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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648화 (647/1,559)

제 648화

베르단데의 거처로 찾아 왔을 때 나는 내 앞을 틀어막는 청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뭐야.”

“내게 할 말이 있지 않아?”

“없어.”

“…….”

나를 노려보는 그녀가 입술을 짓씹었다.

“난 언제 돌아갈 수 있지?”

그녀의 외침에 내가 베르단데를 바라본다.

설명 안 했냐?

“이실디는 과거부터 고집 하나만큼은 지독했으니까.”

담담하게 말한 베르단데는 이윽고 내게 다가와 이실디에게 말했다.

“내가 한 말은 벌써 까먹었어? 넌 지금은 안돼. 아직도 불안정하니까. 세세한 조정에는 짧아도 몇 년이 더 걸려.”

“그걸 말이라고…….”

“원하면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긴 해.”

“그럼 그렇게 해.”

“대신 네가 찾는 그 인간들을 만나고 오래가지 않아 파국을 맞겠지. 그걸 원한다면…….”

“됐어.”

이을 악물고 침묵하는 그녀는 무언가 내게 기대했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심연의 존재. 그것도 심연의 공주에 관한 문제를 내가 자세히 알 순 없는 노릇이다.

“여기 이쯤에 있었을…… 아, 그리드 이리 와 보겠니?”

고요한 나무로 만들어진 집안을 뒤지던 베르단데는 곧 나무 열매를 따오고 있는 사내를 향해 손짓했다.

“어머니, 무슨 일이십니까.”

미소를 머금은 채 다가온 그는 처음 만났을 때보다 여유가 있어 보였다.

제 어머니와 아무의 눈치도 볼 것 없이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그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든 것일까.

이윽고 그리드 국왕은 나를 보기가 무섭게 여유 어린 얼굴을 보여주었다.

“오랜만이군.”

“제법 훤해지셨습니다.”

“왕자 덕분일세.”

그의 낯간지러운 말에 베르단데는 짧게 헛기침을 한 후 그를 쏘아보았다.

“덩치만 컸지 어리광은 여전한 게지.”

혀를 쯧쯧 차며 그녀가 그가 가져온 나무 열매 하나를 집어 들었다.

“되었단다.”

“무슨 실험이라도 하십니까?”

“글쎄.”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내게 받은 치르바트 이어링을 테이블 위에 올린 뒤 그리드가 가져온 과실을 천천히 잘라냈다.

그리고는 마치 액기스를 짜내듯 천과 나뭇가지가 이어진 도구를 이용해 과즙을 짜내기 시작했다.

향긋하면서 신기한 향이 흘러나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과즙을 잔뜩 묻힌 치르바트 이어링 위에 손을 올린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옅은 반응이 일어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달그락 소리를 내며 떨리는 이어링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길 잠시.

마치 신비한 환각이라도 일어나듯 그녀의 손끝에서 검은 불빛이 튀었다.

피잉!! 핑!!

그렇게 튕겨 나가길 몇 차례.

이윽고 귀걸이를 집어 든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어링을 보다 이내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너…… 설마 아틀란티스와 충돌했어?”

이윽고 나를 향해 진지한 물음을 던진다.

“뭔가 좀 알고 있는 눈치인데?”

“…… 아냐. 아무것도.”

말끝을 흐리는 그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말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 협박하는 거야?”

“분위기가 심상찮으면 누구라도 물을 거다.”

그런 물음에 그녀는 침묵했다.

“별거 아니야. 단지…….”

말끝을 흐리던 그녀는 곧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기어들어 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그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냐…… 그저 잘못 본 거겠지.”

“곱게 말할래. 후회하고 말할래.”

“…….”

얼버무리는 것만큼 싫은 게 또 있을까.

내 물음에 그녀가 침묵하고 있던 찰나였다.

“조화의 파괴자. 침략자의 전쟁 도구.”

어느새 다가왔는지 이실디가 입을 열었다.

“네가 말하고 싶은 건 그거 아니야?”

이에 베르단데가 그녀를 쏘아보지만, 이실디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불만이 있는 들 어찌할까.

힘은 그녀가 한참 상위에 있는 강자인데.

생각해보면 이놈의 신목의 성지는 그야말로 내가 동원할 수 있는 최대무력이 죄다 모인 곳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실디. 확실하지 않은 것으로…….”

“꿈이야.”

이실디의 답변에 내가 나는 추가 설명을 요구했다.

“단순히 꿈이라면 내가 알아듣나?”

“말 그대로 꿈이야. 우리 심연의 공주들이 타나토스 님의 파편이라는 건 알고 있을 거야.”

“공주뿐만 아니라 다른 놈들도 마찬가지겠지. 연가시나 오에돈처럼.”

“맞아. 그렇기에 우린 신의 기억과 꿈에 민감해. 그리고 얼마 전부터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어.”

아틀란티스라는 존재에 대해서.“

“좀 알아낸 건?”

“단편적이지만…… 거대 용과 싸우고 있는 모습.”

그 말에 나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용? 드래곤이라고?”

드래곤이 싸우기엔 아틀란티스들의 힘은 제법 강했는데?

“혹시 그 용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려줄 수 있나?”

내 요청에 짧게 한숨을 내쉰 베르단데가 손을 펼쳤다.

그러자 황금빛 구체가 그녀의 희고 작은 손위로 모여들며 무언가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용과 비슷하면서. 용이 아닌 것.

나는 이놈을 본 적이 있었다.

“고대문명…….”

고대문명. 헤라클래스의 클론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있던 뱀파이어의 은신처.

지하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심연과 이어진 통로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단 두 가지였다.

광기에 미쳐버린 주제에 심연에 관련된 모든 것을 파괴하려 들던 헤라클래스와.

그리고 뼈밖에 남지 않는 조금 특이하면서도 압도적으로 거대한 용을 말이다.

“그래서 묻는 거야. 아틀란티스와 충돌했다면…….”

말끝을 흐린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넬타리드와 네가 적대하지 않고 있는 거야?”

아틀란티스.

내가 흉신으로 알고 있는 이들은 넬타리드의 충복이며. 그의 무력 중 하나라 불러도 손색이 없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나와 충돌을 했다는 것이 아직도 쉬이 믿기지 않는 듯 보였다.

“흐음. 내가 본 그놈들이 아틀란티스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그놈들이 넬타리드를 따르는 것 같진 않았지.”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의 입장에서 프리아 여신도 그렇지만 넬타리드 신도 믿을 수 없긴 매한가지니까.”

초월적인 의지가 작정하고 무언가를 꾸미면 무슨 짓을 해도 막을 수 없다.

그렇기에 전지라 불리고 전능이라 불리는 신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것이니까.

“아마 네가 만난 그 아틀란티스라는 존재들. 정상 상태는 아니었을 거야.”

이실디의 냉정한 판단을 보아하니 그냥 넘기기엔 확실히 무언가가 있었다.

그녀의 힘이 약해졌다 하여 그녀의 시야가 좁아진 것은 아니다.

그런 그녀가 꿈을 통해 본 아틀란티스, 즉 흉신과 내가 싸운 흉신의 수준이 너무 다르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냥 넘기기엔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애초에. 넬타리드의 충복이자 그의 힘이나 다름없는 아틀란티스가 왜 넬타리드에게 숙청을 당했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었다.

“이 귀걸이. 급하지 않다면 내게 주지 않겠어?”

“네게?”

“그래. 어차피 네가 가지고 있어 봐야 쓰지도 못할 물건이니까. 차라리 내게 맡겨.”

그녀의 제안에 나는 기가 막힌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나?”

“무슨?”

“이걸 네가 사용 가능하게 만들어서 내게 주는 생각.”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어 보였다.

“적어도 후회하진 않을 거야.”

“너의 뭘 믿고.”

그녀는 겉보기엔 인간처럼 보이지만 본질은 내가 죽인 다수의 심연의 공주와 같은 존재였다.

심연과 전쟁 중인데 심연을 믿으라니 웃기는 소리도 따로 없다.

“이걸 만든 녀석들, 나와 접촉할 수 있어?”

“공방 내에 한해서는.”

“그럼 나와 만나게 해줘. 이미 이방인들과 접촉해보고 그들의 힘에 대해 본 적은 있으니까.”

그녀의 능력은 참 특이하기 그지없다.

꿈, 마술, 예지까지.

하나같이 두루뭉술하며 이론적으론 설명이 어려운 영역에 있다.

같은 심연의 공주들 사이에서도 가장 이질적인 존재.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넌. 정말 심연의 공주가 맞는 거냐.

“빠른시간내에 네가 원하는 걸 도와주지.”

“내가 뭘 원하는 줄 알고.”

“넬타리드의 차원. 간섭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당장은 혼령 정도겠지만…… 그곳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소리지. 어때?”

“네가 내 적이었다면 정말 칭찬해줬을 거다.”

이간질하는 실력이 놀랍다.

“싫으면 관둬.”

“누가 싫다고 했나. 그렇게 해.

결정은 빨랐다.

* * *

흑풍 길드가 고작 십수 명에 달하는 연꽃 길드에게 전멸당하고 모조리 계정 초기화를 당했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수백 명이 고작 열도 되지 않은 숫자에 완전히 아작나버린 것이다.

정작 흉신 레오라에 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규모급 거대 레이드까지 도전하던 길드를 듣도 보도 못한 길드가 박살 내버렸다는 사실은 절대 곱게 보일 수 없었다.

“쓸모없는 새끼들.”

싸늘한 욕지기를 뱉어낸 고성 그룹의 망나니 고진석은 손에 쥔 와인을 던져버렸다.

“찾아서 조지라고 말했더니 아주 속 시원하게 끝장이 나?”

애초에 버림 패 중 하나였다지만 이렇게 쓸모가 없을 줄이야.

고진석에게 사실 이 알프 온라인 내부에서의 알력 싸움 같은 건 관심 없었다.

자신에게서 도망친 마가, 한유나를 자신의 손에 다시 넣는 것만이 목적일 뿐이었다.

물론 그에게 있어서 한유나는 잠시 즐기고 버리는 그런 장난감 같은 존재였고, 아직 확인하지 못한 미련이 조금 남아있는 부산물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노리는 건 한유나가 아닌 다른 아가씨였다.

그녀는 그로서도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세계 굴지 기업의 아가씨이며, 이미 상류사회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그녀와 연을 맺어 신성 그룹과 커넥션을 만들기를 기대하고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고진석에게 신성 그룹의 아가씨는 아직 공략하지 못한 대상일 뿐이었다.

픽업 아티스트라는 말을 아는가.

그것과 같진 않지만, 고진석에게 여인이라는 존재는 단순히 가지고 놀 듯 들었다 놨다 하며 하룻밤을 지내고 질리면 버리는 그런 대상일 뿐이었다.

상류 연회에서 그녀에게 다가가려 드는 어중이떠중이 같은 것들과 비교할 수 없는 재능을 지닌 게 자신이라 여겼으니 말이다.

실제로 성격이 얼마나 뒤틀렸건 그는 여성을 후리는 기술은 제법 좋은 편이었다.

순진하고 착해빠졌던 한유나를 빠져들게 만들고 그렇게 망가뜨려 버린 것도 사실상은 그 이유 때문이었다.

한번 버린 여자에겐 어떤 미련도 가지지지 않는 그의 성품을 생각할 때 그가 한유나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신성 그룹의 고고한 아가씨는 아직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었고.

한유나는 비록 그와 단 한 번이라도 밤을 보냈다곤 하나 그에게 미련을 남겨버린 유일한 케이스였다.

“…….”

그는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스마트폰을 조작했다.

그곳에는 한 여인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잠들어있는 한유나의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자신이 찍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단 한 번의 잠자리에서 그는 용의주도하게 그녀가 도망치거나 보복하지 못하게 준비를 했다.

이제는 그도 물러설 수 없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데이터 조각인 게임 속에서 만난 NPC.

처음엔 사람인 줄 알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그놈의 소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들을 수 있었다.

그가 티오니스 성자라는 유명한 NPC라는 것을 말이다.

고작 NPC에 겁을 먹고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탓에 그의 자연 머리는 탈색되고 끔찍한 원형탈모가 와있다.

그 탓에 그는 현재 평범한 가발을 위장하여 쓰고 있다.

만약 본래의 머리가 드러나면 그의 위상은 바닥을 치리라.

마음 같아선 당장에 클레임을 넣고 그 빌어먹을 NPC를 삭제시키라 악을 지르고 싶다.

하지만 그쪽에선 접속기의 어떤 방법으로 신체에 위해를 가할 수 없으며 고진석이 겪는 문제는 단순히 그의 육신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 대답할 뿐이었다.

실제로 접속기로 그의 머리를 빠지게 하는 건 불가능한 만큼 어떤 반박도 처벌도 소리 없는 아우성에 불과했다.

“이봐 박 실장.”

“예 도련님.”

“준비해. 한유나를 기다리는 것도 지쳤어.”

계속해서 거리를 벌린다면.

이쪽에서 끌어내 주는 수밖에.

계속해서 빠지는 머리 때문에 그나마 남아있던 용의주도함까지 잃어가고 있는 그였다.

그리고, 그는 알지 못했다.

한유나, 즉 마가가 데이비와 한 계약이 무엇이었고, 그것으로 인해 이 지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말이다.

“내가 신현아 그 아가씨에게 접촉해서 시간을 벌면 너희들은 몰래 그년에게 접촉해. 명심해. 끌고 가면 안 돼. 직접 제 발로 찾아오게 만들어야 할 거야.”

그의 입에 음흉한 미소가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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