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7화
[이 의견이 맹주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붉은 공허는 계속해서 허기에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허기?”
[태초의 신이 죄를 범함으로써 생겨난 공간이니까요. 그렇기에 불안정하고 과도기에 있습니다. 그렇게 불안정한 주제에 막대한 힘이 응집된 이곳은 끊임없이 프리아 여신의 흔적을 갈구합니다. 당신처럼 살아있는 존재를요.]
“그래서?”
[이곳의 지배자가 되십시오. 그리고 그녀를 데리고 와 이곳에 종속시킨다면…….]
“아비트. 난 타나토스를 찢을 방법을 물었는데.”
[실례합니다. 맹주.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터무니없는 목표라 제가 아는 유일한 방법을 제시해드린 것입니다.]
너무도 태연자약하게 그가 단언한다.
[과거부터 수많은 강자들이 존재했지만, 그들조차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 태초의 의지들입니다. 반신들이 세계와 동화되어 만들어지는 세계의 조율자 혹은 창조주. 애초에 신은 싸워 이길 수 있는 개념이 통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더 강한 개념으로 밀어내 입지를 좁히는 것일 뿐.]
신은 생명체가 아니다. 하나의 개념, 혹은 초월적인 의지의 집합체와 다를 바 없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 초월적인 의지 자체를 말살하면 되지 않는가 할 수 있지만, 그 말인즉슨 세계를 파괴시키겠다는 뜻과 일맥상통한다.
지금 넬타리드의 일면, 파괴를 강제적으로 소멸시키면 지구가 박살 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헤라클래스는 이곳의 지배자가 된 건가?”
[1대 맹주께서 이곳의 지배자이시던 시절. 이곳은 제어되지 않은 혼란투성이였습니다. 지금이야 그가 그토록 오래도록 노력했으니 이 정도지, 본래 세상이 새로 태어나는 건 부단히 어려운 법이지요.]
절대 신과 그 절대 신에게 반기를 든 두신의 삼파전.
그로 인해 생겨난 신의 죄가 만들어낸 세상.
당연히 그 붉은 공허는 세상을 조율할 존재를 필요로 한다.
“애초에 신이 이렇게 탄생하는 건가?”
[3만 년이나 됐지만 저는 아직도 그 사실을 쉽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다만 프리아 여신과 다르게 넬타리드와 타나토스는 모두가 신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반신에서 신이 된 이들이죠. 맹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주께선 이미 한차례 인간의 업을 벗어나셨지 않습니까.]
그가 나를 설득하듯 속삭였다.
[붉은 공허의 신이 되십시오. 반신인 맹주라면. 또 1대 맹주의 힘을 다룰 수 있는 당신이라면 어렵지 않게 붉은 공허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넌 이제 쉬고?”
[허허. 당연한 말씀을.]
그의 웃음소리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이고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가 거대한 머리를 내게 가져다 대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방금 기괴한 생각이 들었는데 말이야. 넌 이런걸 왜 이렇게 잘 아는데?”
[…….]
“내가 맞춰볼까? 지금 네가 제안한 방법이 헤라클래스와 네가 처한 상황과 완전히 같은 거 아닌가?”
내가 그의 코를 툭 후려치며 묻자 그가 침묵했다.
[무분별한 변화는 좋지 않습니다.]
“다른 방법…….”
[3만 년을 기다리게 하셨습니다. 맹주.]
“널 기다리게 한 건 헤라클래스지, 내가 아니다 아비트.”
그의 표정이 엄하게 변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이 저를 구원해주리라. 제게 영원한 안식을 안겨주리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이렇게 외면만 하실 겁니까?!]
“아, 백 년도 못 기다려?!”
[1000년을 기다리고 만년을 기다려도 1년이란 시간이 긴 건 변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을까.
조용히 있던 그가 말했다.
[그럼 정말 백 년입니까?]
“아니…… 한 500년만 기다리자.”
[맹주!!!]
“신혼생활은 즐겨야 할 거 아니야 이 새끼야!”
[어차피 실패하면 신혼생활이고 뭐고 다 날아가는 거 아니었습니까?!]
“도움 안 될 거면 그 입 다물어.”
내 타박에 아비트가 꿍얼거리며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가십시오. 방법은 찾아보겠습니다. 다만, 타나토스는 신입니다. 즉 고정된 육신이 없지요. 대신할 육신만 있다면야…… 아 물론 쉽다는 건 아닙니다. 신을 담을 육신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절규하는 그를 두고 나는 결국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 * *
심연이 갑자기 수그러들면서 지구의 상황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사실상 저들의 대규모 침공이 시작되면서 지구에는 너무도 많은 인명피해가 생겼다.
과거의 찬란하던 지구촌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당장 몬스터가 습격하지 않기를 바라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각성자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지만 흉신이 그 꼴이 났음에도 몬스터의 침공은 멈추지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향후 수백 년간은 멈추지 않으리라.
“방법을 찾아야 해…….”
그동안 페르세르크가 심연에 끌려가지 않게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녀의 죽음이 확실시되는 마왕의 좌를 찬탈해 신의 분노를 사기도 했고, 그녀의 힘이 폭주하기에 반신에 이르러 그녀를 강제로 환골탈태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뭐?
그녀가 타나토스 그 자체이니 무슨 짓을 해도 그녀를 구할 수 없다고?
콰앙!!
나는 인적이 드문 강원도의 한 숲속을 파괴하며 이를 악물었다.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선 조용한 곳이 필요해서 찾아왔건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프리아 여신이 내게 말했었다.
수천 번을 반복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그 당시엔 내가 미래를 바꿀 거라 장담했건만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은 너무도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의식을 막아도 그녀가 타나토스에게 완전히 먹히는 건 기정사실.
그 어떤 발버둥으로도 그것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가장 화가 났던 것은 그녀가 나를 믿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왜 말하지 않은 건데…….”
그녀는 자신이 점차 타나토스 그 자체에 먹혀들어 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차라리 그 사실을 일찍 말해주었다면 이렇게 시간이 촉박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는 의식이 완성되는 그 순간까지 말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가 위험에 빠질까 봐.
무리한 선택을 할까 봐.
그녀는 끝까지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그런 행동이 나를 너무도 화나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제 와서 의식을 막는다?
가능은 할 것이다.
세상도 세상이지만 페르세르크는 이제 나의 한편이 되었고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하…….”
아공간에서 꺼낸 열반주를 벌컥벌컥 들이킨 내가 비어버린 열반주의 주둥이를 콱 틀어잡았다.
-스스스슥…….
그때 귓가로 작은 소리가 들려온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에는 단검을 들고 긴장한 채 나를 바라보는 고블린 무리가 있었다.
“…….”
-키익…… 키이이이익!!!
녀석들은 긴장한 표정으로 마치 레이드라도 하듯 포위하고 파르르 떨었다.
겁에 질린 주제에. 그래도 싸우겠다고.
그렇다면 그 용기. 가상하게 여겨주리라.
와장창!!!
나는 열반주의 단단한 병을 바위에 내리쳐 부순 후 날카롭게 벼려진 병 끝을 놈들에게 겨누었다.
“다가오지 마.”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현재 종족을 불문하고 전해진다.
그 탓에 고블린들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곧 이어지는 내 말에 파랗게 질렸다.
“내가 갈 테니.”
푸욱!!
순식간에 파고든 내가 병 끝으로 고블린의 목을 찍어누르듯 짓밟고 꿰뚫어버렸다.
“방법을 찾을 거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 의식을 파괴해버릴 것 같으니까.
어지간해선 최대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던 페르세르크가 내 품에 안겨서 엉엉 울지 않았나.
미안하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더 이상 그녀로 인해 내가 위험해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며 울던 그녀의 목소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키아아아악!!
-캬아아아악!!
괴성을 내지르며 고블린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치기 시작했다.
애초에 싸움이 안될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듯싶었다.
눈물 콧물 다 짜내며 내게서 도망치려 했지만 나는 마치 홀린 것처럼 놈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목을 꿰뚫어버렸다.
“…….”
그 와중에 한 마리가 도망쳤던 모양이었다.
필사적으로 달려가는 놈을 쫓아 비틀거리며 쫓아갔을 즈음이었다.
나는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변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
흉신도 해결했고 심연도 짓밟아 놓았다.
이제 다 이겼는데…….
다 끝났는데…….
이제 남은 건 하인스 영지로 돌아가 곧 결혼할 윈리나 바리스의 결혼식을 축복해주고 에이리아와 페르를 데리고 취미생활을 하며 유유자적하며 살아가면 되는데.
왜 마지막에 와서 이렇게 된 것일까.
사태가 이 지경이 된 직후 페르세르크는 계속해서 나를 피하고 있었다.
아마 내 눈을 마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으리라.
다 필요 없는데. 지금이라도 내게 안겨 사랑한다는 한마디만 해주어도 미소가 지어질 텐데.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그렇게 물어본들. 프리아 여신이 해줄 대답은 하나뿐이지 않을까.
수천 번을 반복해도 바뀌지 않는 미래. 그래도 같은 선택을 할 거냐고.
그 당시엔 그렇게 할 거라 했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시도를 하면서도 나는 절대 그 목표를 잃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와서 발목을 잡히게 될 줄이야.
“당신은 그래서 자비가 없는 양반이야.”
신이면 뭐라도 좀 해보라고. 같은 신의 싸움에 제발 멀쩡히 잘 사는 인간 끼워 넣지 말고.
나는 그녀의 거래자. 그녀의 흥미를 이끌었던 자.
반면 사랑을 받지는 못했던 자였다.
어쩌면 이번 삼신의 전쟁이 마무리되면 그녀는 내게서 신성력을 거둬갈지도 모를 일이다.
그냥 내줄 생각은 없지만.
투덜거리듯 주정을 부리며 피가 묻은 병을 휙 던져버린 나는 도망치던 마지막 고블린까지 찾아 찢어버렸다.
“사연 없는 무덤은 없다고 했지.”
나는 페르의 무덤을 만들 생각이 없다.
“자애로우신 프리아 여신이시여. 당신의 어린양이 간청하옵건대. 이번 시련은 내가 도저히 어떻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치트키 좀 칩시다. 당신이 도와주세요. 그러지 않는다면…….
“콱 심연에 붙어버릴라니까.”
시위 아닌 시위를 하던 도중이었다.
갑자기 내 손목에 있던 넬타리드의 성흔이 빛난다.
[시련은 이겨낼 수 있기에 시련이라고 하는 것.]
“넬타리드?”
[나의 성흔을 받은 자. 프리아여. 기억하라. 신은 개념이되 육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파괴와 힘 싸움을 하기에 어떤 간섭도 할 수 없는 신이 내게 보낸 계시.
나는 아비트와 똑같은 말을 하는 그의 말에 곰곰이 생각을 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가.
[나의 성흔을 받은 자, 프리아여.]
“나는 데이비입니다.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마세요.”
[기회가 있으리라.]
두리안 톡! 두리안 톡!!
그때였다.
다급히 올라오는 두리안 톡의 착신음에 말없이 핸드폰을 들어 올린 나는 톡에 올라온 미 대통령 도널드 드럼퍼의 다급한 개인톡을 볼 수 있었다.
단체톡은 몰라도 개인톡은 모두 잠가놨을 텐데?
해킹이라도 당했나?
미국의 저력을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도와주세요! 뭐든 하겠습니다. 국민 수백만이 죽게 생겼습니다! 도와주세요!]
그 말과 함께 몇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사진에는 너무도 익숙한 이가 있었다.
검보랏빛의 고딕 레이스 풍의 드레스. 검보랏빛의 양산을 쓴 소녀.
심연에서 현재 가장 위협적이고 가장 강하며. 몰락한 심연과 다르게 유일하게 나를 압박하고 있는 최후의 전력.
알프 온라인에 가둬놓았던 그녀가 결국 해방되었다.
대체 어떻게?
그녀는 지구의 인간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이제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텐데.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 먼저 나는 다른 생각이 들었다.
“가만. 쟤도 심연이잖아.”
그것도 슬리지아같은 최상위 심연의 공주조차 감히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절대 강자.
“…….”
평소라면 차례를 기다리라며 넘겼을 테지만 나는 곧바로 양손을 강하게 부딪쳤다.
짜악!!
동시에 주변의 자연 지기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나의 부름에 응하여 소환될지니.”
[태초의 바람이여.]
강력한 강풍이 몰아친다.
[신의 말을 전하는 가벼운 울림이여.]
만물을 관장하는 생명의 원천이 되는 자. 나의 요청에 응하여 이곳에 나타날 지어라.
방대한 정령 에너지가 모여들기 시작했고 나는 내 앞에 모여든 거대한 태풍을 향해 말했다.
“곧바로 바다를 넘을 건데 좀 태워줘라. 아 참, 거리비례 할증 없지?”
내 말에 태풍이 요동친다.
정령왕을 소환하기 위해선 강대한 힘과 염원이 필요하다.
가능할지 불가능할지 몰랐는데 자기만 당할 수 없다며 이를 부득부득 가는 세 명의 정령왕 노예들이 아주 작정하고 나를 위장시켜놓은 듯 보였다.
어서 와라. 한번 잡혔으니 넌 돌아가지 못한다.
[음? 어떻게 이런 인간이 나를 소환한…… 이게 뭐야. 노아스와 엘라임에 이프리트의 힘?!]
“됐고. 계약할 거야 말 거야. 제비 자식아.”
내 말에 분노한 바람의 정령왕이 강대한 폭풍을 일으켰다.
[닥쳐라!! 하찮은 미물이여! 감히 바람의 정령왕에게 제비라는 불손한 단어를…….]
“계약.”
말을 하던 바람의 정령왕 실피드가 움찔거렸다.
느끼한 인상의 남성의 모습으로 변한 녀석이 내게 짓눌린 채 눈을 부릅떴다.
[무…… 무슨…….]
“할 거야, 안 할 거야.”
내가 던져버린 병의 날카로운 부분으로 놈에게 겨누며 말했다.
“지금 내가 곧바로 바다를 건너야 하거든? 그런데 날 수 있는 놈들 중에 동원 가능한 게 너뿐이더라.”
이클립스.
지금 내가 만나러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