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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799화 (798/1,559)

제 799화

224. 자신이 한 일에 책임을 져라

어디로 급히 향하던 길이었던 것일까.

한참 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일리나였다.

그녀는 급히 내 품에서 떨어져 나오더니 나를 걷어차듯 밀어내버리고는 헤프게 웃어 보인다.

“아하하. 페르 언니, 오랜만이에요.”

“일리나.”

의아한 듯 그녀를 불러보지만, 일리나는 다급히 멀어질 뿐이다.

“사정이 있어서 지구로 따로 넘어왔어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그…… 그래?”

의아한 듯 대답하는 페르세르크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일리나가 도망가버린다.

동시에 페르세르크가 빠르게 다가와 내 품에 안겨 왔다.

“데이비. 걱정 많이 했어.”

“…….”

“그대가 본녀를 환각 속에서 구했다고 들었는데…… 륀느에게 전부 들었음이야.”

“아픈 곳은 없고?”

떨떠름한 내 질문에 그녀는 말없이 발뒤꿈치를 살짝 들어 그녀의 입술을 내 입에 맞춰왔다.

밤 시간대의 싸늘한 창공의 바람이 나와 페르세르크를 휘감는다.

“본녀가 아픈 게 어딨겠어. 다 그대가 고생인 게지.”

어떤 상황이건 나를 믿어주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속에서 울컥하는 느낌이 든다.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페르…… 세르크.”

“왜 그래. 데이비.”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은 채 나를 보듬어주는 그녀의 물음에 나는 어렵사리 입을 뻐끔거렸다.

숨겨도 되잖아.

어차피 술을 마시고 있었던 하룻밤의 사고였을 테고. 확실하지도 않는데.

게다가 일리나 또한 그냥 하룻밤의 꿈이라고. 괜찮다며 넘겼지만.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x을 x대로 놀리면 넌 진짜 내 손에 죽는 거야. 알아들었어? 후회할 땐 늦어. 그러니까 처신 잘해. 이 호랑 말코 같은 자식아.]

영웅의 회랑에서 가장 신성한 성녀라는 입장인 주제에 입이 걸걸하기로는 회랑 최고나 다름없는 초대 성녀 다프네의 경고뿐만이 아니었다.

일리나가 괜찮다고 말했건 아니건 나는 그녀에게 짐을 떠안겼고, 그 짐을 준 이상 나는 그녀를 책임져야 한다.

에이리아도 결국 그런 상황이었고 페르세르크는 그때 당시 자신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필사적으로 에이리아를 내 곁에 붙이려고 애썼다.

하지만 지금은?

지금 그녀의 영혼은 타나토스에게서 일정 해방된 상황.

그녀의 영혼이 심연에서 만들어졌는지 일개 마족의 혼에 타나토스의 힘이 깃든 것인지는 몰라도 지금 당장 그녀가 다시 그곳으로 끌려들어 갈 일은 없다.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와 함께 공유한다는 게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쉬울 리가 있나.

당연히 불가능하지.

지구의 기준이었다면 당장에 머리채 잡고 이혼서류에 도장 찍으라 소리를 질러도 입도 뻥긋 못할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다.

그런 마당에 이성은 자꾸 나를 합리화 시켜나갔다.

지금의 평온을 위해 숨겨도 괜찮지 않을까. 한 번 정도는.

나만 입을 다물면 평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지금 있는 이 평화를 깰 수 없다.

마치 새로운 자아가 나를 설득하듯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애초에 페르세르크에게 말하는 게 일리나와 사고를 쳐버린 책임을 지는 방향이 맞는가.

복잡함 심리 속에 나는 페르세르크가 걱정스레 나를 올려다보며 부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데이비? 아까부터 이상한데.”

“내가…….”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는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쉽게 말하기 힘든 일인가 보구나.”

“페르세르크.”

“괜찮아. 본녀는 다 이해할 수 있어. 그러니까 천천히 말해봐.”

내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그녀가 키득거린다.

“그대가 이렇게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절경이로구나.”

담담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물었다.

“꼭 말해야 하는 일인 게야?”

“…….”

“말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돼.”

그녀가 내 품에 안겨 머리를 묻으며 말했다.

“그대가 본녀를 떠나거나 죽으러 가는 것만 아니라면야.”

“페르.”

부드러운 미소에 나는 양심이 처참하게 찢기는 느낌이 들었다.

빌어먹을 술 때문에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일리나에게 호감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천년 가까이 모태솔로로 살아왔으니 이런 경험에 대해 판단력이나 익숙함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니까.

“아무것도 아니야.”

결국, 나는 그녀에게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평생을 죄로 안고 살아가더라도 그녀에게 슬픔을 줄 자신이 없었다.

“거짓말이구나.”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너무도 칼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

“…….”

“말해봐. 데이비. 왜 무서워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데이비.”

“아무것도 아니…….”

“또 거짓말.”

그녀가 내 뺨을 약하게 꼬집었다.

“그대는 설사 수많은 인간을 죽인 대학살자가 되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야.”

“…….”

“본녀에게 말하기 힘든 게 있어? 그대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무엇인지 본녀는 알 것 같은 데.”

그녀의 말에 내 눈이 크게 뜨여졌다.

“무슨 일이 있었구나. 일리나와.”

그녀의 말에 나는 생각보다 그녀가 나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에게 마음이 생긴 게야?”

“…… 그건…….”

“아니지. 그건 애초에 물어볼 것도 없는 질문이었지. 그대가 본녀에게 과분할 정도의 사랑을 준 것도 알고 있지만 그대. 솔직히 에이리아도 일리나에게도 말 못 할 묘한 감정을 품고는 있었잖아?”

처음부터.

그 네 단어가 왜 이리 아프게 들려오는 것일까.

“…….”

“다시 물을게 데이비. 이번에도 거짓말을 하면 본녀는 정말로 화를 낼 거야.”

그녀가 단호한 얼굴로 내게 묻는다.

“일리나와…… 무슨 일이 있었지?”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에게 너무 미안했기에. 비록 술 때문이라곤 하나 나는 페르세르크를 배신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물론, 변명은 하지 않았다.

“일리나와…… 사고를 친 것 같아.”

결국, 내가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흐음…….”

하지만 페르세르크는 담담했다.

“그래서?”

“어떻게든 내가 녀석을 안아버린 건 사실인 것 같으니까.”

“책임지고 싶다?”

정말 여태까지의 생활을 모두 돌이켜보아도 지금의 나는 참 못났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 아니. 만약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철썩!!!

페르세르크의 손이 순식간에 내 뺨을 쳐올렸다.

그녀는 단단히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본다.

역시 화날 수밖에. 평생 사랑해준다고 약속하고 결혼까지 한 주제에. 얼마 지나지 않아 부인을 둘이나 들이겠다고 말하고 있는 꼴이니까.

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과 내가 저지른 일은 무조건 내가 책임진다는 책임감이 서로 공존하며 서로를 견제하고 싸워나가고 있는 지금 혼란스러움만이 앞선다.

“그러니까, 후우. 미안하다.”

내 말에 그녀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직 뭘 잘못한 건지 전혀 모르네. 그럼 딱 세 대만 맞아. 그 후에 본녀가 알려줄 테니.”

그녀가 다시 뺨을 쳐올리려는 그 순간이었다.

“언니!!”

갑작스럽게 나타난 일리나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이건 다 제 탓이에요! 제가 괜히 그런 말을 해서!”

“그런 말?”

페르세르크가 담담하게 묻는다.

“솔직히 데이비…… 마음에 품고 있었어요. 어쩔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품었다구요. 그래서 말했어요…… 곧 린디스 제국의 귀족과 혼인을 치를지도 모르니까…… 하룻밤만이라도 좋으니까…… 그……그래서 제가!.”

“그래서 안아준 게야?”

페르세르크가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 그건 아니에요…… 데이비는 끝까지 거부했어요, 언니를 배신할 수 없다고.”

“그럼 뭐야. 데이비를 일리나 그대가 어찌하기라도 했다는 뜻인가?”

페르세르크의 물음은 고저가 없었지만 그래서 더 차가워 보였다.

“그게…….”

일리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회랑과 같은 환경의 특수공간에서 보낸 7개월 가까운 시간에 대해서.

초기 이클립스와의 싸움에서 지쳐있던 당시 회랑의 영웅이 건네준 말도 안 되는 독주를 마시고 뻗어버린 사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은 후였다는 것을.

곰곰이 듣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피식 웃어 보인다.

정말 못났다 싶을 정도로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내게 그녀가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데이비. 본녀가 그대를 왜 때렸는지 알아?”

평소와 다르게 머릿속이 회전하지 않는다. 그저 미안하다는 말 밖에 안 나올 정도로.

“전혀 모르는 것 같은데.”

담담하게 말한 그녀는 근처에 있는 난간에 걸터앉았다.

“그대는 일리나를 책임지려 했겠지. 맞아?”

“그래.”

거짓말은 아니었다. 일리나와 사고를 친 게 사실이라면, 끝까지 책임질 생각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본녀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서 책임을 회피하려 했잖아. 그게 일리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모르는 게야?”

“페르. 그건.”

“알지, 본녀가 그대에게 배신감을 느낄까 봐. 슬퍼할까 봐 그런 거겠지.”

잘 알고 있다. 아니 모를 수가 없다.

“왜 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거야.”

하지만 페르세르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화를 냈다.

나는 에둘러 시선을 피했다.

“애초에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어, 이런 사고가 아니었더라도, 본녀가 그렇게 만들었겠지.”

“뭐?”

내 의문을 무시한 그녀는 다시 일리나에게 물었다.

“전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지?”

“그런 말?”

“기회 줄 때 잡으라고. 그게. 단순한 동정심이나 계산 때문에 나온 거라 생각해?”

그녀가 그런 말을 했었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가 내게서 사라질 거라 판단했기 때문에 그녀가 내린 결정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는 소리였다.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제 언니가 사라질 일은 없으니…….”

“그러니까, 이제 상황이 좋아졌으니까 그 말을 파기해도 된다?”

그녀가 붉은 눈동자를 빛내면서 일리나를 노려보았다.

“일리나.”

“네…….”

“뭔가 단단히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실 본녀는 그 일이 없었어도 일리나 그대를 반드시 데이비 곁에 두었을 거야.”

“그게 무슨…….”

“본녀와 혼인을 치르기도 전에 데이비의 마음속 한편에 그대가 있었다고.”

그녀의 말에 일리나가 충격을 받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나 또한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본다.

“데이비의 마음이 가는데에 한 점 후회가 없게 해주겠다고 본녀는 그리 맹세했어. 거기에 이견 따위는 없고.”

“하지만 이건 잘못된 거잖아요…… 일부다처제는 체제일 뿐 그건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는…….”

“본녀의 남편 잡아먹었으면 그대도 책임을 져야지 날름 도망치려고?”

“언니…….”

다시 페르세르크의 시선이 내게 향한다.

“데이비.”

“그래.”

“본녀가 허락한 건 에이리아와 일리나 두 사람뿐이야. 두 사람은 그대가 본녀와 혼인하기 전부터 그대의 안에 그대도 모르게 자리했던 사람이니까.”

“…….”

“다만, 다른 이들은 건드리지 마. 이제부턴 함부로 손 뻗어서 상처 주지도 말고 마음도 주지 마.”

처음부터 마음 일부가 이미 가 있었다는 말이 아프게 후벼판다.

애써 외면했지만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멱살을 잡아당긴 채 시선을 맞췄다.

“그대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 지 본녀는 다 알아. 그대의 사소한 버릇까지도 다 알고 있고. 본녀는 그걸 다 포함해서 그대를 사랑해. 그렇기에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전부 해주고 싶었고. 그대는 아니야?”

“헛소리 하지 마. 내가 장난으로 사랑한다 말한 줄 알아?”

처음부터 알면서도 사랑해준 것.

대체 그녀는 내게 얼마나 큰마음을 준 것인가.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미래의 평온을 계산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말대로 방금 나의 행동은 일리나에겐 상당히 큰 상처가 될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고마워. 이야기해줘서.”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서렸다. 장난기 서린 미소.

내가 가장 좋아하던 미소였다.

“이미 약혼 이야기가 오간 것 같은데.”

“그렇겠지. 살리반 그 양반, 행동력 하나는 확실하니까.”

혼담을 거부한 나를 대신해 일리나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은 결과가 바로 그 린디스 제국의 공작일 것이다.

“본녀가 원하는 결과는 적정선 내에서 일리나를 그대가 데려오는 것이야. 방법은 알아서 해결해야 할 테지. 메테오를 떨어뜨리건 마왕의 이름값답게 납치를 하건, 그건 알아서 해결하고.”

“…….”

내가 침묵하자 그녀가 또박또박 씹어뱉듯 말했다.

“알아서 해결해.”

“예 마님.”

“이제 좀 보기 좋구나…….”

코웃음을 치며 우아하게 돌아선 그녀가 걸음을 옮긴다.

“참, 이걸 말 안 했는데.”

담담하게 말한 페르세르크가 전에 없던 장난스런 얼굴을 해 보였다.

“데이비?”

“엉?”

“그대 말이야, 사실 일리나와 아무 일도 없었어.”

단순한 추정이 아닌 확신에 찬 목소리다.

그 말에 일리나와 내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누가 보면 얼굴의 이목구비가 사라지고 물음표 하나만 생겨난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의아한 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요.

의사 양반…… 아니, 이게 아니고.

“너무 재밌어서 장난 좀 첬는데. 잘도 넘어오는구나.”

“야. 잠깐만!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녀가 그걸 어떻게 확신한단 말인가.

당황한 내 외침에 그녀가 잠시 멈추고는 나를 비웃듯 슬쩍 쳐다보았다.

이상하리만치 그녀의 시선이 내 중심의 아래쪽에 향해있다.

오싹한 느낌이 든다. 뭔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어마어마한 짓을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말이다.

“궁금하면 직접 알아내 봐. 그리고. 한 입으로 두말하지 말아. 본녀는 변수를 싫어해. 앞으로 그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르는 그 어떤 변수조차도 본녀는 용납할 생각이 없다는 뜻인 게지.”

“야, 잠깐만 페르!”

다급히 내가 쫓아가 그녀를 잡으려 하자 그녀가 꺄르륵 웃으며 부드럽게 내 사정거리에서 빠져나가 버렸다.

“굳이 힌트를 주자면…….”

그리고는 장난치듯 말한다.

“본녀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점. 나머지는 알아서 생각하라지.”

키득거리며 사라지는 페르세르크의 뒷모습을 보며 나와 일리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못 한 채 그녀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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