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7화
거대한 시추 작업장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었다.
땅속에서 기어 나온 기괴하게 생긴. 전신이 타르처럼 끈적끈적한 몬스터를 시작으로 다수의 혐오스럽게 생긴 몬스터들이 일대를 장악했다.
도저히 화력으로 제지할 수도 없고 각성자를 투입해도 인원이 턱없이 모자라거나 피해가 너무 극심하다.
알하자드는 해외에서 찾아온 은인에게 곧바로 문제를 맡기는 건 예우가 아니라는 말을 핑계로 나를 그의 집무실로 초대했다.
깔끔하면서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집무실은 들어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환영합니다. 티오니스 성자, 데이비 왕자님. 나는 이 나라의 왕자로서 정부를 이끌어가고 있는 알하자드라 합니다.”
“석유 왕국 왕자님을 보긴 처음이네요.”
“하하. 우스갯소리로 그렇게들 말하곤 합니다만 틀린 말은 아니지요.”
“피해가 어느 정도입니까?”
“……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정말 참담한 수준입니다. 이 나라의 각성자의 화력으론 큰 효과를 볼 수 없습니다. 저라도 전투형 각성자였다면 손을 보탰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나라의 각성자들은 타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그 전력 수준이 낮다.
그렇기에 알하자드는 어쩔 수 없이 많은 돈을 들여 해외에서 각성자들을 용병으로서 고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석유 매장지를 몬스터에게 장악당하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호시탐탐 이 나라의 기름을 노리고 있던 몇몇 국가의 수작질로 인해 용병의 유입수가 극도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알하자드가 스스로 고개를 숙이고 많은 이권을 내놓으며 도움을 요청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공동의 적이 있어도 서로 돕지 않는 세계라……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네요.”
“사실 왕자님이 와주지 않았다면…….”
말끝을 흐린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이 나라가 먹고 살 수 있는 수단을 모조리 빼앗겼겠지요. 목숨을 건져도 그 이후의 미래는 참담하겠죠. 그렇기에 저는 당신께, 아니 당신이 보여준 호의를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그가 내 손을 꼭 잡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말 감사합니다.”
“일단 그건 나중에 생각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넓게 깔린 몬스터들을 내려다보았다.
당장 공격하진 않지만,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하나같이 끔찍한 질병균을 내풍기며 공격을 해온다는 것이다.
“보아하니 보이드 들이로고…… 다만. 석유 때문인지 변질되었어.”
질병 몬스터 보이드. 사실 잘 보기 힘든 보이드라는 저 젤리형 몬스터들을 이렇게 많은 수로 보는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그런데 몬스터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진 않는 겁니까?”
“예 조금 이상하게도 놈들이 저 석유 매장지 영역을 벗어나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 어디 한번 가봅시다.”
“자…… 잠깐만요!”
알하자드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그냥 가시는 겁니까?”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내 물음에 그가 표정을 복잡하게 바꾸었다.
“당신은 저를 믿을 수 있는 겁니까? 만약 도움을 받고 내가 당신의 약속을 어긴다면요.”
“뭐, 그럴 리 없겠죠.”
내 말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서입니까?”
“그냥 사람을 보면 그 사람 됨됨이가 보입니다.”
내 말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거면 됩니까?”
“충분…… 아니 차고 넘치는군요. 제가 도울 수 있는 건 없겠습니까.”
“약속대로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한 나는 아공간에서 꺼낸 메세스의 검은 넝마 조각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설마 그 흉신이 떨어뜨린.”
“재단사 스킬 가지고 계시죠?”
“예, 레벨이 높진 않습니다만.”
“걱정 마세요. 레벨이야 올리면 그만이니까.”
그 말에 알하자드가 침묵했다.
“올…… 린다고요?”
“네. 문제라도?”
“아뇨. 괜찮습니다. 가능하다면 제 한 몸 바칠 준비는 되어있으니까요.”
“그러면 이야기는 끝났네요. 그럼 바로…….”
“아…… 잠시 기다려주세요.”
그렇게 말한 알하자드가 나를 제지했다.
“당신이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도움을 주기 위해 오신 분에게 아무런 대접도 못 할 순 없습니다. 비록 큰 도움이 안 될지는 몰라도 저와 제 길드원들이 만든 제작용 아티펙트들을 가지고 가시는 것이…….”
“왕자님!!”
갑작스레 들이닥친 비서 안토니오의 외침에 알하자드가 눈을 꿈틀했다.
“무슨 일입니까. 안토니오.”
“크…… 큰일 났습니다. 모…… 몬스터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갑자기 그들이 왜 움직여요!”
심각한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놈들이 향하는 방향이…….”
“어딥니까! 뜸 들이지 말고 말하세요!”
“피난소 쪽입니다! 이대로 가다간 피난민들이 제대로 대피도 못 한 채…….”
“이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낭패를 보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에 내가 정리를 하기 위해 나서려던 찰나였다.
“알하자드 왕자님.”
누군가가 허락도 없이 집무실로 들어섰다.
“허락도 없이 찾아온 점 사죄드리겠습니다. 일본 각성자 연합 총괄팀장인 무라타 토오루라 합니다.”
정중한 자세로 그에게 명함을 내미는 모습에 알하자드가 인상을 찡그렸다.
“일본 각성자 연합? 당신이 왜 여기 있습니까.”
“우리 일본은 형제국이나 다름없는 이곳의 심각한 사태를 듣고 곧바로 출동했습니다.”
“이제 와서요?”
알하자드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척 봐도 간을 보다가 더 늦기 전에 움직였다는 느낌이 강했다.
“자잘한 문제는 넘길 문제이지요. 이미 저희 일본 각성자 연합의 뛰어난 전문가들이 현장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빠른 시간내에 좋은 소식이 들려올 테지요.”
그렇게 말한 무라타는 곧이어 내게도 시선을 돌리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티오니스 성자님. 의도하지 않게 자리를 빼앗아버린 격이 되었습니다만 조금만 양해해주실 순 없는지요. 일단 저희 일본에서도 저들을 돕기 위해…….”
“마음대로 하세요.”
알하자드의 표정이나 페르세르크가 그를 보고 느낀 바는 훤했다.
한국은 군사정권, 즉 내부에서 난리가 나서 이렇게 나서지 못한 것뿐. 사실상 중국, 일본의 경우 한발 빠르게 나선 것이다.
아마 내게 공적을 빼앗기면 곤란하다는 입장일 터.
거기에 괜히 나와 반목할 요소를 남기지 않으려는 준비까지.
나름대로 철저하지만, 한가지가 미흡했다.
자신감 과잉.
현재 알하자드도 그렇지만 이쪽에서도 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괜찮겠습니까?”
“네?”
내 물음에 무라타의 표정에 의문이 어린다.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불러요.”
빙그레 웃으며 나는 그에게 물었다. 물론, 그 또한 준비가 철저하다 자부했는지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저희 일본에서는 선녀를 확보하고 있으니까요.”
선녀?
“티오니스 대륙에서 히든 클래스로 전직했던 저희 일본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녀가 있다면 이정도 적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 말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일단 현장으로 가봐야겠네요.”
“예?”
“아직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전혀 모르시는 거 같아서 말입니다.”
아직 잘 모르나 본데. 저놈들이 움직였다는 말은…….
땅속에 있던 놈이 충전이 끝났다는 소리다.
그놈.
절대 각성자 수준으로 못 막을 거다.
* * *
끈적거리고 검은 점액 덩어리.
슬라임과 흡사하지만 많은 면에서 다르며 끔찍한 악취와 지독한 질병균을 옮기는 보이드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풀 한 포기 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지옥도가 펼쳐진다.
본래 이놈들의 이동속도는 빠른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움직이기 시작한 녀석들의 움직임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커헉!!”
피를 뿌리며 터번을 쓴 한 남성이 바닥에 쓰러지자 그 위로 나타난 점액으로 뒤덮인 이족 보행형 괴물이 그를 짓밟았다.
그르르르르르.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마치 대놓고 조롱하듯 그를 짓밟고 비벼대는 괴물이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아직 살아남은 각성자들의 얼굴에 두려움이 서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더 강해졌잖아…….”
“체감상으로 두 배에서 세 배 이상…… 어떻게 이런 일이…….”
안 그래도 위협적인 몬스터들이 두 배, 세 배 이상 강해진 것이다.
“피난 상황은 어떻습니까!!”
“아직 덜됐어요! 최대한 막는 수밖에 없습니다. 일단 화염계통 공격을 통해 최대한 진군을 늦추고…….”
“끄아아아아악!!”
상황은 처참했다.
끝도 없이 밀고 들어오는 몬스터도 몬스터지만…….
이번엔 다른 놈들도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반을 뚫고 튀어나온 거대한 점액 덩어리의 검은 지렁이들.
날카로운 이빨 수백 개가 박힌 지렁이들은 대뜸 각성자나 화력지원을 위해 있던 군인들을 덮쳤고 닥치는 대로 씹어 삼키며 진형을 붕괴시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지렁이가 튀어나와 입을 쩍 벌리기가 무섭게 그 입안에서 수많은 벌레 형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명백히 이놈들의 모습은 알프 온라인에서도 알려진 바 없는 몬스터였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너무 많은 피가 흘렀다.
각성자 팀원을 구성하고 있던 압둘은 끔찍한 현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이쯤 되면 석유고 몬스터 소재 광산이고 다 포기하고 타국에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이미 상황은 늦었다.
참담한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쉬이이이잉!!!
하늘에서 거대한 비행기 몇 대가 빠르게 창공을 지나친다.
동시에 몇몇 인원들이 마치 특수부대 훈련을 받은 것처럼 낙하산을 펼치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놀란 압둘은 가장 먼저 지상에 내려선 짧은 머리 사내의 팔에 그려진 군기를 보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 일본 각성대!”
“반갑습니다. 일본 각성자 리더 총괄 켄세이라고 합니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중반 정도. 제법 젊어 보이지만 각성자에게 사실 나이는 무의미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몇몇이 더 착지했는데 그중엔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로 어린 소녀도 섞여 있었다.
학생이라도 되는지 교복을 입고 있는 그녀는 제법 단정한 이미지를 하고 있었다.
나이는 대략 15살 정도. 아직 어린 소녀는 무표정의 얼굴을 하고 허리춤에 채워진 얇은 장도를 언제든 뽑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코오나 양. 준비는 됐는가.”
“네. 죽이면 되나요?”
그 말에 켄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그녀의 전신에 새하얀 물결 같은 빛무리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기이한 힘을 눈치챈 이족 보행형의 괴물이 그녀를 향해 덤벼들었고.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놈을 보다 한 발 내디뎠다.
서걱!!
섬뜩한 파육음이 울려 퍼진다.
이미 이족 보행형 괴물을 지나친 코오나가 검을 거둬들이기가 무섭게 이족 보행형 괴물의 육신이 경련하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무슨 속도가…….”
경악한 듯 압둘이 중얼거리자 켄세이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놀라웠다.
그녀가 검을 뽑기 전에 섬광이 번뜩였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적들은 쓰러지고 있었다.
“세계에서 몇 없는 히든 클래스입니다. 사실 그녀의 힘이 알려지지 않은 바 있지만…… 그녀의 저력은…… 절대 티오니스 성자에게 밀리지 않을 거라 자부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켄세이의 자랑스러운 어조에 압둘이 떨떠름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보통 각성자와 차원이 달랐으니 말이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불안한 기분이 계속해서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