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5화
194. 지구에 생긴 변화
하인스 영지로 떠날 준비를 하는 데오르트 황제와 알버스 황태자의 표정에 비장감이 감돈다.
“데이비 왕자는 상당한 공처가로 유명합니다. 솔직히 아직도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애초에 그가 에이리아를 건드릴 틈이 있었는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에이리아가 주기적으로 하인스 영지를 찾아가 그에게 자잘한 선물을 건네주고 오고는 있지만, 그녀를 지키기 위해 파견된 기사들의 말에 따르면 큰 접촉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이리아가 알면 또 난리가 나겠지요.”
아마 절대 안 된다며 막아설 것이다.
그렇기에, 에이리아가 모를 때 가서 일을 성사시켜야 했다.
“우린 에이리아의 행복을 위해서다. 알버스.”
“예, 폐하.”
비록 이상한 일이라 할지라도. 만약 에이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정말로 데이비의 핏줄이라면, 그걸 이용해서라도 두 사람의 관계를 진전시켜주고 싶은 알버스와 데오르트 황제였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에이리아의 뱃속에 든 아이가 단순한 일로 생겨난 게 아니며, 그들의 행동을 이미 에이리아가 알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따악!!!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에이리아가 어전에 나타났다.
조심스럽고 수줍던 소동물 같은 왕녀가 아닌. 드레스 자락의 아래로 꼬리가 9개 돋아난 나인테일의 모습이었다.
우웅…….
분홍빛 기류와 함께 알바스 황태자와 데오르트 황제가 굳어버렸다.
마스터 급 유저로 유명한 황제였지만 나인테일 종족의 정신 지배는 특질능력에 가까운 사기적인 힘이었다.
“…….”
멍하니 굳어버린 두 사람을 보며 꼬리를 까딱거리던 그녀가 말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조심했어야지. 에이리아.”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를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데오르트를 올려다보았다.
“죄송해요, 아바마마. 하지만 이 일은 그 사람이 알면 안 되니까요.”
아홉의 꼬리를 까딱거리며 그녀가 조용히 중얼거렸고. 이내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누그러졌다.
그렇게 말한 그녀는 자신의 눈앞에 떠오른 반투명한 창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당신의 흔적을 이렇게 품을 수 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할 거에요.”
비록 아이가 아빠를 모를지라도.
주변에서 외간남자를 들여 임신까지 한 정조 없는 황녀라 손가락질할지라도.
에이리아는 그때 데이비가 본인도 모르게 내어준 마음의 연심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를 절대 잃고 싶지 않았다.
* * *
내가 향하는 건 지구가 아닌 알프 온라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와 티오니스 사이에 존재하는 완충재.
두 차원의 결합에 있어 생길 거대한 진통을 억제하는 쿠션이나 다름없는 장소였다.
애초에 알프 온라인에 대해 내가 아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각국의 수많은 유저들이 즐기는 게임이며, 과금요소가 거의 없다시피 한. 도대체 어떻게 회사가 굴러가는지조차 의문스러운 게임.
사실 내가 제작 랭킹 1위 유저를 둘이나 찍어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알프 온라인의 근본이 현실에 기반을 둔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량으로 밀어붙인 것일 뿐 그 게임 내부에 대해선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디서 정보를 얻어야 하는가.
애초에 알프 온라인에 한해서 최고의 정보꾼이 둘이나 있는데 걱정할 게 무엇이 있을까.
“여기부터 폭염의 갈그락스 영역이에요.”
지도를 펼쳐 들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확인한 수소감귤맛스타, 즉 윤지환이 나와 윈리를 안내했다.
“신기한 곳이네요. 숲인데 공기가 뜨거워요.”
윈리의 중얼거림에 수소는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얼마 전에 유저들이 12 흉신 폭염의 갈그락스를 토벌했거든요. 불의 핵을 잘못 먹고 불의 정령이 된 탓에 엄청 약해진 놈을 잡은 게 전부긴 하지만.”
“유저?”
“이방인을 말하는 거야.”
내 말에 그제야 이해한 듯 윈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티오니스에서도 현재 이방인이라는 특이한 존재들에 대해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그럼 오라버니, 이방인은 대륙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사실인 건가요?”
“일단은 그렇지.”
내 말에 윈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신기하네요.”
“솔직히 저 형과 함께 다니면 이런 일은 그냥 장난 수준인걸요. 오라버니인데 잘 모르시나 봐요?”
“조용히 해.”
괜한 소리 하지 말라며 일축하자 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네가 말했던 그 문어 다리는 아직 변화가 없나?”
“네. 문어 다리는 여전히 그대로 있어요. 처음에 누나랑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리 신기해도 계속 보다 보면 지겨워질 수밖에.
처음엔 그것을 보고 요란법석을 떨던 남매였다.
다른 이들은 빛의 기둥 정도로 인식하는데 남매의 눈에는 그게 빛의 기둥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런 호들갑과는 별개로 거대한 문어 다리는 모습을 드러낸 채 아직도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물론, 괜히 불안요소가 생길 수도 있기에 주기적으로 변화를 이야기하러 수소 녀석이 하인스 영지에 들리고는 있지만 불안함이 쉽게 가시지는 않는 듯 보였다.
“다 왔…… 어라? 저것들은 뭐야.”
지도를 접어 넣으며 수소 녀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사냥터의 입구, 즉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영역의 입구를 틀어막고 있는 몇몇 인간들 때문이었다.
유저 하나에 NPC가 다수.
하지만 장비 사정이 굉장히 좋아 보이는 것이 고렙의 느낌이 물씬 풍긴다.
“거기, 멈추시오.”
이윽고 미묘한 분위기에 아니겠지 하며 수소가 그들을 지나치려 하자 고급 창을 든 병사들이 수소의 앞을 막아섰다.
“뭡니까.”
“이곳부터는 통제구역이오. 자세한 내용은 모험가 길드나 천랑 길드에 의뢰하시오.”
“천랑?”
“그렇소.”
유저로 보이는 이는 누구와 대화하느라 정신이 없는지 낄낄거리고 있었고 일을 하는 건 NPC들이었다.
“아니, 미친 사냥터에 니꺼 내꺼가 어딨어, 천랑 길드가 여기 필드 전세 냈습니까?”
수소가 짜증스레 묻자 병사는 창을 굳건히 틀어막은 채 대답했다.
“자세한 건 천랑 길드나 모험가 길드에 문의하시오.”
“난 들어가야겠는데요.”
“들어갈 수 없소. 무리하게 들어가려 한다면 쓴맛을 보는 수밖에.”
그의 말에 수소가 인상을 찌푸렸다.
“천랑…… 천랑…… 뭐야 이 새끼들. 무슨 사냥터를 통제하고 난리야.”
게임이 방대한 자유도를 가지고 있으니 별의별 인간 군상이 다 나타난다지만 사냥터 통제라니 우스울 따름이었다.
“참고로 천랑 길드는 일대를 장악하신 성주 길드요. 천랑 길드에 거스르고 무사히 탐험을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소.”
“그래서. 알아서 기어라?”
“그렇소이다.”
그 말에 수소가 검을 빼 들었다.
“웃기고 자빠졌네!”
그리고는 대놓고 욕설을 터뜨리며 무기를 그들에게 들이밀었다.
창!! 창!!
순식간에 병사들과 수소가 대치하자 분위기가 과열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보며 실실 웃던 유저도 갑작스런 사태에 고개를 돌리더니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이. 뭔데.”
“당신이 천랑 길드원입니까?”
“그런데?”
“그런데는 반말이고 이 양반아.”
수소가 인상을 찡그리며 말하자 그가 킥킥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쩌라고, 게임하면서 나이 많고 적고가 어딨어.”
“별 미친놈 다 보겠네. 신고하기 전에 NPC 물리지?”
“미친놈이라니, 그건 내 쪽에서 할 말이고.”
스르릉…….
느긋하게 검을 뽑으며 다가온 그가 수소를 노려보며 물었다.
“여기 필드는 우리 천랑 길드에서 통제 중이라고. 말귀 못 알아들어?”
“아니 미친 공용 필드에 니꺼 내꺼가 어딨어!”
“여기 있어 새끼야. 꼬우면 강해져서 성 먹으시던가.”
“개 같은 비매너 새끼들!”
“애초에 이런 것도 콘텐츠야. 그걸 왜 너한테 그딴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는데.”
“이거 영지에 신고하면 참 볼만하겠다 그치?”
“볼만하지. 영주가 우리 길드 마스터인데 잘도 처벌하겠다. 그치? 불만이면 딴 영지 가던가. 이 영지는 우리가 먹었고, 우리 마음대로 하겠다는데 왜 난리인지 모르겠네.”
“뭐?”
“솔직히 돈도 없는 멍청한 놈들이 영지 관리하는데 돈 얼마나 깨지는지도 모르는 주제에. 우민 새끼들이.”
“어이구!! 대~~단한 정치인 납셨네!!”
“아. 됐고, 그냥 꺼져. 여기 우리 길드 전용 사냥터로 통제 중이니까. 입씨름하기도 귀찮다. 여기 NPC들 전부 상위 엔피씨랑 더럽게 세거든? 아이템 떨구기 싫으면 가라 그냥.”
그가 손을 휘휘 저으며 꺼지라는 시늉을 했다.
그제야 기억이 난 것일까.
수소는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났다. 너희 새끼들. 10원 하는 포션을 200원에 쳐 파는 새끼들이 있다더니 그게 니들이었구나?“
“영지도 천랑 길드 소유인 마당에 사냥터라고 안 될 법 있나? 아 물론 삼십 분에 50골드씩 내면 생각은 해볼게.”
큰 돈이든 적은 돈이든 이런 상황에 돈을 지불한다는 게 수소같은 자존심 강한 소년의 입장에선 복장이 터지는 결정일 것이다.
서로 대화가 통하질 않는다.
수소는 순식간에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고 동시에 유저와 NPC 또한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분위기에 윈리가 놀라 스태프를 쥐자 나는 조용히 녀석을 끌어당겼다.
“재밌어 보이네. 예전에도 비슷한 걸 본 적이 있는데. 한번 구경이나 해보자.”
내 말에 윈리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저 침묵했다.
콰앙!!
이윽고 자존심 하면 상당한 자존심의 소유자인 수소와 천랑 길드원이 충돌했다.
물론, 그 훅풍이라는 길드가 몰락한 뒤로 천랑이 날고 기는 길드 중 하나가 되었다 해도 눈앞의 사내는 일개 길드원일 뿐이다.
사실 메인 전투력은 NPC에게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수소는 조금 일반적인 유저와 달랐다.
녀석의 손에 쥐어진 무기가 바로 그 반증이었다.
코로나 티스트로이어!!
바로 흉신의 재료를 통해 만들어낸 3타 파괴의 절정 오함마!
그것이 바로 녀석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몬스터 몰아오라고 빌려준 무기를 벌써 써먹으니 퍽 상황이 우습기 그지없었다.
순식간에 전황이 수소에게 유리하게 돌아간다.
당연한 결과였다.
방패를 들어 수소의 공격을 막아도 3번 이상 공격을 당하면 그대로 무장해제를 당하는 꼴과 다름없으니 말이다.
결국, 수소 녀석이 마지막 NPC를 쓰러뜨리고, 유저를 제압하는 그 순간.
천랑 길드원이 급히 인벤토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하늘로 던졌다.
삐익!!!
마치 신호탄 같은 것이 터져나간다.
“넌 x, 이제 망한 거야. 여기서 사냥 다 한 줄 알아라.”
그렇게 말한 유저가 인상을 찌푸렸다.
“영지에서 눈에 띄는 순간 무한 PK 해줄 테니까.”
잡템 하나부터 필수 품목의 물건까지.
그의 협박에 가까운 말은 보통 유저라면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게 만드는 수준이었지만 애석하게도 수소 녀석은 협박에 움찔할 녀석이 아니었다.
“그래. 어디 한번 계속해봐. 누가 더 난리 나는지 한번 해보자고.”
그러면서 내 눈치를 흘끗 살핀다.
내가 나서주길 바라는 모양이다만. 사실 나는 나설 생각이 없었다.
“으…… 오라버니.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윈리가 불안한 듯 제 스태프를 만지작거렸다.
그녀에게 있어서 지금 상황은 말 그대로 처음 겪어보는 사태일 테니까.
불안해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내가 빙그레 웃는다.
“오라버니 믿지?”
“믿기는 믿지만…….”
“걱정 마. 넌 최선을 다하면 돼.”
윈리가 내 결정에 반박하지 않는 건 내 조건이 그것이기도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내가 했던 말이 어느 정도 크게 와닿은 점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그런데 마나가 부족하면…….”
“걱정 마라. 네 정도 마나면 얼마든지 채울 수단이 있으니.”
나는 륀느의 연구실에서 가져온 마나융합식 마석을 꺼내 지면에 커다란 마법진을 그렸다.
그리고는 그것을 허공에 놓듯 내려놓았고 무형의 힘이 그것을 뒷받침하면 천천히 세우기 시작했다.
“저…… 일단 몹을 좀 몰아올게요. 얼마나 데려와요?”
“일단 한 마리.”
“그 정도는 껌이죠.”
수소가 떠난 직후 나는 화염 마법 캐스팅을 준비하는 윈리를 바라보다 생각에 잠겼다.
초월적인 힘을 거부하는 지구에 초월적인 존재가 눈을 떴으니. 과연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적어도 지금은 지구에 간섭할 방법이 전혀 없는 만큼 현아나 연희 누나가 안전하길 기원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쿵!! 쿵!!
이윽고 몬스터 한 마리를 몰고 오는지 숲 저편에서 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윈리. 마법 준비해.”
“작열하고, 이글거려라. 나의 의지에 따라 일어날지어다.”
윈리의 영창이 빠르고 깔끔하게 이어진다.
순식간에 마법 하나를 캐스팅하고 긴장한 채 바라보고 있기를 잠시, 윈리는 곧이어 수풀을 박살 내며 튀어나오는 시뻘건 바위로 이루어진 거대한 석골렘을 보며 그대로 스태프를 뻗었다.
“나의 의지를 따라라! 플레어!!”
그녀의 영창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팡이 끝에서 화염의 고리들이 일순간 일고여덟 개 이상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이어 마치 거대한 스코프처럼 늘어진 원고리들이 축소되기 시작했고 이내 수소가 몰고 오고 있는 거대한 바위 골렘을 향해 화염의 포탄을 발사한다.
투쾅!!!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날아든 화염탄은 석골렘을 향해 그대로 날아들었다.
몬스터의 속성은 지(地)속성, 그리고 화(火)속성.
솔직한 말로 화염 마법이 주특기인 윈리에게 정말 최악의 상성을 지닌 몬스터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는 윈리를 이곳으로 데려왔다.
“게임이 너무 쉬우면 재미가 없지.”
반사적으로 스산한 미소가 걸린다.
“데이비…… 성질나오기 시작했군…….”
내 어깨에 앉은 페르세르크의 중얼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적당히 조절한다는 마음속 트리거가 나도 모르게 풀려버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