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1화
“찢어 죽여버리겠어!!”
격노한 헤라의 외침과 동시에 사방의 지반이 무너져 내리며 그 안에서 거대한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사방을 찢고 나온 괴물들이 일제히 나를 노리고 파고들었다.
치외법권 같은 힘을 지닌 존재.
기본적으로 심연은 동전 앞면의 세계의 법칙에 대해 상당히 불친절하기 그지없다.
같은 마법을 써도 저들에겐 거의 먹히지 않았고. 저들의 공격은 이쪽에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사실상 심연의 공주든 심연의 존재가 위험하게 여겨지는 건 그 때문이리라.
실제로 심연의 존재를 죽이기 위해선 압도적으로 강한 출력의 힘으로 짓누르거나 그들의 힘을 사용해 대항하는 방법, 혹은 유일하게 나만이 가지고 있고 나만이 다룰 수 있는 헤라클래스의 힘. 금기의 힘을 다루는 법뿐이다.
그런 만큼 저들에겐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 세 가지가 모두 해당될 수 밖에 없다.
-키아아악!!!
마치 랩터처럼 생긴 심연의 개체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나를 향해 덤벼들자 내 뒤에 숨어있던 각성자들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조심하세요! 저놈들 때문에 예카테리나 씨가 큰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게 누군데 X덕아.
위험하다 외치는 그들을 무시한 채 한 발 내디딘 나는 순식간에 파고 들어와 나를 물어뜯으려는 수백 개의 이빨이 박힌 입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쩌어엉!!!
동시에 거대한 소닉붐이 일어나며 놈의 거대하고 단단한 입이 마치 거대한 프레스에 찍혀버린 것처럼 뒤틀려버렸다.
한 마리를 순식간에 쥐포로 만들어버린 주먹이 일순간 빛을 뿜어낸다.
[천지 아수라패황권]
쩌어엉!!!
그리고, 뒤따라 돌진하는 또 한 마리의 랩터와 흡사한 심연의 괴물을 포함한 수십 마리 괴물들의 머리통이 빛으로 이루어진 일격에 터져나갔다.
압도적인 무력에 숨을 삼키는 소리조차 조용히 묻혀나갔다.
사방에 터져나간 것은 좀 전까지 괴물이었던 것들의 피였다.
순식간에 대량의 심연 개체들을 지워버린 나는 스산한 표정으로 파고든 헤라를 향해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파고들었다.
“이 건방진 게!!”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의 팔을 거대한 안개로 바꾸며 덤벼들었다.
푸쉬이이이익!!!
동시에 검은 안개에 닿은 내 팔이 검게 변색된다.
“아하하하하하하!! 역시 착각이었어!!”
그녀가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리며 내게 소리 질렀다.
“그래! 한낮 홀른 주제에! 감히!! 뮤!! 얼른 일어나!”
이윽고 헤라가 조각나버린 심연의 공주 뮤를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녀는 헤라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어나지 않았다.
“뮤? 장난치지 말고 일어나! 네가 그깟 공격에 죽을 리 없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아!”
서서히 내 팔을 검게 부식시켜가는 그녀의 힘이 점차 격렬하게 퍼져나간다.
“자…… 장난치지 마…… 응?”
조각나버린 뮤의 시체를 향해 소리치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죽었으니까 못 일어나지.”
“뭐라고?!”
“솔직히 심연의 공주라기에 조금 긴장한 내가 멍청했다.”
가장 약하다 생각했던 천중원의 심연의 공주 둘조차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로써 확실해진 기분이었다.
심연의 존재. 위협적이고 치명적이지만 이들은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 전자 제품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그 사실을 확인한 이상 내게 거리낄 것은 없었다.
“니들. 심연의 공주 하나가 여럿으로 분열된 뭐 그런 건가 보지?”
지금 떠오른 가능성은 그게 전부였다.
다만.
“실화세요?”
그녀의 반응을 보니 그게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다급한 상황에 머릿수는 부족하니 급한 대로 전력을 분산시킨 것이다.
콰직!!!
그 말과 동시에 내 팔을 잠식하던 검은 기류가 순식간에 사라지며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자 헤라의 표정에 경악이 서린다.
“어…… 어떻게…….”
“걱정 마. 효과는 확실했는데 겉보기엔 멀쩡해진 것처럼 보이는 거니까.”
이 이상 팔을 잠식하던 그녀의 힘이 파고들지 못한다. 금기의 힘이 발현되며 그것이 모조리 떨어져 나갔지만 처음 부식 당했던 부분은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리커버리.]
이윽고 신성 마법을 통해 부식된 피부를 다시 원상태로 복구하자 헤라는 흡사 괴물을 보는 듯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 무슨 이런 말도 안 되는…….”
콱!!
그리고. 뒷걸음질 치며 도망치는 그녀에게 동조했는지 수십의 기괴한 형상을 지닌 심연의 개체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일단 너희부터 시작하자.”
의식이 시작된 이상 사나흘 간은 지구로 넘어오는 빌어먹을 심연의 존재를 모조리 박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니.
여기서 발목을 묶일 순 없다.
나는 청단이를 들고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청단이. 아빠 말 잘 들으면 끝나고 와플 사줄게.”
[와…… 와플!]
[홍다니도! 홍다니도 머글래!]
홍단이도 질세라 외쳐대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좋아. 말 잘 들으면 두 개!”
[홍다니 할 수 이써!]
의욕이 활활 타오르는 두 검을 부드럽게 회전시키듯 잡은 내가 겁에 질린 반푼이 심연의 공주 헤라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마…… 말도 안 돼…… 말도 안 된다고!”
그녀는 아직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듯했다.
* * *
“커헉…… 컥…….”
사방은 검은 피로 가득하다.
“우…… 우리는…… 하나…….”
좀 전까지만 해도 앙증맞은 소녀였지만 이제는 기괴하고 거대한 살점 덩어리가 되어버린 심연의 공주. 헤라의 시신을 짓밟은 나는 말 없이 청단이를 들어 그녀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심연의 존재들이 나타나 일방적으로 각성자들을 유린했다면 이번엔 이쪽에서 심연의 존재들을 일방적으로 유린한 꼴이다.
그들로썬 날벼락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나라는 존재를 제외하면 그들을 이토록 처참하게 짓밟을 존재는 사실상 이 지구에 없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니까.
“흐음…… 문제는 시베리아 벌판뿐만이 아닌데.”
심연은 아주 작정하고 있는 전력 없는 전력을 다 끌어내 의식을 방해할 터.
대체 무슨 수로 넘어오는지는 모르겠다만. 넘어올 가능성을 얻은 이상 무조건 놈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저쪽은 계속해서 전력을 밀어붙이고 나는 저들을 하나하나 빠르게 찾아내 박멸해야 한다.
문제는 케인이 의식에 집중하는 이상 심연의 존재를 곧바로 찾아낼 존재라고 해봐야 베르단데뿐이라는 점이었다.
“이럴 때 좋은 방법이 있지.”
“저…… 저기…….”
내 미소에 한 러시아 여성 각성자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그녀를 포함한 각성자들은 죽을 위기에서 너무도 쉽게 그들을 구해내 버린 나라는 존재가 상당히 놀랍고 어렵게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마침 러시아는 강대국이기도 하고.”
내 혼잣말에 그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구해줘서 고마워요?”
내 물음에 그들이 침묵한다.
“그럼 나를 당신들의 대통령이 있는 곳으로 좀 데려가 줬으면 합니다.”
내 말에 그들이 의아한 듯 서로의 시선을 마주했다.
* * *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쿠틴은 눈앞의 청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갑작스레 러시아 영토를 침공한 정체불명, 괴이쩍기 그지없는 괴물을 막기 위해 각성자를 보냈었다.
하지만 들려오는 보고는 전멸. 전멸. 혹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
이쪽의 공격은 먹히지도 않는데 저쪽은 마치 장난감 다루듯 각성자와 군부의 전력을 찢어발겼다.
몬스터와는 그 격부터가 다른 압도적인 힘에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찰나.
그가 나타난 것이다.
쿠틴도 그를 알고 있었다.
모르는 이들도 많지만 사실 쿠틴은 그가 예전 이벤트맵에 출현했을 때부터 그곳에 있기도 했었을 만큼 알프 온라인을 굉장히 좋아하는 편이었다.
의외의 모습이라고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간이 크게 꺼내는 인간은 없었다.
“홍차 맛이 좋네요.”
“마음에 든다니 다행입니다. 우리 러시아의 불곰은 티오니스 성자의 도움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 제가 하는 일을 조금 거들어주시지요.”
타 차원에서 넘어온 성자. 라운 왕국의 왕자 데이비 올 라운의 말에 쿠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들어달라 함은 어떤 걸 말하는 것인지요.”
그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각국 통수권자들의 정보가 조금 필요합니다.”
“정보?”
“시베리아 벌판에서 튀어나온 그 괴이쩍은 놈들을 보았을 겁니다.”
“예. 인공위성을 통해 파악하곤 있었습니다.”
“그놈들 그냥 두면 지구가 부서지는 건 한순간입니다. 이미 저들의 손에 몇 개나 되는 차원이 개 박살이 났으니까요.”
데이비의 발언에 쿠틴의 표정이 살짝 꿈틀거렸다.
“차원이 박살났다라…….”
“놈들이 지금 겉보기엔 별거 없어 보이지만 실질적인 전력은 거의 나타나지도 않았고 가장 위험한 작자도 알프 온라인에 가둬놓았기에 아직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지요.”
“설마…….”
그는 분위기나 생긴 것과 다르게 알프 온라인의 골수팬인 만큼 그 영상을 이미 접한 바 있었다.
데이비와 충돌한 고딕풍 드레스를 입은 소녀를 말이다.
“단 한 명만으로 세상을 파멸시키는 괴물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바로 심연입니다. 그곳에 대해서 알려고도,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만큼 위험하니까.”
“정보는 어떻게 사용하려고 하십니까?”
식은땀을 흘린 쿠틴이 조심스레 묻자 데이비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다 쓸데가 있지요.”
* * *
[사진]
[사진]
[사진]
핸드폰의 커뮤니티 어플인 두리안톡에 몇 장의 사진이 올라간다.
사진의 공통점은 기괴하여 설명이 어려운 괴형체의 괴물들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삐릭.
-데이비 올 라운 님이 도널드 드럼퍼 님, 엘리자베스 님, 장핑 님, …… 카카루시 님을 초대하셨습니다.
한순간에 방에 수십 명이 초대된다.
[보상이 좋은 쪽을 선착순으로 정리해드립니다.]
[???]
[이게…… 무슨?]
[뭡니까.]
순식간에 채팅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말씀드려야 하는데 하나하나 찾아서 말씀드리자니 복잡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현재 각국에 균열이 생겨나고 이전의 몬스터와는 완전히 다른. 각성자들의 공격조차 제대로 먹히지 않는 괴물들이 나타나고 있을 겁니다. 물론, 자선사업가가 아니기에 내건 보상이 좋은 쪽을 우선으로 정리해드립니다. 하나하나 찾아가기 귀찮네요.]
그 말에 아직도 혼란스러운 듯 물음표와 이게 무슨 상황이냐 묻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그중 몇몇은 말도 없이 채팅창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이들은 다른 선택도 내렸다.
[도널드 드럼퍼] - 10억 달러. 선금이고 이후 도움을 더 줄 때마다 그에 따른 보상을 제공하겠습니다.
가장 눈치가 빠른 미국의 대통령이 딜을 시작하자 뒤질세라 영국의 여왕도 나섰다.
[엘리자베스] - 같은 조건, 달러로 11억을 걸겠습니다.
[장핑] - 그대로 받고 티오니스에서 필요한 물자를 지원하겠소. 우리 중국의 자본은 세계 제일의 시장이오.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중국의 통수권자 장핑의 대사에 다른 대통령들이 아뿔싸 하는 듯 하나둘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한다.
“더 없습니까?”
데이비의 한마디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마치 서로의 눈치를 살피듯 각국의 대통령들은 갑작스레 초대된 이 두리안톡에 집중했다.
[야베 산조] - 세상에…… 다국가 대통령들이 한 채팅방에 모여 경매를 하다니…….
[한 대통령 조수환] -야베 산조 씨. 마음에 안 들면 나가면 됩니다.
마치 경매하듯 자국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각국의 대통령들이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서로를 견제하며 점차 높은 대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카푸차] - 돈은 그렇게 많이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텅스텐과 원유가 풍부합니다. 5억 달러에 대량의 텅스텐과 원유를…….
미 대통령과 영국 여왕의 선공에 이어 뒤질세라 상황의 심각함을 인지하고 있던 대통령들이 급히 대가를 올리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통해 두리안톡의 현황을 지켜보던 러시아의 대통령 블라디미르 쿠틴은 벙찐 표정으로 스산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이보게. 분명 타 차원에서 온 왕자라고 하지 않았나?”
“예…… 각하…… 분명 그랬습니다만…….”
“아직 젊은 친구가 지구의 대통령들을 한국의 폰팔이들 경매하듯 굴려대고 있군…….”
단순히 웃긴 상황 같은데 그렇지도 않았다.
이미 사정을 간단히 전해 들은 그는 데이비라는 이 티오니스의 성자가 고른 방식이 상당히 섬뜩하다 생각했다.
적의 위치를 쉽게 얻기 힘드니 그냥 한 번에 싸그리 모아놓고 도와준다는 핑계를 대서 적들의 위치를 파악한다.
그리고 일국의 왕자로서 왕국에 도움이 되는 대가까지 철저하게 경매로 붙여 뜯어먹는 악랄하고 치밀함까지.
“러시아에 저런 인재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생각한 그는 문득 그를 따르는 이들 중 데이비의 눈에 찰만한 미녀가 없는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데이비가 보여준 외교는 파격적이고 과격하면서, 효율적이었다.
* * *
케인이 절대보옥의 활성화를 위한 의식을 진행하기 시작한 그 시각.
륀느는 의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틀어막은 채 낭랑하게 주저앉은 채 주변을 멍하니 둘러본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앞으로 익숙한 인물이 다가왔다.
“륀느 양.”
“이곳은 위험하다고 판단. 륀느가 조속한 대피할 것을 권고.”
그녀의 앞에 나타난 건 다름 아닌 연희였다.
신연희.
현아의 언니이자. 데이비의 전생 삶에서 그의 누나였던 인물이었다.
분명 병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이런 곳에 있을 리 없는데.
그런 생각이 미친 륀느는 당장이라도 라이트 세이버를 소환할 준비를 마쳤다.
이윽고 경계를 한 채 묻는 륀느의 질문에 그녀가 움찔거렸다.
“경고. 이 이상 접근하면 위험하다고 판단. 륀느의 개인 재량을 동원하여 사태를 제어할 권리가 있음을 명시.”
륀느의 발언에 신연희가 움찔거렸다.
“경고. 스캔 결과 인식 장애가 있음을 확인. 당신은 연희 님이 아니라고 판단.”
륀느가 라이트 세이버를 뽑아 들고는 평야에 홀로 나타난 연희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어설픈 위장은 금방 들킨다고 륀느가 판단. 그것을 륀느가 낮게 평가.”
륀느의 말에 잔뜩 위축되어있던 연희의 표정이 일순간 바뀌었다.
“…….”
고요한 침묵이 감돈다.
“1만 년이 지나도 당신은 이해할 수 없군요.”
그 한마디에 륀느의 표정이 무거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