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2화
방대하고 웅장한 공간의 틈.
마치 우주에 존재하는 거대한 웜홀을 옆에서 보는 것과 같은 공간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그 틈은 일반적인 이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즉, 신의 장벽이 약해졌을 때 존재하는 이동 경로와는 달랐다.
기본적인 차원의 틈보다 훨씬 위험하고 험난한 틈이지만 심연의 존재들에게 슬리지아의 죽음은 너무도 예상 밖의 일이었던 만큼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 탓에 그는 오래전부터 심연에 굴러들어온 어떠한 유물을 손에 넣었다.
명칭 [사해문서]
오래되고 낡은 기억 일부에 따르면 심연을 이 지경으로 만든 존재가 떨어뜨리고 간 물건인데 이 물건을 다시 깨워낸 심연의 공주중 최상위 존재가 슬리지아를 대체할 물건으로 사해문서의 힘을 제시했다.
그 영향을 받지 못한 심연의 공주들은 죄다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버린 꼴이지만 말이다.
[그르르륵…… 그륵!]
조금만 늦었어도 죽음을 맞이할 뻔했다.
수억의 사념이 모여 만들어진 심연의 공주들은 여왕에 대한 갈망을 금제 당한 대신 압도적인 힘을 얻어냈다.
물론, 심연 자체의 흉포함과 파괴 욕구는 그대로이기에 페르세르크를 갈망하지 않는 점만 제외하면 일반적인 심연과 동일하지만 말이다.
반대로 일반적인 심연의 개체는 여왕을 갈망할 수 있게 된 대신 강대한 힘을 얻지 못한 심연의 개체들도 더러 존재했다.
오에돈, 연가시 같은 존재들이 그런 존재들이었다.
단적으로 그들은 강대하고 위험한 존재들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분석해보면 그들의 무력의 근원은 심연의 법칙이 압도적으로 치졸하다는 점과 그들이 가진 특수한 능력이 관건일 뿐, 실질적인 피지컬은 높다고 할 수 없었다.
실질적으로 심연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지금의 티오니스 수준으로도 얼마든지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오버 마인드는 달랐다.
심연의 공주도 아니기에 페르세르크를 갈망할 수 있으면서도, 놈은 보통 심연의 개체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특수능력과 피지컬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돌연변이이기에?
아니, 실상은 그의 존재가 오래도록 유지되어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보통 심연의 존재라도 무구한 시간을 살아갈 순 없다.
하지만 오버 마인드는 특이하게도 동면이라는 결과를 통해 오래도록 살아남은 개체였다.
동면기간 동안 서서히 강해진 놈은 급기야 심연의 공주를 제외한 약한 개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힘을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 공간을 넘을 때만 해도 그는 그런 자신감이 있었다.
심연의 끝자락, 빛조차 들어오지 않는 그곳에서 동족들의 기억을 공유받아 데이비 올 라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그는 면밀하게 계략을 꾸몄다.
힘으로 이길 수 없는 적을 꺾는 방법에 대해.
그리고, 그는 자신의 힘과 모두가 갈망하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여왕을 이용할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보란 듯이 그는 오버 마인드의 어마어마한 연산능력을 뒤집어엎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를 살려 보낸 것을 두고두고 후회할 것이다.]
살아남은 오버 마인드는 심연의 끝자락.
빛조차 통하지 않는 자신들의 근원으로 향했다.
이 거대한 통로는 일방통행이다.
돌아가기 위해선 중간에 방향을 바꿀 수 없고 오로지 목적지에 도달했다가 다시 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그는 용의주도하게 계략을 꾸몄다.
어차피 데이비라는 저 적대 대상은 자신을 위험인자로 착각했을 것이고, 지금처럼 여러 방식을 통해 지독한 추격을 보여주었다.
그는 철두철미했다.
그가 매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미 그는 도망치는 루트까지 상정해두었다.
그 과정에서 심연 속에서 잠식되어가던 고대룡 [이클립스]를 잠시 깨우는 위험한 짓을 저지르긴 했지만 그 정도 위험부담으로 그 인간을 죽일 수 있다면 충분했다.
[자…… 넘어와라! 우리의 영역까지 어디 따라와 보아라.]
한번 빨려 들어오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하는 통로를 타고 심연에 도달했을 때.
수십 명의 심연의 공주들이 일제히 그를 죽이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스산한 웃음소리를 내며 너덜너덜해진 촉수를 이끌고 심연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그는 이상하리만치 데이비가 이곳으로 따라오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 의심이 많은 건가?]
그의 행동거지, 살기를 고려해볼 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죽이려 들 줄 알았는데.
전혀 따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이 그를 잘못 파악한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였다.
그는 자신과 이어진 특이개체인 심연의 공주가 아직 살아있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발목을 묶고 있는 것인가.
쓸모없는 년 같으니.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녀는 그의 발목을 묶을 수 없다. 심연의 공주라곤 하나 오버 마인드가 근처에 없다면 그녀는 힘을 발현할 수 없으니까.
그때였다.
오버 마인드의 본체를 향해 심연의 공주가 보내오는 감정의 편린이 속속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 감정은. 공포. 경악.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토록 두렵게 만든 것인가.
그런 순간적인 의문은 곧 그녀와 이어진 끈을 통해 기억이 전해져 왔을 때.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 상황에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경우 무슨 일이 벌어질지 빠르게 계산이 되는 머리가 저주스러워졌다.
[아…… 안돼!!!]
거의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어떻게든 다시 돌아가려 했지만 매정하게도 거대한 통로는 그를 심연으로 내던져버렸다.
그리고, 깊고 깊은 바닷속으로 입수한 직후처럼 심연에 내던져진 오버 마인드는 거대한 눈동자를 통해 어둠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수십 쌍의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심연의 개체는 물론 심연의 공주도 보인다.
찌잉…….
그리고, 잠시간의 침묵 끝에 통로 속에서 옅은 빛이 따라와 그에게 스며들었고, 세상이 느려진 듯한 그 짧은 찰나에 오버 마인드는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막을 방법이.
없다.
후웅!!!!
이윽고 웜홀의 틈에서만 흘러나오는 빛을 제외하고 빛 한점 닿지 않던 어두운 심연의 바닷속에서 묵직하고 거대한 파문이 퍼져나갔다.
후웅!!
또 한차례 무형의 파문이 퍼져나간다.
본능적으로 무언가 파문이 퍼져나갔음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망연자실한 오버 마인드가 급히 소리치려던 찰나.
퍼져나갔던 파장들이 새하얀 빛이 되어 일순간 압축되듯 그에게 몰려들었다.
거대한 중력에 의해 빛이 빨려 들어가듯 그에게 완전히 모여든 파장은 곧이어 그의 육신을 비틀기 시작했고.
거대한 블랙홀과 같은 중력파를 만들어냈다.
이후의 일은 간단했다.
거대한 중력파가 물리법칙을 뒤틀고 발현한다.
치외법권의 힘을 지닌 심연의 개체라도 이 정도의 화력에서 무사하기는 쉽지 않다.
아니, 그 계산대로라면, 이 자연재해 유도 마법은…….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는다!
그러한 결론에 이른 오버 마인드가 눈을 부릅떴다.
그리고.
빛 한점 없던 심연의 입구를 새하얀 빛으로 가득 채웠다.
그동안 티오니스를 포함한 다수의 차원을 침공했던 그들에게 가해진 빛의 세례였다.
* * *
마치 한번에 대가를 모조리 가져가듯.
몸 안의 모든 힘이 빠져나간다.
단순히 원소 마나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신성력, 사령마다, 정령마다 이외에 주술에 필요한 도력까지.
이거론 턱없이 부족하다고 외치는 것처럼 닥치는 대로 긁어가는 마나는 육신이 정해놓은 최소안전치의 마나만을 남기고 싸그리 긁어가듯 증발해버렸다.
작정하고 골수까지 빨아 먹힌다는 게 이런 기분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장시간 곱게 모아놨던 별부수미 칭호의 마나까지 빨아먹은 탓에 마치 장시간 마라톤을 뛴 것처럼 온몸이 피로해졌다.
“욱…….”
깨달음도, 육체 재능도 부족한 내가 아직 벌을 내디딜 수 없는 공간에 내디딘 대가는 제법 거대했다.
마법 성공의 여파는 따질 것도 없었다.
애초에 이쪽에서 저쪽으로 돌아가도록 된 차원 웜홀인 만큼 저쪽에서 무언가가 이곳으로 넘어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할 수밖에 없다.
나는 불씨를 던졌고. 그게 얼마나 큰 효과를 지닐지는 그저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오버 마인드의 죽음이 확실시 되는지를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놈의 존재 자체가 페르세르크의 힘을 증폭시키는 매개체였다면 놈이 죽는다는 말인즉슨, 페르세르크의 폭주하던 힘이 다시금 잠잠해진다는 소리일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제 확인만 하면 되는 일인데.
생각지도 못한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저기…… 누가 나 좀 일으켜 줬으면 싶은데.”
살리반을 쫓아내 버린 탓에 이곳에서 나를 부축해줄 인간이 없다는 점을 깜빡한 결과였다.
그는 영리한 존재이니 괜히 다시 접근하여 나를 방해하려 들진 않을 터. 내가 살리반이었다면, 반드시 황성 내부에 있는 이들을 대피시킬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할 인간이었고,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도 없다.
당분간 이곳에 아무도 오지 않을 거라는 현실만이 확실하게 닿는다.
“으…… 모르겠다. 일단…….”
나지막이 중얼거린 나는 몰려오는 수마를 참지 않고 그대로 잠에 빠져들어 버렸다.
동시에 희미한 의식 너머로 이전과는 비교도 안될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하는 마나의 움직임만이 느껴졌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번 일로 인해 팔란 제국에서 대규모 피난 사태가 일어나고 국가 비상과 동원 명령이 떨어졌다는 웃긴 사실이 존재했다.
* * *
꿈속이었다.
내 눈에 보인 것은 거대한 웜홀을 옆에서 바라보는 듯한 기이한 공간이었다.
차원의 틈과 유사하지만, 완전히 다른 밤하늘 색의 공간.
중력장으로 인해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그 모양새는 마치 고속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하나의 블랙홀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을 전해주었다.
이 특이한 공간은 어디서 본 느낌이 들었다.
그래. 오버 마인드가 넘어왔던, 그리고 심연의 존재들이 넘어올 때 느껴지던 차원이동과는 미묘하게 다른 그런 공간의 흐름이다.
거대한 힘의 격류는 오로지 일방통행으로 흐르고 있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를 그 흐름 속에서 나는 왜 내가 이런 곳에 눈을 뜨고 있는지 의문이 생겼다.
쿠웅!!!!
그때였다.
거대한 웜홀의 아랫부분에서 눈이 아플 정도로 거대한 빛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상상도 못 할 크기의 폭발 여파가 아래 영역을 일순간 집어삼켰다.
“…….”
나는 저 폭발이 무엇인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단순한 우주공간에서 초신성 폭발을 목격하는 것과 달랐다.
저것은, 내가 일으킨 유사 행성폭발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위쪽은, 티오니스. 아래쪽은 심연.
그렇다면 이 사이에 난 거대한 통로는…….
[동전의 앞면과 뒷면.]
어린 소년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구나, 프리아.]
“뉘신지.”
빈정거리듯 내가 물었다.
나를 부르는 호칭과 분위기를 보고 모를 수가 없었다.
[여긴, 태초의 공간. 거대한 폭발로 인해 두 세계가…… 아니 모든 세계가 나뉜 시초, 신의 영역이며…… 프리아 여신의 근본.]
그렇게 말하며 아무것도 없던 어둠 속에서 빛으로 일렁거리는 형체가 나타났다.
동시에 끝동 없이 흘러가던 거대한 웜홀의 에너지 격류가 일순간 멈췄다.
마치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이곳에 네가 온 것은 운명의 안배인지. 아니면, 이 또한 정해진 결론인지.]
“…….”
빛으로 이루어진 형체는 곧이어 한차례 강렬한 빛이 되더니 이내 한 형체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반신조차 인지하지 못하던 형체가 처음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긴 귀에 흰 머리칼을 지닌 작은 소녀였다.
하지만 살아있다고 하기엔 조금 괴리감이 드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더욱이 신기한 점은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봤던 그 양반과는 다른데?
애초에 신에게 형체가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다시 대화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웅웅 울리는 목소리가 조금 더 현실적으로 변했다.
“네 행동으로 심연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어. 심연 전체에 비하면 티끌 같은 영역이 전소했지만. 네가 내린 결정으로 심연의 존재 다수가 그 자리에서 소멸해버렸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스르륵 날아올라 내 뺨을 쓸어내리며 조용히 말했다.
“결과적으로 타나토스는 한번 휘청였고, 당분간은 복구에 정신이 팔려 그 어떤 수작도 부리지 못할 거야.”
“시간 벌었네.”
“아니, 운이 좋았다고 생각해야 할 거야.”
그렇게 말한 그녀는 감은 눈을 뜨지 않은 채 천천히 다가왔다.
“타나토스의 잔재를 네가 이렇게 막아내지 못했다면 다음엔 이클립스가 움직였을 테니.”
“이클립스?”
“타나토스의 가장 큰 파편. 네 곁에 있는 타나토스의 근본을 제외한 가장 거대한 존재.”
본래엔 고대룡이었으나. 심연을 먹어치우고 심연에 잠식된 존재.
무궁한 역사 속에서 버텨온 최상위 심연의 공주.
그러니까. 저쪽도 이제 물러날 길이 없다는 소리였다.
“동맹을 할 거면 확실하게 했어야지. 그렇게 흉신으로 뒤통수 후려갈기면 내가 당신을 손절할 거 같습니까? 아니면 놔둘 거 같습니까.”
내 물음에 그 아니 그녀는 조용히 침묵했다.
그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에도 약속을 지켜주지 못했네. 프리아.”
“거 데이비라는 이름도 있는데, 자꾸 다른 이름으로 부르면 예의가 아닌 거 모르시는지.”
짜증스레 중얼거리자 그녀가 신비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소녀의 형상으로 의태한 존재.
신이되 반쪽은 파괴, 반쪽은 온화를 상징하는 조화의 신.
넬타리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