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97화
습격!
아니, 아니었다.
폐창고의 절반이 날아가면서 보인 것은 거대한 크기를 지닌 거대 슬라임이었다.
겉보기엔 약한 저렙 몬스터같이 생긴 것이 슬라임이라 하지만.
눈앞의 이 슬라임은 알프 온라인 유저인 넷은 모두가 아는 유명한 몬스터였다.
그것도, 일반이 아닌 보스급.
저래 보여도 유저 10명 이상이 모여야 공략이 가능한 상위 필드 보스급 몬스터라는 소리였다.
제너럴 슬라임.
수천 마리의 슬라임을 몸 안에 담고 다니며 어지간한 마법도 무시하고, 물리 공격도 무시하는 악질적인 몬스터가 바로 이놈이었다.
제너럴 슬라임은 엄연히 알프 온라인에서도 악명높은 괴물이었고 놈의 공격패턴 정도는 질릴 정도로 들어 알고 있었다.
실제로 일대 도시를 모조리 개 박살 내버린 원흉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제너럴 슬라임이었다.
자신들이 탈취해온 물건이 무엇이기에!
저토록 상위 몬스터가 이렇게 집요하게 쫓아온 단말인가.
모두를 놀라게 만든 건 그 점이었다.
제너럴 슬라임은 이 공장 채로 집어삼켜 먹어버리려 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무전기에서 날아온 목소리는 한없이 담담하게 엎드리라 말할 뿐이었다.
“이게 뭔…….”
껄렁한 인상의 윤태강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치지지직!! 다시 간다. 명부에 사인하고 망각 차 마시기 싫으면 숙여.
콰아아아앙!!!!
또 한차례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볼 수 있었다.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모를 새하얀 광탄이 날아들어 제너럴 슬라임을 포격하는 것을 말이다.
조금만 늦었다면 건물 채로 그들은 슬라임에게 먹혔을 테지만 어디선가 날아든 광탄은 그런 제너럴 슬라임의 행태를 순식간에 저지한 것도 모자라 회복 불가능할 정도의 치명상을 입혔다.
“세상에…… 저게 뭐야…….”
-그우우우우우……….
그리고, 제너럴 슬라임이 쓰러짐과 동시에 한발이 아닌 수십 발의 광선이 날아들며 하늘을 날아다니는 백색의 와이번들의 날개를 격추하기 시작했다.
와이번들은 강력한 브레스와 단단한 갑피를 지니고 있지만 유일하게 날개의 피막은 약한 편에 속한다.
그리고, 그 날개를 정확하게 맞출 수만 있다면 녀석들을 낙하시키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맞추기만 한다면 말이다.
와이번의 속도는 어마어마한 편에 속하기에 압도적인 속력으로 공격을 피해내기로 유명하다.
그렇기에 보통 와이번을 사냥할 땐 공격을 퍼부어 놈이 내려오기를 유도한 다음 잡는 것이 정석 방법이었다.
이렇게 무식한 방식으로 잡아도 될만한 것이 아니었다.
몸을 엎드린 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생존자들은 계속해서 날아드는 광선이 일대의 큰 몬스터들을 싸그리 날려버렸다는 사실에 멍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치익!!
그리고. 광선이 멎어 들었을 즈음. 고용한 그들 가운데에서 무전기가 신호를 울려왔다.
“헙!”
거의 반사적으로 장비를 가동시켰던 허진우가 기어가 무전기를 집어 든다.
“누…… 누구십니까?”
“지원군이다.”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이에 무전기를 바라보던 이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순간적인 공포에 물든 그들은 멍하니 고개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았고.
그곳에 나타난 한 명의 청년과 작은 소녀, 그리고 20대 초반 정도의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바…… 방금까지 아무도 없었는…….”
“다친 곳은…… 물어봐야 의미 없네.”
손을 뻗어 주저앉아 있던 지민에게 다가간 데이비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굳은 듯 멍하니 있는 그녀의 팔에 손을 얹더니 새하얀 빛을 일으켰다.
“볼 때마다 신기하네…….”
보통 각성자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힘의 차이에 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고 지민은 아릿하게 올라오던 통증이 사라진 탓인지 눈을 크게 뜨고 데이비를 올려다보았다.
“생존자는 이게 전부인가? 듣기로는 8명이라고 들었는데.”
데이비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그리고, 잠시의 침묵 끝에 중년 남성이자 사실상 리더나 다름없던 박두식이 천천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명은…… 임무 중에 전사했습니다.”
아무리 높게 봐줘도 20대 정도의 청년이다.
본래 경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 박두식이었지만 그는 어째서인지 함부로 말을 놓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수가…… 벌써 늦었다니…….”
현아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시신은?”
“이 빌어먹을 물건을 가져온 곳에서 낙오되었소. 지금쯤이면 고깃덩이가 되어있겠지…….”
그의 말에 데이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데?”
그렇게 중얼거린 데이비가 륀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륀느, 이 인간들 데리고 빠져나가. 내가 일대를 모조리 처리해놨으니까 아무 문제 없을 거다.”
데이비의 말에 륀느가 부루퉁한 심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데이비 님. 륀느도 따라갈 거라고 명시해.”
“여기 있어. 현아를 지켜줄 사람도 필요하잖아.”
그 말에 륀느는 입을 삐쭉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어디 가는 겁니까!!”
“생존자의 유해라도 수습할 겸 좀 알아볼 게 있어서.”
데이비의 말에 지민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동고동락하던 팀원들이 죽었다는 사실이 다시금 그녀를 울컥하게 만든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됐다고!! 우릴 빨리 이곳에서 빼내!”
그때였다.
짜증스레 벌떡 일어난 윤태강이 다가와 소리쳤다.
“당신네 때문이잖아! 당신네가 브리핑을 잘못해준 탓에 넷이나 죽었다고! 그런데 이제는 산사람보다 시체나 뒤지겠다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돌려 말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윤태강! 무슨 말이 그래!”
박두식의 엄포에도 윤태강은 짜증스레 화를 냈다.
“X발! 죽을 뻔했다고!! 처음부터 저렇게 강한 양반이 있었으면 우리가 오지 않아도 됐던 거잖아! 우리 목숨은 무슨 총알받이라는 거야 뭐야!”
화를 내는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했다는 사실 때문에 극도로 흥분한 듯 보였다.
지금 이런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제야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안도하기보다 국가기관에 분노했기 때문일 테고.
“어이.”
“당신이 도와준 건 고맙지만 화를 내야 할 건 우리라고! 우리도 나라를 위해 싸우는데 우릴 소모품마냥…….”
빠아아악!!!
일순간 윤태강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콰앙!!!
그리고 바닥을 뒹군 그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듯 데이비와 윤태강을 바라보았다.
“으으으…… 아이고, 내 코야…….”
“두 가지를 착각한 모양인데. 나는 네가 말한 그 국가기관 소속이 아니야.”
그말에 모두가 놀란 듯 다시 데이비를 본다.
“둘째. 물에 빠진 놈 구해놨더니 봇짐 내놓으란 식으로 구는 놈까지 구해줄 이유가 없다.”
“뭐…… 뭐?! 컥?!”
“널 데려가진 않을 거라는 소리야.”
스산한 얼굴로 그를 짓밟으며 데이비가 선언하자 그의 얼굴에 공포가 서렸다.
“륀느. 빨리 이동해. 저 멍청이가 할 일도 끝이니까.”
데이비가 가리킨 것은 현아였다.
현아의 목표는 이들을 살려서 데려가는 것.
본래대로라면 그들에게 물자를 원조하고 그들의 힘을 이용하여 빠져나오는 것이지만 물자도 잃어버린 마당에 저들이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자…… 잠깐!! 날 두고 가겠다고?!”
윤태강이 벌떡 일어나 소리친다.
“이의 있나?”
“당연히 있지!!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죽을 순 없단…….”
“야.”
데이비의 목소리에 고저가 사라졌다.
동시에 싸늘한 공기가 주변을 짓누르자 윤태강은 자신이 누구에게 화를 내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확실히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 나가도 아무도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니 말이다.
그제야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윤태강이 우물쭈물하자 박두식이 재빨리 그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린 뒤 머리를 숙이게 했다.
“미…… 미안하오! 이 녀석이 죽다 살아나서 지금 많이 혼란스러운 상태입니다! 부디 선처를.”
“큭…….”
한 번만 더 말하면 죽을 거라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낀 윤태강이 몸을 사리자 박두식은 제 머리까지 숙여가며 부탁했다.
“이놈이 아직 제정신이 아니라 그런 것이니 한번 용서해주시오…….”
박두식의 그런 노력에 현아가 나를 바라보며 용서해주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한번 봐줄 수도 있잖아요.”
“그래 목숨줄은 붙여줄게. 운 좋은 줄 알아.”
데이비의 말에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고개를 숙이고 있기에. 그는 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몸에서
무언가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을 말이다.
“저항력 낮은 인간은 제가 뭘 당했는지도 모르지, 네 전신에 숲이 있으라.”
장난스레 말한 데이비가 돌아섰다.
* * *
륀느에게 현아의 신변 보호 겸. 임무를 맡겨놓은 나는 박두식의 설명에 따라 그들이 임무를 했던 위치에 금방 도달할 수 있었다.
중요한 물건인데 갑자기 습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8명의 팀원이 암암리에 그곳으로 가 중요 물건을 회수하고자 한다.
문제는 그 물품의 정체였다.
대체 그게 뭐길래 몬스터들이 노렸고, 현아를 이용해 그걸 열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사실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현재 한국에서 제법 힘을 자랑하는 신성 그룹을 뒤흔들고, 한국의 정황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는 요소.
문제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몬스터들이 마치 도운 것 같다 이 말이지.”
그러니 한번 확인해보는 수밖에.
몬스터의 시체가 가득한 현장이었다.
비행기의 잔해와 누군가가 격하게 싸운 흔적들이 가득하자 나는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크아아아아앙!!!
그때 시신 사이에서 거대한 체격의 트롤 한 마리가 벌떡 일어나 내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콱!!!
물론, 놈의 주먹은 나의 손에 의해 그대로 막혔지만 말이다.
조용히 놈의 주먹을 낚아챈 채로 주먹을 다시 편 내가 녀석의 손가락을 마디만 웅크리게 만든 뒤 살살 움켜쥐었다.
“너 손가락 비트는 것보다 마디를 꺾어 누르는 게 더 아프다는 거 모르지?
트롤의 생존능력은 좋다.
하지만 그게 고통을 감내해주진 않는다.
-크…… 크아아아아아아앙!!!
이윽고 내가 녀석의 손을 누르자 트롤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앙!! 크앙!!
처절하게 울며 제발 놓아달라는 듯 필사적으로 버둥거리던 트롤을 보며 내가 손을 놓자 녀석이 후다닥 물러나며 와들와들 떨기 시작했다.
역시 이놈들.
만들어진 몬스터는 아닌 듯 보였다.
“흉신이 만든 권수 같은 건 줄 알았는데. 이 정도면 그냥 몬스터 같네.”
조용히 중얼거린 내가 놈에게 다가가자 녀석이 그대로 주저앉더니 뒷걸음질 치며 내게 공포심을 드러냈다.
“야. 여기서 너희와 싸운 인간들은 어디 갔어.”
알아들을 리가 있나.
그러니 정신 마법을 쓰는 수밖에.
적당히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놈에게 물어보자 녀석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유난히 처참한 시체 밭 속에서 몇몇 남녀를 불쑥불쑥 꺼내 들었다.
팔 하나가 뜯겨 나간 작은 소녀.
머리가 보이지 않는 남성.
사지에 물어뜯긴 흔적이 가득한 남성 등등.
하나같이 멀쩡한 시신은 없었다.
내 눈치를 살피는 트롤을 무시한 채 시체들을 보던 나는 조용히 그들의 몸에 손을 짚었다.
자자. 정령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기를 비마.
그렇게 바랬건만.
애석하게도 정령은 남아 있지 않았다.
모종의 힘이 정령을 모두 내쫓아버린 것이다.
“그럼 하이잭이라도 하는 수밖에.”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내가 천천히 손뼉을 쳤다.
스스스스스스…….
동시에 내 몸 앞으로 검은 기류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내 한 명의 혼령이 구현되기 시작했다.
“자.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을 거 같은데.”
내 말에 혼령으로 나타난 청년이 표독스러운 얼굴로 내게 소리 질렀다.
[윤태강!!!! 윤태강 그 빌어먹을 배신자!!!!]
영혼이 가진 집념. 단 한마디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어쩐지. 시체 확인한다니까 유별나게 날뛰긴 했지?”
그놈은 다른 이들과 다르게 묘하게 이상했다.
윤태강을 향한 분노를 드러내는 혼령을 다시 성불시키고 다른 영혼을 불러들인다.
그러자 그 영혼은 나를 총명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외쳤다.
[그 상자를 열면 안 돼요!! 그 안엔 재앙을 몰고 오는 씨앗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봤네. 알아듣게 설명해줄래?”
임퍼펙션 데스 로드의 위압이 발현되자 혼령이 우뚝 멈췄다.
어디 두루뭉술한 설명을 하고 있어.
[상자 안에 흉신 소환 코어가 들어있어요! 한국은 함정에 빠진 거라고요! 넬타리드 교단에서 주고받은 코어가 아니라 일루미나티 쪽에서 바꿔치기한 가짜!]
“그래서? 넌 그걸 왜 아는데?”
[윤태강이 통화하는 소리를 들었어요. 한국어가 아니라 저와 성태윤 씨 밖에 못 들었지만…… 분명히 그걸 낙동강 방어선 쪽에서 활성화 시켜 흉신을 불러내야 한다고…… 그게 실패하면 아무 곳에서라도 활성화 시키라면서…….]
성태윤이라면 방금 윤태강을 향해 강한 적의를 드러내던 혼령이었다.
그나저나 일루미나티라…… 그놈들이 완전히 박멸된 게 아닌 건 알았지만 의외의 소득이었다.
그러니까.
적이 둘에서 셋이 된 꼴이 아닌가.
데스 로드의 육신을 가지고 개 짓거리를 하는 페스리사 대륙의 인류의 배신자들.
심연에서 기어 나온 타나토스의 가장 가까운 존재인 이클립스.
마지막으로 흉신과 넬타리드의 일면인 파괴.
“나머지 둘은?”
[희…… 희생되었습니다.]
“너희가 죽은 이유는 그놈이 너희를 사지로 몰았기 때문인가?”
[저희가 진실을 알리려고 했을 때 저희를 죽이고 몬스터를 불러들였어요. 갑작스런 습격이라고.]
“재밌네.”
그럼 윤태강이 상자를 터뜨리려 한 것도, 살았다는 사실을 알기가 무섭게 그것을 운반하려 한 것도.
대충 이해는 되었다.
“그런데 굳이 그 상황에서 나를 자극할 필요가 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살건 죽건 어차피 상자가 열리는 건 매한가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올라가. 편히 쉬어라. 그 상자는 내가 처리할 테니.”
내 말에 소녀 영혼이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은…….]
“날 아나?”
[티오니스…… 성자…….]
“그래.”
[어째서 당신이 이곳에 있는 거죠? 인류를 위협에 몰아넣은 당신이?]
“이건 또 뭔 개소리야.”
내 말에 그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당신은 당신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는군요. 지금 지구에선 당신이 티오니스의 인간이며 지구를 멸망시키기 위해 일부러 알프 온라인을 박살 냈다고 알려져 있어요.]
“내가 박살 냈다고?”
[영상이 나왔거든요. 당신과 작은 꼬마가 싸우면서 세상이 모조리 박살 나는걸.]
보통 그런 걸 보면 몸을 사릴 텐데.
겁이 없는 건지.
[알프 온라인에 접속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각성자의 수가 더 늘어나지 못하니까 상황이 점차 악화되고 있죠. 그래서 모두가 당신이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줄 알고…….]
“헛소리야.”
짧게 일축한 내가 영혼을 흩어버렸다.
[아닌…… 가요?]
“정확히 말하자면 지구의 인간이 죽으면 이쪽도 곤란하거든. 그래서 지켜주러 왔다.”
내 말에 소녀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다행이에요. 다만, 윤태강은 꼭…….]
“오냐. 오빠만 믿어라.”
[저…… 이래 봬도 이십 대 중반인데요오…… 제가 이래 봬도 당신보다는 나이가…….]
“어쩌라는 거야. 니가 천년을 살았어?”
[네…… 네?]
당황한 그녀를 향해 내가 혀를 찼다.
“하여튼 요즘 젊은것들은 쯧쯧……. 나 때는 말이야 상상도 할 수 없었어.
[와…… 좀…… 그렇네요.]
“편히 가. 적어도 잘못한 놈은 벌을 받게 해줄 테니.”
[고마워요.]
그렇게 말한 소녀는 곧이어 무언가 생각난 듯 내게 부탁해왔다.
[저기…… 아저…… 아니 오빠.]
귀여운 앙탈을 부리듯 애교를 피운 소녀가 내게 부탁해왔다.
[좀 보기 흉하겠지만…… 제 시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회수해줄 수 있나요? 제 동생에게 가져다주세요]
“유품?”
[네, 동생들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을 순 없으니까요.]
소녀의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라.”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쳐 싸우고 사망한 참전용사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토록 용감한 소녀의 공로가 그대로 잊혀지는건 웃긴 일이 아닐 수 없다.
“걱정 마. 내가 다 처리해줄 테니.”
내 말에 소녀는 만족한 듯 조용히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나갔다.
현재의 지구는 참 재밌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흉신을 부르는 촉매 코어라…….
나는 조용히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트롤을 향해 손짓했다.
녀석이 후다닥 뛰어오자 나는 녀석의 몽둥이를 빼앗음 담은 꺼지라는 시늉을 했다.
“살려줄 테니 꺼져.”
그래. 윤태강이 문제의 원흉이라면, 또 내가 이곳에 오는 걸 원치 않았다면.
사고를 위장해 나를 이곳에 묶어두거나 죽이려는 행동을 할 것이다.
-크르르르르르…….
지금처럼.
나는 나를 한입에 삼켜버리기 위해 더 다가오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 몽둥이를 이리저리 휘두르다 까딱거렸다.
“어디를 가든 인간이 문제야.”
배신자까지 신경 써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