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0화
신현아가 진정한 건 그로부터 잠시 후였다.
지아와 한유나는 곧 그녀를 따라 근처의 읍내로 향했고 벌레 우는 소리와 맑은 공기가 느껴지는 고요한 정자에 올라앉았을 때 말문을 열었다.
“저…… 여기 주인 있는 거 아니에요?”
“제 꺼니까 걱정 말아요.”
그녀의 말에 윤지아는 반사적으로 그녀가 어마어마한 금수저, 아니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수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그럼 사양 않고…….”
익숙하게 싸 들고 온 것들을 펼치기 시작하는 한유나의 모습에 지아가 조심스레 귓속말했다.
“저…… 저기 유나야. 너 어떻게 저런 사람이랑도 아는 거야?”
“응? 아…… 아아 어쩌다 보니……”.
금수저라는 사실을 밝힌 적 없는 유나의 당황한 답변에 윤지아는 조금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유나로써도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자신이 있는 이 진흙탕 같은 세계에 엮였다가 피를 본 남녀들이 한둘이던가.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있는 건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다는 말을 정확히 인지시켜주곤 했다.
일전에도 고진석과 일이 엮였을 때 그 쓰레기가 혹여라도 산소에게 해코지를 할까 싶어 일부러 다른 마을의 위치를 알려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언니는?”
“언니는 요새 몸이 안 좋아.”
“그때 그 병 때문에?”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경과를 좀 더 지켜봐야겠다더라…….”
“하…… 괘…… 괜찮을 거야.”
당황한 채 말을 더듬는 유나의 말에 현아는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래야지…… 그래야만 해…….”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만 기다려줄래? 지아 씨에게 줄 선물이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곤 종종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였다.
“뭔가…… 세계 굴지 기업의 공주님이란 별명답지 않게 소박하네.”
“저래 봬도 엄청난 부자니까. 납골당에 유골함이 딱 하나만 있는 거 봤지? 현아와 현아의 삼촌이 현수 씨를 위해서 만든 곳이야. 현수 씨는 생전에 이런 공기 맑고 고요한 곳을 좋아했데.”
“흐음…… 많이 소중했었나 봐. 오징어니 뭐니해도 슬퍼하는 걸 보니.”
“…….”
말끝을 흐린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수 씨가 어떤 사람인지는 나도 잘 몰라. 하지만 이야기는 들었어. 초등학교 졸업할 때부터 희소병에 걸려서 특수무균실에서 평생 살아야 하는 병에 걸렸다나 봐. 그때엔 신성 그룹이 없을 때이기도 하고. 현아도 굉장히 고달픈 삶을 살고 있을 때였다는데.”
그녀는 원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너무 간단했다.
아파서 무균실도 벗어나지 못하는 제 오빠를 직접 치료해보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시험을 치던 날.
신현수라는 그녀의 아픈 손가락이자 짜증 나면서도 소중했던 오빠는 무균실에서 최소한의 사람들만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는 모양이었다.
“현아가 겉보기엔 정말 차갑고 냉정해 보여도 아픔이 많거든. 그 탓에 정이 많아.”
한유나가 현아에게 지아만큼의 애정을 보내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그녀의 애정엔 거짓이 없었으니까.
그녀에겐 애초에 자본이 얼마나 있건 그 인간의 집안이 어떤 집안이건 관심 없었다.
그저 애정을 줄 대상이라 판단되면 꾸준한 애정을 줄 뿐이었다.
“꼭 소개해주고 싶었어. 너라면…… 내가 힘들 때 나를 지탱해준 너라면 현아도 치유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긴 원래 현아가 살던 곳인데. 공기도 맑고 네 회복에도 도움이 될까 싶기도 해서.”
“흐음…….”
괜한 부담감을 느낀 윤지아가 앓는 소리를 냈다.
“끄응…….너무 부담스러운걸.”
“뭐. 당장 해달라는 건 아니야. 우리 산소산소에게 꼭 소개해주고 싶었던 것도 있고.”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어떻건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렇게 소개해주고 싶었다는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그때였다.
꺄르륵 거리며 대화를 나누던 윤지아와 한유나의 시야에 저 멀리서 다가오는 몇몇 차량이 보이기 시작했다. 검은 스타x스 차량 두 대였다.
“여기 들를 사람이 있었나?”
“이쪽으로 오는데?”
“음? 이쪽은 사유지라 못 들의 올 텐…….”
말을 하던 한유나의 표정이 굳었다.
“산소…… 아니 지아야.”
“응?”
“도망쳐.”
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녀가 소리쳤다.
“이 미친 새끼 설마 했는데 선을 넘으려 들어?!”
당황한 듯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두 사람이 정자에서 내려와 도망치기도 전에 근처에 정차한 스타렉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떡대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지아야!!”
깜짝 놀란 그녀가 소리친다.
하지만 대체 어디서 왔는지 모를 사내들은 순식간에 밀어닥쳐와 두 사람을 제압했고 약을 묻힌 듯 보이는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아 그대로 두 사람을 쓰러지게 만들어버렸다.
“됐습니다. 형님. 어떻게 할까요.”
“어쩌긴 물주님이 데려오라는데 데려가야지.”
“그런데 한 명뿐 아니었습니까?”
“어디 보자 한유나…… 한유나…… 이년이구만. 나머지 하나는 니들 맘대로 해라. 근데 흔적 남기지 마.”
“얼굴, 반반하다. 적당히 즐기다가 통나무 치거나 팔면 돈, 된다.”
“어휴 저 빌어먹을 인간 백정 새끼.”
한국어가 어눌한 한 사내의 대답에 다른 사내들이 학을 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러나. 사람의 몸. 돈 된다. 아주 많이.”
“적당히 선 지켜서 나대 이 x새야. 뭐해. 잘난 물주님이 어그로 끌고 있으면 잽싸게 튀어야지.”
그렇게 말한 사내들은 급히 두 사람을 스타x스에 실어 태웠고 그대로 언제 있었냐는 듯 빠르게 사라졌다.
* * *
“준비되셨습니까?”
케인의 질문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는 흉신 굼다와 레오라의 소재를 섞어 만든 강화된 치르바트 이어링 중 하나를 왼쪽 귀에 채웠다.
“데이비. 본녀도 갈게야.”
언제 다가왔는지 페르세르크가 자신의 붉은 귀걸이를 빼 조심스레 상자에 보관하고는 치르바트 이어링을 왼쪽 귀에 채웠다.
“여기 남으면 안 되겠냐?”
“남편이 가는 길에 부인이 안 갈 수야 있는가. 본녀도 갈 테니 그리 알아.”
그녀의 고집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부작용은 책임지지 못합니다.”
이미 케인은 치르바트 이어링에 대해 들었다.
그렇기에 간섭할 수 없어도 영혼으로나마 지구에 진입해보겠다는 내 의견을 막지 않았다.
그는 현재 나와 넬타리드 신의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하며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임무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번에 지구로 향하는 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지구에 퍼져있다는 넬타리드의 교단에 대해 조사해볼 겸 한유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애초에 로드 오브 기어스는 쌍방계약 종속마법.
그렇기에 마가와 포도가 나와의 계약을 지켰듯 나 또한 마가와 포도가 제시한 계약 내용을 지켜야 했다.
포도는 지원을.
마가, 한유나의 요청은 그 정신머리 없는 도련님을 그녀의 곁에 접근도 못 하게 만드는 것.
마가의 문제는 영혼밖에 없는 내가 어찌할 분야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점을 케인이 대신 처리한다면 그리 어렵진 않았다.
이윽고 프리아 여신과는 다른 조금 특이하면서도 신성한 기운이 감도는 마법진을 그려낸 케인이 푸른 머리카락을 빛냈다.
그리고 녀석의 입에서 무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고 이내 마법진 위에 올라선 나와 페르세르크를 감싸듯 빛이 쏟아져나오기 시작했다.
투웅!!!!!
그리고.
빛 속에서 나는 전신에 탈력감을 느끼며 그대로 시야가 점멸했다.
* * *
영혼상태.
차원을 넘을 땐 보통 그 존재를 오려 넣고 다시 붙이기를 하듯 옮긴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우엔 오려내기를 한 게 아니라 안의 색채만 빼 옮긴 꼴이었다.
거대한 힘의 폭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도저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넘어갈 수 없는 경계임을 드러내듯 엄청난 차원의 폭풍이 쏟아지지만 익숙한 듯 앞장서는 케인과 다르게 페르와 나의 경우엔 그런 힘의 폭풍이 우리를 그저 지나쳐 사라졌다.
츠츠츠츠츠츳!! 츠팡!!!
그리고 그 거대한 힘의 폭풍을 넘어선 내가 도달한 곳은. 너무도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세계였다.
“음. 탁한 공기. 너무 오랜만이라 구역질이 난다.”
내 중얼거림에 울렁증이 밀려왔는지 페르세르크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말했다.
“끄응…… 데이비. 그대가 고향이 이런 곳이었나?”
“공업지대 같은데. 고요한 걸 보니 사람이 빠져나간 곳인가?”
곳곳에는 한국어가 쓰인 기계장비들이 즐비해 있었다.
내가 있는 이곳은 거대한 공장 겸 창고였다.
분명 케인은 내 계약 대상인 한유나의 곁으로 우리를 전송시켰다.
하지만. 녀석도 페르와 나도 모두 이곳에서 나타났다.
케인의 탐색능력이 떨어진다면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훤했다.
“꺄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이 내 귓가를 때리자 케인의 날개가 한차례 펄럭였다.
“비명입니다.”
순식간에 모습을 드러낸 케인이 나와 페르세르크를 이끌며 이동한다.
스르륵…….
영혼상태이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벽을 통과해 들어선 나는 생각지도 못한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완전히 꺼진 창고, 털털털!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발전기와 옅으면서도 환하게 빛나는 조명까지.
음습한 분위기 속에서 두 명의 여자가 밧줄에 꽁꽁 묶인 채 의자에 앉아있는 게 보였다.
두 명의 여자는 두건 같은 것으로 얼굴을 가려놓았는지 공포에 질린 비명만 지르고 있었다.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는지 몸이 사시나무처럼 파르르 떨리고 있다.
“형님. 도련님이 늦으시는데요.”
“새꺄. 좀 더 기다려봐. 참을성이 이렇게 없어요.”
“에이 형님~ 그래도…….”
떡대의 사내는 뭔가 원하는 게 있다는 듯 손을 싹싹 비벼댔다.
“저런 여자 품어보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기왕 하는 거면…….”
빠악!!
“아, 새끼 쫌 기다리라니까!”
결국, 짜증이 난 듯 사내가 소리치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쳐버리자 떡대 사내가 끙끙 앓았다.
이 기괴한 상황에 나는 케인에게 눈치를 보냈다.
이거 뭐냐.
내 눈치를 이해한 것일까 녀석은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조용히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어냈다.
뭐 어쩌라는 건지.
어차피 페르와 나는 영체 상태에 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어도 절대 간섭하면 안 된다는 규칙이 있는 만큼 실제로 무언가를 하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물론 영체가 되면서 변한 점도 존재한다.
현재 내 힘의 근원은 나의 영혼.
본래라면 육신과 생기는 괴리감으로 인해 영혼의 힘을 모두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육신이 없기에 단순히 따져도 지금 나는 보석을 완전 개방한 것 같은 수준의 무력을 끌어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면 뭣하나 빛 좋은 개살구인 것을.
다행이라면 케인은 나와 페르와 다르게 움직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대번에 나서려는 그에게 팔을 들어 제지한 나는 말 없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끼이익!!!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창고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빌어먹을 년. 까칠하기는.”
짜증이 난 얼굴로 들어서는 사내의 중얼거림에 몇몇 사내들이 그에게 후다닥 다가갔다.
“가셨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넌 지금 내가 잘됐다고 말하길 기대하는 거냐?”
거칠게 빈 의자에 걸터앉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떡대의 사내들이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누가 봐도 저 가장 젊은 청년이 이번 사태의 원흉임을 알 수 있었다.
‘데이비 님. 당신은 지구의 인간인 한유나 양과 계약을 하셨습니다. 이에 저는 당신의 링크를 이용해 지구로 넘어왔고요.’
그 말인 즉. 가까운 곳에 한유나가 있다는 소리였다.
‘높은 확률로 저기 묶여있는 둘 중 하나가 그녀겠죠.’
‘치안율이 굉장히 높던 한국에서 아주 난리가 났네. 이딴 짓이나 벌리고.’
내 중얼거림에 케인이 의견을 제시해 왔다.
‘일단 제압해드릴까요?’
‘아니 일단 지켜봐.’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리에 앉아있던 사내. 고진석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저거 벗겨봐.”
그의 말에 떡대 두 명이 두 여인에게 다가갔고 머리에 덮어씌워 놓았던 포대 같은 것을 풀어냈다.
“흑…… 흐흐흑…….”
“흐끅…….”
겁에 질린 두 여자는 엉엉 울고 있었다.
헝겊 같은 것으로 입을 틀어막고 손발조차 움직이지 않게 막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고개를 든 한유나가 고진석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정말…… 널 한번 보기가 이렇게 어렵네.”
“으읍!! 으으으으으으읍!!!!!!”
스산하게 웃는 그의 말에 한유나가 악을 쓰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저항은 부질없었다.
그녀가 게임에서는 제작 랭킹 1위를 달리고 있지만, 현실에선 그저 인간일 뿐이니까.
“그러게 내가 대화만 하자고 할 때 찾아 왔으면 좋았잖아. 뭐라고 말 좀 해봐. 유나야.”
그의 부드러운 어조에 한유나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어이. 저거 풀어줘.”
이윽고 입에 물린 재갈과 헝겊을 풀게 시킨 그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스마트폰을 들어 보여주며 말했다.
“네가 내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 같아?”
“개새끼…… x발새끼…… 넌 내가 반드시 신고해서 감방에 처넣어버릴 거야…….”
“저런 잡혀있는 주제 말은.”
“아빠가 널 조져버릴 거라고!!”
“네 아버지가 나를? 하! 어림도 없는 소리. 장사밖에 모르는 인간이 이런 뒷 라인을 알 턱이 있나.”
스산하게 말한 그는 한유나의 뺨을 강하게 틀어잡고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역시 넌 신기해. 내가 보통 한번 안은 여자에게 미련을 가지는 편은 아닌데 말이야. 넌 다르더라고. 그러니까 내가 신성의 아가씨를 함락시키기 전까지만 장난감이 되어달란 말이다.”
그렇게 말한 고진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데이비인지 개밥인지 하는 빌어먹을 데이터 쪼가리 놈에게 화풀이 못한 게 한이긴 하지만 뭐 상관없어. 그리고 저기 저년은 네들 마음대로 해. 대신 뒤처리는 깔끔하게.”
그의 말에 떡대 사내들이 낄낄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꼴을 지켜보던 케인이 내게 시선을 보내왔고.
나는 내 손이 사물을 통과하는 걸 몇 번이고 확인해본 뒤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 손을 끌어내렸다.
‘저놈 하나 빼고. 싸그리 처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