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8화
침묵하는 데이비가 페르세르크의 심층세계. 아니 그녀가 갇힌 심연의 일부로 들어간 지 10분이 지났다.
바깥과 안의 시간 차이는 어느정도 괴리감이 든다.
륀느는 품에 안은 두 자루의 검을 꼭 끌어안은 채 묵묵히 기다렸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데이비의 육신이 이따금 영혼과 링크되어 움찔거리긴 하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정신력이 빠르게 약해지고 있어. 이대로라면…….”
데이비의 상황을 보던 베르단데가 제 손톱을 물어뜯으며 중얼거린다.
“안돼…… 벌써부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베르단데의 외침과 동시에. 데이비에게서 변화가 일어난다.
“륀느, 빠른 상황해석을 요구.”
“타나토스의 함정이야! 데이비가 심연에 잠식당하고 있어! 이대로라면 아무리 그라도 빠르게 미쳐버릴 거야!”
미쳐버린다는 뜻은 간단하다.
데이비도…… 이클립스처럼 망가지고 괴물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런 베르단데의 불안함이 적중하듯 움찔거리기만 하던 데이비의 몸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압해야 돼! 그가 날뛰지 못하게 시간을 끌어!”
베르단데의 외침에 륀느는 청단이 홍단이를 뽑을까 망설이다 이내 천천히 검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뜬다.
등허리에 난 작은 날개가 거대화하며 이내 세 쌍의 날개로 변하고 그녀의 머리 위 원고리가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한번 각성한 이후 세피로스화를 어렵지 않게 펼쳐내는 수준에 이른다.
기계장치의 신은 그녀의 그런 부분까지 성장시켰다.
물론 지금 상태로 세피로스화를 유지하는 건 길어야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이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세피로스화를 하지 않으면 데이비를 막을 수 없다는 게 륀느의 판단이었다.
그의 명령대로…….
절대로 그가 날뛰게 둘 수 없었다.
휘적거리며 일어나는 데이비를 향해 륀느가 천칭을 녹여낸 창을 들고 그를 바라본다.
천천히 침묵한 채 일어서는 데이비의 몰골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본래 인간의 형태였으나 지금 그의 몸엔 검은 핏줄이 돋아나고 눈의 흰자위가 검게 변해있었다.
묵묵히 침묵하던 그가 손을 천천히 내려 세운 채 펼쳤다.
스스스슷…….
동시에 그의 손으로 검은 안개가 모여들며 검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쩌어엉!!!
그리고.
검이 완성되기가 무섭게 그가 검은 검을 허공에 휘둘렀고 어마어마한 풍압이 주변의 모든 것을 날려버렸다.
페르세르크의 저항에 이어 이제는 데이비까지 미치기 시작했는지 데이비의 육신이 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온몸에 오한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충격파를 버텨낸 륀느가 입을 꼭 다물고 창을 꽉 쥐었다.
“데이비 님의 안전을 최우선 순위로. 륀느. 제압을 이행.”
그 말과 함께 륀느의 몸이 섬광처럼 쏘아져 나가며 그대로 데이비를 향해 창을 찔러 넣었다.
카아앙!!!
하지만 그녀가 내지른 회심의 공격이 무색하게 데이비는 고고하게 선 채 검은 검으로 륀느의 창을 빗겨내고 손을 뻗었다.
콱!!!
그리고는 륀느의 목을 틀어쥐고는 그대로 그녀를 지면에 내리찍어버렸다.
콰아아아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주변의 지면이 내려앉는다.
“크으…….”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는 륀느를 그는 이성이 사라진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반신급 정신체도 못 버티는 공간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버텨! 그가 돌아올 때까지!”
베르단데의 외침에 륀느는 전신이 뒤틀리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이 잘못되면 청단이 홍단이를 이용해 그를 죽이라 명령했다.
하지만.
륀느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니. 하고 싶지 않았다.
“륀느…… 뛰어난 전투 골렘…… 임에 의거. 데이비 님이 상처 입지 않는 선에서 저지하는 방법을 채택.”
그 대가가 다시 한 번 그녀의 심장이 멈추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했다.
* * *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정신적인 고통은 계속해서 나를 압박한다.
지금 내가 보고 맡고 듣는 모든 것이 거짓이다.
실제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냄새가 맡아지질 않으니
심연이 만들어내는 공포는 끝이 없었다.
유일하게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 금기의 힘이라지만 베르단데의 힘으로 나를 유지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금기를 발현했다간…….
문제가 심각하게 변한다.
금기의 힘은 이로운 것 해로운 것을 가리지 않고 독립해버리니 말이다.
당장 이곳을 쳐다보고 있는 내 영혼이 다시 육신으로 끌려가는 것도 하나의 결과물일지 모른다.
타나토스는 내가 금기의 힘을 발현하지 못 하는 걸 잘 알고 있었고, 나를 끊임없이 유혹하며 절망하게 만들었다.
방법 자체는 다양했다.
마치 감각이 돌아오게 만든 것처럼 하여 내가 다시 페르세르크를 찾게 만들었는데 알고 보니 그건 내가 본 환각이고 수 시간 동안 헤맨 모든 것이 고작 30분 동안 진짜 내가 느낀 허상이었다거나.
내가 생각하는 가진바 일말의 두려움이라도 있는 존재를 모조리 주변에 가져다 놓은 것 같은 모습이거나.
애초에 타나토스는 나를 들여다보는 존재다.
근원까지 알아보기엔 힘이 부족한 듯 보였지만 기본적인 심층의식 정도는 우습게 넘나드는 만큼 타나토스라는 초월적 의지가 나를 뭉개버리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도 않았다.
처음엔 버텨냈다.
하지만 시간이 계속 흐른다. 삼십 분. 한 시간. 두시간. 네시간.
계속되는 어둠 속의 압박과 공포 속에서 내 정신력은 빠르게 고갈되기 시작했다.
정신적으로 지치고 절로 약한 생각이 든다.
페르세르크를 두고 도망쳐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십 번 들 만큼 이 빌어먹을 공간이 전해주는 정신 붕괴는 너무도 강했다.
버티는 게 용할 정도로 말이다.
강하게 반응하던 것과 다르게 시간이 흐르면서 이제 내 영체는 지칠 대로 지쳐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다.
[버티는 것도 한계일 테지.]
[이제라도 포기해.]
[이곳에 너는 갇힌 거다. 너는 그들에게 속아 버림받은 거다.]
[이곳에서의 천년은 그곳에서의 1초도 되지 않지.]
[네가 찾고자 하는 가련한 영혼은 네가 이곳에서 억겁의 시간을 헤매도 찾을 수 없다.]
계속해서 내 정신을 뒤흔드는 속삭임이 머릿속으로 직통으로 울려 퍼진다.
타나토스의 속삭임 하나하나가 내 정신에 직접적으로 닿으며 내 마음을 꺾고 부숴버리기 위해 계속해서 속삭여왔다.
타나토스의 한마디 한마디는 헛소리로 치부할 수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말은 현재 내게 와닿아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게다가. 더욱 심각한 것은 한번 그 사실 중 하나를 인정해버리는 순간 걷잡을 수 없게 될 거라는 사실이 피부가 저릿할 정도로 다가온다는 점이었다.
반신의 위계. 아니 회랑에서 어느정도 정신력이 강화된 이후 느껴 본 적 없던 근본적인 절망과 좌절 공포와 혼란이 계속해서 나를 잠식해갔다.
그럴수록 나는 움직임은 힘이 없어지고, 영혼의 떨림은 더더욱 심해져만 갔다.
점차 의욕을 잃으며 두려워하기 시작하는 나는 타나토스의 의도대로 점점 부서져만 갔다.
이대로 가다간. 누군가의 구원을 바라며 결국 완전히 집어 삼켜지리라.
범을 잡기 위해선 호굴로 들어가야 한다 했나.
문제는 호굴에 들어가서 범에게 잡아먹혀 버리면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는 것.
나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보호하듯 영혼이 된 내 몸을 웅크리고 한 손으로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듯 압박했다.
정신 차려라. 여기서 내가 무너지면…….
[아직도 저항하는가. 그래 본들. 얼마나 가겠나.]
그래. 아직은 버틸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내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었다.
페르세르크를 찾기 위해선 계속해서 움직여야 한다. 한곳에 머물러있을수록 타나토스 좋은 꼴일 테니까.
천천히 움직인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좀 전 보았던 환각. 끝이 보이지 않는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함이 일지만 어디 떨어지는 거로 겁을 먹을 내가 아니었다.
저벅…… 저벅…….
천천히 걸음을 이어나가면서도 나는 나를 보호하는 정신력이 빠르게 소모됨을 느꼈다.
* * *
결론부터 놓자면 나는 결국 그녀를 찾지 못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흘? 삼십일? 삼 년? 아니면…… 삼백 년?
시간의 개념조차 모호한 것이 고작 하루가 흘렀을 텐데 체감 시간은 몇 년은 흘러버린 기분이 들었다.
완전히 감각을 잃은 채 계속되는 공포가 몰려온다.
타나토스는 직접적인 접촉은 하지 않았다.
그저 음산하게 속삭이고. 환각을 보여주고 내 곁에 무언가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가 나를 보고 있는 것처럼 계속해서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
반신의 정신체이기에 어느정도 버텼지만 이게 계속될수록 서서히 지쳐갈 수밖에 없다.
타나토스가 가져다주는 환각과 고통 공포 혼란은 계속해서 새로운 것으로 바뀌었으니까.
그러면서도 타나토스는 끊임없이 나를 회유했다.
[두려운가? 두렵다면 손을 잡아라. 비록 프리아의 대리자이지만 나는 너를 아주 고평가한다. 나와 함께하자.]
[이 어둠은 내 말 한마디면 너를 해방시켜줄 수 있다. 자. 다 내려놓고 모든 걸 포기해라…….]
끔찍한 심연의 끝에서 나는 내 영혼의 형태가 기괴하게 변해버렸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반사적으로 알겠으니까 제발 그만하라 외치고 싶은 걸 억지로 내리누른다.
[나는 보인다. 네가 두려워하는 것이. 네가 이곳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이…….]
타나토스의 회유와 압박에 짓눌린 채 체감시간으로 몇 달이 더 흐른 느낌이다.
이 와중에도 내 정신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이곳 어딘가에 있을 페르세르크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또 다시 체감시간이 몇 년이 흘렀다.
정신이 뒤틀리고 부서진다.
지칠 대로 지친 나는 이미 바깥의 나는 죽은 게 아닐까. 나는 영원히 이곳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게 아닐까.
베르단데가…… 또 다시 배신을 한 게 아닐까. 그런 끔찍한 상상에 시달렸다.
보통이라면 트라우마가 생겨 덜덜 떨어도 이상하지 않으련만 나는 끝까지 버텨내며 계속해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또다시…….
체감시간으로 몇 년이 더 흘렀다.
이제는…….
생각할 힘조차 남지 않았다.
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게 누구였더라?
아, 그래. 페르세르크.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페르세르크라는 이름 하나뿐. 그녀의 얼굴도, 생김새조차도 목소리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 내가 왜 그녀를 찾아 헤매는지조차 판단이 서지 않았다.
이미 내가 누구에게 내 육신을 맡겨놓고 왔는지조차 잊어버렸다.
완전기억능력이 내 체질일진데 망각할 정도라면 상태가 많이 심각하다는 뜻일 터다.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그저 망상이고 착각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에 이르렀을 때.
나는 결국 정신이 비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걸음이 멈춘다.
체감시간 수십 년 동안 쉬지 않고 걸었다.
페르세르크를 찾기 위해 아주 희박한 가능성을 뚫고 내 정신의 가장 깊숙한 곳에 새긴 일념조차 이제는 침식당하기 시작했다.
또 시간이 흘렀다.
이제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완전히 부서진 나는 극도로 약해져 있었다.
공허해진 표정을 풀지 못한 채 걸었다가 쓰러졌다가를 수차례 반복했다.
[자…… 나와 하나가 되자. 나의 대리자가 되어라…….]
그의 속삭임에 나는 이제 저항하지도 못한 채 그저 멍한 표정을 고수했다.
“하…… 나…….”
이제는 타나토스의 목소리에도 반응하는 수준에 이르렀고 나는 두려움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조차 잊었다.
[조금만 더…… 금만…… 아주 조금만 더…….]
옅은 중얼거림에 나는 무릎을 꿇은 채 석상처럼 굳어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 나와 하나가…….]
타나토스의 속삭임을 들으며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내뻗어지는 손을 잡으려던 그 순간이었다.
툭…….
나는 내 품에서 떨어진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인데.
어째서 이것만큼은 확연히 보이는 것일까.
그것은 마나 아티펙트를 이용해 출력해낸 사진을 담은 펜던트였다.
사진에는 즐거운 듯 웃고 있는 남자와…….
그런 남자를 따라 거대한 봉우리를 뛰어넘으며 울상을 짓고 있는 은발의 소녀가 보인다.
그녀의 이름은…….
뭐였더라…….
[그런 건 아무 의미 없어. 자…… 내 손을 잡아.]
공허한 얼굴로 사진을 바라보던 중 내가 천천히 팔을 뻗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속삭임에 따라 펜던트를 으스러뜨려 부숴버리려던 찰나였다.
아주 잠깐, 그 짧은 순간 나는 들리지 않는 귀에 아주 작은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익숙한 화음이다.
너무도 부드럽고 매력적인 음률이다.
이 음악.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는데…….
[음? 이게 무슨?]
멍하니 있던 내게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점차 흐릿하던 화음이 선명해지자 멍하던 정신에 파장이 일었다.
그리고 멍하니 그 소리를 듣고 있던 나는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아공간에서 작은 악기를 하나 꺼내 들었다.
무기로는 쓸 수 없지만. 본래의 용도대로 악기로는 충분한 물건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손을 뻗었다.
마치 중풍이라도 걸린 것처럼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이 작은 악기의 현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아아아~
멀리서 들려오는 화음에 맞추듯. 나는 홀린 것처럼 손가락을 튕기기 시작했다.
목소리를 제외하고 내가 연주하는 악기의 음색이 귓가에 서서히 들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소리가 닿는다니?!]
동시에, 내게 남은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한다.
몸이 기억하듯 현이 화음을 따라 같은 곡을 연주한다.
그래, 이거.
조금 편곡하긴 했지만 모를수 가 없다.
편곡 자체를 내가 했으니까.
지구에 와서 페르세르크에게 들려주었던. 노래.
그녀에게 해준 선물이며, 그녀에게 내 마음을 담아 전해준 선물이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
잔잔하면서도 평범한 그 음악이 어둡고 깊은 심연의 끝에서 울려 퍼졌다.
마치 잔잔한 수면에 파장이 퍼지듯 울려 퍼진다.
내가 연주한 곡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화음과 맞춰 서서히 이 어두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갔고.
아주 먼 곳에서 이변이 일어났다.
[이게 무슨?! 어떻게 한낮 피조물이 초월의 의지에 발을?!]
파장이 강해진다.
화아아아아악!!!
동시에 나를 압박하던 끝도 없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힌다.
정신적으로 내몰렸던 정신이 멀쩡해지며. 기억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어! 감히 피조물이 초월의 영역에 발을 들이밀려 하는 것이냐?!]
“그딴 건 모르고.”
나는 내가 하는 게 뭔지. 이 목소리가 어째서 내 귀에 닿았는지도 관심 없다.
중요한 건.
페르세르크의 노랫소리가 그곳에서 들려온다는 것.
그 말과 함께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잠시 밝아진 공간은 다시 어두워졌지만. 나는 일어났다.
그리고. 영체가 된 손을 망설임 없이 뒤로 당긴 뒤 금기의 힘을 발현한다.
금기의 힘은 베르단데가 내게 걸어준 모든 보호마법과 지금 내가 영체로써 이곳에 있을 수 있게 해주는 힘까지 독립시켜버린다.
아주, 찰나의 시간이 주어진다.
그 안에 이곳에서 쫓겨나리라. 한번 쫓겨나면 다시는 같은 방법으론 돌아올 수 없지만 상관없었다.
애초에 나는 페르세르크의 심층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영혼은 애초에 내게서 먼 곳에 있지도 않았다.
그저 보이지 않는 앞을 갈구하며 걸어 나갔지만 정작 내 앞에 그녀를 가둔 감옥의 문이 존재했다.
높이는 수십 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석문. 기괴한 뱀의 형상이 그려진 문을 바라본 내 손에 힘이 모여든다.
여기 있었구나.
“문 열어.”
콰직!!!
한차례 신력이 서린 주먹이 석문을 후려친다.
쿠웅!!!
또 한차례.
[그만!! 그만둬라!!]
“문!”
내 외침에 그의 속삭임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후두둑 소리와 함께 석문이 거의 부서져 내린다.
“열라고! 개자식아!”
콰직!!! 콰르르르릉!!!
멈춤 없이 나아간 주먹이 문을 완전히 부숴버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문의 너머에 검은 촉수에 묶여 정신을 잃고 있는 은발과 뿔. 너무도 아름다운 모습을 한 마족 소녀를 말이다.
화음을 내던 그녀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건 의식을 잃은 가련한 존재만이 있을 뿐.
그녀가 보내온 화음은 기적이었을까. 아니면. 의식을 잃었으면서도 나를 찾아 헤매던 그녀가 만들어낸 현상일까.
“페르세르크.”
그녀는 의식을 놓아버린 이 와중에도. 내가 연주했던 아주 짧은 음악에 본능적으로 반응했고. 나를 찾았다.
나 또한 나를 찾는 그녀의 파장을 감지했고, 서로가 서로를 찾는 그 염원이 합쳐져 서로의 위치를 인지했다.
나는 비틀거리는 영체를 이끌고 나아가 그녀를 붙잡고 있던 촉수를 하나둘 끊어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잠들어있던 그녀의 영혼이 짧게 미동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다.
파르르 떠는 눈꺼풀을 들어 나를 시야에 담은 그녀가 울먹거리며 나를 본다.
“미련하긴…… 어찌하여 이곳까지…….”
“누구 마음대로 이혼서류에 도장 찍으려고.”
“쿡…… 쿡쿡…….”
내 장난스러운 말투에 그녀가 힘없이 웃어 보였다.
[그만!! 어째서야! 어째서 미쳐버리지 않는 거야!]
타나토스의 외침이 울려 퍼진다.
처음과는 완전히 다르게 흡사 아이의 투정과 같은 외침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절한 페르세르크를 안아 든 나는 천천히 그녀를 품 안으로 당기며 말했다.
“어떤 게임에서도 상태 이상기가 무한 지속되는건 없어 이 개자식아.”
물론 현실은 게임이 아니기에 헛소리에 불과하다. 애초에. 내가 망가지기 직전.
나는 마지막 도박을 감행하듯. 오딘이 해방하지 말라 하였던 그것을 풀어버렸다.
어디 심연이 그렇게 잘났다면. 그 어마어마하던 괴물이던 회랑의 영웅조차 몇이나 소멸시켜버린 내 안에 억눌러놓은 회랑식 수련법의 부작용.
내 안에 자리 잡아버린 뒤틀린 광기까지 잠식할 수 있겠는가.
그 결과.
신력과 함께 날뛰기 시작한 광기는 심연을 아주 우습게 밀어내 버렸고. 그 틈을 타 기회를 얻었다.
물론 오래가지 않아 심의 영역인 심연의 근본에 다시 그 광기가 억눌리기 시작하긴 했지만 아주 잠깐 튀어나와 나를 도운 것만으로 충분했다.
프리아의 신력을 뚫고 이렇게 쉽게 나를 그 꼴로 만든 것도 칭찬은 해주리라.
그 말과 동시에 금기의 힘으로 인해 이곳에 존재할 수 있는 힘을 잃으면서 내 의식이 페르세르크의 의식을 데리고 빠르게 심연의 끝에서 튕겨 나가기 시작했다.
스팡!!!!
동시에 웜홀 너머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전신을 엄습했고.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진짜 빛이 눈가에 비치는 느낌이 들었다.
그 공간 속에서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쳐버린 이클립스와 다르다. 그녀는 실패했지만. 나는 내게 세긴 그 망할 놈의 자기 암시를 끝까지 놓지 않았다.
-나는 죽지 않아.
나는 반사적으로 영체가 육신에 깃들기 전 페르세르크의 영혼이 육신에 제대로 안착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돌아본 자 영원히 나갈 수 없음이니. 너는 나와 함께…….]
검은 안개가 나를 포박하자 페르세르크가 눈을 크게 떴다.
“데이비?!”
경악한 그녀는 안개 속에 묶여 심연으로 다시 끌려들어 가는 나를 향해 다가오려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팔을 잡아 그대로 밀어냈다.
그녀를 이 꼴로 만든 것은 내 탓이다. 그렇기에.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녀를 보내고 돌아서려던 그 순간이었다.
[여기서 꺼져. 내가 널 구했으니. 넌 내 딸을 살려.]
생각지도 못한 존재가 타나토스를 튕겨내고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이클립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