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3화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일리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침묵한 채 반으로 갈려버린 키르시나를 바라보았다.
“…….”
상반신이 잘려버린 키르시나의 표정엔 경악이 가득했다.
자신이 어떻게 된 것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다.
겉보기엔 휘두르긴커녕 작은 체구로 드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거검이지만 그녀는 마치 나뭇가지 휘두르듯 가볍게 휘둘러버렸다.
푸른색의 바람 같은 것이 서서히 멎는다.
순식간에 그녀를 처리해버린 일리나의 강함도 생각 이상의 놀라움이었다.
분명 티오니스가 지구보다 전력이 강한 건 사실이지만 흉신을 상대로는 티오니스나 지구나 별다를 게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티오니스가 전투능력이 화기가 아닌 마법에 치중되어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리 마스터라 해도 일리나가 흉신, 그것도 2위나 하는 최상위 흉신을 이렇게 단번에 베어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스릉.
백은의 거검을 갈무리하며 지아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녀가 걸어온다.
그런 그녀를 보던 지아가 눈을 화들짝 크게 뜨며 소리 질렀다.
“뒤!!!”
그녀의 시야에 보인 것은 쓰러진 키르시나가 갑자기 빛으로 화하며 일리나를 뒤에서 공격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실도 모른 채 걸어오던 일리나였다.
그대로라면 일리나가 다시 그녀에게 당할 상황.
하지만 일리나의 관심은 그녀가 아닌 허공을 향하고 있었다.
“선조님?”
쩌억!!
그리고 세상이 다시 한번 격변했다.
이전과 같은 섬광이지만. 좀 전과는 완전히 다르다.
키르시나의 표정은 짜증이나 경악이 아닌.
공포가 서린다.
“어…… 어떻게 무슨?!”
“검의 극의에 이르면 너 정도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너…… 넌 누구야!”
완전히 달라져 버린 일리나의 말에 키르시나가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는 공포에 질린 듯 소리 질렀다.
“넌 누구냐고!!!”
악을 쓰던 그녀의 몸에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너희를 잡아두는 근본이 사라졌으니 육신을 유지할 수도 없지. 너희들. 애초에 완전한 생명체도 아니었구나.”
“아…… 아아…… 아아아!!”
양손으로 제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던 키르시나가 발끝부터 바스러져 사라져갔다.
흉신 2위의 죽음은 너무 허무할 정도였다.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일리나가 천천히, 그리고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끝까지 방심하다가 죽는 멍청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후손님.”
담담하게 말한 끝에 그녀의 몸이 크게 비틀거렸다.
“으윽…… 수명 날아가니까 빙의는 함부로 하지 마시라니까…….”
인상을 찡그린 그녀였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하지 못한 지아가 그녀에게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일리나가 눈을 크게 떴다.
“헙! 지아 양. 저는 이곳에 없었던 거에요! 알겠나요!?”
“네?”
“그…… 그럼 다음엔 제가 티타임에 초대할게요!”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바닥을 박차며 사라진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멍하니 있던 지아는 자신의 몸에 생긴 끔찍한 상처에서 슬슬 아픔이 몰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으윽…… 욱…….”
통증에 이어 구토 증상이 오자 몸을 웅크리며 고통스러워하던 지아는 곧 자신의 몸이 따스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마.”
“은…… 인께서…….”
지아가 지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
일리나와 대화할 때 이제는 너무 멀어져 버린 것 같았던 사람이 지금 눈앞에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데이비 올 라운.
그였다.
그의 표정은 지친 기색이 남아있지만, 상당히 차갑기 그지없었다.
“어떻게 여길…….”
“신현아의 집에 설치해둔 결계도 결계고 네 몸에 심어둔 방어 마법도 한 번에 박살이 났는데 어떻게 안 오냐.”
“그……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그녀는 과거 동생과 함께 데이비에게 목숨을 구원받았다.
실제로 그 때문에 상당한 PTSD를 안고 살아가고 있기도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그조차도 거의 다 회복한 상황이다.
그토록 많은 도움을 주었으니 더 이상 그에게 무언가를 바랄 순 없다.
애초에 산소와 수소 남매는 마가나 포도맛과 달리 그와 계약을 한 것도 그가 지킬 라운 왕국 국민도 아니지 않은가.
그저 지나가는 인연일 뿐이었다.
“음? 몰랐던가? 너희 남매 지금 하인스 영지민 소속이야.”
그의 말에 지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다.
“몸은?”
“네? 아…… 이제 안 아파요!”
놀란 그녀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키르시나에 의해 구멍이 송송 뚫린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져 있었다.
“혹시 모르니까 네 동생 데리고 현아의 본가에서 지내. 거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썼으니까.
과거 유리아 헬리샤나가 살고 있던 하인스 영지의 근처 엘프 영지.
달의 숲에 설치한 것과 거의 비슷하지만 조금 떨어지는 결계라는 모양이다.
지아로썬 그게 어느정도인지 알 길이 없다만. 하늘에서 미사일을 직격으로 쏘아도 가볍게 버텨내는 정도라니 그가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법했다.
“그보다. 널 이 꼴로 만든 그 빌어먹을 흉신은?”
“흉신…….”
“빌어먹을 키르시나. 이번엔 반드시 잡아 찢어버리든지 해야지.”
“그게 말이죠…….”
어떻게 답할까 고민하던 그녀가 어렵사리 입술을 달싹였다.
“방금…… 죽은 거 같은데요?”
“뭐?”
이게 무슨 코끼리가 개미와 1:1 복싱 경기하다가 라이트 맞고 KO 당하는 소리란 말인가 싶은 그녀였다.
* * *
흉신이 직접적으로 나를 공격하는 대신 내 주변인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현재 지구에서 내가 설치해둔 가장 결계가 강한 곳인 현아의 본가.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삼촌과 현재 그룹을 대신 이끌고 있는 연희 누나가 사는 집에 현아나 수소 남매. 그리고 마가를 포함한 네 사람을 모두 지내게 하는 것.
오래는 못 버텨도 잠시간은 버텨주리라.
애석한 일이지만 그들을 제외하면 내가 굳이 목숨을 지켜줘야 하는가 하는 이는 많지 않다.
이곳은 내 세상이 아니니까.
“지구로 간 소식은 들었다만…… 이것 참…… 신께서 또 무슨 생각을 하시는 겐지…….”
청록의 내음이 나는 세계수의 내부.
그곳에서 나는 세계수 알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의 일부와 흉신 키르시나가 죽은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남아있던 정령의 기억을 추출해내 가져왔다.
“정령왕의 힘으로도 힘들다더군요.”
“그렇겠지. 정령의 소관을 넘어선 의지력으로 기억을 지워버렸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이건 너도나도 할 수 없는 영역의 힘이야.”
알의 말에 나는 눈을 감았다.
정령의 기억을 지우는 건 데이터 백업을 하듯 되찾을 방법이 있다.
정령왕이라는 엄청난 존재를 내가 계약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의도적으로 지워진 이 기억은 도저히 복구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힘으로 지워져 있었다.
막대한 마나가 소모된 게 아니었다.
“이런 건 의지력으로 찍어누른 것이라고밖에 볼 길이 없어. 문제는 네 의지력으로도 이런 게 안 되는 건 알 테지?”
“알고 있습니다.”
“하면 예상가는 이는?”
“…….”
그녀의 물음에 나는 눈을 감았다.
이미 두 차례나 보지 않았던가. 술고래 천마 독고준. 그리고…… 나를 구해주었던 마법사의 신 오딘.
그 두 사람의 존재를.
그렇게 사라져버린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만. 만약 자신의 영혼을 저당잡아 잠시 현신한 게 그 둘 뿐만이 아니라면…….
한 명 더 있다.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나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회랑에 관한 이야기는 아낄수록 좋으니까. 다만 영상 속의 주인공을 꼭 찾아야 한다는 생각은 반드시 들었다.
영상에 나온 인물이 회랑의 스승 중 하나라면. 그 인물은 지금껏 나타난 다른 스승과 다르게 장기적으로 현신해있다.
그를 붙잡아 그에게서 지금 회랑이 어떤 상황인지 들어야만 했다.
이미 죽어서 속세를 벗어난 그들이 현세에 간섭하는 건 서로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후우…… 그래서 내게 이것을 가져온 게로구나.”
정령의 기억이 담긴 정령 마나석. 즉 정령석을 손에 쥔 알이 한입 베어 문 과일을 옆에 내려둔 뒤 허공에 던졌다.
우웅…….
동시에 정령석이 마치 무중력상태에 내던져진 것처럼 천천히 부유하기 시작했고 이내 알의 손에서 뻗어져 나온 빛에 휘감기기 시작했다.
놀라울 정도의 자연 생명력이다.
그녀의 이전에 나와 충돌했던 위그드라실의 힘과는 격부터가 다른 경험이 묻어난다.
“정령의 기억을 찾을 수 없다면…… 땅 그 자체의 기억을 읽어야겠지.”
“가능합니까?”
“시도는 해보겠다만 기대는 하지 마라. 그보다. 네가 날 찾아온 건 그 이유 때문은 아닌 것 같은데.”
“이클립스를 포함한 타나토스가 현재 심연으로 쫓겨나 있습니다만. 그게 영원하진 않겠죠. 해서 방법을 고민하러 온 겁니다.”
내 계획은 실패했다. 그렇다고 좌절할 틈 따윈 없다. 다음 계획을 준비하고 구상해둬야 할 테니까.
객관적인 평가로 볼 때 이클립스는 너무 강하는 게 내 결론이다.
아비트의 도움으로 혼과 육신을 완전동기화 시킨 나도 그녀와 타나토스의 힘의 합작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클립스 본인 정도라면 이제 신력을 이용해 어떻게든 협상이라도 해보겠지만…….
“그녀를 그렇게 괴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네 녀석이 아니더냐. 애초에 타나토스와 이클립스를 합치면 안될 일이었지.”
“그럼 페르가 그대로 심연으로 끌려가게 두었어야 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알의 빈정거림에 나는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경고했다.
“페르가 없어지면 이딴 세상 망하건 말건 알게 뭡니까.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내 와이프를 매도하면 이 빌어먹을 나무 전체를 불태워버릴 겁니다.”
“하…… 지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주 괴물이 되어 돌아왔구나. 좋다. 인정하지. 네게 강요할 순 없으니까.”
나는 상식이 있는 세상은 선호한다. 그리되어야 하고.
잘못한 자는 벌을 받고, 잘한 이는 상을 받는 세상.
그게 맞는데.
그게 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애초에 심연과 싸우는 이유도 이 빌어먹을 놈들이 내 취미생활 루트를 방해해서일 뿐입니다.”
그 과정의 끝에서 빌어먹을 베르단데의 배신이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결국 그녀를 죽이지 못했다.
알량한 동정심 때문이 아니었다.
[여기서 꺼져! 내가 널 구했으니까 그 사실을 잊지 마라.]
페르세르크를 구해 심연에서 빠져나오기 직전. 꿩 대신 닭이라고 나를 끌고 들어가려던 타나토스의 저항에서 나를 구한 건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나를 향해 오빠오빠거리며 술래잡기라는 미친 추격전을 펼쳤던 괴물. 이클립스였다.
그녀는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사람을 찢어발기는 괴물이었지만. 나를 구해낼 때의 그녀는 완전히 다른 성격이었다.
사실 그때 이후 아비트를 불러 물어본 결과. 이클립스의 성격은 굉장한 편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는 베르단데와 매우 흡사했다.
[흐음…… 이클립스 님이라…… 작은 체구와 다르게 그분은 정말 거침없었지요. 폭언은 물론, 손속도 자비가 없었습니다.]
[물론, 그렇게 행동하면서도 남들이 놓치는 자잘한 것들까지 챙겨주는 모습에 그분을 따르는 이가 많았지요.]
[1대 맹주님 말입니까? 이클립스 님과 만났을 때도 두 분은 서로의 멱살을 잡고 당장이라도 싸울 것처럼 구셨습니다.]
아마 베르단데가 그녀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까.
“이 녀석과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주겠니?”
이윽고 알이 주변에 뛰노는 동물들에게 부드럽게 말하자 동물들은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하나둘 흩어지기 시작했다.
“잠시 밖에서 기다려줄래?”
이후 나는 나를 따라온 케인을 흘끗 보았다.
“넌 왜 안 나가.”
“저는 넬타리드 님의 사자로서 여기 있는 겁니다. 제가 듣지 말아야 합니까?”
그는 내가 베르단데를 죽이지 않은 것에 상당히 불만이 많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한 번밖에 못하는 의식을 방해한 심연의 족속이니까.
게다가 녀석은 아직 의식을 한 번 더 진행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는 걸 제대로 몰랐다.
“본론입니까?”
“듣는이는 많지 않을수록 좋으니까. 괜한 설레발은 혼란을 불러오는 게다. 일단 네가 뭘 원하는지는 대충 알겠다만. 그전에 확인해봐야겠다.”
그녀가 나를 직시한다.
“넌 그 고대의 용을 어찌하고 싶은 거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베르단데의 말도 틀리진 않아요. 만 년 동안 세상을 지켜온 그녀를 그 끔찍한 공간에 영원히 봉인하는 것도 다시 생각해보게 됐고.”
“정이 많은 게지. 그래서 그녀도 죽이지 못한 겐가?”
베르단데를 지칭하는 말일 것이다.
“배신자를 살려둘 줄 몰랐는데.”
“일의 결과가 어떻건 죽일 생각이었습니다. 이클립스가 마지막에 빚을 지우지 않았다면요.”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 가능성은 적다.
하지만.
오딘의 힘에 의해 강제로 심연에 추방당한 이클립스의 정신이 아주 잠시 돌아왔었다는 건 분명하다.
물론 회랑의 영웅에 대해선 그녀에게 언급하지 않았다.
“요지는 그것이로구나. 베르단데의 문제는 뒤로하고, 이클립스를 영면에 들게 한 후 타나토스를 영원히 심연에 가둬버리고 싶다는 게지.”
“그게 베스트겠죠.”
이클립스의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손으로 그 끔찍한 삶을 끝내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뭘 고민하는 겁니까! 그녀를 살려두면 두고두고 또 변수가 생길 겁니다!”
케인이 강하게 반박해왔다.
“그녀를 죽이세요! 그리고 변수를 차단하는 겁니다! 빌어먹을 의식을 진행할 수 있는 곳은 제가 어떻게든 찾아내겠습니다! 절대보옥의 힘도 최대한 빠르게 회복할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케인이 강하게 어필해온다.
“진정해 이 새끼야.”
“이게 진정할 일입니까?! 그녀의 배신으로 대체 얼마나 많은 존재들이 고통을 받았는지 잊었습니까?! 멀리 갈 것 없이 당신만 해도 죽을뻔했지요! 페르세르크…….”
“네 목적을 위해 페르세르크를 함부로 팔지 마라. 콱 죽여버리기 전에.”
사늘한 내 일갈에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는 페르세르크를 걱정해서 이런 태도를 고수하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심연을 척결하는 데에만 집중할 뿐.
“…….”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침묵하는 케인을 보며 알이 킥킥 웃어 보인다.
“솔직히 나도 저 발키리아 종족과 같은 의견이야.”
“당신도 말입니까?”
“난 네 부하가 아니라 동맹 관계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정령석에 집중하던 그녀가 이내 화색을 띠었다.
“자. 다되었다.”
그녀가 내민 정령석 내부로 노이즈가 낀 기억의 일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 그녀가 저렇게 허무하게…….”
영상 속에 보인 것은 환한 금발을 지닌 누군가의 아주 일부가 보였고 그녀? 혹은 그의 공격에 바스러지듯 소멸하는 키르시나의 모습이었다.
“죽은 게 확실해?”
“확신할 순 없지만…… 적어도 저런 현상을 보인다는 건 아틀란티스의 죽음이 맞을 겁니다. 그녀가 신처럼 따르는 카트시가 죽었으니 그녀의 힘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지만…… 이건 좀.”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
“혹시. 당신을 구했던 그들과 연관이 있는 거 아닙니까?”
오딘이나 독고준을 뜻하는 것일 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원하는 바는 이루었나?”
“애초에 이건 부가적인 것일 뿐입니다.”
나는 영상 속에 나타난 키르시나를 죽인 이가 누구일까 고민하다 정령석을 아공간에 던져넣었다.
내가 아는 한에서 금발을 가진 영웅은 그 오딘과 그 빌어먹을 난봉꾼 엘프뿐이다.
다만 둘 다 검을 쓰진 않는다.
내가 아는 한에서 금발이면서 검을 쓰는 이는…….
일리나?
그럴 리가.
그녀가 지구에 있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지금 일리나의 실력으론 상위 흉신 최하위의 그 무식한 근육쟁이를 만나도 끔찍하게 살해당할 정도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신들끼리의 싸움은 우리 같은 피조물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차라리 다행이라 여겨. 시간을 벌었잖아. 다음 절대보옥을 사용할 준비를 하는 게 생산적일 거야.”
“절대보옥의 힘을 다시 충전해야 하는데 솔직히 말해서 지금은 힘듭니다. 지금 속도라면 수십 년은 걸릴 테니까요.”
케인의 말에 알이 느긋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그거야 해결방법이 있지, 네 녀석. 마계 쪽에 꽤 영향이 있지 않나?”
“마계?”
“그곳에는 정제되지 않은 힘이 넘치지. 게다가 고대 마수들도 그 땅에 봉인되어있고, 일전에 네놈이 펜릴을 다시 가둬버린 것을 잊었나?”
세계수를 먹은 포식의 괴물.
내가 다시 땅속에 처박아버리긴 했지만, 놈은 확실히 엄청난 힘을 지니고 있다.
죽지 않는 늑대라 불리니까.
“뭐 그 늑대라면 한번 다시 봉인한 적은 있죠. 그래서 그놈을 어쩌라고?”
“그놈의 힘은 오랜 시간 축적되어왔지. 그놈을 죽이고 오갈 곳 잃은 그 힘을 보옥에 흡수시킨다면?”
그녀의 말에 절로 고개를 주억거린다.
“뭐 원초적인 해결법은 아니지만, 흥미는 생기네요. 그래서 어떻게 그놈을 처리하라는 건지 말해줘야지요.”
“그건 이제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안 그래?”
알이 동의를 구하자 침묵으로 보답했다.
알의 제안 자체는 제법 흥미로웠다.
당장 그녀의 말마따나 이클립스를 처리할 방법도 없으니까.
단순한 방법으론 베르단데가 또 방해하려 들겠지만 정말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땐 이클립스와의 약속을 깨는 한이 있어도 베르단데를 죽이고 의식을 진행할 수밖에.
“꺼내는 방법을 찾는 게 조금 걸리긴 하다만 배터리로 쓰기엔 제격이겠네요.”
이클립스가 말도 안 되게 사기적이 존재일 뿐. 지금의 나는 고작 고대 마수 정도에 밀릴 스펙은 아니니까.
“그리고 지구의 문제는 잠시 한발 물러나 지켜보는 걸 추천하지. 쉬지 않고 일하다간 과로사하는 법이니. 아 참!”
대화를 끝내려던 그녀가 손뼉을 쳤다.
“검에 미친 빌어먹을 녀석 당장 데리고 나가!”
이윽고 그녀가 화를 내며 허공을 두드린다.
쿠당탕!!
동시에 허공이 찢어지며 그 안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청발의 소녀가 볼품없이 떨어졌다.
“으악! 이게 뭐야!”
그녀는 다름 아닌 심연의 공주. 다른 심연의 존재가 다 끌려가 흡수당할 때도 살아남은 존재인 이실디였다.
“데이비? 네가 왜 여깄어?”
말없이 그녀를 보던 내가 손을 뻗어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마계로 갈 건데 따라와.”
“뭐? 뭐?!”
“아 따라오라면 따라올 것이지 잔말이 많아.”
그녀도 심연이니까.
케인이 상당히 불쾌해하지만 그렇다고 인간의 편으로 돌아선 그녀를 죽이는 건 지금에 이르러선 내키지 않았다.
복잡함으로 인해 머릿속이 쉬이 정리되지 않는다.
* * *
그 시각 지구와 마계.
끼이익!!! 쿠웅!!!!
바닥에 쓰러진 채 륀느는 조용히 침묵했다. 맹한 기분이 들어 아무런 행동도 하기 싫다는 게 이런 것일까.
충격 자체는 별로 크지 않았지만 나른함이 몸을 지배한다.
아마 몸 안의 부품 중 하나가 문제를 일으킨 것일 터다.
평소엔 이것과는 비교도 못 할 공격에도 끄떡없는 그녀였지만 세피로스화를 하고 폭주한 페르세르크와 싸우느라 몸 안의 부품들이 많이 삐걱거리고 있던 찰나였다.
데이비가 수리를 해주긴 했지만, 아직 그가 손을 못 대는 부분은 자연스럽게 수복하고 있던 찰나였기에 그 타격이 좀 컸다.
갑자기 금속 마차, 즉 차량이 달려오더니 길거리를 배회하며 키르시나의 흔적을 조사하던 그녀를 들이 받아버린 것이다.
데이비 때문에 복잡한 마음이 들어 멍하니 누워있던 그녀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 X발 어떻게 해?”
“모…… 몰라! 죽었나?”
“아 빌어먹을 술 적당히 먹을걸! 야! 튀어!”
“X, 그러니까 적당히 처먹으라니까!”
“미쳤어?! 그러다가 뺑소니 되면 어떻게 하려고!”
“이미 늦었어! 이년아! 게다가 우리 전부 미성년자라 괜찮아. 미성년자 관련 법 몰라? 따라와!!”
누군가가 떠들더니 이내 큰소리와 함께 차량이 쓰러진 그녀를 뒤로하고 급히 달린다.
끼익!!!! 쿵!!
그리고, 이미 술에 취한 그들은 륀느에게서 도망치다 또 한차례 죄 없는 사람 하나를 치고는 도망쳐버렸다.
“끄응…….”
쓰러진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인상을 찡그렸다.
“륀느. 이 상황에 의문을 평가. 데이비 님에게 조언을 요구.”
자리에서 일어난 륀느가 눈을 가늘게 떴다. 맹한 눈으로 차량이 사라져버린 곳을 바라본다. 푸른 눈동자에 사라져버린 차량에 붙은 번호가 보였다.
말없이 일어난 그녀가 천천히 걸어 쓰러져버린 인간을 향해 다가갔다.
“혼수상태로 추측. 시급히 치료가 필요하다 판단.”
그때만 해도 몰랐다. 이 사태에서 륀느의 특유의 엉뚱함이 불러온 뺑소니 소식을 들은 이가 어떻게 나올지 말이다.
그리고, 같은 시각 마계에선.
[크흐흐흐흐 나를 영원히 가둬놓을 수 있을 거라 생각지 마라! 빌어먹을 인간!]
제 운명도 모른 채 땅속에 봉인된 거대한 흉물이 분노를 불태우며 탈출을 감행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