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0화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공포로 주변을 가득 채우던 망령 고진석과는 차원이 다른 힘의 압박.
마치 저런 악하고 강한 망령을 잡는 상위 저승차사가 맞다고 말하듯 그의 전신에서 힘이 쏟아져 나온다.
[커헉?! 컥!!]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지 괴로워하는 망령보다는 나았지만, 현아의 표정도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져 있었다.
두렵다.
이게 그녀가 알던 그가 맞는가 싶을 정도로 그의 붉은 눈은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싸늘하고 무거운 공기에 두려움을 느끼던 그녀는 떨리는 손을 억지로 주체해보려는 듯 부단히 애를 썼다.
하지만 점차 강해지는 힘은 그런 것 따윈 보지 않았다.
“이…… 이봐요…….”
그렇게 억지로 입술을 뗀 그녀가 힘겹게 그를 부른 그 순간.
화아아악!!!
주변을 짓누르던 공기가 일거에 사라졌다.
[커억?!]
그리고. 일순가에 해방된 고진석의 망령이 품에 끌어안은 납골당의 뼈를 지니고 그 자리에서 사라지듯 도망쳤다.
“…….”
천천히 다가온 데이비가 손을 뻗는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두려움에 움찔거렸던 그녀는 처음 느껴보는 너무 따스하면서. 또 익숙한 감촉에 눈을 크게 떴다.
“현…… 수 오빠?”
그녀는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지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의 손이 가볍게 허공을 휘젓자 그녀의 눈이 서서히 감기기 시작했다.
“오빠가, 너만큼은 꼭 지켜줄게.”
대못이나 박고 떠난 현아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것이 전부다.
“미안…… 미안…… 하다 현아야.”
천년이나 걸려서도 해주지 못했던.
무려 천년이 더 흘러서야 가능했던 한마디가 이제야 입 밖으로 천천히 흘러나왔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기절한 그녀를 천천히 들어 올린 나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거대한 운명의 축은 바뀌지 않는다 하였던가.
여기서 내가 그녀를 구함으로 인해 더 큰 문제가 발생할지라도.
이제는 물러날 이유가 없어져 버렸다.
“넬타리드. 당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주지.”
싸늘하게 일갈한 내가 한 발 내디뎠다.
동시에 주변의 공간이 일순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8서클 마법 워프.
지구에서 절대 발현되어선 안 될 마법이 발현된 것이다.
신의 존재가 보호해주지 못해 인간이 스스로 주술이라는 초월적 염원을 만들어낼 만큼 이 땅에서 마나가 활동할 순 없지만.
지금 여기서 그것이 발현된 것이다.
“헙?!”
갑자기 빛과 함께 내가 현아를 안고 나타나자 당황하며 안절부절못하던 한 박사님이 눈을 부릅떴다.
“다…… 당신은?!”
경악한 그에게 천천히 다가간 내가 그녀를 내밀었다.
“당신은 누구요!”
“현아를 부탁합니다.”
조용히, 그리고 담담히 말한 내가 현아를 그의 손에 넘겨준 뒤 돌아섰다.
“당신은 설마…….”
그는 현아에게 내가 빙의했을 때 느낀 괴리감과 같은 것을 내게 느낀 모양이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빛과 함께 나타난 나의 존재부터가 이미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
“…….”
“말씀해주시지요……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문 채 그대로 허공을 넘었다.
쩌저저저적!!!!
지구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케인의 경고대로 일반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영혼의 힘 이상의 무언가를 발현해버린 이상 이제는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쿠웅!!! 프리아 여신이 나를 불러들이는 힘은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넬타리드가 나를 보호하는 힘 또한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의 구원의 손을 잡음으로 인해 그가 내게 가할 수 있는 영향력이 늘어난 것이다.
신을 함부로 믿을 순 없지만.
나는 아무리 초월 의지라 할지라도 받은 은혜를 잊어버릴 만큼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었다.
당신이 원하는 바.
내가 이뤄드리지.
금기의 힘이 발현되며 나를 구속하던 힘을 서서히 밀어낸 내가 허공에 손을 뻗었다.
망령 고진석은 내게서 도망쳤다.
왜 내 유골을 가지고 도망쳤는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만 이 사태를 일으킨 게 놈 하나뿐이 아니라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떠나가기까지 놈들에게 보여주리라.
쩌저저적!!!
“결국, 일을 치셨군요.”
공간이 열리며 나타난 케인의 표정이 씁쓸해 보였다.
“현신화까지 하셨습니까. 뭐. 애초에 당신 정도의 강자가 힘을 발현하면 당연히 현신화할 수밖에 없지만요. 그래서. 어떻게 할겁니까. 전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케인. 그 주둥이 좀 다물 수 없나?”
“당신이야 멀쩡하겠죠. 그런데. 저들은 어쩌실 겁니까. 당신이 지키고자 한 그들은 어쩔 겁니까. 이 세계의 법칙과 운명이 그들을 그냥 두지 않겠지요.”
“…….”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십시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힘을 발현한 순간부터 이미 늦었는데 늦지 않았다니, 농담도 지나치다.
하지만 상황이 그렇게 최악인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미 만나셨을 테니 당신이 힘을 쓴 거겠지요. 아닙니까?”
“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망령이 힘을 발현해도 이렇게 납골당에 불을 지르고 산사람을 직접 해치고, 납골당의 유골을 가지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절대 안 되지.”
“이미 당신보다 먼저 이 세계의 법칙을 범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그들 때문에 당장 당신의 근처에 있는 분들이 영향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그가 말을 흐렸다.
“그건 시간 탓이겠죠.”
“얼마나 남았지?”
“저도 확신할 순 없지만 지금 상태를 보면 30분 정도가 한계이겠지요.”
“충분하네.”
내 말에 케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뭐라고요? 지금 당신이 해야 할 건 당장 티오니스로 돌아가는 겁니다. 넬타리드 님께선 당신을 총애하십니다. 그래서 당신을 구원하신 거고요. 당신이 지구 출신의 인간이었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새삼스러울 건 없습니다. 동생을 구하기 위해 한 당신의 행동도 이해 가지 않은 바 아닙니다.”
그가 내 멱살을 잡았다.
“신께서 당신을 보호할 때. 당장 이곳을 떠나세요.”
그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잘 들어 케인.”
그리고는 역으로 그의 멱살을 잡아당기며 으르렁거렸다.
“넬타리드에게 그대로 전해. 어정쩡한 구원으로 내게 환심을 사려 들지 말라고.”
“신성…… 모독입니다.”
“네 신이 바라는 큰 그림, 내가 그려주마.”
“…….”
“대신. 기도나 올려. 30분 안에 어떻게든 프리아 여신의 히스테리와 이 세계 법칙의 간섭을 막으라고.”
으지지직!!!
허공을 찢어발긴 내 전신으로 힘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들리는가…… 복수의 신부여.]
아, 듣고 있다니까 그러네.
[약속을 이행하고, 구원을 행하라.]
“거래 성립. 화끈하게 다 박살 내드리지요.”
우리 좋은 사업 관계잖아요. 안 그래?
서서히 나를 감싸던 금기의 힘이 사라진다.
금기의 업이 꺼짐과 동시에 내 혼과 육신을 동기화시켜주던 보석이 마지막 힘을 발현한다.
콰직.
옅은 파괴음과 함께 더 이상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뒤틀리는 보석은 이내 산산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뭐 하는 겁니까!! 그들이 원하는 건 당신입니다!! 당신을 불러들이는 게 그들의 목적이란 말입니다! 뭐 때문에 유골함의 뼈를 가져갔는지…….”
“케인.”
짧게 일축한 나는 찢어진 공간으로 발을 들이밀며 말했다.
“그 입 좀 다물어.”
서늘하게 중얼거린 내가 그를 노려보았다.
“페르세르크를 데려온 건 딱 한 번만 용서할 테니까.”
내 말에 그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일단 끝내고 보자고.
공간을 뛰어넘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데이비 님.”
“뭔데.”
“케인의 어머니가 이걸 맡겼습니다.”
그가 던진 것은 새하얀 브로치였다.
그게 뭔지 모를 수가 있나.
과거 처음 내가 일리나의 옷에서 잡아 뜯은 첫 물건인데.
“괜찮네.”
그렇게 말하며 브로치에 힘을 발현하자 신성한 휘광이 뒤섞인 새하얀 거검이 손에 쥐어졌다.
[오랜만이다?]
칼디라스의 아이 같은 목소리가 머릿속으로 울려 퍼진다.
이에 나는 공간을 완전히 뛰어넘으며 말했다.
[네가 하려는 게 뭔지 모르겠지만 일리나가 나를 네게 맡겼어. 적어도 지난번처럼 꼴사납게 기절하진 않을걸?]
자랑스레 말하는 칼디라스를 무시한 채 나는 칼디라스의 거검을 질질 끌었다.
[악!! 악!! 야야!! 끌지 마! 질질 끌지 말라니까?!]
“강화를 해도 네 그 수다는 사라지질 않네.”
[그런데 뭘 어쩌려고?]
“놈들이 뭘 원하든 나를 부르고 있으니까.”
가서 혼내줘야지.
그녀의 외침에 나는 말 없이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고진석은 내게서 도망쳤지만. 그에게 무언가 조력을 해준 놈들이 나를 부르고 있다.
놈들이 부르는 방향을 향해 공간을 뛰어넘기가 무섭게 몇몇 눈빛이 나를 바라보는 게 보였다.
이미 이곳은 참극 그 자체였다.
“아아…… 기다린 보람이 있군. 이렇게 와줄 줄이야.”
검은 정장을 입은 장년의 사내는 손에 쥔 것을 휙 던져버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피바다가 되어버린 참극의 현장.
차량의 유동이 많은 거대한 대교의 위에서 모두 멈춰버린 차량은 그들이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재앙같은 흉신의 등장으로 모두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것이다.
그는 마침 아직 어린 소년 하나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지만, 나의 출현으로 움직임을 멈추고 피가 묻은 손가락을 핥았다.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제법 강하구나. 우릴 배신한 신이 선택한 두 번째 영웅다워.”
그렇게 말한 그는 쓰러진 시체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를 뽑아내 그대로 꿀꺽 삼켜버렸다.
“제안하지. 우리와 손을 잡아라. 너를 옥죄는 신의 굴레를 끊어주마. 네가 두려워하는 결과에 도달하지 않도록 우리가 도와주지.”
“내가 두려워하는 게 뭔지 알고.”
“적어도 모를 순 없지 않겠나.”
껄껄 웃으며 그가 천천히 다가온다.
“이보게. 자네. 자네에게 주어진 선택권은 딱 두 가지일세.”
받아들이거나.
죽거나.
“그 말에 나는 어두운 밤하늘 아래의 참상이 벌어진 대교 위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폭사시켰다.
칼디라스와 가장 잘맞는건 천마독고준의 검도 아닌 검신의 중검이다.
하레스의 중검이 폭사하듯 내 주변으로 쏟아져 나왔다.
“독배를 들고자 하는가.”
“더 말해 뭣해.”
“그럼 별수 없이 벌주를 주는 수밖에.”
휘이이잉!!!
짧은 바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쿠웅!!!!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파고들었고.
그의 주먹과 칼디라스를 들지 않은 나의 주먹이 서로 충돌했다.
쩌엉!!! 와장창!!!
거대한 충격파에 대교를 지탱하던 쇠줄과 거대한 H빔이 일부가 휘어진다.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자동차의 유리창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박살 난다.
30분.
넬타리드가 나를 가호하는 짧은 시간.
적은 상상 이상으로 강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
순식간에 표정이 찌푸려진 그가 내게서 거리를 벌리기 위해 뒤로 튕겨 나갔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도 전에 파고든 나는 칼디라스로 대교를 가를 듯 빠르게 당기며 그대로 쳐올렸다.
[중검]
[천지일참]
쩌억!!!!
길이 수백 미터를 호가하는 거대한 다리가 가로가 아닌 세로로 잘려나간다.
그리고, 그 여파는 다리에서 멈추지 않고 거대한 검기가 되어 마치 공간을 단절시키듯 수백 미터 상공까지 퉁겨져 올라갔다.
당황한 듯 검기를 피해낸 그가 내게서 다시 거리를 벌리려 들었다.
그리고는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대단하구나. 인간치고는 정말 대단해. 하지만 자네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는데.”
그가 그렇게 말하며 손을 휘젓는다.
“내가 자네 같은 변수를 손에 넣기 위해 홀로 존재한다 생각했는가.”
그 말과 함께.
그의 주변으로 유령 같은 그의 형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나둘. 다섯. 여덟.
마치 제곱하듯 증식하는 그 숫자는 놀라울 정도였다.
이게 만 년 전 그 고대유적에서 보였던 넬타리드의 힘의 일부라 이거지.
하나하나가 경악스러울 정도의 힘을 지닌 청년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공자 가라사대 물량 앞에 장사 없다고. 한둘도 아니고 수백에 달하는 강적이 눈앞에 나타나면 자신만만해질 법도 했다.
다만 그는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었다.
공자 가라사대 물량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은 나도 공감하는바.
적이 수백을 가져온다면.
이쪽은 수천수만을 데려가는 방법이 존재한다.
“이제라도 포기하고 우리와 함…….”
자랑스레 말하던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고 침묵했다.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내 의지. 즉 심상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힘의 파장이었다.
그리고, 그 파장들이 하나하나 충돌하며 흐물거리는 창공의 수면 속에서 검의 끝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하나둘. 넷 여덟.
하늘 높이 고개를 든 그의 시야에 비친 것은.
기검으로 만들어진 수천, 수만 자루의 기검들이 폭격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것도 그가 불러낸 수많은 존재를 가볍게 압도할 정도의 포대, 혹은 빗방울이었다.
보석의 마지막을 사용하여 혼과 육신을 완전히 동기화시켰다.
애석하지만 네가 얼마나 강하건 지금 내게는 관심 밖의 문제다. 이 말이다.
하나하나가 소드 마스터가 가진 오러 블레이드가 아닌, 그 상위의 개념으로 잡혀진 것.
새하얀 기검은 단 하나조차 소드 마스터들이 도달하고 싶어 하는 경지에 있는 검의 일부였다.
단 한 발 한 발에는 검사가 평생을 쌓아온 정수가 담겨있고, 영역을 모조리 부수는 힘이 서려 있다.
혼과 육신이 완전히 동화되어 모든 깨달음을 육신이 구현하게 되었을 때.
그리고, 검신 하레스의 검. 칼디라스의 힘이 완전히 내게 힘을 빌려줄 때 가능한 힘의 정수나 다름없다.
[마령검]
[중검]
[복합 심검]
[대(大) 만검 폭우]
“무슨, 터무니없는 힘의 양이군…… 어떻게 가장 나약하던 인간이 이토록 방대한 힘과 경험을…….”
기가 막힌 지 고개를 든 그의 입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천년, 아니, 체감 시간 수만 년에 달하는 기억을 담으면 뭐든 가능하거든, 뭐해? 안 튀어?”
내 비웃음에 그의 표정이 구겨졌다.
완전 기억능력은 저주이며, 재능이다.
“빌어먹을!!!!”
하늘에서 마인드 블레이드의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