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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692화 (691/1,559)

제 692화

두 개의 달이 비치는 고요한 방.

데오르트 황제와 함께 나는 죽은 듯 잠들어있는 에이리아를 바라보았다.

“손바닥 하나론 박수 소리를 낼 수 없다라…….”

“뭐라 하였는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는 내게 이 사실을 끝까지 숨기려 했다.

그토록 따르던 황제와 황태자의 기억에 최면을 덮어씌우면서까지.

어떤 의미로 이런 행동은 반역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아무리 황족이라도 황제에게 최면을 걸어 행동을 유도하다니, 극형을 면치 못할 정도의 중죄이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면서까지 아이에 대한 소식을 절대 숨기려 하지 않았다.

에이리아가 내게 마음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렇게 숨기려고 했던 진실은 다른 무엇도 아닌, 그녀에게 아이를 가질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준 프리아 여신에 의해 드러났다.

유산이라는 끔찍한 형벌로.

그녀가 축복과 은총을 내려 그녀에게 구원을 행하였으나.

나의 행동으로 인해 격노한 그녀가 그 축복을 거둬들였다.

솔직한 말로 이 정도에 그친 게 다행일 정도로 프리아 여신의 분노는 대단했었다.

“마음의 병은 단순히 의학 진료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 잠시…… 생각 좀 하게 해주세요.”

그녀의 일로 사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나였다.

어머니의 일을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고 못을 박으면서도. 결국 내가 그녀를 마음 한편에 품었었다는 진실이 사라지진 않았다.

“우선 경과를 지켜보지요.”

그녀의 육체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정신이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상황은 어때?”

“걱정할 정도는 아니야. 하인스 영지로 돌아가. 아직 심연에서 널 왜 그렇게까지 노렸는지 모르는 상황에 네가 나와 있는 건 위험해.”

“누굴 애 취급하는 거야. 그리고, 내게 거짓말하지 마. 그냥 날 보기 껄끄러운 거 아냐?”

“…… 이래서 눈치 빠른 것들은.”

나를 보자마자 물어오는 건 다름 아닌 일리나였다.

그녀는 페르세르크와 나의 대화를 모두 들은 인물이었던 만큼 그녀가 왜 이런 사태에 처해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굳이 페르세르크가 이 사실을 일리나까지 알게끔 한데엔 이유를 모를 지경이었다.

“머리가 아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복잡하게 사네 너도.”

그렇게 말한 그녀가 나를 지나쳤다.

그리고는 내게 말했다.

“전에 타냐 왕녀와 마리아 공주, 그리고 유리아 헬리샤나 씨와 다과회를 하면서 나온 이야기인데, 넌 말이야.”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씁쓸해 보였다.

“가끔 네 가치관을 너무 강하게 밀고 나가는 경향이 있어.”

그 어떤 틈도 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너 혹시, 누구에게도 부끄럼 없이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그러는 거 아니야? 게다가 과도한 오지랖까지.”

그녀의 비수 같은 말에 나는 눈을 감고 대답하지 않았다.

* * *

페르세르크는 내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이리아가 이런 일을 겪게 만든 건 오히려 내 잘못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틈을 심어주어 버렸고, 프리아 여신은 그런 그 마음을 이용해 에이리아에게 구원이라는 명목하에 기이한 선물을 하사했다.

정작 에이리아는 이 기형적인 구조의 은총조차 너무도 소중하게 받았고 그렇게 그녀가 얻은 희망을 내가 다시 부숴버렸다.

적당히라는 걸 알아야지.

에이리아를 깨우기 위해선 심층 내면에 숨어든 그녀의 의식을 찾아 외면으로 끌어내야 했다.

본래대로라면 그녀의 본능이 눈을 떠야겠지만. 그 본능조차 이번엔 충격이 컸는지 눈을 뜨지 않았다.

그 후 차도 없이 이틀 정도가 더 흘렀다.

그녀를 깨울 방법이 없는가. 더 완벽한 결말이 없는가.

조용히 고민한 나는 말 없이 에이리아의 손을 꼭 잡았다.

동시에 내 몸에서 신력이 서서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의식이 전환된다.

검은 공간으로 들어선 나는 그곳에서 말없이 앉아 포대기에 싸인 무언가를 안고 있는 에이리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사람이 미련하게 왜 그럽니까.”

내가 그녀에게 느낀 감정은 미안함보다 답답함이었다.

대체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병을 치료한 그녀는 이제 그녀를 사랑해줄 정말 멋진 남성을 만날 수 있다.

능력이 있는걸 떠나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해줄 수 있는 사람.

윈리와 율리스 같은 케이스처럼 말이다.

그녀는 제국의 황녀이고 데오르트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보고 있는 만큼 더 폭넓게 그런 멋진 남성을 만날 수 있을 텐데.

“왜 굳이 가시밭길을 가냔 말입니다.”

내 말에 흐느끼던 청록빛 머리칼의 소녀가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의 희망도…….”

“…….”

“저는 품을 수 없는 건가요.”

조용한 질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갑시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차라리 그만하게 해주세요…….”

“에이리아 님.”

“이 이상…… 더 이상 당신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요.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요.”

투정이라 여길 수 있지만 나는 조용히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를 품에 안았다.

“누구 마음대로.”

“예?”

놀란 듯 그녀의 눈동자가 나를 담는다.

“하고 싶었다면서요. 평온한 노을을 보면서 같이 앉아 홍차를 마시고. 같이 늙어가면서 언젠가 이때의 선택이 옳았고 행복했다고. 말하고 싶다면서요.”

정원에 주저앉아 가면을 부술 듯 꽉 쥐고 절규하던 그때.

그녀가 말하지 않았나.

어쩌면, 그때 그녀의 그 절박하고 간절했던 바람에서 나는 이미 그녀를 나도 모르는 새에 품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

누굴 괴롭히는 것에 상당히 매력을 느끼면 곤란한데.

“…… 데이비 님?”

“그래요. 뭐 이제 와서 숨길까. 온전히 당신만을 사랑해줄 순 없어요.”

페르세르크가 있으니까.

“하지만 최선을 다할 겁니다. 불만 있습니까?”

내 말에 그녀의 눈에 투명한 눈물이 어렸다.

“까짓거 뭐라 하는 놈이 있으면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나는 망설임 없이 그녀를 살짝 떼었다가 다시 잡아당겼다.

그리고, 놀란 듯 나를 보는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 * *

당장 목숨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페르세르크는 데이비가 에이리아를 치료하는 동안 황성에서 륀느와 일리나를 대동한 채 느긋하게 차를 마셨다.

“페르 님은 어째서 인간의 감정, 질투하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을 륀느가 요구해.”

“쿡쿡. 질투라…… 본녀는 질투가 상당히 많은 편인데.”

“이해 불가. 더욱 자세한 설명을 요청.”

질투가 많은데 다른 부인을 들이는 걸 허락한다니, 웃기는 소리.

나는 침묵한 채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가장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쩌면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기에 그 정도 자리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줘도 상관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륀느.”

키득거린 그녀가 륀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어떤 때엔 내가 사랑하는 이를 독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

그렇게 말한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게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일일까?”

“륀느, 고성능 인공지능으로도 이해 불가능하다 판단.”

“데이비는 이 세상에 단 하나야. 그가 본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면.”

본녀 또한 그에 맞춰 데이비에게 그에 걸맞은 사랑을 주는 수밖에.

“그깟 부인의 자리 서열이 중요한가. 데이비가 더 중요하지. 그리고, 본녀가 아는 데이비는 일을 치고 책임도 안질만큼 못난 인간이 아닐세.”

페르세르크의 중얼거림에 일리나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언니. 그럼…… 앞으로 데이비가 수명, 수십 명을 들여도 다 괜찮을 자신이 있다는 거예요?”

“누가 그러던가.”

“네?”

좀 전까진 괜찮다며 말하던 그녀치고는 빠른 태세 전환이었다.

이에 륀느와 일리나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자 페르세르크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일리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본녀는 아무 여우나 데이비 곁에 달라붙게 둘 생각은 없는 게지. 실제로 데이비 또한 많은 여인들과 엮인 여난의 상이 있지만 단 두 명을 제외하곤 칼같이 그 선을 그었고, 그러니까…….”

그녀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기회 줄 때. 잡으라는 뜻인 게야.”

* * *

에이리아가 갑자기 일어났다.

내 손을 꼭 잡고 있던 그녀는 일어나기가 무섭게 주변을 빠르게 둘러보았고, 데이비를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품에 안경 엉엉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무슨 상황인지 이해 못 한 데오르트 황제는 당황하여 급히 어의를 부르려 했지만, 데이비가 고개를 저어 그를 제지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엉엉 울면서도 편안해진 그 분위기를 눈치챈 한 아이의 아버지는.

“그렇군. 그렇게 된 것이로군.”

조용히 입을 다물고 몸을 돌렸다.

* * *

라운 왕국, 그리고 린디스 제국.

두 국가의 회담이 시작되었다.

국제 혼약.

페르세르크 때와는 다르게 한 왕국의 최고 실권자나 다름없는 인물과.

한 제국의 절대자가 극도로 싸고도는 황녀의 약혼식이 예정되었다.

데이비를 알고 있는 인간들은 그가 결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약혼을 또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지만.

그걸 빌미로 무어라 하는 인간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분위기는 이제야? 라는 느낌이 강했다.

물론 일면에서는 뭐, 공처가니 뭐니 한 것치곤 말을 바꾸는 것도 한순간이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그런 비난에 신경 쓸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약혼식은 언제로 하면 되겠는가.”

“아이를 유산한 산모에게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는 건 절대 안 됩니다.”

“흥. 이제 와서 신경 쓰는 척은.”

“이제 제 부인이 될 사람인 만큼 황녀를 힘들게 하면 황제 폐하라도 그냥 넘어가 드릴 수는 없습니다.”

“퍽이나 신경 썼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데오르트 황제는 마음이 편안한 표정이었다.

“에이리아를 울리지 말아라.”

“제국의 황제가 하실 말씀치고는 지나치게 정이 묻어있네요.”

“한 아이의 아비에 황제 천민이 어디 있겠느냐.”

그렇게 말한 왼손으로 턱을 어루만졌다.

“못난 것 결국 아비의 품을 떠나가는구나.”

씁쓸하게 말하는 그를 뒤로한 채 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정원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에이리아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인족답게 후각이 예민한 그녀인 만큼 그녀는 내가 근처에 이르자마자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 나를 찾아냈다.

“데이비 님!”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달려온 그녀가 잠시 멈춘다.

그리고는 이내 나와 페르세르크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뭐 하는 게야. 어서 가서 안기지 않고.”

“그…….”

빨개진 얼굴로 어쩔줄 몰라 하던 그녀는 곧 용기를 낸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는 내게 달려와 그대로 안겨들었다.

마치 내 체취를 평생 기억하려는 듯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비비는 그녀를 보며 피식 웃어버린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예쁘네.”

내 말에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 그게…….”

“예전에 에이리아가 만든 옷인 게야. 그대가 혼약을 받아들였다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밤을 새워가며 직접 만들었다더군.”

자연적인 아름다움과 청초함이 묻어나는.

청록색 머리칼과 잘 어울리는 예복이었다. 과거 페르세르크와 몇몇이 나와 에이리아의 약혼을 성사시키기 위해 수작질을 부렸을 때를 말하는 것이리라.

그땐 그녀도 나도 속은 상황이었으니까. 보며 나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마음에 안 드시나요?”

“아니, 마음에 들어.”

내 사람이 되기로 한 이상 과한 거리감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녀의 뺨을 쓸어주고 입을 맞춰준 나는 눈을 부릅뜨고 페르세르크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위태위태한 평화이며 일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금에 충실하리라.

“참. 데이비 님. 제가 직접 도시락을 만들었어요. 같이…….”

그때였다.

“으으읏! 혼자 다 먹어써!!”

그때 어디로 갔는지 조용하던 청단이의 외침이 들려왔다.

“맛있는 냄새…… 났는데에…… 홍다니…… 홍다니 혼자 다 먹어써!!”

울음기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는 청단이의 외침이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작은 자리 위에 놓인 도시락 바구니와 그 바구니를 잡고 흐느끼는 청단이가 보였다.

그리고는 그 앞에 선 채 당황하여 고개를 젓는 홍단이가 보였다.

붉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세차게 고개를 젓는 홍단이의 얼굴은 억울하다는 심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호…… 홍다니 안 그래써!”

변명을 하는데 청단이는 쉽게 믿지 않는 모습이었다.

“흐아아앙! 홍다니 나빠! 나빠!!”

엉엉 우는 청단이를 보는 홍단이도 덩달아 울음을 터뜨려버린다.

두 녀석 다 거짓말은 아닌데. 그럼 범인은 누구인가.

“세상에…… 두 아이 모두 먹고도 남을 양의 음식을 담아놓았을 텐데?”

페르세르크가 기가 막힌다는 듯 중얼거렸다.

단시간에 그렇게 사라질 양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고개를 슬쩍슬쩍 돌려본 나는 저 멀리 나무 뒤에 빼꼼히 드러난 새하얗고 작은 날개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윽고 내가 소리를 죽여 나무에 다가가자.

나무 뒤에서 도시락으로 추정되는 음식들을 놓아둔 채 눈을 반짝이는 륀느가 보였다.

“매우 높은 당분을 검출. 륀느가 이것을 높게 평가. 매우 고품질의 미각 데이터 수집가능하다 판단.”

범인 여기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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