현재 설정상으로 12명의 흉신이 존재한다고 한다.
이미 그중 하나가 내 손에 아작이 나 무기로 재탄생해버렸으니 11명.
그리고 눈앞의 이 퍼런 대머리 자식이 또 하나.
흉신 레오라의 머리는 저항 없이 내 손에 붙들려서 서서히 식어갔다.
그의 목에선 피가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았는데 이런 와중에도 녀석의 눈이 부릅 뜨여진 채 나를 노려보는 것이 괴기스럽다면 참 괴기스러운 모습이었다.
“끄아아아아악!!!”
급기야 놈의 입에서 괴기스러운 괴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푸쉬이이이익!!!!
동시에 쓰러진 그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서서히 주변의 시야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독연이었다.
“커헉!!”
그리고. 놈이 내뿜은 독연은 의외의 인물들을 순식간에 죽여버렸다.
뒤따라 내성에서 튀어나온 흑풍 길드의 길드 마스터를 순식간에 죽여버린 것이다.
물론, 놈의 독기가 내 몸을 침식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의외로 녀석의 독기는 내 신성력을 통한 저항을 돌파하지 못했다.
물론, 밀고 들어온다 할지라도 기본적인 육체가 지닌 독에 대한 저항력이 밀어내겠지만 말이다.
“독…… 까지 먹히지 않는…….”
“준비가 너무 미흡했다는 생각은 안 드나?”
“빌어먹을 전설템…….”
전설템이 정확히 뭔지도 모르면서 그게 무슨 아티펙트라 생각한 듯 레오라가 침묵했다.
동시에 일대를 장악하던 독연이 서서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자연적인 독이 아닌 그가 만들어낸 인공적인 독인 만큼 주체인 그가 사망하면 존재할 수가 없다.
[띠링!! 연꽃 길드와 흑풍 길드의 길드전에서 연꽃 길드가 승리하셨습니다!]
[조건에 따라 패배 길드인 흑풍 길드의 모든 레어 스킬과 아이템은 연꽃 길드의 추가 길드창고에 모두 적재됩니다!]
[조건에 따라 패배 길드인 흑풍 길드의 모든 캐릭터들이 레벨 1과 초보자 직업으로 조정됩니다.]
캐삭빵.
나름대로 아이디까진 지우지 말라는 배려 같은데 애초에 고레벨 유저가 단숨에 1레벨이 되면 게임을 유지해나가기 어렵다.
특히 알게 모르게 적이 많은 흑풍 길드라면 더더욱.
언뜻 보면 재가입이 불가능한 이 게임에서 나름대로 자비로운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이게 겉으로 드러난 이미지였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사실 이러한 처사는 단순한 삭제보다 더 자비 없는 대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물론 레벨 정말 낮은 초보자의 경우엔 그렇지 않겠지만 말이다.
애초에 초보자 보호 시스템인 만큼 당연한 결과이지만.
마지막 유저였던 흑풍 길드장이 사망함으로써 길드전이 끝이 났다.
애석하게 레이드 판정이 아니었는지 흉신 굼다와 같이 소재가 무더기로 떨어지진 않았지만 하나 정도는 건질 수 있었다.
바로 놈의 머리였다.
굳어버린 녀석의 머리 두 조각을 아공간에 던져넣어 버린 나는 빛에 휩싸이는 주변 공간을 보며 저 멀리서 다가오는 두 명의 인영을 바라보았다.
옷에 여기저기 먼지와 잔상처가 있지만 제법 멀쩡해 보이는 일리나와 처음과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페르세르크였다.
“다친 곳은 없어?”
“그런 게야.”
키득거리며 그녀가 놀리듯 물어왔다.
“어찌하여 그런 표정을 짓는가. 마치 본녀의 옷이 여기저기 찢겨서 비치기를 바라는 것처럼.”
“눈 호강하자고 널 고생시킬까.”
“호오?”
“자꾸 도발하지 마. 페르. 나는 보고 싶으면 내가 직접 보지 다른 놈에게 네 그런 모습 보여줄 생각은 없어. 그건 너도 마찬가지다.”
페르세르크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격침된다.
그리고 내게 의외의 호명을 받은 일리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허둥지둥거렸다.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내가 왜 너랑 밤에…….”
“무슨 소리야.”
고개를 살짝 꺾으며 의아한 표정을 보내자 그녀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침묵했다.
구구구구구!!
그때 저 멀리서 전서구 한 마리가 빠르게 날아가는 게 보였다.
아마 이번 길드전을 이유로 급히 누군가가 보내는 메시지 이리라.
애초에 저건 시스템이나 다름없다. 생긴 게 저럴 뿐 기본적인 온라인 게임의 귓속말과 다를 게 없다는 소리였다.
대화를 방해하는 게임이 어디 있겠는가.
쑤욱!!
갑자기 고개를 들이민 현무, 기우제의 두 개의 머리 중 하나가 순식간에 전서구를 물어버렸다.
그리고는 내 눈치를 살피듯 우물거리기 시작한다.
“야. 뱉어.”
대뜸 달려든 나는 양손으로 녀석의 목을 틀어쥐고 조르며 위협했다.
“뱉으라고!”
마구잡이로 흔들자 녀석이 꽥꽥거리며 괴로운 소리를 낸다.
그러면서도 다문 입은 절대 놓지 않았다.
적과 싸우랬더니 언제 이곳까지 와서 이런 사고를 치는 건지.
현무의 괴행동에 내 손길이 점점 거칠어지는 그 순간이었다.
퉤!!!
결국, 참지 못한 현무 기우제가 입에 든 전서구를 뱉어내 버렸다.
아니.
정확히는 전서구의 다리 조각만 뱉어냈다.
“대화 시스템을 이렇게 방해하는 게 가능해?”
“나도 처음 알았네.”
기가 막힌 기분이 든 나는 이미 먹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우제의 머리에 핵 꿀밤을 먹였다.
-끄우우우우우!!!
아프면서도 황홀해 하는 그 울음소리에 나는 질린 얼굴로 녀석의 등딱지를 툭툭 걷어찼다.
“다음부터 독단 한 번만 더 하면 죽는다 아주 그냥.”
내 말에 기우제의 눈이 가늘어지고 숨이 거칠어진다.
이에 나는 녀석의 머리를 당겨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한 일 년만 내 옆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아보라고.”
내 말에 끝나기가 무섭게 녀석의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진심으로 공포에 질린듯한 표정이었다.
“기회는 두 번 없어. 알겠나?”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인 녀석이 도망치듯 후다닥 사라진다.
흑풍 길드 에겐 전쟁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스펙이 낮은 유저들에게 있어서 사신수의 시너지와 전 마왕의 마법. 그리고 신검의 주인이 내뿜는 위협은 하나의 재앙과도 같았으리라.
스펙과 템빨 앞에 장사없다더니.
* * *
기절하듯 잠들었다가 깨어났다.
마가 한유나와 포도맛캣타워는 얼마 전 있었던 엄청난 작업량의 악몽에서 겨우 깨어난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전 세계 유저가 경악한 작업 스킬 레벨 60대.
유일한 60대로 현재 장인 커뮤니티에서는 포도와 마가를 찾으려는 장인 유저들로 가득가득했다.
대체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빠르게 레벨업을 한 건지 알기 위해서 장인 길드에서 대대적으로 자금을 푼다는 소문도 돌았다.
물론 두 사람에겐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 끔찍한 작업 세례를 했으니.
이제 당분간은 제작이고 뭐고 푹 쉬고 싶은 생각이었다.
하지만. 누가 그랬던가.
인생사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른다고.
“아…… 아니죠?”
“아니라고 말해요! 빨리! X발 이게 말이 돼?!”
기겁하는 포도맛과 거친 욕설까지 터뜨리는 마가의 표정엔 공통적으로 공포가 어려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접속하기가 무섭게 자신들에게 이상한 소재를 내미는 데이비의 존재 때문이었다.
“아니라고 말해줘요. 형…… 제발.”
상대가 NPC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어째서 계속 이렇게 끌려다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쨌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미 지뢰는 밟았고.
도망치기엔 글러 먹었다.
갈아 넣는다는 말을 통감하며 두 사람은 주춤거리고 한 발, 두 발 물러났다.
“걱정 마. 이번엔 하나뿐이야.”
그가 내미는 것은 척 봐도 흉신의 소재.
“레오라라고 했나? 이놈은 좀 더 좋은 놈이니까. 기왕이면 좋은 거로 만들어보자.”
씨익 웃으며 말하는 데이비의 미소는 그토록 환한데.
어째서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아귀를 보는 기분인가.
떨리는 손으로 소재를 집어 든 포도맛은 공정 과정을 면밀히 살폈다.
“제발…… 제발…….”
“누나. 물질변환…… 64레벨…….”
“안돼!!!”
비명을 지르는 마가에 이어 포도의 표정이 핼쑥해진다.
“대장장이…… 65레벨…….”
당장이라도 토할 것처럼 경련하는 녀석이 급기야 데이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제…… 제발……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괜찮아. 사람은 쉽게 안 죽어.”
데이비의 말에 두 사람은 직감할 수 있었다.
잘못 걸렸다고.
* * *
알프 온라인에서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고생하는 에이미를 대신하여 하인스 영지의 업무를 며칠째 처리하고 있던 나는 문득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유일하게 알프 온라인에서 마가와 포도맛이 넘어올 수 있는 소규모의 공간인 지하 공방에 도착했다.
그들은 공방 밖으로 나갈 순 없지만, 이들이 이곳에 있음으로 인해 티오니스의 인물과 접촉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긴 하다.
그곳에 도착한 나는 세상멸망을 기다리듯 늘어져 있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한쪽 테이블엔 익숙한 귀걸이가 놓여 있었다.
치르바트 이어링.
코로나디스트로이어나 천 갑옷과는 다르게 이름 말고는 아직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아이템이다.
주기적으로 색이 변하는 이 귀걸이는 페르세르크의 심연의 힘으로는 알아보기 힘들었다.
귀걸이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그 특성이 텅 비어있기 때문이었다.
대체 무엇일까.
나름대로 고급 소재를 사용했는데 말이다.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건 조금 이상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걸 어찌할까 고민하던 찰나.
마가로부터 특별한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휴면 아이템 아니에요?”
“휴면아이템?”
“휴면아이템 몰라요? 성능이 뛰어난 아이템은 감정 과정을 거쳐야 효과가 랜덤으로 드러나거든요. 아 물론, 흉신 소재로 만든 거라 기본 NPC를 통한 감정은 안될지도 모르겠네.”
그렇다고 유저가 가능한가.
그건 아니었다.
유저의 감정사 레벨은 아직 낮은 수준. 이 정도의 아이템을 감정하긴 힘들었다.
“감정이라…….”
나의 경우엔 스킬이라는 게 없기 때문에 효과를 노리긴 힘들어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대신 감정을 해줄 이를 만들어야 한다는 소리인데…….
“한 명 더 육성해볼까.”
내 중얼거림에 곁에서 듣고 있던 포도와 마가가 흠칫 놀라며 나를 본다.
그런 그들의 반응을 나는 굳이 무시했다.
“그런데 감정이 대체 무슨 원리야.”
아무리 스킬이라도 기본 조건은 분명 존재할 터였다.
하지만 조금 미심쩍은 것들이 많은 만큼 그 감정이라는 것을 이쪽에서 익혀볼 순 없을까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음? 신기한 걸 가지고 있구나.”
의외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리자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인물이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허업!!”
기겁한 포도가 눈을 부릅뜨고 굳어버렸다.
홍조까지 돋은 것을 보니 한눈에 사랑에 빠져버렸다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네가 여긴 어떻게?”
“네 녀석이 오지 않으니 직접 분신체를 보냈지.”
차갑게 말하는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실디의 처분은 어찌할 거지?”
“아니 그건 됐고. 좀 전에 뭐라고 했어. 신기한 거?”
“음? 아아. 무언가로 힘이 아직 봉인되어있는 느낌인데. 단순히 해제마법으로 풀리는 건 아니기에.”
“가만…… 너 마술이 특기였지?”
현실 왜곡.
눈속임.
단순한 눈속임과 현실왜곡을 넘었던 영향력의 발현, 그렇다면…….
“너…… 이거 해제할 수 있겠냐?”
“어느 정도 수준을 원해.”
“최상품으로.”
“흠…… 어렵진 않아. 다만 분신체로는 어렵지. 신목으로 찾아오면 해주지.”
심연의 공주.
베르단데의 말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퇴근해. 오늘은 칼퇴근을 허락한다.”
그 말과 동시에 마가는 기다렸다는 듯 튀어버렸고 포도맛도 베르단데에게서 시선을 못 떼면서도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놀려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저 둘은?”
“이방인.”
“아아…… 넬타리드 쪽 종자였군.”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나를 본다.
“넬타리드를 너무 믿지 않는 게 좋을걸?”
“누가? 내가? 미쳤냐? 믿을 걸 믿어야지.”
스산하게 말한 내가 표정을 지웠다.
* * *
지칠 대로 지친 마가, 한유나는 접속해제를 하자마자 접속기를 던져버렸다.
“하아…… 하아…….”
공포에 질려 질식하는 줄 알았다는 생각이 든 것도 오랜만이었다.
약속은 약속인데. 그 인간 아주 악랄한 인간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이행해주고 있는 자신이었다.
물론 그도 약속은 어기지 않았다.
필요 이상의 지원을 해주며 그 외의 것도 모든 배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하…… 게임이 일하러 가는 기분이야…….”
애초에 그녀 정도 상류 부잣집 아가씨가 돈이 부족할 일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노동의 보람에 대해선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지 않은가.
아무리 믿어 의심치 않는 자신의 친구 산소의 부탁으로 만난 남자라지만 이건 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차라리 욕망에 충실하고 약속을 칼같이 지키는 모습에 안도하고 있는 자신이 미워질 따름이다.
어지간해선 남자건 여자건 사람을 못 믿게 된 지 꽤 오래되었다.
이중인격에 가까울 정도로 대하는 온도 차이가 너무 커서 미친 거 아니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살아오긴 했다.
하지만 그 인간에게는 한없이 말려드는 기분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고개를 돌린 그녀는 찌뿌둥해진 몸을 풀며 중얼거렸다.
“고진석 이 새끼 일은 잘 풀리고 있으려나…….”
그때 이후로 잠잠해지기 시작했다는 건 뭔가 조치가 있었다는 소리인데.
어떻게 될진 조금 더 지켜보아야 할 일이었다.
“쇼핑이나 갈까.”
차가운 인상으로 머리를 거칠게 쓸어넘긴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입고 있던 잠옷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우우웅!!
그때였다.
저 멀리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스마트폰이 점등하며 웅웅 울린 것이다.
하지만 지칠 대로 지친 그녀의 귓가에 들리진 않았다.
우우웅…… 우우웅…….
그녀의 핸드폰에는 발신자의 이름이 뜨여있었다.
[우리 신성 공주님]
저장된 이름은 그런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