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4화
바리스의 경우엔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미묘한 공기가 감도는 펠리스티 공녀와 바리스 사이엔 나이 차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거기까진 뭐, 애들끼리 풋풋한 연애라도 할 수 있지. 또는 어차피 약혼 관계로 묶인 만큼 그 이상 내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율리스는.
“…… 언제부텁니까.”
“…….”
“율리스 님.”
“오라버니!”
“윈리. 조금만 기다려줄래?”
빙그레 웃으며 윈리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녀석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내가 저 도둑놈을 확실히 처리해주마!”
“아…… 안돼요!”
비명을 지르는 윈리를 뒤로한 채 나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허공에 매달려있는 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율리스는 자신의 경지로는 디스펠이 절대 불가능한 경지에 있는 압도적인 포박 마법에 질린 듯 보였다.
“데이비 왕자님은 볼 때마다 엄청난 성취를 이루시는군요.”
“언제부텁니까?”
“처음부터였습니다.”
그는 옅게 웃어 보였다.
“…….”
“데이비 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어째서 그렇게 나섰는지.”
과거 율리스는 일리나와 혼약 관계가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 관계에 대해 전혀 일말의 관심도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래. 알고는 있었다.
적탑의 잘나가는 장로와 이름 없는 소국 왕녀의 만남이다.
그것도 귀족가의 아가씨도 아니고, 사실상 기반 세력이 없으면 가장 애물단지나 다름없는 왕족.
그나마 왕자가 아닌 왕녀라는 점에서 조금 나은 편이지만 한창 대륙의 천재라 떠받들어지며 칭송받는 율리스가 굳이 윈리를 위해 제 목숨까지 걸어가며 링튼 백작에게 대항했을 리가 없었다.
인제 와서야 윈리의 위세는 등에 업고 있는 나의 존재로 인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버렸다지만 이전까지의 윈리는 말 그대로 기반세력이 빈약한 왕족 여성일 뿐이었다.
그런 윈리가 단순히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쫓아와 제 목숨까지 걸어가며 그녀를 돕고 지키고, 그것도 모자라서 내 곁에 있으면 마법 발전에 도움 된다는 반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붙어있는 이유.
“그래도 나이 차가 너무 양심 없는 거 아닙니까?”
“아하하하…….”
부드럽게 웃어 보이는 그의 안경이 삐끗하는 느낌이 들었다.
“오라버니! 허락해주세요!”
“뭐?”
“그…… 그 나이 차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전 후회하지 않는걸요……”
그렇게 말하는 윈리는 자신의 마른 배를 옅게 쓰다듬었다.
그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나는 놀란 얼굴로 윈리의 표정에 서린 미소를 지켜보았다.
벌써 저런 얼굴을 할 줄 아는 나이가 되었구나 싶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며 따르던 윈리는 어느덧 훌쩍 큰 듯 새장을 떠나 날아오르려 하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모습에 나는 과연 내가 이렇게 구는 게 옳은 일인지에 대한 의문이 서렸다.
그리고,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후…….”
그래, 본인들이 좋다는데 어쩌겠는가. 이미 아이까지 생긴 마당에.
나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윈리가 원한 결론에 내가 무어라 말할 자격은 있는가.
애초에 율리스라는 인간이 좋은 인간이 아니었다면 강제로라도 막았을 테지만.
놀랍게도 율리스는 제 위치에 비해 굉장히 사람이 좋은 축에 속했다.
그렇기에 내가 그를 몇 차례고 구해내고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일 테고 말이다.
‘그래. 차라리 율리스 저 양반 옆에 있는 게 더 나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것과 불안함은 별개의 문제였다.
“율리스 님.”
“예. 데이비 님.”
“알겠습니다. 서로 원하는데 해준 것도 없는 못난 오라비가 뭐라 하는 것도 웃기겠네요.”
정말로 동생을 사랑한다면. 가족을 사랑한다면 마냥 싸고도는 게 아니라 정말 해야 할 땐 축복하며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리라.
“윈리…… 잘 부탁합니다.”
“네.”
“윈리 넌 나중에 나 좀 보자.”
내 말에 윈리는 지레짐작한 듯 움찔거리며 꼼지락거렸다.
“별수 없네. 조금 급하지만 윈리 녀석 문제도 해결해줘야겠구먼.”
“어쩌시려고…….”
“당신은 평생 그 얼굴 그대로 살아갈 거 아닙니까, 그러니 제 동생, 피부미용이나 해주려고 합니다.”
환골탈태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준하는 무언가 대책을 세워줘야 했다.
그러자 그곳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예?”
굳이 지금에 와서?
그런 의문이 들어 질문을 던지자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율리스 님. 환골탈태한 인간이 평생을 거의 늙지 않는 건 아시겠지요.”
기본적으로 심득에 이르지 못한 마스터 급 존재들. 즉 기본적인 환골탈태를 이뤄낸 이들은 평생을 거의 늙지 않는다.
율리스도 6서클을 넘어섰으니 아마 그 사실은 변함없으리라.
그렇다면 어째서 대현자 헬리슨이나 데오르트 황제 같은 경우는 노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가.
그것은 그들의 나이가 문제였다.
환골탈태하고서도 감당이 안될 정도로 나이가 많은 경우.
이 경우에 헬리슨 대현자가 있다.
둘째. 환골탈태 이후 과도하게 무리를 하면 서서히 늙어간다.
데오르트 황제가 이 경우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환골탈태하였음에도 스스로 늙기를 바라는 자.
낮은 확률로 의지에 반영되어 변하는 경우가 있다.
심득을 얻은 뒤로는 인간의 수명은 물론 육신이 거의 고정에 가까운 형태로 변해버리지만. 보통 인간의 경우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게 늙지 않는 건 축복이죠.”
하지만 축복의 이면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율리스가 평생 젊은데, 그걸 늙어가야 하는 윈리가 바라본다면?
처음엔 행복할 것이다. 외형이 무슨 상관일까. 서로가 사랑하는데.
그런데 배우자는 그대로인데 자신만 늙어가면 그 멘탈은 어찌 감당될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미 수차례 그런 상황에 처한 이들을 봐왔으니까,
가장 큰 차이는 수명의 차이도 존재했다.
마스터 급 유저가 더 오래 사는 건 당연한 이치.
윈리가 일찍 죽어버리면 홀로 남게 될 이도 문제가 될 수밖에.
“넌 그걸 감당할 자신이 있나?”
늙는 쪽과 늙지 않는 쪽. 시간이 갈수록 괴로워지는 건 다름 아닌 늙는 쪽이다. 늙지 않는 쪽이 괜찮다고 다독여본들. 그게 닿을 수는 없는 법.
그게 이해가 되고 닿아버린다면 인간이 젊음을 추구하는 하는 욕망을 이겨내는 것과 다를 게 없다.
내 말에 복잡한 생각이 들었는지 윈리가 침묵했다.
“하지만 윈리는 이제 4서클 초입입니다. 이 이상 올라가기 위해선…….”
율리스가 떨떠름한 질문을 던져왔다.
내가 나서면 방법이 없진 않을 테지만, 그 과정에서 윈리가 얼마나 고생을 할지 걱정하는 모양새였다.
아주 깨가 쏟아지는구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합니다. 율리스 님은 딱 하나만 내게 약속하세요.”
내 말에 그가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난 인간이 자유를 얻는 대신 대가로 바친 게 책임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겠지요.”
“윈리의 눈에서 눈물 나게 하지 마세요.”
녀석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면.
그땐 당신의 눈에서 피눈물을 흐르게 해줄 테니.
내 말에 그는 핼쑥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럴 일도 없을 것이고, 설사 목숨이 아까워서라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거면 됩니다. 책임을 지면 돼요.”
사람이 일을 쳤으면 책임을 져야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리는 내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날아오른다.
“호오…… 데이비. 그 말을 책임질 수 있는 게야?”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그렇다면 린디스 제국의 그 황녀님은 어찌하게?”
“에이리아 황녀? 그녀가 왜 나와.”
잘나가다 왜 산으로 가냐는 시선으로 그녀를 보자 그녀는 키득거리며 대답을 회피했다.
“글쎄? 적어도 그건 그대가 알아봐야겠지.”
괜히 불안하게.
그녀와의 관계는 딱 잘라내지 못한 내가 미련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에 와서 다시 잘라낼 수 있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있어서 가장 혼란스러운 존재였으니까.
다만 적어도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적어도 내가 하룻밤의 불장난이라도 처서 애라도 생기지 않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다.”
“프리아 여신은 참 용의주도한 게지.”
그렇게 말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알았어야 했는데.
우선적으로 윈리는 4서클 초입의 마법사로 마스터 급인 6서클 마법사를 단시간에 육성해내기엔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건 아니었다.
주와 객을 확실히 잡아야 한다고 윈리에게 중요한 건 환골탈태라는 과정이 아니라, 젊음이라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니까.
그렇다면 굳이 마스터 급에 이르러 젊음을 유지할 필요는 없었다.
방식이야 여럿 존재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 하나로써.
나는 윈리에게 새로운 방식의 진화를 시도해볼 필요가 있었다.
트리거가 되는 반신으로써의 격은 존재하니.
그다음으로 준비해야 할 건 변화의 당사자인 윈리의 준비였다.
육체든 정신적이든 어느 정도 성장할 매개체가 필요한데.
티오니스는 현재 지나치게 평화롭다.
그렇다면?
해결방법 딱 하나 있네.
어딜 가도 적들이 넘쳐나는 세상.
그런 주제에 제법 안전한 장소.
딱 한곳을 알고 있지 않던가.
팅!!
나는 차원 열쇠를 꺼내 들고 윈리를 불러들였다.
“오라버니?”
당황한 듯 나를 향해 다가오는 윈리의 의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널 바꾸기 위해선 어느 정도 준비가 필요해.”
1레벨짜리 캐릭터가 경험치를 쌓아 만렙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준비요?”
“그래. 그러니까 오라비만 믿어라.”
“저…… 오라버니. 전 괜찮은걸요. 정말.”
“정말? 괜찮을 자신 있어?”
내 물음에 그녀가 움찔했다.
“오라비의 과민반응이면 좋겠다만. 적어도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시간이 흘러 점점 늙어가는 네 모습을 보는걸 넌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수 있나?
서로 늙어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를 텐데?
내 말에 윈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율리스가 괜찮아도, 윈리가 괜찮을 리 만무하다.
“…… 어떻게 하면 돼요?”
그녀의 말에 나는 손뼉을 짝! 하고 쳤다.
“네 육신이 어느 정도 변화를 겪을 매개가 필요해. 마치 게임 캐릭터가 레벨업을 하고 새로이 전직하듯 말이다.
“그럼?”
“사냥하자.”
경험치 깔리고 깔린 곳이 있다.
내 미소에 윈리는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 듯 보였다.
“가서 보스 몹들 좀 솔플 하다 보면 몸이 조금씩 진화조건을 맞추겠지.”
최소치만 맞추면, 그 뒤엔 내 혼의 격으로 강제 변화를 시키면 될 일이다.
“오라버니 믿지?”
“네…… 네?”
“걱정 마 윈리. 죽진 않을 거야.”
네가 그 선택을 내렸다면, 오라비는 조금 엄하게라도 네가 불행해질 요소를 차단해야겠다.
차원 열쇠를 가동한다.
내가 원하는 목적지는 티오니스가 아닌. 타 차원. 바로 알프 온라인이다.
* * *
데오르트 황제는 골머리를 싸맨 채 눈앞의 한 노령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 확인해보았는가.”
“확실하진 않사오나…… 회임이 맞습니다. 폐하.”
“…….”
“폐……폐하!”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데오르트 황제를 보며 알버스가 기겁하며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그토록 든든한 아버지가 이때만큼은 너무도 힘이 없어 보였다.
“아아…… 알버스…… 프리아 여신도 참 무심하구나.”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대체 누구냐!!! 감히 누가 우리 에이리아의 몸에 아이를 배게 만든 것이야!!!”
격노한 그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단순히 혼삿길이 막혀서가 아니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 기가 막혔기 때문이었다.
“고…… 고정하시옵소서. 폐하. 설마 황녀 저하께서 아무 외간남자를 들이셨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한 걸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어의의 말에 데오르트 황제가 움찔거렸다.
“뭐? 그렇다면…….”
“해서 이 늙은이가 손을 좀 써봤습니다. 데이비 왕자의 머리카락 샘플을 이용해 표본을 마법으로 추출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계속해라.”
“그리고, 황녀저하의 뱃속에 자리를 잡은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도 알아냈습니다.”
“말하라. 짐이 생각하는 그놈이더냐!”
“그게…… 맞습니다.”
침묵이 감돌았다.
“준비해라. 알버스. 라운 왕국으로 간다.”
대륙의 황제가.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짐이 죽더라도 책임을 지게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