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0화
-빨리 오셔야 합니다! 사방에서 역겨운 심연 냄새로 가득하니까요!
“가는 거야?”
현아의 말에 나는 대답 대신 침묵으로 일관하며 돌아섰다.
“오빠야.”
담담한 부름에 다시 고개를 돌리자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몸 조심해.”
“이미 죽은 사람이 몸 조심할 게 어딨어. 너나 조심해.”
“꼭 조심해야 된데이.”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이고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킥하고 웃으며 나를 떠밀었다.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할게.”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 이 기지배야.”
“아니다. 오빠야는 왠지 다시 볼 거 같다.”
“…….”
이상한 불안함이 감돌지만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애초에 그녀 나름대로 쿨하게 보내주는 방식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시야에서 사라져 다른 곳에서 나타나기가 무섭게 내 전신에 빛이 서리며 전생의 모습. 신현수에서 데이비 올 라운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신현수는 이것으로 끝이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 지금은 데이비일 뿐이다.
나는 세찬 바람이 부는 하늘을 스윽 올려다보고는 근처에 떨어진 나뭇가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자. 청소하러.”
원래 내 납골묘가 존재했던 장소는 경기도 지방이다.
당연 경기도 지방은 몬스터에게 점령당한 게 사실이지만 아스가르드가 속초에 자리 잡은 이후 주기적으로 한국 영토 전역을 순회하며 몬스터를 청소한 결과 각성자들의 힘으로 경기도 지역 대부분을 탈환한 상황이기도 했다.
-하던 일은 잘 해결됐습니까?
“그래. 이거면 돼.”
-그럼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의식의 진행은 약 사흘에서 나흘 정도 지속될 겁니다. 당신은 그동안 지구 각지에서 생겨날 심연의 침공을 막아주십시오.
의식의 진행 자체는 케인과 프레이아만으로도 충분한 만큼 내가 할 일은. 놈들이 의식을 방해하기 위해 지구로 넘어오는 족족 찢어발기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어째서 심연이 갑자기 넘어올 수 있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알아본 게 없나?”
현재 지구에는 동시다발적으로 여기저기 균열이 생겨나고 있다. 차원이동이 이렇게 쉬웠다면 이클립스가 그렇게 갇혀있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아직까지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서열 9위의 흉신이 얽혀있는 것 같습니다.
“그놈, 죽은 거 아니였어?”
-그렇다면 좋겠지만. 하위 흉신 중에서도 9위 흉신 리오스의 힘은 조금 독특하니까요.
리오스의 힘은 무언가를 개변시키는 힘이라는 모양이었다.
그 조건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가 그 능력을 사용하는 걸 거의 본 적이 없기에 알프 온라인 설정상으로도, 과거의 기억이 있는 아비트조차도 명확하게 짚지는 못했다.
하물며, 케인이라고 다를까.
메가로드리아를 의식장을 호위하는 용도로 남겨놓았다.
그리고 조금 먼 곳에 샨드라미네아 또한 배치해두었다.
아직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이지만 심연에 대한 적대감은 확실한 듯 보이니 알아서 잘 막아줄 터.
총공세를 시작한 심연의 수준을 잘 기억하고 있는 내 입장에선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는 이들이 최대한 부담을 적게 느끼도록 지구 전역을 게릴라 하면서 모여드는 심연을 쳐내는 수밖에 없었다.
새카만 점액질 같은 형체에 거대한 눈이 달린 형태 불분명의 괴물이 평야를 전진하다 내 손에 찢겨 사라졌다.
시베리아 벌판을 밀고 내려오는 괴이 그 자체들은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군인과 각성자들을 처참하게 찢어발겼다.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
몬스터의 경우 화기는 안 먹혀도 각성자들의 공격은 분명히 큰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이놈의 심연의 생명체들은 그보다 더 악랄했다.
같은 공격이라도 지독하게 오래 버텼고, 더욱 치명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근접 전투도 문제였다.
4족 보행형 거대한 코끼리 같은 기괴한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내면서 문제가 더 커진 것이다.
놈은 이마에 달린 20개 이상 되는 눈동자를 번뜩이며 시야에 닿는 이들을 바라보았고.
그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미쳐버렸다.
케인의 설명대로라면 놈의 이름은 아판이라는 심연의 개체로 심연. 그 끝없는 어둠 속으로 대상의 정신을 끌어당겼다가 놓는 생명체라는 모양이었다.
이클립스 같은 고대룡조차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린 심연인데. 일개 인간이 그걸 어떻게 버틸까.
당연한 결과였다.
심연의 냄새가 가장 짙게 나는 곳은 다름 아닌 러시아가 몬스터의 공세를 막아내기 위해 축성한 거대 요새였다.
아직 그곳까지 도달하지 않았음에도 수차례의 전투 흔적들이 보인다.
그리고 이미 늦어버린 처참한 전장의 흔적 속에서 나는 잠시 멈췄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요새와 가장 가까운 전투의 흔적이었다.
요새에서 방어전을 하기도 전에 이미 한차례 이곳에서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드넓은 평야와 그 위에 펼쳐진 생지옥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끼리릭…….
불닭이가 낮게 울며 날개를 펄럭여왔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수백에 달하는 시체를 둘러보고 한쪽 무릎을 꿇어 시체에 손을 뻗었다.
“…….”
공포에 질린 얼굴. 대체 무슨 공격을 당했는지 모를 정도로 검게 변질되고 일그러진 피부까지.
끔찍한 죽음이었다.
게다가 대부분이 비슷한 증상으로 죽어있었다.
반면 심연의 괴물의 시체는?
사실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일방적인 비율이었다.
이 정도면…… 거의 학살에 가까운 싸움이 아닌가.
몬스터와 군인의 싸움에서도 이렇게 일방적인 싸움은 없었을 텐데.
“로마노프 드렌.”
내 앞에 있던 청년의 시체에서 인식표를 뜯어 그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린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는 나뭇가지를 가볍게 붕붕 흔들었다.
-끼리릭…….
“불닭아. 말했던 대로 주변을 한 바퀴 돌고 와.
-끼잉…….
가라앉은 내 목소리에 불닭이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더니 전신을 화염으로 바꾸며 날아올랐다.
이곳엔 생존자가 없지만, 저쪽엔 남아있다.
산사람은 구하고. 빌어먹을 불청객도 저기 있을 테니. 목적지야 다를 수가 있나.
불닭이가 떠나고 근처 시체에게서 인식표들을 모두 뜯어낸 나는 전신에 마나를 활발하게 활성화 시킨 뒤 짧게 숨을 골랐다.
스팡!!!
동시에 시야에 닿는 공간으로 빠르게 공간이 도약된다.
저 범위 공간 도약인 블링크.
한두 번 정도면 문제가 없는 공간 도약마법이지만 이게 수차례 계속되면 난이도는 오를 수밖에 없다.
스팡!!
물론, 그건 내게 해당하지 않지만 말이다.
이윽고 요새의 상공까지 날아든 나는 사방을 가득 메워 요새를 포위하고 집어삼키고 있는 심연의 존재들과 이미 요새 내부로 들어가 마치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인간들을 찢어발기고 있는 소녀들을 볼 수 있었다.
기괴한 형체를 가진 심연의 객체는 수도 없이 많지만, 심연의 공주로 추정되는 소녀의 수는 총 둘.
하나하나가 세상을 파멸시킬 존재라더니…….
오버 마인드를 통해 선물을 보냈음에도 아직까지 생존한 심연의 공주가 남아있는 건 그리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것 한방에 심연의 공주를 모조리 처리했을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
“으…… 으으…… 살려줘!!!”
“꺄아아아아악!!”
요새의 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스멀스멀 기어 들어오는 수십 가닥의 촉수들을 보며 여성 각성자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촉수 다발은 순식간에 남성 각성자를 잡아 찢어버렸고 남성 각성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절명해버렸다.
이후 여성 각성자의 팔다리를 잡아 허공에 들어 올린 거대한 촉수형태의 심연개체가 입을 쩍 벌린다.
속이 보이지 않는 검은 공허 같은 입안으로 여성을 통째로 삼키려던 그 순간.
나는 공간을 넘은 채로 망설임 없이 놈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나뭇가지를 던졌다.
쩌어엉!!!
거대한 소닉붐과 함께 이기어검술처럼 날아든 나뭇가지가 새파란 검기를 방출하며 괴물의 육신을 뚫었다.
방어력에 자신이 있는 건지 심연의 개체가 가진 특유의 그 뻔뻔한 특성을 믿는 건지 괴물은 나를 발견하고도 멈추지 않았다.
물론. 그런 안일한 행동은…….
쿠우웅!!! 쩌억!!
곧 놈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나뭇가지에서 나온 것이라곤 상상할 수 없는 거대한 충격파와 날카로운 검풍이 심연의 개체를 조각조각 찢어발겼고 촉수에 묶여 살려달라 부르짖던 여성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경악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런 나의 난입에 모두의 시선이 몰려든다.
“저…… 저 사람은?!”
“티오니스 성자다!”
순식간에 나를 알아본 이들을 무시한 채 나는 한 손에 청단이를. 또 나머지 한 손에 홍단이를 들고 검 끝을 내리 세웠다.
“지금 이 길로 다들 후퇴하는 게 좋을 겁니다.”
후퇴하고 있는 이들의 뒤를 막아주듯 홀로 선 나는 계속해서 몰려드는 심연의 개체들을 향해 홍단이의 검 끝을 겨누었다.
“흐응…… 새로운 장난감이네? 저기 헤라. 저건 좀 재밌을까?”
“그렇겠지. 그동안 참 심심했는데 잘됐어.”
나를 몰라?
수많은 심연의 개체들을 이끌던 두 명의 심연의 공주들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응. 역시 내가 장난감으로 쓸래. 그동안 장난감들이 너무 약해서 심심했단 말이야.
칭얼대는 소녀의 말에 나머지 소녀가 키득거렸다.
“뮤 마음대로 해. 나는 저기 인간들을 가지고 놀 거니까.”
내가 막아선 퇴로 너머로 도망치고 있던 인간들을 가리키며 혀를 내미는 소녀의 발언이 이어진다.
의사소통을 떠나 의지가 전해졌는지 도망치던 이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죽음의 공포에 오줌을 지려버린 이들도 있었다.
“이거 어째, 여기부터 통행세를 좀 내셔야 하는데. 좀 많이 비싸거든.”
이윽고 내가 조용히 두 소녀를 향해 말했다.
“통행세? 흐응…… 하지만 뮤는 지나갈 건데?”
“맞아. 약한 주제에 왜 헤라의 앞길을 막는 거야?”
각기 특유의 힘을 발휘하며 도발을 가하는 두 심연의 공주가 손짓하자 그녀들의 뒤에 있던 거대한 코끼리 형태의 괴물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바라보는 자를 심연의 어둠 속으로 내던지는 힘을 지닌 괴물.
하지만.
-뿌우우우우우우우!!!
비명을 지르고 쓰러질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나는 멀쩡했고, 코끼리의 형태를 한 심연의 개체 아판이 괴성을 내지르며 무너져 내린 것이다.
“정신 공격은 나도 잘해. 꼬마 아가씨들.”
“너…….”
물론, 겉모습만 저렇지 실제는 괴물 같은 년들이지만.
내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뮤라 불린 심연의 공주가 어두운 힘을 내뿜기 시작했다.
“얌전하게 굴면 아프지 않게 가지고 놀 생각이었는데.”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스산한 기운을 내비친다.
“좀 아플 거야.”
“오냐.”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눈앞의 이 심연의 공주 둘은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다.
그리고. 그 정보의 부족은 곧 어떤 결과를 낳아버렸다.
나를 향해 사뿐사뿐 다가오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공기를 응축시켜 걷어차 날린다.
자신의 방어력에 자신이 있던 뮤는 어떤 대처도 하지 않고 그것을 막아내려 했다.
콰직!!
하지만.
내가 응축시킨 바람은 정확히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버렸고.
그녀의 몸을 수십 미터나 멀리 날려버렸다.
“어? 뮤?”
“어때. 아프지? 니들 종족의 힘인데.”
도발하듯 내가 말하자 뮤가 눈을 부릅 뜬 채 몸을 비틀고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한다.
“끄으으으윽?! 끄윽…… 이, 이게 대체 무슨?!”
경악스러운 통증. 제대로 회복조차 되지 않는 육신.
내가 그녀에게 사용한 건 금기의 힘도 아니었다.
그녀들과 같은 존재. 심연의 공주 베르샤의 저주일 뿐이었다.
“이…… 이게 무…… 꺄아아아악!?”
“내 손에 죽은 심연의 공주가 몇인데. 어디 되다만 것들이…….”
육체능력은 울드와 비할 바 못 되고. 특수한 힘은 베르샤나 슬리지아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이나 다름없다.
하물며 당장 지금의 내 상태로는 슬리지아가 와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인데 고작해서 저 정도밖에 안 되는 심연의 개체들로 나를 막아선다?
결과가 다를 수가 있기야 할까.
“충분히 재밌게 즐겼잖아. 안 그래? 이제 이쪽도 재미 좀 봐야지.”
“닥쳐!!”
섬뜩한 표정으로 소리 지르며 공격을 가하는 그녀의 공격을 그대로 받아내자 그녀의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졌다.
“어…… 어떻게 인간이…… 아니 어떻게 힘이 먹히질 않는 거야?!”
“그거야 니 선배들한테 물어봐.”
슬리지아가 적어도 선배겠지.
당황한 그녀가 내게서 벗어나려는 그 순간.
손에 쥐어진 청단이가 푸른 검기를 발현했고. 금기의 힘과 뒤섞인다.
위험을 감지한 뮤가 눈을 크게 뜨고 형체를 일그러뜨려 거대한 괴물로 순식간에 변했다.
그리고 반격하듯 내 머리통을 쥐어 터뜨리려 했지만…….
그녀의 손에 닿았을 때 청단이는 휘둘러졌고 그녀의 뒤편에 있던 수백 마리에 가까운 심연의 개체들과 함께 그녀를 조각내버렸다.
침묵이 감돈다.
뮤가 조각나버리자 경악한 남은 심연의 공주 헤라가 눈을 부릅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심연의 공주인만큼 죽진 않았겠지만 저렇게 조각이 나면 회복하는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뭐해. 그쪽은 안 덤벼?”
내 도발에 헤라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