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6화
신비한 방식으로 스르륵 사라지는 엘프의 모습에 여성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녀의 정체는 프리아라는 이름을 지닌 대신관장.
1만년 전에 존재한 프리아 여신의 신부이자 강림을 위한 제물이며.
동시에 두 번째 삶의 전에 존재했던 나이기도 하다.
말없이 그저 침묵하는 륀느는 지금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무표정은 같으나 그녀를 바라보는 내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동시에 평화롭던 초목이 어두운 밤하늘로 인해 검게 변한다.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 듯 보였지만 보이는 것은 20세 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과 륀느가 전부였다.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
하지만 몇 가지가 달랐다.
단순히 평화롭기만 하던 곳과는 다르게 하늘엔 불길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들이 떠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고 검은 구름이 가득해졌다.
거대한 폭발과 함께 프리아가 어디론가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고 하늘에서는 검은 광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쿠웅…… 쿵!!!
거대한 폭음과 함께 지상이 갈라지고 울린다.
지옥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끔찍한 공격은 대지를 바꾸어 놓았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죽여 나갔다.
검은 악령 같은 형체들이 그녀를 죽이기 위해 내려온 그 순간.
한 줄기 섬광이 현란하게 날아들면서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궤적을 남긴 채 움직이는 섬광은 곧이어 마지막 한 발의 흑광탄까지 제거한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륀느!!”
“멍청이. 빨리 따라올 것을 권고해.”
여전히 싸늘하지만 이전과는 많이 다른.
프리아를 향한 애정까지 느껴지는 륀느의 변화에 나는 말 없이 침묵했다.
그리고. 또다시 기억이 변한다.
피바다가 된 시체의 산 앞에서 프리아의 복부에 빛의 검을 찔러 넣은 륀느가 보인다.
푸른 눈동자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입술을 뻐끔거리며 무언가 말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녀의 날개가 한 차례 강렬하게 펄럭였다.
그리고.
마지막 기억.
륀느를 꺼냈던 지하 유적지에서 몇몇 인물들과 무언가 대화를 나눈 륀느가 거대한 마법진 위에서 자신의 혼을 불사르는 모습이었다.
내가 본 기억의 파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대신 나는 내 의지가 다른 곳으로 끌려왔음을 볼 수 있었다.
“당신은 대체 뭡니까.”
영상이 사실이라면.
대체 눈앞에 그녀는 누구인가.
프리아 여신이 만들어진 존재라면?
넬타리드와 타나토스만 존재했다는 소리가 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창세 기존의 신화부터가 모조리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녀는 대체 무엇인가.
나의 물음에 푸른 머리칼의 작은 소녀는 그렇게 답했다.
[태초의 의지. 존재하되 개체되지 않는 이성.]
복잡하게 둘러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까.
눈앞에 있는 신은 내가 본 반신, 즉 프리아에게 구혼을 하던 넬타리드와는 다른 완전히 태생부터가 위대한 의지였다는 소리였다.
다만 신이라고 부르기도 애매한. 거대한 세상의 근본 중 하나였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존재를 가장 증명하기 힘든 신이며.
모든 이들에게 가장 친숙한 태초 그 자체.
인간과 부대끼는 반신이 아닌. 진짜 세상 전체를 굽어살피는 의지.
그것이 지금의 프리아 여신의 원류였다.
당연히 신의 존재는 불명이었고, 단순한 민간 신앙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홀른, 즉 인간은 신을 불러내는 데에 성공했다.
성경의 강림서라 하였는가.
스스로 진화할 힘을 지닌 인간을 두고 홀른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나.
그건, 어쩌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자신을 불러냈기에 내려 준 대가가 아니었을까.
이러니 그녀가 단일 개체로 강림하자마자 싸움이 될 리가 없다.
일개 개체가 될 수 없고. 일개 개인의 이성을 가지지 않는 절대적인 의지.
“본래 이름이 없었지만 이름이 생기고. 강림하고. 의지가 하나의 신이라는 틀에 묶였다…… 뭐 그렇게 보면 됩니까?”
나는 생각나는 대로 물었다.
이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개인감정과 이성이 생겨난 프리아 여신은 전쟁을 종식시켰고. 그에 따라 문제가 되는 존재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로써 확실해지는 기분이었다.
프리아 여신은 여신이 아닌 말 그대로 창세의 의지였고.
넬타리드는 반신이었다.
“그럼 타나토스는?”
타나토스는 대체 무엇인가.
그 질문에 프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나를 이곳으로 보낸 건 이곳에 당신의 의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본래 이 세상에는 반신이라는 존재가 존재했다.
반신들은 이유도 모른 채 끝없이 완전한 신이 되기를 갈구했고.
넬타리드는 그런 반신이었다.
넬타리드를 모시는 종족이 흉신과 발키리아. 그리고 백익 세피로스.
등등.
그 외에 종족에 대해선 아직 알아낸 바가 없다.
넬타리드는 지금의 프리아 여신과 같은 완전한 무언가에 대한 막연한 욕망을 품고 있었고. 완전한 신이 되기 위해 무언가를 치렀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반신에서 온전한 신이 되었음에도 불완전한 무언가가 되었고.
전쟁이 가속화되었다.
심연의 타나토스. 그리고 넬타리드.
그 외에 반신이 아닌 진짜 태고의 의지, 초월적인 의지인 과거의 프리아 여신을 믿는 인간들.
세 진영의 전쟁이 벌어졌고. 그 과정에서 인간들은 결국 태초의 의지를 프리아 여신이라는 개체 안에 불러 고정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위계가 떨어졌으나 간섭력이 강해진 프리아 여신과.
위계가 상승했으나 뒤틀려 버린 신 넬타리드.
결과적으로 난장판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결국 프리아 여신이 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인가에 대한 의문은 해결이 된 셈이었다.
본래 내 전생의 육신이 프리아 여신을 담아야 하나 그녀는 륀느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그 결과 륀느가 그녀를 대신하여 초월 의지를 몸에 불러 프리아 여신으로서 각성했다.
륀느는 그때 당시 완전히 사멸했다.
지금의 륀느는 고대의 륀느와는 다른 생체 골렘.
그저 기억을 보관하고 있는 그릇일 뿐이었다.
그녀의 힘은 육신에서 비롯된 힘일 뿐이고. 그 힘을 끌어내는 건 왜 만들어졌는지 모를 기계장치의 신. 즉 데우스 액스 마키나를 통해 흉내 내는 수준에 이르러 있다.
한순간에 너무 복잡한 사실들이 머릿속에 들어왔다.
신인 줄 알았던 존재는 본디 생명체의 곁에서 생명체의 경외를 받으며 존재해 온 반쪽짜리 신이었고.
지금의 주신은 감정과 이성이 없는 태고의 의지였다.
“내가 당신의 신부가 되면. 당신은 내 영혼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겁니까.”
내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게 손을 뻗어 주었다.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넬타리드가 나를 두고 복수의 신부라 하였습니다. 당신은 자애가 아니었습니까?”
그녀의 진실된 근본은 무엇인지 나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런 내 질문에 그녀는 내게 빛을 심어 준 뒤 말했다.
[모든 것을 잃고도…… 같은 선택을 반복할 자여.]
그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그녀를 직시했다.
[시련의 끝에 성장을 하리라.]
* * *
여신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고 나를 공격했던 거대한 용의 머리는 사라졌다.
남은 것은 고요하게 빛나는 마석들이 전부였다.
주기적으로 마나를 빨아들여 에너지를 방출하는 마나석이나 마정석과 다르게 마나 분자를 융합시켜 마나라는 존재를 만들어내는 최상위 에너지 석이나 다름없다.
쩌적…… 쩍!!
이윽고 마석을 보호하던 장막이 부서져 내린다.
오랜 시간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 사라지는 장막 너머, 마석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석들을 고정시켜 주던 장치들이 풀리기 시작했다.
“…….”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건?”
“몇 개만 맡겨 놔. 이제 이곳은 별로 의미가 없으니까.”
절반 정도는 환골탈태에 쓰고.
흉신의 의지대로 반신에서 신이 된 넬타리드의 반쪽이 깨어난 게 맞다면. 그 반쪽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타나토스와 넬타리드의 반쪽에 대항하려면 지금의 수준으론 힘들었다.
적어도 내 힘의 대부분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는 소리였다.
절반 정도로는 어림도 없을 테니.
그리고 나머지는…….
“일단 킵 해 놓자.”
마석들을 집어 챙긴 나는 말 없이 그 유적을 벗어났다.
결국, 헤라클래스에 대해선, 회랑은 왜 존재하는지에 대해선 알아낸 바가 없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를 순 없다.
톱니바퀴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나는 취미도 즐기고 남들 하는 것처럼 다 해 보며 제대로 살아보겠다는 내 인생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방해가 되는 것들을 치워 둘 필요가 있었다.
남들만큼 사는 게 이토록 어렵구나.
고롱고롱 잠에 빠져든 청단이와 홍단이를 안아 든 나는 지하 유적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내디뎠다.
그때였다.
쿠르르르릉!!!
갑작스런 굉음과 함께 입구 쪽에서 기이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시에 내 몸이 무언가를 지나친 듯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느낌보다는 감이었기에 나는 내가 잘못 느꼈나 하는 심정으로 무시했다.
그 후 성국에 다시 들른 나는 익숙하게 리나 성녀의 기도실로 향했고, 그곳에서 의외의 장면을 볼 수 있었다.
“자, 따라 해 보세요!”
그렇게 외치며 양손을 높이 들어 올리는 이오.
그리고 맹한 얼굴로 이오를 따라 손을 들어 올리는 리나 성녀.
“오오 자애로우신 프리아 여신님이시여. 당신의 축복이 이 땅에 닿으리니. 당신을 진실되게 따르는 목자로서 당신께 영원한 믿음을 맹세하옵고…….”
기도를 올리는데 묘한 느낌이 든다.
“나의 목숨을 바치옵나니…… 어린양의 피와 내장을 빼내어 바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홍단이를 륀느에게 넘겨준 뒤 순식간에 이오의 뒤를 점했다.
그리고는 그녀의 머리를 콱 틀어잡으며 음산하게 물었다.
“마계로 가라고 했더니 여기서 이상한 짓이나 가르치고 있나? 네 머리에 태양을 심어 주랴?”
내 말에 이오의 눈이 부릅 뜨여진다.
“으악!! 아…… 안 됩니다! 프리아 여신이시여 가여운 어린양의 모근을 지켜 주시옵고…….”
와들와들 떨며 제 머리를 지키기 위해 난리를 치는 이오의 모습에 나는 리나 성녀를 흘끗 보며 물었다.
“뭐 하는 겁니까.”
“네에?”
“후…… 제대로 된 답변을 바라는 게 꿈이지.”
성녀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많다.
한 명은 극도로 입이 험했고. 또 한 명은 머릿속이 놀라울 정도로 꽃밭이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4차원의 성질머리를 지니고 있다.
“성흔 보유자 중에 유일한 정상은 나밖에 없는 모양이다.”
내 말에 뒤따라온 륀느가 묘한 시선으로 나를 직시했다.
이오는 엄연히 구시대의 인물이었고. 리치화하며 살아남은 특이 케이스일 뿐이다.
대체 리치가 어떻게 성녀인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그녀의 기도에 프리아 여신의 은총이 내려진 것을 보면 그녀가 성녀라는 사실도 언뜻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직접 워프까지 시켜 줬더니 왜 여기 있는 거야.”
내 물음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죄송한데요?”
“음?”
“누구…… 시죠?”
나를 향한 질문에 내 표정이 대뜸 찌푸려졌다.
“누구냐니. 데이비입니다.”
내 대답에 그녀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고개를 갸웃거린다.
“데이비 님? 데이비 님은 당신이 아닌데요?”
역시 감을 무시하면 안 된다더니…….
아무래도 유적에서 빠져나오며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