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35화
[당신이 그곳을 안정화 시키고 돌아올 때까지…… 네가 목숨을 내어가며 지킨 이곳을. 내가 지킬게. 잊지 마.]
당신을 사랑한다는 걸.
“흐읏…….”
부서진 세상 속. 이제는 빛을 잃고 침식되어버린 나무에 기댄 채 잠들어있던 작은 소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소녀는 잠에서 완전히 깬 것이 아니라는 듯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마치 깨진 천장이 잔해를 흘리는 듯한 모습이었다.
부서진 틈 사이로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검은 공간.
바로 차원의 틈이었다.
그때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머리 아파…….”
콰지직!! 와장창!!
동시에 그녀의 심정을 대변하듯 하늘의 균열이 일순간 가로로 갈라지며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균열을 만들어냈다.
이미 이곳에서 나가지 못하게 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으응……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언제까지 기다리란 거야!”
짜증을 왈칵 낸 그녀가 소리를 빼액 지르자 허공에서 검은 회오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잠식된 고대룡이여.]
“넬타리드! 이클립스는 지금 엄청 심심해! 당장 여기서 꺼내주지 않으면 이클립스는 크게 화를 낼 거 같아.”
빈말이 아니라는 듯 그녀를 기준으로 주변 배경이 붕괴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잠들어있던 나무도 완전히 입자단위로 분해하듯 사라져 버렸다.
“이클립스를 화나게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만하면서도 강대한 용이여, 나의 종자가 그대를 해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흥. 정작 자기는 아무것도 못 하면서.”
[…….]
이클립스의 빈정거림에 목소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심심해…… 심심해 심심해!!”
땡깡을 피우듯 버둥거리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이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른 구원을 하사하리라.]
그때였다. 이클립스가 무슨 짓을 해도 침묵을 고수하던 넬타리드의 일면, 파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다른 구원?”
그 말과 함께 검은 회오리 속에서 빛이 모여들며 녹빛의 반짝거리는 액체가 담긴 성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셔라, 고대룡이여. 그대의 운명을 개척하라. 그대에게 지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수단을 하사하겠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눈치챈 것일까.
“넬타리드. 이거…….”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단순히 땡깡을 피우던 아이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잠시간의 숨 막히는 침묵 끝에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맛없어 보여.”
* * *
붉은 변이체는 나와 아비트가 상상한 이상으로 영리한 놈이었다.
실제로 아비트와 나의 추적을 눈치챈 놈은 본능적으로 디코이를 뿌려 내 추격을 뿌리친 것이다.
본래대로라면 붉은 공허의 힘, 즉 내가 가진 금기의 업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면 놈이 디코이를 쓰건 변장을 하건 잡아낼 수 있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불가능하다는 게 현실이었다.
간단히 말해서 놈은 내게서 본능적으로 도망치기 위해 미끼를 던졌다는 뜻이었다.
“네가 여기 있는 사이에 또 다른 놈이 튀어나올 가능성은?”
[맹주, 제 본체는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지금 맹주의 곁에 있는 저는 의식을 분할한 개체. 그렇기에 공허의 입구는 현재 제가 잘 막고 있습니다.]
그의 말에 나는 내 발치에 밟혀 으깨진 젤리를 바라보았다.
좀 전까진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조금의 저항 끝에 젤리가 되어버렸다.
이건 그 붉은 공허에서 빠져나간 변이체가 만들어놓은 위장술이기도 했다.
[한데. 벌써 이렇게 디코이를 만들어낼 정도라면 예상 이상으로 성장 속도가 빠릅니다. 이렇게 빠른 성장을 하기 위해선 짧은 시간에 엄청난 존재를 먹어치우거나 상위 변이체일 가능성이 높지요.]
“전자 후자 모두 가능성은 있네. 이대로 두면 위험성은?”
[만약 놈이 상위 변이체라면, 이 속도로 성장한다면…… 이른 시일 안에 놈을 막지 않으면 곤란하겠지요.]
“그 정도로 복잡한가?”
[헤라클래스 님께서도 1만 년 동안 성장한 변이체의 왕을 상대로 애를 먹으셨으니까요.]
“그 양반이?”
[처음엔 그도 맹주와 같았습니다. 하나 시간이 가면서 그 극한의 환경 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지요. 끔찍한 환경의 지옥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는 끝까지 살아남고 스스로를 진화시켰습니다. 물론 그 변이체의 왕이 특수한 개체이긴 했습니다만 현재 맹주의 힘을 생각하면 무시할 순 없겠지요.]
놈들에게서 안전해지기 위해선 금기의 업을 내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어야 한다.
“지배자라더니 순 고기 방패가 따로 없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 다른 잡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클립스와 헤라클래스라…….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는듯하면서도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나란히 서 있는 둘을 상상해보았다.
상의를 대놓고 노출하고 다니는 거구의 호쾌한 사내와. 장난기가 가득한 아이 같은 부잣집 아가씨 같은 소녀.
둘을 나란히 세워놓으면 무슨 고목과 매미 같은 느낌이었다.
“역시 안 어울린다.”
혀를 차며 나는 싸늘하게 울려 퍼지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일본 쪽으로 향한 건가?”
[이쪽 방향은 맞습니다. 맹주. 신속히 놈을…….]
“디코이는 스스로 활동하지 못한다고 했지?”
[예.]
“내가 놈을 쫓으면 놈은 또 디코이를 이용해 도망칠 거고.”
[그렇겠지요.]
“그럼 차라리 함정을 파자고.”
도망치는데 도가 튼 놈을 쫓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계약자. 불안정한 지반을 정리했다.
“그래.”
땅의 정령왕 노아스의 의념이 들려오자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당장 효율 떨어지는 짓에 시간을 허비할 수야 있나.
나는 공간 도약마법인 워프를 그대로 가동했다.
노아스를 역소환하는 것이야 여기서도 가능하지만. 그곳에는 아직 제어되지 않은 절대 환수가 한 마리 존재한다.
“빡대가리는 빡대가리 나름대로 조련법이 있다만…….”
환수왕 셋 중 가장 머리가 나쁘고 본능대로 사는 베헤모스라면 무작정 패고 공포를 심어주면 되지만 샨드라미네아는 똑똑하지도 완전히 멍청하지도 않은 중간의 위치에 있기에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스팡!!!
미리 지정해둔 좌표에 공간을 넘어 도착하기가 무섭게 나는 볼 수 있었다.
수많은 중국 군인들이 가만히 침묵한 채 앉아 있는 샨드라미네아를 포위하고 있는 것을 말이다.
함부로 공격하고 있진 않았지만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당장 공격할 기세가 가득했다.
-그르르르르……
비늘 사이사이로 붉은 마그마 같은 것이 흐르기 시작한다.
샨드라미네아는 아직 완전히 잠식에서 빠져나온 것이 아니기도 하고 그들의 기준에서 미물에 불과한 인간들이 자신을 포위하고 있다는 사실이 상당히 마음에 안 드는 듯 보였다.
당장 현신한 노아스의 힘만으론 상위 흉신이 저질러놓은 짓이 수습되지 않아 샨드라미네아를 꺼내놓았다만.
이런 식이라면 당장 대참사가 벌어질 것만 같았다.
[대단한 생물체로군요.]
“샨드라미네아. 지폭룡이라는 녀석이야.”
[흐음. 저희 종족과 비슷하지만, 근본이 다릅니다.]
“꺼낸 김에 놈의 몸 안에 있는 잠식을 지워야겠지.”
[맹주의 힘이라면 그 어떤 힘이라도, 설사, 신의 기적이라도 지울 수 있는 상성에 있습니다.]
메가로드리아와 다르게 이놈은 값싼 혓바닥으로 해결할 수 없다.
유일한 해결책은 놈을 제압한 후 울드의 힘을 강제로 빼내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때였다.
콰앙!!
누군가가 명령 실수를 한 것인지. 샨드라미네아를 향해 그대로 대포를 발사해버린 것이다.
콰아앙!!
어마어마한 굉음과 함께 샨드라미네아의 비늘에 폭발이 일어나며 거대한 연기가 돋아났다.
-그르릉…….
동시에 샨드라미네아의 눈에 분노가 서린다.
“골때리는 새끼들.”
그 말과 동시에.
샨드라미네아의 입에서 거대한 화기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그대로 공격을 행한 인간을 향한 재앙을 쏟아부었다.
[앱솔루트 실드]
쩌어어어엉!!!
그와 동시에 인간 측의 앞을 막아선 내가 허공에 마법진을 빠르게 그려낸 뒤 방어 마법을 발현시키자 묵직한 충격이 내 전신을 타고 전해진다.
“역시 힘 하나는 대단한 놈일세그려.”
공격을 받은 샨드라미네아는 분노로 인해 이성을 잃어버린 듯 보였다.
급기야 놈은 내가 걸어놓은 제어마법을 그대로 박살 내버리고는 마구잡이로 날뛰기 시작했다.
얌전하던 놈이 도시를 부수기 시작한 것이다.
“노아스, 잡아.”
쿵!!! 구구구구궁!!
지면이 갈라지면 거대한 손이 뻗어 나와 놈을 구속한다.
하지만 오래가진 않았다.
정령왕 정도의 힘으로는 단신으로 폭주한 환수왕을 제압하는 게 불가능하니 말이다.
-미물들이!!
급기야 언령을 내뱉으며 분노하는 놈이었지만 노아스의 제압이 잠깐의 틈을 만들어냈고, 그 틈을 이용해 충분히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이뤄낼 수 있었다.
신마의 카드첩은 한번 저장한 이를 계속해서 봉할 수 있다.
샨드라미네아가 현재 현신하고 있지만, 놈의 일부는 카드에 봉인되어있다는 소리였다.
놈을 봉인시켰던 카드들이 증식하며 순식간에 금빛 사슬들을 만들어냈고 샨드라미네아의 전신을 옭아매고 놈의 힘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중군 군부 쪽에선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재앙에 가까운 괴물이 단 한 명의 난입으로 제압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용을 쓰며 벗어나려 애쓰는 샨드라미네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안쓰러운 기분이었다.
“너, 더 약해졌구나.”
울드의 잠식의 여파일까.
나는 샨드라미네아의 분신체가 가지고 있던 힘을 생각했을 때 본체가 현재 말도 안 되게 약해져 있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만큼 잠식이 샨드라미네아의 육신에 부하를 가하고 있다는 소리이리라.
“자…… 잠깐!”
주변에서 만류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말 없이 놈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숨을 거칠게 내쉬며 나를 노려보는 샨드라미네아의 콧등에 손을 올렸다.
대체 룩스 대륙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얌전히 있어. 지금부터 널 해방시켜줄테니.”
내 말에 놈이 다시금 버둥거린다.
하지만 나는 이미 놈과 닿은 손을 통해 녀석과 완전히 교감하듯 파고들었다.
그리고는 녀석의 기억을 순간적으로 읽어 들였다.
[비켜. 이곳만 부수면 내 동생의 위치를 알 수 있다고 했어.]
[이 건방진 것들이!!!]
[빌어먹을 괴물 같으니! 계약자가 없으니 이 정도가 결국 한계다. 그동안 우리가 너무 오만했어.]
[샨드라미네아!! 베헤모스가 변심했다! 내가 저 여자를 막는 동안 네놈이 베헤모스를 제압해라!]
샨드라미네아의 기억 속에는 세상을 필사적으로 부수던 울드와.
폭주한 거대 해룡 베헤모스. 그리고 그런 베헤모스를 제압하기 위해 울드에게 메가로드리아를 단신으로 맡기고 가장 약한 바닷속으로 향한 지룡의 기억이 담겼다.
그리고, 샨드라미네아의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가던 중 울드의 것으로 보이는 잠식의 힘으로 추정되는 검은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고 있구나.”
울드는 잠식의 힘을 통해서도 나를 보고 있었다.
샨드라미네아를 카드 속에 가둬놓은 탓에 베르단데에 대해 들키진 않은 듯 보이지만. 이렇게 옵저버를 심어놔?
지금도 겁도 없이 나를 관찰하고 있는 이 빌어먹을 심연의 공주의 힘을 향해 내가 손을 뻗었다.
심연의 힘이 이쪽에 압도적인 상성 우위라지만 붉은 공허에는 해당하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가진 금기의 힘의 특징은. 분해.
어떤 면에선 헤라클래스 본인보다 더 이런 상황에 더 적합한 성질을 지니고 있다.
쩌엉!!!
나는 손에 머금은 금기의 힘을 이용해 그녀의 잔재에 파고들었다.
검은 잠식의 잔재가 급기야 내 정신을 갉아먹을 듯 파고들지만 곧이어 내 몸 안의 두 가지 힘에 의해 밀려나기 시작했다.
심연의 공주 베르샤의 힘과
로 아이아스의 흐름 거부 저주였다.
혼란스레 비산하는 잠식의 힘을 맨손으로 잡아낸 내가 눈동자를 직시했다.
그리고는 말없이 그 힘을 강제로 찢어버렸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검게 변질되어있던 샨드라미네아의 정신체가 환하게 변하며.
내 정신이 밖으로 퉁겨져 나왔다.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 샨드라미네아의 육신이 서서히 쓰러지자 나는 녀석의 몸을 다시 카드 안에 봉인시켰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오는 이들을 무시한 채 한발 가볍게 뛰었다.
스팡!!!
그리고, 그들이 말을 걸기도 전에 한국 쪽으로 돌아와 버렸다.
일루미나티를 처리하려다가 그보다 더한 것을 본 느낌이지만 상관없었다.
“데이비 님.”
그런 내가 오기를 기다렸던 탓일까.
내가 도착한 현아의 저택 지붕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륀느, 별일 없었…….”
[세상에!! 륀느 님이 아니십니까!!]
그때 내 어깨에 있던 노인, 아비트가 경악한 듯 소리쳤다.
아, 륀느는 세피로스라는 종족으로서 프리아 신녀와 같은 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라는 점을 깜빡하고 있었다.
* * *
일본 오키나와 해안.
상해에서 떨어진 해안가부터 이곳까지 헤엄쳐 온 붉은 변이체에게 잠식된 존재. 차우 황이 고개를 기괴하게 꺾으며 주변을 바라보았다.
츄르릅.
그리고는 방금 전 무언가를 먹어치운 듯 혀를 날름거렸다.
꺼억!!
그리고는 거친 트림을 하며 무언가를 퉤! 하고 뱉어냈다.
“배고파…….”
좀 더 명확해진 목소리.
하지만 곧 그는 자신을 쫓던 끔찍이도 무서운 존재를 떠올리곤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곧 무언가 묘수가 떠오른 듯 고개를 까득까득 뒤집었다.
그리고, 변이하기 시작했다.
전신이 녹아내리고 액체처럼 뒤틀리던 변이체는 확실히 일루미나티가 붉은 공허의 에너지를 빌려 만들어낸 흑마법파생의 변이체와 다르게 완전한 존재였다.
인체연성을 흉내 내기 위해 만든 호문클루스가 아닌 진짜 인간처럼.
꾸무럭대며 형체를 바꾸던 존재는 곧이어 한 인간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은 차우 황도, 다른 중국인 각성자들이나 군인들의 모습도 아니었다.
바로.
데이비 올 라운.
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변한 그는 놀라울 정도로 데이비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