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7화
191. 시련
서로 눈을 마주한 채 의아함을 내비치는 그녀들의 말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저…… 그런데요오?”
멍하니 있는 나를 보며 그녀가 조심스레 손을 들어 보였다.
“뭡니까?”
“저기…… 낮이 익은데 혹시 저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요?”
그녀의 질문에 륀느가 무어라 말하려던 찰나.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프리아 여신의 권능이 남아있던 그 지하 에너지 저장소에서 나올 때 우리를 덮쳤던 기이한 장막.
그것이 원흉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저들은 나를 데이비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나의 존재를 잊은 것은 아니었다.
엄연히 데이비라는 이름에 반응했지만 나를 못 알아본다.
내 모습이 변해서? 그럴 리가.
그런 문제가 생겼다면 륀느부터 눈치챘으리라.
그때였다.
덜컹!!!
갑작스레 기도실의 문이 열리며 수십 명의 성기사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성녀님!! 피하십시오!!”
다급한 이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동시에 성기사들은 각기 긴장한 얼굴로 나와 륀느를 포위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신의 뜻에 반하는 사특한 기운이 감지되었습니다!”
“물러나 주십시오. 성녀님!”
“호오.”
당장 이들은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나를 적대하고 있다.
신의 뜻에 반하는 사특한 기운?
애초에 저들이 규정짓는 사특한 기운은 인간과 반목한 이들을 대상으로 한 힘을 말한다.
진실된 구분을 하자면 사실 마족의 마기도 별달리 종족의 특색일 뿐이니까.
사령 마법의 원류가 인류의 의학발전과 육체에 대한 연구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 논리는 말이 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이들에게 무슨 소용일까.
당장이라도 등에 있을 거대한 성흔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결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
이 세계.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하다.
애초에 내가 있던 그 세계가 맞는지도 의문스러웠다.
“얌전히 잡힌다면 거친 수는 쓰지 않을 것이다!”
고위 성기사로 보이는 노년의 성기사의 외침에 기사들이 한발, 또 한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륀느가 당장이라도 공격할 준비를 한다.
“우웅…… 아빠아?”
이윽고 잠에서 깬 홍단이와 청단이도 눈을 비비며 뭔가 이상한 기류를 눈치챈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자…… 잠깐만요오! 아이도 있는데 검은…….”
“겉모습에 현혹되시면 안 됩니다! 전에도 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대륙 성녀 데이비 왕녀가 보여주었지요!!”
뭐?
내 눈이 꿈틀거렸다.
“뭐라고?”
“조용히 하라!”
“아니, 됐고. 지금 뭐라 했습니까?”
인상을 찌푸린 내가 묻자 노기사가 엄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과거 사특한 마족과 뱀파이어 무리가 전쟁을 걸어왔을 때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수많은 이들의 뒤통수를 친 전적이 있다! 이번에도 같은 수가 먹히리라 보느냐!”
“데이비 님. 성녀라는 사실이 매우 의문.”
륀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낭랑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내 가슴께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내려 내 사타구니 쪽을 직시했다.
“데이비 님. 확실한 남성체라고 판단. 륀느가 그것을 보증…….”
“조용히 해.”
어디서 본건 기억하고 있어가지고.
한숨을 내쉰 나는 성흔을 보이는 것을 포기했다.
뭔가 이상하기 그지없다. 내게서 저들이 사특한 기운이라 느낄만한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느낀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일단 하인스 영지부터 가봐야겠네.”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홍단이와 청단이를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우웅!!!
“놈이 마법을 쓴다!! 마법 방해 장막을 펼쳐라!!”
노 성기사의 외침에 기다렸다는 듯 일부 신관들이 특이하게 생긴 아티펙트들을 꺼내 들었다.
“고위 마법사의 마법도 막는 아티펙트다! 포기해라! 여기서 네놈이 함부로 마법을 쓰면 전신이 산산조각…….”
[디스펠.]
우우우웅…….
천천히 손을 휘저은 내가 담담한 얼굴로 마나를 퍼뜨리자 마법 방해 장막을 펼치던 아티펙트들이 과부하가 걸리기 시작했다.
콰직!!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친 소리와 함께 아티펙트들이 박살 나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데이비 성녀께서 직접 맡기고 간 아티펙트들이!?”
“재밌네. 이걸 데이비라는 그 가짜가 만들었다고?”
“가…… 가짜?! 웃기지 마라!”
“프리아 여신님. 거 할 이야기는 많은데 당장 내 말을 들어줄 것 같진 않으니 장단에 놀아나 드리리다.”
우웅…… 츠츠츠츳!!!!
내가 발현한 마법진이 거대한 사이즈의 푸른 스파크를 만들어낸다.
다급히 성기사들이 나를 지근거리에서 제압하기 위해 몸을 던졌지만.
그들이 마법진 내부로 들어오기도 전에 내 육신은 이미 공간을 도약한 후였다.
스팡!!!
순식간에 공기가 변하며 완전히 다른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 시야에 놀라운 장면이 보여지기 시작했다.
거대하고 우아한 성벽.
그리고 수많은 인파와 함께 거대한 성벽을 감싸는…….
거대한 마법 장막.
“이것 봐라?”
나와 비슷하다.
아니, 마나에서 느껴지는 파장은 내가 사용하는 파장과 정확히 일치했다.
하지만. 방식은 달랐다.
“데이비 님 고에너지 장막 반응. 륀느의 출력으로 돌파할 수 없다고 보고해.”
“뚫을 필요 없어.”
성녀 데이비가 뭐 하는 놈인지, 년인지 아직은 모르겠다만.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면.
“정면으로 밀고 들어간다.”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를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파직!!!
거대한 장막이 내가 아는 그 지식대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나는 뚫고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리라.
우웅! 하는 소리와 함께 접근을 차단하던 장막에 흘러 들어가듯 내 몸에 스며들었다.
동시에 영지 곳곳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데이비 님! 고에너지 검출!!”
륀느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반사적으로 배리어를 펼치자 지면에서 날아든 빛의 밧줄들이 내 베리어를 한 차례 휘감고는 부서져 내렸다.
“이것 봐라?”
어떻게 보아도 이건 대량의 마정석을 정제하여 만든 대 침입자용 방비 시스템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단순히 침입자를 포박하는 곳에서 멈추는 게 아니라 경보시스템 또한 포함하고 있는 듯 보였다.
철컹!! 철커덕!!!
순식간에 영지 곳곳에서 대량의 에너지가 검출되며 빛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내가 무언가를 하기도 전에 금속 몸체를 지닌 거대한 골렘들이 나를 포위하듯 감쌌다.
[침입자. 제압한다.]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너무도 익숙한 골렘이 나를 향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단순히 제압을 하고 있지만, 냉정하게 상대를 가늠하고 제거를 염두에 둔 공격들이었다.
쩌엉!!!
물론, 나는 거기에 맞게 대응을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같은 성질머리에 마나를 지니고 나와 같은 인간이라면 죽을 수야 있나.”
묻고 두 배로 가야지.
키이이이잉!!!!! 카가가가가각!!!
두 메가트론이 만들어낸 거대한 마나 전기톱이 서로 충돌하며 어마어마한 굉음과 불똥을 튀기기 시작했다.
같은 크기에, 같은 디자인.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뭔가 이상했다.
내가 있는 곳은 정말 티오니스가 맞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사정을 지닌 혹 평행세계가 아닐까.
여러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내게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몽환 세계…….”
신의 꿈속 세상.
그녀는 내게 시련을 가한다 하였으니.
그 목적을 모른다 할지라도 이 억지 같은 시련을 내게 적용시키는데에 평행선의 세계를 이용하진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철컹!! 철컹!!
두 메가트론의 스펙은 사실상 누가 우위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비슷했다.
다만 이쪽이 힘에 치중된 움직임이라면 저쪽은 속도와 유연함에 더욱 치중되어있다.
같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메가트론 간의 싸움에 이어 뒤에서 거대한 대거를 들고 골렘 한기가 더 나타나기가 무섭게 나는 나머지 큐브도 모조리 던져버렸다.
질 수 없다.
이건 데이비라는 존재와 데이비라는 존재의 자존심 싸움 그 자체.
어디 가짜가 나를 이기려 드나.
카앙!!!!
묵직한 소리와 함께 신속에 가까운 속도로 디셉테콘 편대의 골렘 퓨마가 서로 충돌한다.
뒤여져 멀리서 날아드는 광탄을 탱커가 방패를 들어 막아내기가 무섭게 이쪽에서도 저거너트가 거대한 마탄을 쏘는 미니건을 꺼내 들고 포화를 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앆!!!”
쿵!!! 쿵!!
거대한 폭음과 함께 비명이 터져 나온다.
갑작스런 침입자나 다름없는 내 행동거지에 영지민들은 비명을 지르며 혼비백산 도망치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그들에게 영향이 가지 않는 범위 쪽으로 골렘들을 제어하며 나를 제압하려던 마나 로프를 모조리 끊어버렸다.
콰직!!!
힘 싸움을 하던 메가트론이 상대측 메가트론을 집어던진다.
그러자 몸이 부웅 뜬 적의 메가트론이 거대한 첨탑과 부딪히며 무너져 내렸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도망치지 못한 영지민에게 향하고 있었다.
“륀느, 인명구조.”
내 말에 륀느가 푸른 눈동자를 빛내며 섬광처럼 파고든다.
그리고.
“으아아아악!!”
“으앙!!”
딸을 끌어안은 채 비명을 지르는 아버지가 있는 쪽을 향해 내가 손을 뻗었다.
우웅!! 쩍!!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첨탑의 파편이 허공에서 멈추었고 륀느는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채 순식간에 영지민들을 대뜸 들어 올려 안전지대로 데려다 놓았다.
“밀피유. 너도 좀 거들지?”
“인간 따위는…….”
“죽고 싶으면 계속해봐. 널 살려두고 있는 게 누구인지 잘 기억하라고.”
“…… 흥미롭지 않아.”
내 말에 밀피유가 인상을 찌푸리며 스르륵 흩어졌다.
순식간에 전장이 되어버린 이 난장판 속에서 나는 성녀라 불리는 데이비 왕녀가 누구인지 문득 궁금해졌다.
대체 누군데.
누구이기에 내 이름을 고스란히 쓰는 주제에 성자도 아니고 성녀란 말인가.
게다가 왕자도 아니고 왕녀라 하였으니 성별이 여성이라는 뜻인데.
대체 무엇이 어떻게 된 건지는 직접 들여다봐야 알 것 같았다.
그래. 만나면…….
일단 머리에 태양부터 심어주마.
여자라고 하여 모근이 안전할 거라 생각지 마라.
그때였다.
피잉!!!
갑작스레 나를 향해 날아드는 검은 기류가 내 몸에 스며든다.
이거…….
“어떤 빌어 처먹을 놈이 감히 내 가족이 있는 영지에서 소란을 피우나 했더니.”
청명한 여성의 익숙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하늘 높은 곳에서 내려오듯 한 여성이 공간을 찢고 나타났다.
“아…… 아아…… 데이비 왕녀저하!!”
하늘에서 나타나는 이들을 보며 륀느의 도움을 받아 피신했던 영지민들이 눈을 부릅떴다.
“뭣들 해!! 인명이 우선인 거 몰라?! 당장 영지민들 피신시켜!!”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사방에서 들이닥친 근위병과 엘프 병단이 일사불란하게 시민들을 대피시키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그들을 헤칠 이유는 없었다.
지금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구조. 그리고. 나의 자리를 차지한 불청객의 존재.
같은 육신이기에 확실한,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으며 다가오는 여성은 나와는 달랐다.
하지만 동시에 같기도 했다.
“데이비 님…… 매우 닮았다고 판단.”
그랬다.
“뒤지고 싶어? 넌 뭔데 남의 집에 와서 이 난리야.”
나를 향해 그녀가 싸늘하게 웃어 보였다.
“데이비 님. 미소도 똑같다고 판단.”
나와 너무 흡사하지만. 남성보다는 아름답고 청초함이 서린 외모.
무심코 정말 아름답다 여기지만, 반대로 차가운 느낌이 서린 눈매도 보였다.
언 듯 보면 내가 프리아 여신의 기억 속에서 본 고대의 대신관 프리아와 나를 합쳐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는 너야말로. 남의 집에서 뭐 하는 짓이냐?”
내 물음에 그녀가 눈을 찌푸린다.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가 할 소리다 이년아.”
내 말에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하지만 곧 내가 쏘아 보낸 무언가에 의해 표정이 굳어졌다.
베르샤의 저주와 내가 평소에 사용하는 저주 모두였다.
목적은. 그녀의 찰랑거리고 빛이 나는 긴 흑발에 서린다.
탈모의 저주!
받았으면 돌려줘야지.
대뜸 보자마자 탈모의 저주를 박아넣은 년이 바로 눈앞의 그녀였다.
그녀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이 개 x놈이.”
“남의 머리를 뽑으려고 각오했으면 자기 머리 뽑힐 각오도 해야지. 어디 건방지게 남의 머리에 탈모 저주를 걸어?”
“…….”
내 말에 그녀가 처음으로 놀란 듯 보였다.
그녀는 겉보기에도 지금의 나와 비슷한 수준, 아니 거의 동일한 수준의 강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 대해 모른다.
반대로 나는 그녀가 누구이든 어느 정도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 차이가 만들어내는 심리싸움은 제법 여파가 거대했다.
“메가트론…… 너, 뭐야?”
그녀의 물음에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데이비 올 라운이다.”
내 말에 그녀의 손이 번뜩였다.
카아아아아앙!!!!
동시에 그 누구도 반응하지 못할 속도로 나와 그녀의 신형이 움직였고.
거대한 충격파를 일으키며 각기 홍단이를 뽑아 들고 서로의 검을 마주 대었다.
다만 이번엔 조금 달랐다.
그녀가 뽑아 든 검은 홍단이나 청단이가 아닌.
새하얀 백색의 신검.
칼디라스였다.
“니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
“…….”
“원래 주인은 어디 가고.”
“그 주둥아리는 좀 닫아주지 않을래?”
그녀의 기세가 흉포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다르다.
몇 가지가 다르다.
왕자는 왕녀로, 성자는 성녀로. 그리고.
데이비 올 라운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청단이 홍단이, 그리고 륀느까지.
보이지 않았다.
대체 프리아 여신은 이곳에서 내게 무슨 시련을 바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