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97화
223. 생각지 못한 적의 조력자
수많은 생각이 오간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한참 동안 멍하니 있던 그녀는 그제야 뭔가 상황을 파악한 듯 눈을 크게 떴다.
”…… 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제 몸을 가리는 그녀의 빠른 행동에 나 또한 행동으로 보답한다.
콱!!
그녀가 모조리 잡아당기려는 이불을 반쯤 빼앗은 채 내가 소리 질렀다.
“치…… 침착!! 침착해!”
“네가 더…… 더더더더…… 더 당황했거든?!”
“뭔가 잘못됐다!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니까 일단 진정해!”
“이 꼴을 보고 그런 말이 나와?!”
“치…… 침착하고!”
“꺄아아악!!”
“망할! 돌겠네 진짜!!”
난장판 그 자체.
전날 있었던 미묘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현재의 나와 일리나는 사고 제대로 쳤다는 패닉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기겁하며 제 몸을 가리고는 소리치는 그녀와 아무 말이나 내뱉고 있는 나의 몰골은 후에 다시 돌이켜보면 우스꽝스러움 그 자체가 아닐 수 없다.
외침과 비명이 난무한다.
“일단 됐으니까, 아무거나 좀 걸쳐 임마!”
퍽 소리와 함께 내가 아공간에서 꺼내 집어던진 로브가 그녀의 얼굴에 정면으로 직격했다.
다만 그녀도 당하고 있을 생각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 이게!”
퍽!!
그녀도 반격을 가하듯 주변에 있던 것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녀의 공격을 피할 새도 없이 날아든 것을 잡아낸 내가 눈을 찌푸렸다.
새하얗고 면적이 좁은 무언가.
“꺄아아아아악!!!”
내 손에 쥐어진 게 무엇인지 깨달은 일리나의 수치심 가득한 비명이 다시 울려 퍼졌다.
* * *
새로운 술은 언제나 환영이야.
“…….”
너만 빼고.
콰직!!
한방에 인사불성이 되어 사고를 치게 만드는 망할 술은 필요치 않다.
박살 나버린 호리병을 노려본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술을 마시면 내가 개다.”
머리를 부여잡고 인상을 찡그렸다. 몸 상태는 확실히 좋아졌는데 어마어마한 대가를 지불하고 말았다.
책임지지 못 할 짓은 저지르는 게 아니라고 하던 말은 내가 늘 하던 이야기였다.
게다가 스스로 약속까지 한 주제에. 고작 하루 만에 술을 먹고 이딴 사고를 쳤다.
당장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엄한 짓을 저지른 내 멱살을 잡고 패대기 쳐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후…… 침착하자.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니잖아.”
애써 현실도피를 해본다. 그래. 그냥 우연찮게 비슷한 상황이 연출된…….
“으윽…… 허리가 너무 아파…….”
“…….”
눈두덩이를 손으로 꾹꾹 지압하며 한숨을 내쉰다.
“내가 죽일 놈이네.”
술을 마시고 뻗었다.
자고 일어나니 언제 꺼낸 건지 모를 이불을 덮고 있는 내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고, 그건 일리나 또한 마찬가지.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여우 같은 와이프가 있는 유부남이 지금, 앞날 창창한 여인과 밤을 보냈다 이 말인가.
이 사실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현실도피를 하고자 해도 쉽지 않았다. 만약 내가 생각하는 그 사실이 정말이라면. 나는 어찌해야 하는가.
멍청할 정도로 착해빠진 페르세르크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 그녀가 위험한 요소는 사라졌으니 배신을 했다며 화를 내고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내 탓이다. 내가 책임지고 모든 것을 수습해야 한다.
“우리…… 그…… 그거 한 거야?”
일리나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기억도 없는데…….”
나도 기억이 없으니 더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래. 한 명, 목격자가 있구나.
나는 문득 내게 호리병을 건네주었던 망할 장인어른을 떠올렸다.
그 작자가 망할 독고준의 술을 주지만 않았어도…….
마침 멀지 않은 곳에 그의 영혼이 느껴진다.
“데…… 데이비.”
벌떡 일어나 나가려는 내 발걸음을 붙잡은 건 일리나였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사…… 사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괜찮아. 내가 부탁했던 거잖아. 평생 비밀로 간직할 거야. 네게 어떤 책임도 묻지 않아.”
그녀는 이미 납득한 듯 보였다.
“괜찮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뭘 걱정하지 말라는 것인가.
그녀는 한가지 착각을 하고 있다.
나는 하룻밤이라도 그런 짓을 저지를 생각도 없고, 설사 저지르려 했다 해도, 그녀만큼은.
그녀를 싸구려 취급하는 이 말 같지도 않은 결정을 내릴 생각 따윈 전혀 없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내가 그녀와 배를 맞춘 게 사실이라면.
그땐…….
차갑게 가라앉은 심정이 내 의념을 대변해준다.
“일리나 데 팔란.”
“어…… 어어?”
횡설수설하며 힘겹게 말하던 그녀가 멈칫했다.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많이 혼난다.”
낮은 목소리로 쏘아붙인 뒤 나는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왔냐?]
“어젯밤에. 내게 뭘 먹인 겁니까.”
[말하지 않았나? 약주라고. 어떻게든 네게 도움이 될 거다.]
“그래요. 효과는 쥑이더라, 그런데 하나만 확실히 합시다. 내가 어제. 무슨 짓을 저질렀습니까?”
다시 질문을 던지자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게 중요한가? 결국은 네가 내린 선택이다.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넘어가기엔…… 너무 양심이 없잖냐.]
“화났습니까?”
[굳이 화를 낼 이유가 있나? 어차피 네가 선택하는 것인데.]
그의 말에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돌아버리겠네.”
[풉…… 멍청한 놈.]
더 열 받는다.
나를 비웃던 그에게 자세한 정황을 들어야겠다.
그가 모를 리가 없으니 그는 답을 알고 있다.
물은 답을 알고 있다던데…….
“말해주시죠. 사람 혼란스럽게 하지 말고.”
[만약 네가 생각하는 일이 벌어졌으면 어쩔 거냐?]
“적어도 착각하는 일은 없어야겠지.”
내 대답에 그는 대답 대신 손짓을 했다.
[일주일 동안 내가 이클립스라는 저 고대룡과 싸우지 말라고 했지? 그렇다고 쉬라는 소리는 아니다.]
“이겨서 들어내라?”
[그래. 이 공간에서만큼은 우리도 어느정도 간섭이 가능하다. 약해빠진 널 다시 단련시키기 위해 영혼을 데려왔다.]
그 말과 동시에 막대한 투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무왕……유르그.”
격투술의 절대자.
회랑의 최고 정령사인 정령 여제 유리아나의 남편이자. 한 대륙의 마왕.
단순히 맨주먹으로 시작해 세계에 구멍을 낸 괴물 같은 격투가.
연금술사 이바가 만든 괴이쩍은 스틱맨이라는 것에 감명받아 군중제어기라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효과적인 공격 법을 만들어낸 양반.
포괄적인 전력으로는 중위권 정도에 위치하는 영웅이나 대인전에서만큼은 다른 영웅들도 혀를 내두르는 순수한 육체파.
[오랜만이다 꼬맹아.]
하레스의 영혼 뒤로 덩치가 산만 한 사내가 싱글벙글 웃으며 나타났다.
늘 듣던 유쾌한 목소리.
오래되지 않았고 매번 욕하던 작자들이지만 사실 벌써부터 그리워지고 있던 이가 또 한 명.
내 앞에 나타났다.
[너 대단하더라. 어떻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가 있냐.]
“…….”
그도 알고 있는 듯했다.
“유르그.”
[조건은 들었지? 어디 실력 좀 보자.]
“전이랑 같다고 생각하지 맙시다.”
[그래 봐야 아직 약해빠진 놈이.]
쩌엉!!!
순식간에 그와 나의 주먹이 충돌했다.
[이야. 취소, 취소할게. 제법 많이 늘었구나.]
“괴물 같은 양반. 유르그. 요즘 제자들 성장 속도 무서운지 모르죠?”
[그런 놈이 성장한 게 나다 이 자식아.]
콰앙!!!
마치 약속이라도 하듯 힘을 충돌시킨 그와 나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 * *
콰앙!!! 쾅!!!
로브로 몸을 여민 채 동굴 밖으로 나온 일리나 데 팔란은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다 행동을 멈췄다.
협곡을 누비며 마치 거대한 섬광처럼 잔상을 남기고 충돌하는 두 남자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 사람은…….”
[무왕 유르그. 베르델 대륙의 마왕이다. 회랑 최고의 격투술의 달인이기도 하고.]
“아…… 그 기괴한 군중제어기인지 뭔지를 만든 사람이요?”
데이비가 하던 짓을 봐왔는데 모를까.
기술 하나하나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지만.
“좀 악랄했죠?”
[눈치는 빠르네. 저놈은 대인전에 관해선 아주 프로페셔널이다. 적어도 지금 데이비 놈의 한계를 끌어올리는 데엔 큰 효과가 있겠지.]
일리나에게 데이비는 절대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이자. 절대벽 그 자체였다.
하지만 지금 데이비와 싸우면서도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유르그라는 저 마왕은 격이 달랐다.
[허탈한가?]
“네?”
[그토록 노력했는데, 너희보다. 너희가 싸우는 적조차도 이길 것 같은 막대한 적이 존재한다는 게.]
“솔직히……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당연한 결과다. 이건 데이비에게도 해주지 않은 이야기지만…….]
짧게 침묵한 검신 하레스가 검을 집어 들었다.
[우린 단순히 영웅의 궤에서 멈춘 게 아니니까. 데이비는 몰라도 그 어떤 생명체도 살아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 해보지 않고는 모르잖아요.”
[검을 들어라. 데이비는 유르그가 가르치겠지만. 일주일간 후손님을 담당할 것은 내가 될 것이다.]
“이전처럼 하는 수련인가요?”
[아니.]
잘 모르는 모양이다.
[지금까지 내가 후손님에게 해준 한 수련 방식은 본래 우리가 데이비에게 하던 수련방식의 10분지 1도 안 되는 난이도였다. 지금부터 그 절반까지는 난이도를 올릴 테니 끔찍한 꼴을 당하기 싫으면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라.]
그 말에 일리나는 좀 전 데이비와 있었던 부끄러운 일을 마음속에 묻은 채 검을 들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지금부터 후손님이 할 일은 단 하나.]
내게서 살아남아라.
* * *
생지옥이라는 단어가 여기에 표현될 것이다.
로 아이아스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이 회랑과 동일한 공간에서 하레스가 구현하는 데에 성공한 무왕 유르그.
그는 쉴 틈 없이 나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극한에 극한의 상황을 만들기 위해 정말 죽기 직전까지 내몰린 상황이 수차례 오기도 했다.
하지만. 불평을 하기엔 이와 같은 수련을 너무도 오랜 시간 받아냈다.
물론, 다른 영웅들과 다르게 빙의 형식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하레스와 달리 유르그는 어떻게 이곳에 장기간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그걸 묻는다면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절대용언]
[멈춰라.]
쩌엉!!!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이클립스의 마나를 통해 구현하는 용언은 마치 절대용언 자체가 내 능력이었다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무작정 힘을 얻는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그걸 사용하고 응용하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한 힘이지!]
콰앙!!!
본래 협곡이었던 공간은 나와 일리나가 지내고 있는 곳을 제외하고 모조리 가루가 되어버렸다.
수련의 방식은 간단했다.
최대한 주변의 파괴를 막으면서 상대를 제압하는 것.
그는 나를 제압하고. 나는…….
새로이 얻은 포식특성으로 변형시킨 힘들을 이용해 그에게 저항한다.
단순히 그를 이긴다는 선택도 존재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괴물 같은 양반.
단순 힘은 영웅들 사이에서도 중상위권 정도에 그치지만 대인전에 한해선 최상위 힘을 지닌 영웅들조차 한 수 접어주는 괴물 중에 괴물.
자신의 육신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조리 활용하며 극한의 전투 센스를 드러내는 그는 대인전에 한해선 최고의 스승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일리나와도 만나지 못한 채 수련을 시작한 지. 체감시간으로 약 5개월.
정신을 차렸을 때 나를 제압하던 유르그가 5개월이 흘렀다고 내게 말했다.
일주일 정도 텀을 둔다더니 순 사기꾼들이 아닌가.
쩌엉!!!
그의 기습공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치며 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제법 늘었구나. 이제 힘도 상당히 다룰 줄 알게 되었어.]
나는 손에 머금어진 마나를 가볍게 회수하며 심드렁하게 물었다.
“끝까지 봐주면서 싸운 주제에 말은…….”
내가 이런 말 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 사기 캐릭도 정도라는 게 있는 법이다.
“당신네들 한 명만 멀쩡히 이 세상에 존재했어도, 넬타리드고 타나토스고 아무도 이 딴짓을 못했을 겁니다.”
[데이비. 우린 죽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생전에 그 정도 수준까지 오른 이는 오로지 둘 뿐이야.]
그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됐다.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부끄럽진 않겠다. 정진해라. 그 힘을 반절 다루는데 5개월이나 걸린 거다.]
“누가 모릅니까?”
그는 정말 인정사정없이 나를 공격해왔다.
뼈가 부러지는 건 기본이요. 전신 내장이 파열되어 강제로 각성시키기도 수차례였다.
오랜만에 회랑에서의 수련이 떠오를 정도로 격한 수련방식.
차이점은 이제 나도 어느정도 경지가 있거니와 그의 주 수련 내용이 내 힘의 숙련인 만큼 실전 위주의 싸움으로 수련을 지속했다.
포식의 특성.
먹어치운 힘을 내게 맞게 변질시키고 새로운 힘으로 만들어내는 힘.
필요하면 페널티도 지워버릴 수 있는 불합리 그 자체의 힘 덕분에 현재 내게는 4가지 힘이 완전히 스며들었고 한가지 힘을 점차 내 것으로 바꿔가고 있다.
이클립스의 마나.
신성력.
일리나가 보여준, 본래라면 내가 배우지 못할 차원계통의 검술, 시공격검.
그리고 원소 마나.
네 가지가 완성되었고, 아직 감만 잡은 정도지만 힘의 격차가 워낙에 거대해 막대한 효율을 가져온 신력이 그 예였다.
모두가 제각각 뒤섞이며 내게 가해지는 단점이 보완되고 장점이 극대화된 힘들이다.
보통 마법사라면 불가능한 마법을 아무렇지도 않게 발현하게 되었고.
보통이라면 불가능한, 태생부터 안 되는 힘도 끌어낼 수 있게 되고 있다.
점점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간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제 와서 물릴 수는 없었다.
한 번만 물려라, 타나토스. 미친개가 어떤 건지 보여줄 터이니.
아직 이 네 가지에 익숙해지는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나머지 도력이나 정령 마나, 사령 마나나 신력, 금기까지는 손도 못 대고 있지만, 충분히 자신감이 붙기엔 충분했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금기의 힘, 그것만큼은 최대한 먹어치우지 마라. 그것을 제하고서라도 위계를 버린 반푼이 신은 이길 방법이 존재할 테니.]
가장 강대한 힘이다.
그렇기에 포식을 해도 내 것으로 만들기 쉽지 않은 것이고.
위험한 힘은 안 쓰느니만 못한 법이다.
“알고 있습니다.”
5개월 동안 금기의 힘까지 먹어치워 보려 부단히 노력했지만 얻은 결과는 하나뿐이었다.
지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힘이 아니라는 것.
먹어치우는 건 가능한데. 그걸 변형시킬 능력이 부족하다. 부품도 모자라고, 내 숙련도도 모자라다.
그야말로 최종보스나 다름없는 힘이었다.
[애초에 그 힘을 먹어치울 수 있게 되면 신조차 먹어치워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신이라는 것은 초월적 의지. 혹은 개념.
내 특성의 포식대상으로 이미 포함된다.
“벌써 가시게?”
[나는 저기 금발아가씨에게 빙의한 검신과 케이스가 다르니까. 이 이상 존재할 순 없지.]
“당신도…… 사라지는 겁니까?”
내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묻자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데이비. 모든 존재는 자신의 길이 있는 법이다.]
“…….”
[고생했으니 이제 노력한 결과를 시험해봐야지.]
느긋한 그 행동에 괜히 짜증이 일었다. 제 영혼 사라지는 게 저렇게 대수롭잖은 일이었던가.
그래서일까. 이제 와선 사실 궁금하지도 않은 질문을 던지는 나였다.
“당신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지는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검신과 심연의 신의 잔념이 여기서 한바탕 싸움을 하면서 큰 구멍이 생겼거든. 덕분에 바깥과 시차가 줄어들고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도 생긴 거다.]
그 말과 함께 그가 연기처럼 흩어진다.
그가 사라진 이곳은 막대한 파괴의 흔적만 남아있었다.
그들은 결국 사라지는 것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이 현실에 간섭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할 대가로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가 사라지고 난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나는 어느새 내게 다가온 검신 하레스를 바라보았다.
[데이비. 손님 왔다.]
손님?
그가 고개를 까딱이기가 무섭게 공간의 하늘 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늘에서 익숙한 존재가 공간을 양손으로 찢어발기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클립스.”
여기 있는 가짜 이클립스가 아닌. 타나토스와 하나가 되어버린 타락하고 미쳐버린 고대룡.
진짜 이클립스가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타나토스의 힘으로 불사에 가까운 그녀지만…… 쫓아내는 건 가능하겠지?]
그의 물음에 나는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잘근잘근 씹어먹어 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츠츠츳…….
손끝으로 모여든 신성력이 순식간에 톱날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그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날아들었다.
어떤 대화도 없이 바로 시작된 내 공격에 공간에서 튀어나온 이클립스가 팔을 뻗어 신성력의 톱날을 가볍게 쳐낸다.
카아아앙!!!
하지만.
그녀가 쳐낸 백색의 톱날은 대번에 튕겨 나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손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그렇게 놀란 그녀에게 순식간에 접근한 내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뻗어 낚아채며 용언을 발현한다.
[멈춰.]
아주 잠깐의 경직.
그것으로 충분했다.
폭발적인 회전을 담은 권강이 그대로 그녀의 복부에 꽂혔으니까.
투쾅!!!!
순식간에 그녀의 육신이 지상에 처박힌다.
생각지도 못한 변화에 놀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프냐?”
그 물음에 그녀의 눈이 세로로 갈라지며 방대한 힘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한다.
“용언? 오빠가 그걸 왜 가지고 있어?”
경악한듯한 외침에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좋은 건 좀 나눠쓰자.”
콰득!!
순식간에 발현된 포식의 권능이 타나토스와 일체화된 이클립스의 힘을 한차례 물어뜯는다.
진짜 이클립스의 마나는 앞으로 있을 싸움에 반드시 필요하다.
지금 당장은 사용하지 않아도. 반드시 쓸 곳이 생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