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8화
쿠당탕!!!
차원열쇠를 강제로 열어 졎혔다.
그만큼 본인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텐데.
애초에 그런 편법이 불가능한 걸 알지만 그것을 해냈다는 건 데이비가 준비해 온 히든카드가 하나 드러난 꼴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페르세르크는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크으……흐으……흐으…….”
괴로운 숨을 내뱉으며 그녀가 비틀거린다.
챙그랑!!!
“꺄악! 마님!!”
깜짝 놀란 영지 대리관리인 에이미의 외침이 들려왔다.
에이미는 경악한 얼굴로 뛰어와 페르세르크를 부축했다.
“마…… 마님! 괜찮으세요?!”
“보…… 본녀는 괜찮아. 그보다 데이비를!”
창백해진 얼굴로 그녀가 중얼거렸다.
데이비를 어찌할 것인가.
차원열쇠가 없다면 차원을 넘을 수 있는 존재는 티오니스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은 페르세르크의 귀에 있는 흉신의 소재로 만든 물건.
치르바트 이어링의 효과를 이용해 케인과 함께 넘어가는 것이 고작.
문제는 그렇게 해도 알프온라인으로, 또 데이비의 곁으로 간다는 보장이 없었다.
데이비가 자신의 치명상을 대가로 바쳐가면서 까지 그녀를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도 위험하니까.
그는 정말로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녀만을 내보낸 것이다.
“아…… 안 돼……에이미!”
화들짝 놀라듯 몸을 일으킨 그녀가 급히 소리쳤다.
“윈리…… 윈리는?”
“윈리 왕녀저하께서는 좀 전에 수소님이 데리고 오셔서 방으로 뫼셨어요. 대체 무슨 일인지…….”
“그럼 아카데미로…… 아카데미로 가야 해.”
그렇게 말한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이변을 빠르게 눈치챌 수 있는 이의 도움이 필요했다.
“응? 페르 언니?”
하인스 아카데미의 고등부.
일리나는 애초에 이곳에서 수업을 받기보다는 안전을 위해 몸을 의탁하고 있는 꼴이었다.
본인은 원치 않는 결과였지만, 그건 데이비에게 일말의 연심과 혼란을 품고 있기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인 것이라는 것을 페르세르크는 잘 알고 있었다.
죄 많은 남편이 여복이 많은 것을 누구 탓을 할까.
물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어머니! 이것 좀 드셔 보셔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해 공간을 수차례 뛰어넘은 그녀는 익숙하게 일리나의 숙소로 치고 들어갔다.
평소라면 노크나 연통 등등 준비를 해 두었을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천진난만하게 일리나에게 과일을 내미는 케인과 의아한 듯 페르세르크를 바라보는 일리나의 시선에 페르세르크는 창백해진 얼굴로 케인을 똑바로 직시했다.
“케인…… 이클립스에 대해 아는 바가 있으면 전부 말해 주었으면 하네.”
다급한 그녀의 말에 천진난만하게 있던 케인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이…… 클립스요? 대체 무슨.”
“이클립스라는 심연의 공주가 나타났어! 데이비가 본녀만 이곳으로 보내고 홀로 그곳에 남았다고 말하는 게야!”
분통을 터뜨리는 페르세르크의 외침에 케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무…… 무슨 말이에요 언니? 그리고 케인? 너…….”
“……죄송합니다.”
짧게 침묵한 그녀가 손뼉을 친다.
그러자 마치 공간이 단절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과 함께 일리나의 신형이 그대로 무너져 내려버렸다.
“평화를 깨뜨릴 순 없습니다.”
짧게 중얼거린 그가 페르세르크에게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물었다.
“이클립스라 하였습니까?!”
“그래. 본녀는 그렇게 들었어.”
“…….”
잠시 침묵한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이클립스는 절대 지금 깨어날 수가 없는데…….”
“알기 쉽게…… 부탁이야, 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아…….”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그녀가 다급하게 다그쳤다.
평소 느긋하고, 무슨 일이 터져도 최소한의 여유는 잃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저렇게 말한다는 건 한 치의 거짓이 없다는 뜻.
케인은 계시와 함께 내려온 신의 기억 속에서 떠올린 하나의 공포스러운 이름을 짓씹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클립스…… 프리아 여신의 피조물인 고대룡의 로드입니다.”
“여신의 피조물이 왜 데이비를!”
“그럴 수밖에요!!”
격하게 외친 그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던 그 순간이었다.
치지지지직!!!
“그래. 그럴 수밖에 없지. 고대룡은 멸종했어. 단 한 명을 제외하고.”
공간이 찢어지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에 케인과 일리나가 고개를 돌렸을 때.
그곳에는 허공을 찢고 나타난 두 명의 여성이 보였다.
커다란 책을 끌어안고 있는 흑발의 여성과 무복을 입은 푸른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심연의 공주, 베르단데와 이실디였다.
“베르단데…… 이실디…….”
“이클립스…… 그 말이 맞아? 아니…… 애초에 당연히 이만한 충격파가 터졌는데 아니라고 하는 것도 웃기겠네…….”
베르단데의 중얼거림에 이실디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엔 그놈도 죽겠네.”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에 페르세르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모든 게 자신 때문이다.
자신이 이곳에 있기 때문에…….
심연과 데이비가 계속해서 부딪치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페르세르크의 표정 때문이었을까.
베르단데는 천천히 다가오며 말했다.
“간단히 말해 주지. 심연의 공주가 아닌 심연에 가장 위협적이 적 중 하나이며 감시자인 고대룡의 로드였지만 이제는 심연에 잠식되어 버린 존재. 심연의 공주가 아니면서도 심연의 공주.”
“…….”
케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당신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우리의 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몸을 지닌 존재.”
이클립스.
심연을 통틀어 가장 위험하고, 가장 압도적인 괴물 중에 괴물.
단신으로 심연 전체를 몰아넣고 감시하던 것이 바로 고대룡 이클립스였다.
“하지만 이클립스는 절대 심연의 끝에서 나올 수 없을 텐데?”
“좀 전에 거대한 신의 위광이 충돌했어. 아마…….”
말끝을 흐린 베르단데가 짜증스레 혀를 찼다.
“데이비와 네가 지구에서 깨웠다던 그 고대의 신. 넬타리드의 일면이 관여했겠지.
넬타리드는 이면과 조화의 신이다.
그리고.
신이 없는 심연과. 파괴를 상징하는 신의 반쪽이 접촉했다.
“뭐가 되었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지금이라도 그를 찾아 데려와야 해.”
“무슨 수로? 난 뒤지기 싫어.”
이실디가 확고하게 말했다.
“분명히 말하는데. 아무리 쓸데없는 싸움을 안 하는 주의라고 해도 이클립스는 완전히 별개야. 그년이 날뛰기 시작하면 심연의 공주들이라고 다를 거 같아? 하나같이 벌레 밟히듯이 밟혀 죽는다고. 강림한 신이 있다면 바로 그년을 말하는 것일걸?”
신은 압도적으로 위대한 존재이기에 함부로 간섭하지 못한다.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힘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간섭하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프리아 여신이 데이비에게 이것저것 내려준 건 그녀에게 가해지는 제지력을 떠나 그녀의 위계가 너무도 높았기 때문이었다.
위계가 떨어지며 간섭력이 떨어지다 보니, 오히려 지금은 그 관여가 쉬워졌지만 본래 신이란 창조된 세계에 간섭하는 게 불가하다.
그런데.
신이 아닌 주제에 신에 필적하는 힘을 지닌 존재가 있다면?
그건 말 그대로 재앙에 가까웠다.
말 그대로 상시 24시간 유지되는 강신상태의 무언가라는 뜻일 테니까.
“지금 그는 어디 있습니까.”
“알프. 알프온라인. 윈리의 환골탈태를 시켜주기 위해 갔다가 만나고 만 게야.”
“그녀가 심연을 떠난 것도 모자라서 가상의 현실이라…… 역시 넬타리드님의 반쪽이 그녀를 불러낸 게 분명해 보입니다.”
굳은 얼굴로 케인이 베르단데와 이실디를 본다.
“두 분은 어찌하실 겁니까.”
“어쩌긴. 내가 뭘 해주길 바라는 거야? 나도 심연의 공주야. 그 사실을 잊지 마.”
“베르단데님.”
“…….”
이실디와 다르게 베르단데는 침묵했다.
그리고는 입을 열었다.
“안 돼. 이런 방식은 옳지 않아.”
그렇게 말한 그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이곳에서 지원할게. 네가 가서 도와줘. 예상이 맞다면 이클립스는 한 번 이동한 이상 거기서 다른 차원으로 쉽게 넘어가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거기서 데이비만 빼내면 당분간은 무사할 수 있다?”
“그래. 지구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 차원까지 내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잖아?”
그녀의 말에 이실디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빚 정도는 갚아주지.”
스릉…….
은빛의 검을 뽑아 들며 그녀가 긴장한 얼굴을 했다.
“슬리지아와 싸울 때도 이렇게 떨린 적이 없는데…….”
슬리지아는 최상위 격을 지닌 심연의 공주였지만.
이클립스는 그런 슬리지아와도 비교할 수 없는 단일.
절대적인 심연 그 자체나 다름없다.
그녀가 무너진다면 심연은 그대로 끝난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말이다.
“젠장…… 절대 보옥을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케인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이클립스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괴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 * *
카가가가가각!! 터어엉!!!
빛을 반절 잃어버린 초단이는 겉보기에도 상태가 위험해 보였다.
“쿨럭!”
그리고 작디작은 몸으로 미사일 드롭킥을 갈기고 들어오는 그녀의 공격에 노출되어 버린 나는, 현재 겉치레 없이 정확히 표현해서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쓰러진 나는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을 느꼈다.
혼과 육신을 완전히 동기화 시키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살아남은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그녀는 항거할 수 없는 재앙에 가까웠고. 지금도 그 재앙은 유지되고 있었다.
“후우…… 후우…… 네 곁에 있는 신성…… 넬타리드의 신성인데.”
내 중얼거림에 사박사박 다가온 소녀가 내 앞에 쪼그려 앉아 손바닥으로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본다.
“우와. 오빠 엄청 대단해요! 어떻게 알았어요?”
천진난만하게 묻는 그녀는 좀 전까지 나와 무력으로 충돌한 것 같지 않았다.
아니. 그녀는 애초에 내가 싸운 것이 그녀에게 무력적으로 위협이 된다 여기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강자의 분위기는 분하지만 현실이었다.
회랑의 스승들에 필적하는 힘.
단 한 명만 내려와도 심연은 끝이라고 주장하던 나는 그 주장을 조금 수정해야 했다.
이클립스.
즉 눈앞에 있는 이 괴물 같은 꼬맹이가 존재한다면 한 명으론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심연에 이만한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좀 더 철저하게 준비했어야 했다.
슬리지아 정도의 심연의 공주라면 대처법을 준비해 두었다.
그보다 좀 더 강할지라도.
그 외에 더 큰 위협의 파도가 몰려와도 대처할 방안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신의 반쪽과 손을 잡은 심연의 최심부, 근원에 도달한 그녀는 그런 내 계획을 웃으면서 박살내 버릴 정도로 불합리하게 강했다.
그녀를 이길 방법을 떠올려야 한다.
지금으론 불가능하다.
혼과 육신을 동기화 시킨다면?
그래도 불가능하다.
차라리 영혼의 격을 올린 게 외려 다행이라 여겨질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어떤 의문도 들었다.
대체 그녀 정도의 힘을 지닌 존재가 어떻게 이렇게 대놓고 힘을 발현해댈 수 있는 것일까.
그런 게 상식적으로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들어 그녀에게 물었다.
적어도 그녀가 호의를 품고 있을 때 말이다.
“오빠. 이클립스랑 계속 놀아요.”
“조금 더 평화적인 놀이면 좋겠는데.”
“우웅…… 소꿉놀이는 어때요오?”
아이가 떼를 쓰듯 물어온다.
“바가지 긁히다가 영혼까지 긁히겠네.”
“오빠는 이클립스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요? 이클립스는 익숙한 냄새가 나는 오빠가 정말 좋은걸요.”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 빌어먹을 꼬맹이에게 한 방 먹이고 큰 타격을 주기 위해선 이쪽도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고 준비해야 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런 사태라 그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미 코로나 디스트로이어는 내구 소모 무시라는 효력이 무색하게 반쯤 풍화되어 박살나 버렸고 롱기누스도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초단이는 반을 절반 까지 잃었고, 나머지 무기도 마찬가지.
말 그대로 어린애 싸움에 어른이 낀 격이었다.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이쪽도 어른을 부르는 수밖에.
그 대가로 내가 아작나는 한이 있어도.
그녀는 내가 생각한 게 맞다면 심연의 최종적인 적과도 같다.
[성자 칭호의 효력 쿨 다운 타임이 5분 남았습니다.]
“그래? 그럼 하나 물어보자. 넌 대체 뭔데 격이 넘어간 힘을 아무렇지도 않게 휘두르는 거냐.”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계를 넘어서는 힘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 회랑이건 다른 방식이건 비현실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내 논리에 그녀는 이해를 못하겠다는 듯 너무도 앙증맞은 눈동자를 꿈뻑꿈뻑거렸다.
그리고는 이내 무언가 눈치챈 듯 손뼉을 치며 헤실 거렸다.
“아하! 이클립스 알 거 같아요!”
그렇게 말한 그녀는 곧 제 옷의 앞섬에 손을 쑤욱 밀어 넣더니 가죽으로 만들어진 주머니가 달린 목걸이를 꺼내 보였다.
“헤헤…… 넬타 친구가 이걸 줬어요! 이게 있으면 이클립스는 힘들지 않아요!”
그녀가 꺼낸 것은 벽옥색을 띠는 너무도 아름다운 보석이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혼을 빼앗길 것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보석.
본능적으로 탐욕을 일으키는 귀물.
내가 찾아 헤매던 물건이며. 당장 위치를 특정하지 못해 어찌하지 못하고 있던 물건이기도 하다.
그리고.
심연과의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이었다.
“오, 빌어먹을.”
완전한 절대보옥이었다.
내가 경악하던 그 시각.
지구에서도 두 신의 힘이 충돌하며 생긴 여파로 초월적인 힘을 금제하던 벽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의 눈에 빛으로만 보이던 거대한 연녹빛의 문어다리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구 내부에 잠들어있던, 지구와 하나인 거대한 존재가 완전히 눈을 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