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0화
처음 든 생각은 내가 혹시 사고 쳤는가?
라는 의문이었다.
그럴 리가. 비록 누군가를 괴롭히고 대놓고 여자를 꼬드겨본 적도 있지만 결단코 함부로 누군가를 손댄 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취한 사이에 문제가 생겼는가.
나는 말 없이 페르세르크의 몸에 다시 힘을 밀어 넣었다.
“확인해보자.”
데이비 올 라운의 두 번째 아이를 잉태할 때 그녀의 바람에 아이에게 닿는 축복을.
스르릉…….
마치 깃털이 흩날리듯 빛이 그녀의 몸에 스며든다.
단순히 공학적, 연금술적 지식이 아니라 이제는 영혼까지 간섭하기 시작하는 걸 보니 자연스럽게 사령 술사로서의 한 단계 경지를 개척해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물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뭐야…….”
첫 번째 아이는 안되고, 두 번째 아이는 된다고?
이로써 더욱 확실해져 버렸다.
첫 번째 아이는 현재 이 세상 어딘가에 태어났거나. 아니면 태어날 준비를 하고 있다.
대체 어디서? 누가?
“페르 이외에 바람을 핀 적은 없는데…….”
그녀에게 남녀의 관계는 서로 동등하고 배려받아야 한다며 말했던 내가 아닌가. 그녀가 나를 오로지 외길로 바라보듯 나 또한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니.
혹여 나는 그녀의 뱃속에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로 아이가 생긴 게 아닌가 의심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건 내가 가장 잘 알았다.
그녀의 몸은 실시간으로 검진을 하고 있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가 아니면 대체 누가…….
누가 나의 아이를 품고 있는가.
그런 의문은 결국 시간이 흘러도 해결되진 않았다.
“이건 뭐, 처녀 수태도 아니고.”
지가 무슨 성모 마리아야?
기가 막힌 기분이 들지만 일단은 집중해야 했다.
나는 일차적으로 환골탈태 스택을 페르세르크에게 이관시켰고, 그대로 륀느의 연구실에서 발견되었던 마나융합식 마석을 몇 개 꺼내 녹여 퍼뜨렸다.
그리고는 그녀에게 녹아들게 했다.
뭐가 되었건 일단 그녀가 최우선이니까. 내 첫 아이에 대한 의문은 그 후의 일이다.
이윽고 완전한 빛으로 둘러싸이며 그녀의 몸이 변하기 시작했다.
겉 외향은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등 뒤로 검은빛의 반투명한 날개가 두 쌍 돋아났다가 부서지듯 사라졌다.
그녀의 존재가 변했음을 확실히 느낀 것이다.
이제 오버 마인드 놈의 출현에도 그녀의 힘은 폭주하지 않으리라.
무의식적으로 그녀의 의지가 그 힘을 억누를 테니까.
동시에 그녀의 몸 안에 쌓여있던 노폐물이 마치 수증기처럼 흩어지며 사라졌고 안 그래도 아름답던 그녀의 피부가 더욱 말끔하게 변하며 향긋한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복숭아 향.
완벽한 복숭아 향이었다.
비슷한 전례가 존재한다. 아이 때부터 복숭아만 먹여 키운 어떤 몰상식한 문화.
코를 자극하는 향기에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변화함으로 인해 완전히 불타 사라져버린 모포 대신 로브를 꺼내 그녀의 몸을 덮어주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몸을 돌렸다.
마신의 성지는 프리아 여신의 축복이 남아있는 곳이다.
마족에겐 가장 성스러운 공간답게 그녀의 육신에는 프리아 여신의 축복마저 서렸다.
성공적으로 환골탈태를 성공한 나는 그녀를 등에 업은 채 몸을 돌렸다.
페르세르크의 문제를 해결했으니.
이제 몽환 세계에서 만났던 데이비 왕녀의 부탁을 들어줄 때가 되었다.
“살리반 황태자. 내게 빚 하나 진 겁니다.”
* * *
“흥~흥흥~”
기분 좋은 콧노래가 울려 퍼진다.
청록빛의 머리카락 위로 돋아난 귀가 쫑긋하며 귀여운 인상의 소녀가 눈을 반짝였다.
“다 됐어!”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녀의 손에 만들어진 것은 작은 아이의 신발과 옷이었다.
실크와 털실로 만들어진 조금 투박하지만, 애정이 담긴 의상.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황녀가 이런 물건을 만들고 있다는 소문이 돌기라도 하면 그녀의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이 생길 게 뻔했지만,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의 뒤에 데오르트 황제와 알버스 황태자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납작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며 행복하게 웃어 보였다.
“이름은 어떤 게 좋을까.”
그녀의 배 속에 있는 건 어떤 의미로는 기적에 가까웠다.
기억을 잃었으나 스스로 그를 기억해내는 데 성공한 그녀에게 내려진 신의 축복.
그녀의 뱃속엔.
한 생명이 잠들어있었다.
비록 남성과 동침한 바도 없으나 그녀가 아이를 배어버렸다는 뜻이었다.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또 사내아이인지 여자아인지는 사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비록 아빠와는 만날 수 없을지라도. 그가 남겨준 사랑과 그의 마음으로도 충분했다.
이로써 나인테일의 본능을 어느 정도 억누르고 그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웁!”
그때였다.
향긋한 향기가 올라와 고개를 돌린 그녀는 반사적으로 구역질을 하며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이, 참…….”
쿡쿡 웃어 보인 그녀는 곧바로 창문을 열어젖힌 뒤 자신의 배를 쓸어내렸다.
“당신은 모르겠지만 전 이것으로 충분해요. 당신은 모를 테지만. 저는 당신의 애정을 충분히 받았는걸요.”
기억을 잃었던 당시.
데이비도 몰랐던 한 가지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프리아 여신의 힘은 기적에 가까웠고. 그 기적으로 그녀는 길진 않지만, 너무 행복한 꿈과 함께 아이라는 선물을 받았으니 말이다.
그것으로, 그녀는 충분하다 여겼다.
절대 아이의 아빠가 누구인지는 말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말이다.
물론, 마계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로 아이의 아빠가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는 걸 그녀는 몰랐다.
“아 참. 밀리아, 데이비 왕자님께 보내려고 만들어둔 목도리를 어디 두었는지 기억하니?”
“네? 아아 그거라면…… 황제 폐하께서…….”
“폐하께서 드십니다.”
마침 데이비에게 줄 목도리를 찾던 그녀는 갑작스레 들이닥친 노령의 사내를 보고 놀란 듯 크게 눈을 떴다.
“아…… 아바마마!”
“오. 에이리아. 요즘 미소가 정말로 보기 좋구나.”
지엄하고 무시무시한 황제이지만 그녀의 앞에선 너무도 따스한 아버지였다.
그녀도 이제는 데오르트 황제의 아낌없는 사랑을 확실히 느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그녀에게 그녀의 아버지는 너무도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어?”
물론. 데오르트 황제의 목에 둘러진 목도리만 아니었다면.
“아…… 아바마마? 그…… 그건…….”
“음? 허허허, 그래. 이 아비를 위해 네가 선물을 준비했을줄은 몰랐구나. 정말 고맙다.”
그의 미소에 에이리아가 벙찐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네?”
“응?”
“그…… 그건 데이비 왕자님께 드리려고 만든…….”
그 말에 데오르트 황제의 표정이 굳는다.
“뭐……뭣이? 그럼 이 아비를 위해 만든 게 아니란 말이더냐?”
“…….”
뾰로통해진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에이리아를 보며 데오르트 황제는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런, 정말 미안하구나. 이 아비가 너무 경솔했어.”
“아…… 아녜요.”
물론, 이 순하고 착해빠진 에이리아 황녀는 그걸 가지고 제 아비에게 화를 낼 성정이 아니었다.
“괘…… 괜찮아요. 아바마마. 정말 잘 어울리시는걸요? 목도리야 새로 만들면…….”
그렇게 말하지만, 데오르트 황제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이런. 이 아비가 잘못했단다 화를 풀어 주…….”
“웁!”
그때였다.
향긋한 향이 올라오기가 무섭게 에이리아가 헛구역질을 한다.
방안에 싸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알버스…… 알버스!!!!”
그리고.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킨 데오르트 황제가 격하게 황태자를 부르짖었다.
* * *
팔란 제국의 수도 황태자 살리반 데 팔란은 복잡한 심경에 머리를 끙끙 싸매곤 인상을 찌푸렸다.
팔란 제국은 중앙 제국패권국가이며 세게 규모의 국가 연합을 주도하는 리더급의 국가라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팔란 제국이 정의를 수호한다는 입장을 표명하는 이상 단순히 팔란 제국만 신경 써선 곤란했다.
문제는 하인스 영지라는 별개의 영지와의 관계에 대해서였다.
현재 하인스 영지는 팔란 제국으로부터 다수의 물자를 고정적으로 구매하고 있다.
반대로 팔란 제국에서도 하인스 영지의 특산품을 사들임으로써 서로 상부상조하는 관계이기도 했다.
“저하. 하인스 영지와의 관계가 너무 가깝습니다. 데이비 왕자와의 관계에 거리를 조금 더 두시는 편이…….”
“알고 있네. 대신.”
살리반이 인상을 찌푸렸다.
데이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수록 팔란 제국은 빠르게 성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팔란 제국이 그동안 표방해온 것들이 유명무실해져 버릴 가능성이 너무 거대했다.
“일차적으로 너무 의존하는 경향을 버리셔야 합니다. 일단은 데이비 왕자가 건네오는 요청을 모두 거절하시고…….”
“그리하도록 하지.”
“그리옵고, 하인스 영지에 치중된 무역을 각국으로 돌리시어. 밸런스를 맞추심이 옳은 줄로 아뢰옵…….”
대신의 충언에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던 와중이었다.
“저하!!”
누군가가 급히 알현을 아뢰어 올린다.
“저하!! 데이비 왕자께서 알현을 요청하고 있사옵니다!”
그 말에 살리반과 대신의 시선이 일순간 알현실의 문으로 향했다.
“뭣하나! 대신! 차라도 내어오게!”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방금까지 데이비와 하인스 영지에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하던 두 인간의 태세전환은 그 누구보다 빨랐다.
* * *
어둠 속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눈을 떴다.
[마침내…… 내가 깨어났다.]
그는 거대한 의지를 품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수십 가닥의 촉수에 돋아난 눈들을 모두 띄우기 시작했다.
[나의 어머니시여. 나의 여왕이시여, 나의…… 신이시여]
오랜 시간 잠들어있던 심연의 거대 파편 중 하나인 괴물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유영하며 서서히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제가 깨어났으니 당신을 억압하던 힘이 풀어질 것이오. 내가 갈 터이니 당신을 모시리다.]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며 그가 천천히 움직였다.
심연의 특수개체.
심연의 공주처럼 수억의 사념이 모이진 않았으나 거대한 사념체 몇 개가 뭉쳐 만들어진 특수개체.
오버 마인드였다.
“준비하라. 역겨운 프리아의 영역으로 간다.”
이미 수차례 실패한 심연이기에 데이비라는 인간과의 전투에 조심스러워질 수 박에 없다.
슬리지아에 이실디까지 당하고 이미 사망한 심연의 공주가 다수.
이제는 이쪽도 물러날 수 없었다.
오버 마인드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산발을 한 심연의 공주를 촉수로 옭아맨 다음 힘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그가 태어남으로써 여왕의 힘이 강해진다.
그 후 그가 할 일은 프리아의 영역으로 넘어가 자신의 힘으로 여왕의 힘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뿐.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데이비라는 인간을 죽이기 위해선 직접적으로 넘어가야 했다.
이미 티오니스 대륙과 심연 사이에는 어느 정도 구멍이 뚫려있는 만큼 넘어가는 데엔 큰 지장이 없었다.
츠츠츠츠츳…….
공간이 불타오르듯 찢어지며 그의 육신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스며든다.
티오니스로 넘어가는 장소는 훤했다.
가장 자신의 힘을 발현하기 좋은 장소가 이미 존재했으니 말이다.
비록 인간의 황궁 지하인 듯 보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상관없었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
그때 갓 깨어난 오버 마인드를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울드…….]
“데이비라는 그 인간. 우습게 보지 마. 조심해야 할 거야.”
[난 너 같은 불량품과 다르다.]
“…….”
[놈의 죽음을 몰고 와주지. 쓸모없는 너희들이 실패한 티오니스의 붕괴를 내가 일으켜주리라.]
당당하게 비꼬지만,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버 마인드는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래. 적어도 네가 넘어간 걸 그가 모르면.”
[놈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대륙 곳곳에 생길 변화를 대처하느라 급급할 테니.]
그의 말에 울드는 침묵했다.
그리고. 완전히 공간을 넘어 심연에서 빠져나온 오버 마인드가 거대한 지하제단에 있는 공간을 찢고 나타났을 때.
그의 큰 눈동자엔 그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검은 머리의 청년이 보였다.
“어서 와. 매복은 처음이지?”
스산한 미소와 함께 소년의 얼굴에 음산한 빛이 서렸다.
“세……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이 제단 자체가 심연에서 넘어오기 좋게 변질되어있으니까요, 일단 됐고. 너 잘 걸렸다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