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6화
[아직 한참 멀었네.]
검신 하레스는 멀리서 데이비와 이클립스의 접전, 그리고 틈을 봐서 이클립스의 움직임을 제약해 데이비의 안전을 확보해주고 있는 일리나를 보며 혀를 찼다.
[과유불급이라고 네 입으로 그랬다. 데이비.]
그가 특성을 발현하는 건 정말 놀라운 재능이었다.
사실 특성의 가능성조차 회랑최고의 영웅인 헤라클래스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던가.
아니, 가능성만 놓고 보면 어느 쪽이 우세하다 할 수 없을 정도이지만 지금 상황을 기준으로 볼 때. 그의 힘은 헤라클래스가 가진 힘 이상으로의 효율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완성된 헤라클래스와 달리, 데이비는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나 다름없다.
[그런 병아리 자식이 뭘 하겠다고.]
아직 데이비가 자신의 힘을 포식의 특성으로 먹일 수 있는 건 마나가 전부다.
신력도, 금기의 힘도 아직 그가 먹어서 변환하여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엔 무리가 존재한다.
아마 크게 한바탕 당할 터. 결과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럼 나도 이제 내 할 일을 해야겠구만.]
담담하게 말하며 그가 손에 빛을 머금는다.
자아는 존재하지 않지만,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해온 존재가 그의 손에 구현되었다.
[칼디라스.]
[내 차례야?]
당연히 가짜 칼디라스이기에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가짜 자아일 뿐이다.
그저 검신인 그가 기억하는 칼디라스의 성격을 복사한 디코이.
그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없던 맑은 하늘에 기이한 균열이 일어난다.
[아직 데이비를 네 앞에 내놓을 순 없다.]
담담하게 말한 그가 검은 균열 너머의 황색 눈동자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내가 널 죽일 순 없겠지만.]
적어도 쫓아내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여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그가 허공을 가볍게 내디뎠다.
투웅…….
동시에 무형의 충격파가 퍼져나가며 일순간에 어마어마한 숫자의 검기가 창공과 지상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베어버렸다.
* * *
금기의 힘을 먹어치운다. 순식간에 녹아들기 시작하며 포식의 특성과 금기의 힘이 뒤섞여 하나가 되기 시작하자 새로운 느낌도 들었다.
지금까지 금기의 힘은 최대한 억제하듯 사용해왔다. 게다가 본래의 내 힘이 아니고 양도받은 힘이기에 내가 사용하는데에도 충분히 한계가 있었다.
나만이 가진 금기의 업의 특징?
그건 변질된 것일 뿐 사실상 제대로 다루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 힘조차 먹어치워 내 것으로…….
“커헉?!”
그때였다.
금기의 힘을 먹어치우기 시작한 포식 특성이 갑작스레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광기.
완벽하게 먹어치우고 내 것으로 만들면 광기는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금기의 힘을 뽑아내 그것을 변환시켰음에도 광기가 일어난다.
“쿨럭!”
바닥을 몇 차례 뒹군 채 피를 울컥 토해낸 내가 눈을 부릅떴다.
아직…… 이거 먹고 변환 못 하는구나.
그럴 수밖에. 신의 권능조차 밀어냈었던 금기의 힘이다.
그렇게 쉽게 먹어치울 순 없으리라.
나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이클립스에게서 폭발적인 위압감이 쏟아져 나왔다.
잠깐의 틈을 보이면서 맞은 탓에 타격이 제법 거대하다. 신성력을 두르지 않았다면 그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부활을 준비해야 했으리라.
“데이비!”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내 상태가 심상찮다는 것을 깨달은 일리나가 급히 다가와 이클립스의 시선을 돌리려던 그 순간이었다.
-꺼져라 날파리.
차디찬 목소리가 뇌리에 직통으로 꽂히며 일리나가 허공에 무언가에 맞은 듯 튕겨 나갔다.
의지가 있다?
그럴 리가. 지금까지 상대한 이클립스는 힘을 극도로 제어한 탓에 이성을 잃은 마룡에 불과했다. 그런데 말을 한다는 건…….
난도가 올라갔구나.
망할 양반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강제로 금기의 힘을 다시 억눌러 봉인시킨 뒤 양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정신 차려야 한다. 죽어도 그 끔찍한 고통을 다시 느끼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마치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 다가오는 이클립스와 시선을 맞춘 채 숨을 짧게 들이켰고, 이내 입을 열었다.
[절대용언]
[멈춰.]
쿠웅!!
-용언?!
경악하는 그녀가 고대룡의 권능인 절대용언에 당해 멈춘 찰나의 그 순간. 나는 미련 없이 피투성이가 된 채 끙끙대는 일리나를 데리고 빠르게 장소를 벗어났다.
상대가 약할 때 조금 더 울궈먹고 난이도를 올려야 하는데. 강제로 난이도를 끌어올려 버린 것이다.
단순히 나를 괴롭히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런 경험도 있고.
하지만 이번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어쩌면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클립스는 어차피 허상이기에 내가 범위 밖으로 벗어나며 몇 차례 날뛰다가 다시 휴면상태에 돌입한다. 그렇기에 나는 범위 바깥으로 벗어나 그녀의 상태를 빠르게 살폈다.
일리나는 급히 일어나려 하지만 다리가 부러졌는지 쉽게 일어나지 못한다.
여기저기 뼈가 부서지고 새하얀 피부 안으로 피가 터져 몰골이 말이 아니다.
“겁이 없지 아주 그냥.”
“아야야…… 너무 아파…….”
나는 쓰러진 그녀를 데리고 동굴로 돌아오며 이를 악물었다.
아직. 신력이나 금기의 힘까지 먹어치워 내 것으로 완전히 만드는 건 불가능한 모양이다.
* * *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금기의 힘을 개조하기엔 아직 더 많은 힘을 포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용언의 사용이 확실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성력도 이제는 이클립스의 마나를 끌어 올리는 것처럼 마음대로 사용할 수가 있다.
“아야야! 그냥 뿅! 하고 치료하면 안 돼?”
“엄살피우지 마. 신성마법도 좋지만 그렇게 되면 자체 회복력이 떨어져.”
내 말에 바위에 걸터앉은 채 치료를 받던 일리나가 입을 삐쭉였다.
현재 그녀는 넝마가 된 바지만 입은 채 양손으로 제 가슴께를 가리고 내게 등을 보이고 있다.
힘을 절반 이상 되찾았으며 현신까지 한 이클립스의 공격에 맞고 산 것도 기적이다.
앞으로는 단순히 육체능력과 브레스가 아닌 그녀의 용언과 마법까지 감안해가면서 수련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앞이 막막해진다.
“꺄악!! 아파!”
내부가 작살이 난 곳은 치료마법을 통해 회복시키고 외상은 약을 발라 정성스레 치료한다.
“정작 내 몸은 내가 치료할 수가 없네.”
일리나는 짬짬이 내게 의술을 배웠다.
하지만 그렇게 의술을 배워도 본인의 치료는 사실상 어렵다.
“이클립스의 제한이 풀렸어.”
“풀렸다고?”
“이성이 돌아온 거 봤지? 제힘을 못 이겨서 미쳐버린 때랑 다르게 지금은 제정신이야.”
“그럼…… 더 힘들겠네.”
“그냥 힘들겠냐. 또 고생해야지.”
아직 나도 마나나 사령 마나, 정령 마나 같은 것을 먹어치우진 못했으니까.
신성력을 한번 먹어치우고 그것을 내게 맞게 변환하는 데에 시간이 제법 걸린다.
이클립스의 힘 때와는 조금 다른 흐름이었다.
“이틀 정도는 꼼짝없이 요양해야 할 거다. 죽었다가 깨어나면 멀쩡해지긴 하는데.”
“아야!!”
가차 없이 그녀의 뺨을 꼬집자 그녀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려 나를 올려다본다.
그리고는 자신이 현재 상체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다시 등을 돌렸다.
“진짜 후회하기 싫으면 목숨 아껴. 지금 네가 느끼는 이런 아픈 건 애들 재롱잔치보다 못해.”
“그렇게…… 심해?”
“끔찍할 정도로.”
담담하게 말하며 붕대를 완전히 감아준 내가 돌아섰다.
“다음 싸움 전에 마나까지는 먹여놔야겠다.”
신성력의 변환이 거의 끝나간다. 다만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당장 시도해볼 수 있는 건 원소 마나를 변환시키는 것까지가 전부.
[오퍼레이션 필드]
이윽고 적당히 넓은 공터에 선 채 마나 필드를 형성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저기 말이야. 데이비.”
“왜.”
“지금 생활.”
고민을 하던 그녀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행복해?”
“뭔 소리야. 죽자고 싸우는 일에 즐거운 게 있을 리가 있나.”
변태가 아니고서야 맞는걸 즐길 놈은 없다.
“그거 말고.”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다시 물었다.
“페르 언니와의 결혼 생활.”
조심스레 묻는 그 모습에 나는 심드렁하게 받아들였다.
“좋아. 행복해 죽겠다.”
사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망할 놈의 심연과 파괴 때문에 뱅뱅 돌아왔을 뿐, 여유가 있을 때 그녀와의 잔잔한 연애질은 생각보다 너무 즐거웠으니 말이다.
“부럽네.”
“너도 결혼하면 되지. 좋아하는 사람 만나서.”
“황실에서 서신이 왔었어.”
그녀는 내게 등을 돌린 채 내가 건네주었던 내 체격에 맞는 커다란 와이셔츠를 걸쳐 입었다. 손가락 끝과 허벅지 절반 이상을 가릴 정도로 그녀에겐 큰 옷이다.
본래 그녀는 지구에서 지내는 동안 정장을 입고 다녔지만, 지금은 넝마가 되어버린 탓에 제대로 입을 수도 없는 입장이었다.
“서신?”
“응. 린디스 제국 변방에 있는 공작과의 혼약.”
그 말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황족, 고위귀족이라면 당연한 일이다.
“좋은 사람이래. 부인이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나고 린디스 황제의 명령으로 재혼을 하는 건데. 살리반 오라버니하고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모양이야.”
그녀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렇겠지. 팔란 제국의 국익에 도움이 되면 당연히 해야 하는 게 정략혼이니까.”
그것이. 왕족으로서, 권리를 얻은 대신 이행해야 할 의무다.
남자는 남자의 의무가, 여성은 여성의 의무가.
그녀도 결국은 황녀이기에 언제까지고 제국에서 머무를 순 없다. 때가 되면 혼약처를 찾아 그곳으로 떠나야 하는 게 그녀가 갈 길이었다.
“넌 행복하다고 했지?”
“그래.”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곁에 있을 수 있잖아.”
“그렇지?”
“사실 혼약 이야기를 거절할 생각은 없는데 말이야.”
그녀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본다.
“좀…… 부럽더라. 히히.”
힘없이 웃음을 터뜨린 그녀는 다시 몸을 웅크린 채 와이셔츠의 소매를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소맷단을 살살 문질렀다.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해서,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늙어가는 거.”
“갑자기 감수성이 폭발하셨나. 술이라도 꺼내줘?”
장난스런 물음에도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지금은 널 돕기 위해서 여기 와있지만. 몇 달 뒤에 티오니스로 돌아가면 정식으로 약혼을 할 거야. 일단 나도 혼기가 찬 나이잖아?”
“확정된 거야? 축하한다.”
“축하? 하.”
허탈하게 웃어 보이는 그녀를 뒤로한 채 나는 다시 마나를 끌어 올렸다.
자. 어디 한번 변환시켜봐라.
광기가 흘러나오는 이유는 내가 얻어낸 힘이지만 내게 맞게 변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력이 충분히 이클립스의 마나와 연동되어 변했다면, 원소 마나도 충분히 가능성이 존재한다.
천천히, 순서대로, 원소 마나와, 사령 마나까지 모두 변환하는 데에 성공하면 세 가지 힘과 이클립스의 마나까지만을 사용하여 그녀와 다시 충돌해볼 생각이다.
그걸로도 부족하면 정령 마나.
그걸로도 부족하면 환수 소환사로서의 힘. 그것도 부족하면 주술에 이어 마기까지.
아직 내게 숨겨둔 패는 많다.
그리고, 금기의 힘과 신력을 모두 해치웠을 때. 확신이 선다면.
그땐 절대보옥을 심연을 닫는데에 사용하는 게 아닌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계를 스스로 버리지 않는다면, 강제로 끌어 내려주는 수밖에.
신성력을 갈무리한 뒤 원소 마나를 공간 안에 꽉 채우고 특성을 발현하려던 그 순간이었다.
파악!!
갑작스레 난입한 그녀가 내 몸을 돌리고는 그대로 밀치며 다리를 걸어 그대로 넘어뜨렸다.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본다.
그녀는 나를 깔아뭉갠 채 내 배 위에 올라앉아 물었다.
“데이비.”
“야. 무거워, 비켜.”
큰 와이셔츠 사이사이로 새하얀 피부가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바지는 하나도 입지 않았기에 그녀의 맨살 감촉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데이비.”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뭔가 심상찮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래.”
“좀 전에 죽을뻔하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어차피 후회할 텐데. 하지 않고 후회하면 더 짜증 날 거 같아서”
본능이라는 건 참 무섭기 그지없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눈에 서린 감정을 읽어버린 내가 입을 다물자 그녀는 조용히 몸을 숙이더니 그대로 내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감촉에 사실 놀라움이 먼저 들었다.
그녀가 이렇게 거침없이 입을 맞춰올 거라곤 생각지 못했으니 말이다.
“읍!”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나는 그녀를 떼어냈다.
잘못될 관계는 시작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에이리아를 받아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막 받아들여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아…… 처음은 아니지? 우리 입 맞춘 거.”
언제 그런 적이 있었나?
의문이 들었지만, 그녀는 그저 기분이 좋은 듯 옅게 웃어 보였다.
“데이비. 나 결혼해.”
“…….”
“그러니까 내가 결혼하기 전에…….”
목소리가 옅게 떨렸다. 불안함이었다.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내는 불안함으로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과유불급이라 했다 데이비. 벌써부터 헤라클래스의 힘을 먹어치우려 들다니 겁이 없구나. 내가 전문가들을 데려…… 어이쿠. 타이밍이 나쁘군.]
갑작스레 들어온 하레스가 그 자리에서 180도 회전하며 밖으로 유유히 날아간다.
[잘해봐. 사위. 그나저나 사위인가? 딸의 남편이니 사위이고…… 후손의 남편이니…… 후손 사위? 음, 둘 다 사위인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 거야. 이봐! 돌아가! 며칠 뒤에 다시 오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가버리는 하레스를 보며 나와 일리나가 멍하니 동굴 입구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잠시 후 내가 일어나려던 것을 그녀가 다시 짓눌러 눕혔다.
“데이비.”
“야. 장난치지 마.”
“부탁이 있어.”
“안 들어준다.”
단호하게 말한다. 이 자식은 지금 다급함에 뭐가 옳은 건지 판단을 못 하고 있다.
그리고,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입술을 뻐끔거리다 쥐어 짜내듯 말했다.
“나, 한 번만 안아줘.”
“…….”
“하룻밤의 불장난으로도 괜찮아,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게, 또 어떤 핑계도 대지 않을게.”
힘없이 웃는 얼굴로 그녀가 내게 부탁해왔다.
“여기서 있었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을게. 평생 비밀로 간직할 테니까.”
웃는 얼굴인데 왜 울며 애원하는 느낌일까.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그녀의 와이셔츠 단추를 하나 툭! 하고 풀었다.
“꺅?!”
순식간에 앞섬이 열리자 깜짝 놀란 그녀가 손으로 제 가슴을 가리며 물러났다.
“겁도 없이 까불어.”
한 명을 위해 헌신하겠다. 페르세르크가 오로지 나만을 보겠다고 한 것처럼 나 또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예의다.
하지만, 그런 마음은 에이리아로 인해 할 말이 없게 되어버렸다.
“…….”
고개를 숙인 채 허망하게 바닥을 내려다보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고귀한 황녀님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좋아하는 데 이유가 필요해?”
“…….”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내가 작아서 싫은 거야?”
그녀의 키는 확실히 작은 편이지만 그게 문제는 아니었다.
“좀 진정하고, 나중에 다시 생각해보자고.”
담담하게 말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끝났냐?]
“언제 왔습니까?”
[눈치 보고 있었더만 너도 참 어지간하구나.]
“당신 딸이 내 부인이야. 왜 이래 이거.”
[네 선택은 존중해야지. 그보다. 이거 받아라.]
다시 나타난 검신 하레스가 내게 커다란 호리병을 건네준다.
“이게 뭡니까?”
[네가 떠나고 독고준이 새로 만든 술이다.]
독한 향이 올라온다.
[앞으로 일주일. 그 안에 이클립스와 싸우는 건 금지한다.]
“뭐요?”
[지금 네 안에 마나가 얼마나 혼란스러운 상태인지 모르는 모양인데. 너 그러다가 이도 저도 안돼서 터져 죽어 이 자식아. 급할수록 돌아가라.]
그의 말에 나는 정곡을 찔린 것처럼 침묵했다.
[그 술은 약주다. 네 몸의 안정에 도움이 될 거야.]
그 말에 나는 망설임 없이 호리병 안에 든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리고.
쿵!!
순식간에 이성이 반쯤 날아간 채 쓰러졌다.
무슨 술이 이렇게…….
끔찍할 정도로 독하다. 열반주니 우화등선주니. 강한 술을 많이 먹어보았지만 이건…… 상상을 초월하는 취기를 내게 건네주었다.
독은 웬만해선 먹히지 않는데. 이것은 독과 다르게 몸에 이로우면서 그대로 전해지는 탓에 취기가 밀려오는 모양이었다.
와…… 이거 좀 센데.
제대로 이성판단이 잘되지 않는 상태로 뻗어있는 내 귓가에 하레스가 호리병을 일리나에게도 건넨다.
[후손님도 마셔.]
이에 일리나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의 강요에 못 이겨 한 모금 들이켰다.
그리고.
털썩.
“헤헤…… 헤헤헤…… 데이비…… 좋아해애…….”
순식간에 취해버리며 뻗어버렸다.
이후 다시 내게 다가온 하레스가 내 앞에 손을 휘휘 저었다.
[갔네 갔어. 어휴. 대체 얼마나 독한 걸 만든 거야. 적당히 회복효과만 가미하랬더니 아주 폭탄을 만들어놨네. 어쩐다. 들어서 옮길 수도 없고.]
중얼거리는 그의 목소리가 멀어진다.
그리고. 의식이 완전히 날아간 내가 다시 말끔한 기분에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 품에 고인 안긴 채 곤히 잠들어있는 금발의 작은 소녀를 볼 수 있었다.
“…….”
내 눈이 찢어질 듯 크게 뜨여진다.
내 눈에 비치는 건 그녀의 새하얀 피부였다.
“아야야…… 내 머리…….”
이윽고 굳어버린 내 귓가로 제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대며 일어나는 그녀가 보였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나를 보고는 특유의 차가운 인상을 당혹으로 일그러뜨렸다.
그녀의 시선은 정확히 내 몸에 향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