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6화
“왕자님.”
비서 안토니스의 부름에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던 구릿빛 피부의 남성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부탁이니 또 놈이 움직였다고 말하지 말아 주겠나?”
“죄송합니다. 피해 보고 드리겠습니다.”
“후우…….”
짧게 한숨을 내쉰 사내. 알하자드는 며칠간 잠을 자지 못한 탓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모범을 보여야 할 왕족으로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
그로서는 참 암담한 기분이었다.
각성자로 각성한 건 좋았다.
단순히 즐기기 위해 했던 게임이 실제로 힘을 부여해주리라곤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가 각성한 힘은 블랙스미스와 재단 스킬.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제작 레벨 50대의 랭커급 제작 유저.
나쁘진 않았다.
50 레벨대라면 굉장한 제작 레벨 유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 정도 레벨의 제작 숙련 스킬 레벨이라면 어지간한 물건을 모두 만들어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오랜 시간 노력해온 결과로써 한때 제작 랭커로 유명세를 떨친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그런 제작 레벨 따위보다 나라의 안전을 실시간으로 위협하며, 국가 수익을 초토화해버린 괴물을 막을 수 있는 전투형 각성자가 아니라는 것이 서글플 따름이었다.
미국의 랭커 각성자는 직접 강대한 몬스터를 레이드 하는 데에 성공했다고 하던가.
단순히 재미요소가 아닌 전투용으로 준비했다면.
아니 이 사실을 알고 미리 준비했었더라면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엄청난 손해를 입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살고있는 이 국가는 사실 우스갯소리로나마 기름밥을 먹고 산다고 할 정도로 석유 매장량이 풍부한 국가였다.
물론, 장기적으로 본다면 그것도 한계는 있겠지만 몬스터가 출현하면서 무슨 연유인지 어마어마한 석유 매장지를 발견해내 버린 것이다.
그 탓에 타국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을 보유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것도 지금에 와서는 의미가 없었다.
인생사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하였나.
방대한 석유를 찾은 건 좋은데 문제는 몬스터의 존재 때문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몬스터의 존재 때문이었다.
석유 매장지를 장악해버린 이 괴물의 힘은 사실 어떤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놈과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으니 말이다.
걱정은 하는 주제에 적과의 싸움에 두려움을 느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알하자드는 국가 소속 각성자들을 독려하고 철저한 준비를 마쳐 괴물을 토벌하기 위해 몇 차례고 레이드를 준비한 바 있다.
하지만, 힘이 조금 모자랐던 관계로 그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를 모두 처리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타국에 도움을 요청한 적도 있지만 들려온 대답은 모두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바빠 돕기 힘들다는 거절 답변뿐이었다.
뻔한 거짓말이었다.
석유도 석유지만 이곳에선 몬스터 출현 이후 각성자의 장비에 사용되는 다수의 소재들이 발견된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 나라가 잘되는 것을 견제한 강대국들이 국가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 핑계 저 핑계를 대어 국력이 약회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애석하지만 국력약화는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는 건 절대 원치 않았다.
그동안 이런 사태를 없게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이 공을 들였던가. 수많은 자본을 이용하여 많은 로비활동을 해왔지만 정작 위기상황이 닥치니 이런 꼴이 난 것이다.
석유 시추가 불가능하니 재정이 순식간에 흔들린다.
게다가 국가 소속 각성자들이 다수 병에 노출되거나 중상을 입으면서 도저히 일반적인 방법으론 몬스터를 몰아낼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강력한 각성자가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되진 않았을 텐데.
그러던 중 그는 처음 각성자가 된 직후 즐겨 찾던 제작 스킬 각성자 커뮤니티에 댓글이 달린 것을 볼 수 있었다.
분명 의사를 밝히고 활동을 멈췄을 텐데?
괜스레 복잡한 마음으로 커뮤니티 사이트에 무거운 발걸음을 한 그는 그곳에 남겨진 장난 같은 문구를 볼 수 있었다.
문제를 해결해줄 테니 제작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그건 좋았다.
어차피 그의 제작을 지속할수록 성장할 수 있는 게 바로 이 제작 직종이라는 것이니까.
마음 같아선 전처럼 마음껏 제작이나 해주고 싶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불가능한 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집요했다.
“조금 화가 나네요.”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가 비서인 안토니오를 향해 말했다.
“어떻게 할까요?”
“이게 인터넷에서 말하는 그 어그로인지 뭔지 하는 것인가 보군요.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장난질이라니, 그리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요.”
“찾아서 응징할까요?”
“아니요. 지금 와서 굳이 타국과 얼굴 붉히며 싸울 여유는 없어요. 아이디 삭제시키세요.”
“그렇게 하면…….”
“제작 대행은 자국 내에서만 해도 충분합니다.”
알하자드의 말에 비서 안토니오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그의 커뮤니티 아이디를 삭제시켰다.
한번 삭제되면 다시는 아이디를 못 만드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오너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삭제를 명한다며 혀를 내두르는 그였다.
“후발대를 준비해야겠어요. 제가 직접 장비를 제작해보죠.”
“지금까지도 이미 충분히 하셨습니다. 차라리 미국의 요청을 받아 도움을 받는 것이…….”
“석유로 인해 오랫동안 부유하게 살아온 게 바로 이곳입니다. 만약 그 소유권을 빼앗긴다면 그 결과는 지금보다 더 참담할 테지요.”
척박하기 그지없는 이 중동 땅에서 유일하게 기름만이 살길이 되어주었다.
미국과 러시아가 요구한 것은 새로이 발견된 석유 매장지의 공동개발권.
말이 공동개발권이지 이걸 허용해서 미국의 각성자를 빌려오게 되면 이 나라의 미래는 불을 보듯 훤했다.
결국, 둘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그 대가로 석유를 잃게 될 것이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저어…… 왕자님.”
“후발대 준비하라 말씀드렸는데 아직 움직이지 않으셨군요.”
“티오니스 성자의 도움을 받아보심은 어떨는지요.”
“티오니스 성자? 아아.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영국의 큰 문제를 거리낌 없이 해결해버렸다죠.”
“예. 그의 도움을 받는다면…….”
“연락 수단이 있습니까?”
“제가 한국정부에 연통을 넣어보겠습니다.”
안토니오의 말에 알하자드는 고개를 저었다.
“안됩니다. 듣자 하니 그는 한국정부 소속이 아니라 단순히 체류 중이더군요. 게다가 사이가 그리 좋지도 않고. 그런 마당에 저희가 한국 정부를 이용해서 접촉하면 그리 좋은 결과가 나올 것 같진 않습니다.”
그와 연락이 된다면, 그가 도와준다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만 그게 안 되니 속이 답답한 것이다.
“그럼 개인방송을 써보시는 건 어떻습니까.”
“개인방송?”
“예. 듣자 하니 그가 랜덤 박스인지 뭔지 하는 요소 때문에 개인방송을 하고 있다더군요.”
“신기하네요. 타 세계에서 온 왕족이 개인방송이라니.”
“그가 개봉하는 랜덤 박스가 관심을 요구하는 물건이었나 봅니다. 그곳에 가셔서 직접 도움을 요청해보심은…….”
“그가 방송을 하고 있나요?”
“지금은 안 하고 있군요.”
“의미 없는 선택이었네요.”
한숨을 내쉰 알하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번성하던 도시였지만 지금은 우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결국, 이 나라의 유일한 자원을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멍하니 중얼거리고 있던 그때였다.
똑똑…….
어디선가 누군가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고개를 두리번거린 그가 멈칫한다.
가만, 여기 20층인데?
경악한 듯 주변을 둘러본 그는 곧이어 단단한 유리창 밖에 떠오른 채 작고 흰 손으로 유리 벽을 톡톡 두드리는 작은 소녀를 볼 수 있었다.
청색이 감도는 은발을 양 갈래로 늘어뜨린 소녀는 굉장히 요정 같은 모습이었다.
등허리에 돋아나 팔락거리고 있는 날개와 머리 위에 천사링 같은 원 고리까지.
무엇보다 신비로운 점은 소녀의 눈동자였다.
푸른색의 눈동자 안엔 인간의 눈이라고 보기 힘든 문양들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도저히 인간이라고 보기 힘든 소녀의 등장에 잠시 실내는 침묵으로 감돈다.
콰당탕!!!
동시에 경호원들이 들이닥치며 알하자드의 허리를 숙여 눌렀고 총을 꺼내 들어 그녀를 겨누었다.
“습격이다!! 몬스터의 습격이다!”
“피하십시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내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습격과는 별개로 소녀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고 그저 노크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무언가 중얼거리는지 작고 귀여운 입술을 오물거렸다.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있었을까.
안토니오의 보좌를 받아 경호원들과 함께 몸을 피신시키려던 알하자드는 문득 소녀에게서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시! 잠시 기다려보세요.”
이윽고 그는 손을 들어 모두를 제지했다.
이에 경호원들이 경악한 듯 그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명을 어길 순 없는지 천천히 무기들을 내렸다.
이후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을까.
소녀는 계속해서 입을 오물거리다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한 손을 앙증맞게 들어 올렸다.
지잉!!
하지만 곧 그녀의 손등에 생겨난 물건은 앙증맞지 않았다.
엄청난 고열이 압축된 빛의 검이 그녀의 손등에 만들어진 장비에서 뿜어져 나오더니 모두가 반응하기도 전에 유리를 깔끔하게 잘라내 버린 것이다.
휘이이이이이잉!!!!
순식간에 바람이 내부로 들어오자 경호원들이 다시금 그녀에게 총을 겨누었다.
“잠시!!”
타앙!!!
그리고, 알하자드가 멈추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가 총을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보통 아이라면 머리통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
하지만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얼굴 앞에 손을 뻗었고…….
“초…… 총알을 잡아채?!”
손에서 우그러진 탄환 하나를 톡 하고 떨어뜨렸다.
“데이비 님의 전언. 아이디 삭제하고 도망치지 말고 진지하게 거래 요구.”
“뭐…… 뭐?”
“륀느의 소유자. 데이비 올 라운 제작 커뮤니티를 통해 제작 요청을 시도. 하지만 대상이 데이비 님을 불신. 아이디를 삭제.”
그 말에 주변이 침묵했다.
“륀느가 직접 출장. 이것을 낮게 평가.”
“무…… 무슨 소리인지…….”
알하자드의 중얼거림에 륀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귀여움이 묻어나는 그 엉뚱한 행동에 잠시 침묵하던 순간 륀느가 빈약한 가슴을 펴더니 눈을 번뜩였다.
동시에 그녀의 눈에서 쏘아진 빔이 한 화면을 만들어낸다.
화면은 익숙한 장소였다.
“아아. 들립니까?”
부드러운 미성의 목소리였다.
알하자드는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았다.
“일단 이 나라 사람이 아니기도 하고. 함부로 영공 침범한 건 미안한데. 이거 꽤 큰놈 같거든요.”
빙그레 웃으며 말한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은 제법 잘생긴 인물이었다.
“저기 보이죠? 계속해서 기어 나오는 거.”
청년은 시추 작업장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무너진 싱크홀 속에서 기괴하게 생긴 몬스터들이 기어 나오는 게 보였다.
“30분 안에 쟤들 정리해줄게요. 대신 대리 제작 한번 합시다.”
그 말에 알하자드는 숨이 멎는 기분이 들었다.
그게…… 장난이 아니었나?
설마 그냥 일반 유저같이 다가와 제작대행을 요청하던 유저가.
티오니스의 데이비 왕자일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알하자드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저기…… 보니까 여기 경찰? 군인? 어쨌든 방해꾼 오기 전에 빨리 정해요. 흔적없이 싹 박멸해줄 테니까.”
씨익 웃는 청년의 호감 어린 미소에 알하자드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도……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