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8화
세상이 내일 망해도 사람들이 모르면 평화는 유지된다.
세상이 멸망해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새로운 삶이 생겨난다.
현아가 살고있는 단독주택으로 돌아온 뒤 마가와 포도에게 메세스의 망토를 던져준 나는 현재 메세스가 떨어뜨린 그림자 포식의 힘이 서린 붉은 구슬에 관심이 집중되어있었다.
당연히 이번에 모습을 드러낸 취미생활의 결정체.
돈x랄의 정점을 찍어버린 비공정으로 인해 여론이 상당히 뜨거운 모양이었다.
본래 지구에서의 나는 상당히 여론이 안 좋았다.
그럴 수밖에.
그들의 목숨줄이 되어줄 알프 온라인을 개 박살 내버린 게 나라고 되어있으니까.
“저기…… 내 말 듣고 있어요? 지금 해외에서 그룹을 통해서 당신과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보려고 계속해서 비밀리에 접선하고 있는 건 알아요?”
“대체 신성 그룹이 뭘 하길래?”
“현재 각 물자나 무기 제작 대행을 하고 있어요. 그에 따른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거든요. 한국 정부를 대신해서 물건을 옮겨주고 있기도 하구요.”
그말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기가 막히는 기분이었다.
“저…… 데이비 님. 왜 그러세요?”
“아니…… 별거 아니야.”
사실 황당할 따름이다.
나는 내 곁에 달라붙어 나를 올려다보는 에이리아의 머리를 귀와 함께 쓰다듬었다.
청록빛 머리칼과 긴 여우 귀가 하늘거리며 기분이 좋다는 티를 냈다.
이쯤 되면 삼촌은 대체 무슨 사업아이템을 가지고 이만한 거대 기업을 만들어낸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저…… 그런데 이분은?”
“내 와이프.”
“네?”
“가 될 사람.”
내 말에 그녀가 나를 바라보고 이내 에이리아를 바라본다.
“아!”
그리고는 내가 현재 결혼한 페르세르크 이외에도 혼인이 내정된 이가 더 있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어머나 귀여워라…… 저…… 제가 연상 맞죠?”
“네? 아…… 네! 에이리아 알 린디스라고 해요. 데이비 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황족의 예법대로 우아하게 인사를 건네는 그녀를 보며 현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우아한 황녀님이 왜 저런 망나니와 혼인을 하려는 건지…….”
“아…… 아니에요. 데이비 님은 정말 따스하고 멋진 분인걸요.”
발그레해진 얼굴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 모습에 현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그 거대한 배는 뭔데요. 지금 정부에서도 그렇고 당신에게 직접 물어보기엔 눈치가 보이니까 애꿎은 저희만 쪼아대고 있어요. 알아요?”
“그걸 왜 신경 써.”
“당연하죠! 그만한 무기가 갑자기 튀어나왔는데 긴장 안 할 인간이 어딨어요!”
확실히 몬스터에게 효율적인 공격수단을 지닌 전투선이라면 모든 나라가 침을 질질 흘릴 만도 했다.
그러면 어쩌나. 저런 공격 시스템을 갖추려면 재료가 한두 가지가 드는 게 아닌데.
실제로 비공정 아스가르드는 공허에너지를 기본 메인 원자로로 사용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내가 륀느의 지하 유적에서 가져온 융합식 마석까지 병행하여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적어도 지구에선 유일할 무기이리라.
“무시해. 난 내가 알아서 하지 여기에 빨대 꽂아서 어떻게 좀 쪽쪽 빨아먹으려고 머리 굴리는 것들을 상종할 생각 없어.”
“그래요? 이게 외교 문제가 되면요?”
“알아서 하라 그래.”
내 알 바는 아니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나는 에이리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페르세르크. 전에 약속한 곳에 데려다줄게.”
“오오. 데이비. 기다리고 있었던 게야.”
그 말에 스마트 패드를 콕콕 누르며 눈싸움을 하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몸을 작게 만들며 대뜸 따라붙었다.
“저…… 어딜 가는 건가요?”
“놀기 좋은 곳. 기왕 온 김에 지구 구경이나 시켜줄게.”
“아…… 저…… 괜찮아요. 바쁘시면…….”
“아니, 이게 일이야. 그러니까 거절하지 말고 따라와.”
내 미소에 에이리아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자…… 잠깐만요! 어딜 가는데요!”
“놀이동산. 이곳 대구에도 하나 있지?”
이름이 E월드였나 D월드였나. 본래엔 다른 이름이었지만.
“아직 하지?”
“내일 세상이 멸망해도 사람은 놀 거리가 필요하니까요. 실제로 정부에선 그런 장소 몇몇을 선정해서 불안을 가라앉히고 있긴 해요.”
“그러면 됐어.”
비공정의 출현에 전 세계의 관심이 쏠리건 말건.
흉신의 계략으로 내 이미지가 나빠지건 말건 그딴 건 아무래도 좋다. 지금은 기다리는 시간. 그동안 어떻게 보낼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다.
“지금 이 시국에 간다고요?”
“지금 이 시국이니까 가는 거다.”
물론, 단순히 놀러 간다는 게 아니라는걸. 오늘 저녁이 되면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 * *
“꺄아아아! 재미써!!”
“처…… 청다니 어지러워…….”
작디작은 아이가 륀느의 양손을 잡은 채 회전목마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타고 있다.
겉 외향부터가 이미 수많은 이들의 관심을 끌어모으는 아이들이다.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에게 느긋한 지구의 풍경을 구경시켜줄 겸 홍단이와 청단이를 데리고 놀이공원을 찾은 나는 이미 작정하고 놀기로 마음을 먹었다.
당연히 나의 존재를 아는 이들은 시선을 불러모은다.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운 두 소녀와. 귀여움에 시선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앙증맞은 두 아이의 존재는 내 생각대로 제대로 어그로를 끌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알게 모르게 사진을 찍거나 동영상을 찍는 이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그런 그들을 둔 채 나는 페르세르크의 얼굴에 물감으로 귀여운 이모티콘을 그려주거나 목마를 타고 돌아온 아이들을 향해 웃어주는 등 지극히 평범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슬슬…… 한번은 할 때가 됐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가볍게 바람을 불었다.
“어…… 어어?! 내 풍선!”
손에서 풍선을 놓친 작은 아이 하나가 내 쪽으로 달려온다.
“유…… 유린아!!”
동시에 아이의 부모로 보이는 이들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이를 부르지만.
나와 아이는 부딪힌 지 오래였다.
“아이쿠!”
나와 부딪히기가 무섭게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아이에게 그대로 손을 뻗어 잡아낸 내가 아이를 바라본다.
그러자 아이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아…… 저…….”
“다친 덴 없어?”
“네? 아…… 네.”
“그래. 다행이다. 그런데 풍선은 놓쳐버렸네.”
내가 하늘을 보며 말하자 아이도 시선을 돌린다.
하늘엔 아이가 쥐고 있던 풍선이 바람에 휘날려 날아가고 있었다.
“대신에 선물을 하나 줄까?”
그렇게 말하며 나는 허공에 손을 불쑥 밀어 넣었다.
아이의 부모는 당장이라도 유린이라는 이 아이를 데려가고 싶어 하는 듯했지만.
나는 못 본 척 아공간에서 꺼낸 작은 인형을 하나 그녀에게 내밀었다.
귀여운 정령의 모습을 한 퀄리티가 제법 좋은 인형이 달린 목걸이였다.
“우와…….”
“어때. 예뻐?”
“네!. 예뻐요!”
“그래. 이름이 뭐야?”
“유…… 유린이에요. 김유린.”
“그래 유린이. 이걸 꼭 가지고 다녀.”
“이게 뭐에요오?”
“음…… 부적이야. 부적.”
내 말에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말하며 아이를 돌려보내자 파랗게 질린 아이의 부모가 내가 볼세라 잽싸게 데리고 도망친다.
저 물건을 버리면 본인의 업보일 것이고, 버리지 않는다면 언제 한 번 정도는 큰 도움이 되리라.
이후 회전목마에 완전히 꽂혀 계속 반복해서 타는 홍단이와 청단이를 두고 나는 에이리아와 페르세르크를 데리고 전망대로 올라갔다.
예전의 빛은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도시의 아름다운 정경이 보였다.
“와아…… 아름다워요! 이렇게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본건 처음이에요!”
그래. 마탑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높은 건물은 티오니스에서 잘 없으니까.
찰캉!
“자. 여기 이걸 봐.”
나는 동전 망원경에 동전을 하나 넣고는 그녀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그것을 쥐고 연신 탄성을 흘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지만 역시나 이곳에서도 시선은 보였다.
물론, 그것도 아주 잠시뿐이지만 말이다.
“실례합니다.”
검은 정장을 입은 몇몇 인원이 내게 다가왔다.
“나중에.”
그런 그들에게 시선도 보내지 않은 채 내가 조용히 답한다.
“국가 보안상 중요한 일입니다. 잠시 저희와 함께…….”
“이봐.”
여전히 시선을 보내지 않은 채 내가 목소리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리고는 연신 신나서 도시를 내려다보는 에이리아의 귀를 살짝 막아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두 번 말하게 하는 거 싫어하는데.”
빙그레 웃어 보이자 그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시커먼 악마와 같은 흐릿한 형상이 그들의 목에 팔을 감고 냉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착시 현상.
환각일 뿐이지만 공포를 자극하는 데엔 충분했다.
“그리고. 한국인 흉내를 내려면 적어도 어투부터 바꾸고 와. 티 나니까.”
“…….”
“내가 타 세계 인간이라 모를 줄 알았지?”
더는 할 말 없다는 듯 고개를 돌리자 검은 양복의 사내들은 사라진 후였다.
나름대로 숨긴다고 숨긴 모양이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전생에 한국에서 살았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한국이 아닌 타국인이 한국어를 구사할 때 생기는 특유의 억양에 상당히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천년이나 지났는데 그걸 어찌 기억하냐고?
내 재능의 밑천이나 다름없는 완전 기억능력은 단편적이지만 지구의 기억을 끝없이 붙잡고 있다.
그것이 지금의 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의 노력이 헛된 게 아님을 알려준 것일까.
현아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지아에게 들었어요. 지금 인터넷에 당신의 이야기와 사진 동영상들이 돌아다닌다고.]
그래. 일부러 노출시켰으니까.
툭툭.
나는 그녀에게서 받았던 스마트폰을 익숙하게 조작했다.
[그래서? 반응은?]
나는 그 여론이 어찌 되었을지 훤히 보이지만 예의상 물어보았다.
[이거 노린 거예요? 사람들이 당신을 무슨 귀신 괴물 보듯이 보는 시선을 근본부터 갈아치우는 작업. 지금 인터넷에 의외라는 말이 많아요. 당신이 파괴에 미친 광인이라는 말도 있고, 피도 눈물도 없는 침략자라는 말도 있었는데 지금 당신이 보여주는 모습, 그리고 여기 아이에게 선물을 쥐여주던 모습까지 괴리감을 느낀 모양이던데요?]
[인간의 시선이라는 게 근본적으로 얄팍하거든.]
그녀의 말마따나 핸드폰을 통한 인터넷에 접속해보니 태그에 반전이라는 말이 많았다.
애초에 그들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흉신의 여론몰이, 군사정권을 이끌고 나를 배척하던 서호진의 여론플레이 등등이 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놓았을 뿐.
앞으로의 일에 이 딱지는 상당히 방해될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 와서 에이리아에게 지구 구경을 시켜주며 주변인들이 내게 보내던 시선은 뻔할 뻔 자였다.
저 인물이 왜 이곳에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한번 불씨를 던져놓았고 암시도 대부분 풀렸을 테니 이제 알아서 상황이 풀려나갈 것이고.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나는 흉신 메세스가 떨어뜨린 물건중 하나인 아이템 박스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손을 천천히 가져다 대었다.
“여는 조건이 있다고 했지.”
처음엔 몰랐는데.
나중에 가서야 이게 뭔지 알겠더라.
나는 현아에게 부탁한 대로 스마트폰을 거치대에 연결한 뒤 기능을 작동시켰다.
“저…… 데이비 님? 그건 뭐 하는 건가요?”
“응? 아, 별거 아니야. 저 장치를 통해 이 차원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모습을 볼 수 있는 거야.”
내 말에 경치를 구경하느라 한껏 풀어져 있던 에이리아의 표정이 확 굳었다.
“아…… 저저…… 아직 마음에 준비가…….”
“무슨 준비. 그냥 있어도 화폭이구만. 됐으니 여기 가만히 서 있기만 해.”
그렇게 말한 내가 카메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두를 띤 내가 카메라 앞에 검은 물음표가 서린 박스를 올려놓았다.
“사람이 있을 리는 없겠지만 이렇게 재밌는 걸 그냥 넘길 수야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내가 박스를 툭툭 두드렸다.
“이게 뭐냐고요? 다들 알잖아. 흉신 놈 때려잡고 나온 소재.”
다른 건 다 소재 같은데 이건 솔직히 소재 같지 않다.
다만.
느낌이라는 게 있다.
내 말과 동시에 스마트폰의 한편에 채팅이 올라온다.
[왠지 랜덤 박스 가챠 상자 같은 느낌.]
용기 낸 한마디였다.
아직 보는 이는 고작 1명.
이러면 조금 곤란한데.
“맞아요. 가챠. 랜덤 박스. 이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몰라요. 꽝이 나올 수도 있고. 말도 안 되는 물건이 나올 수도 있어요. 그거야 신님 마음 아닐까.”
킥킥 웃어 보인 내가 조용히 말했다.
“지금부터 이걸 깔 겁니다. 이 상자를 여는 조건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몬스터를 많이 해치운 숫자. 아시다시피 비공정이 대구를 습격하던 몬스터를 떼거지로 주님 곁으로 보내버린 탓에 스택이 좀 많아요.”
그러니까 상당량 깔 수 있다는 소리다.
단순히 소모품으로 사라지는 물건이 아닌 것은 페르세르크가 확인해주었으니까.
“그러니 이걸 공개적으로 깔 겁니다. 투명한 결과. 다들 좋잖아요?”
그러니까…….
“10분 후에 전부 깔 테니까 많이들 보러 오시라고.”
인류의 재앙이나 다름없는 흉신이 떨어뜨린 랜덤 박스.
그 안에서 뭐가 나올지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다.
그리고.
내 한마디에 방송 프로그램의 서버가 터져버리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음…… 해외 아이피는 짤라야 하나?”
상자를 까는 두 번째 조건.
다만, 이렇게까지 많이 몰릴 필요는 없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