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0화
티오니스 중부의 팔란 제국.
현 황제가 몸져누워있는 현 상황에서 황제를 대신하여 국정을 다스리고 있는 황태자 살리반은 한가지 문제로 골치를 썩이고 있었다.
“후우…… 너무 깨끗한데.”
그의 손에 쥐어진 서류에는 한 남자에 대한 인적 사항이 적혀있었다.
린디스 제국의 공작. 네토 라 리리.
리리 공작가의 젊은 유망주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고 홀로 공작가를 휘어잡은 그는 방대한 정보력과 자금력을 이용해 지금은 린디스 제국에서 무시 못 할 어마어마한 힘을 지닌 인간이다.
방대한 영토를 지닌 린디스 제국의 변방을 담당하는 공작 중 한 명으로 그 유명한 일인군단인 불여우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와 정반대의 위치에 있으며, 실질적으로 정치적인 충돌은 없지만, 쌍벽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 이이기도 했다.
“내가 잘 하고 있는 것인지…….”
“저하.”
고민하고 있던 찰나. 그의 곁으로 한 노 대신이 다가왔다.
“쉬어가면서 하시지요. 벌써 며칠째 정보만 찾고 계십니다.”
“재상.”
“말씀하시지요. 재상은 깨끗한 인간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신이 미련하여 말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나이다.”
“티 하나 없이 맑은 인간을 주변인으로 둘 수 있느냐는 물음일세.”
살리반의 피곤한 음성에 재상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군요. 리리 공작가의 그 젊은 공작 때문입니까?”
“…….”
“저하께서 일리나 황녀 저하를 그리 끔찍이도 아낀다는 걸 알면 황녀 저하께서 무슨 말을 하실는지.”
“분명히 말하는데 절대 입을 열지 마시오.”
단호한 반 존대에 재상이 껄껄 웃어 보였다.
“이미 약혼은 성사 직전이시지요.”
“그렇지. 이미 대부분의 이야기가 오갔지.”
“하면 고민할 게 무엇이 있습니까. 미심쩍다곤 하나 확실한 것도 아닌 것을요. 부인과 일찍 사별한 것이 흠이긴 하지만 주변에 명망도 좋고, 재력도 권력도 좋은 이입니다. 필시 황녀 저하를 평생 안전하게 지켜줄 수 있을 테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그가 손에 쥔 종이를 내려놓았다.
종이에는 한 남성을 조사한 흔적이 가득 보였다. 하지만 그 내용 안엔 어떤 문제도 발견된 바 없다는 보고만이 유난히 짙게 보였다.
* * *
“절대보옥을…… 심연을 닫는데에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까?”
케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째서입니까? 지금 당신의 힘으로는 타나토스를 제거하기 어렵습니다. 다른 방법이 있다고 하더라도요. 게다가 마계까지 가서 절대보옥의 힘을 충전해놓고 이제 와서 사용하지 않으시겠다니…….”
“절대보옥의 효과가 뭐냐.”
“그야 막대한 태초의 힘을 이용해 세상의 규칙에 간섭하는…….”
“그거. 꼭 문을 닫는 용도로만 사용하는 거 아니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겠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게 되면 이클립스나 타나토스를 당신이 제압할 수 있어야…….”
“가능해.”
단호한 내 말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정말입니까? 달라진 게 없는데 대체 어떻게…….”
“본래 나서선 안 되는 양반들이 나섰어. 이 정도까지 했는데 못 하면 혀 깨물고 뒈져야지. 무엇보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이클립스가 떠나기 직전 정신을 차리고 내게 했던 말이 상당히 거슬렸다.
타나토스를 돕는 배신자가 내부에 있다.
만약 절대보옥을 통해 틀어막는 게 그들의 목표라면 그대로 휘말려주는 건 곤란하다.
본래의 예정과 바뀐다고 해서 아예 못 쓰는 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방향으로 쓰는 것도 방법이리라.
반대로 이클립스가 거짓말을 했을 경우도 예상해둬야 했다.
치치치치치칙!!! 츠팡!!!
공간이 찢어지며 수백 미터의 거대 비공정이 지구를 떠나 티오니스의 창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파괴가 사라진 직후 지구의 인간들은 모두 환각에서 벗어났다.
남은 신인 평온이 최대한 지구의 상황을 조율하고 있으니 당분간 지구 자체에 큰 위협을 없을 터.
그렇다면 내가 지구에 굳이 남아있을 이유도 없었다.
실제로 마법 화로를 이용해서 아비트의 드래곤 하트를 청단이와 홍단이에게 이식해야 하는 작업도 해야 했다.
하인스 영지민들은 하늘에서 갑자기 나타난 거대 비공정을 보며 나의 귀환을 눈치챌 수 있었다.
“저하! 어서 오세요!”
“내가 없는 사이에 별일 없었지?”
이번엔 환각이 아닌 현실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때 파괴가 보여주었던 환각이 주었던 일말의 복잡함을 해소해야만 했다.
“하인스 영지는…… 별일이 없어요.”
“그래?”
왜 하인스 영지만?
그때였다.
“저하.”
놀라울 정도로 똑같은 목소리.
나를 뒤에서 부르는 베르닐 시종장의 목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몸이 굳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라고, 운명을 알아도 그 흐름을 볼 뿐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다.
“베르닐 시종장.”
“저하. 귀환하신 지 얼마 되지 않으셨으나, 왕궁으로 떠나실 준비를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말에 내 인상이 차갑게 굳었다.
똑같다. 그때와 다른 게 없다.
굳은 얼굴을 한 채 내가 물었다.
“무슨 일이야.”
“폐하께서…… 폐하와 왕비 저하께서 전날…….”
똑같다. 차이점이라면 이번엔 크리아네스 국왕뿐만 아니라 차기 왕비가 된 윈리와 바리스의 생모, 아니샤 후궁까지 뒤얽혔다.
상관없는 일인데 왜 등골에서 오싹함이 밀려오는 것일까.
설사 환각 속에서 봤던 그의 죽음이 현실이 되었을지라도, 나는 괜찮을 것이다. 그와는 완전히 의절한 사이가 아니던가.
비록 왕자의 직급까지 모두 버리진 못했지만 사실상 변방으로 밀려나 왕궁과의 연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나를 흔들 요소가 있는가.
긴장한 얼굴로 그를 보며 내가 말했다.
아니, 본래 말하고자 한 것과 다른 말이 흘러나왔다.
“베르닐 시종장. 나는 시답잖은 거로 장난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평소에 그 시답잖은 장난질을 내가 쳤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애써 정색하며 그에게 경고를 날렸다.
하지만 그는 담담한 얼굴로 자신이 할 말을 내뱉었다.
“폐하께서 전날. 새 왕자님을 득남하셨습니다. 윈리 왕녀 저하와 에오니샤 왕녀저하, 그리고 타냐 왕녀 저하께서도 이미 왕궁으로 떠나셨습니다.”
“…….”
이건 또 뭔 소리야.
“득남? 의아한 표정으로 에이미를 보자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심스레 속삭이듯 보고해왔다.
“아니샤 후궁께서 왕자님을 순산하셨데요. 세상에. 지금 왕성은 경사 난 분위기라고 해요.”
왕비께서 임신을 했었나?
의아함이 일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내가 뭔 생각을 한 건지.
“가보자. 그래.”
그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에 왜 안도를 하고 있는 것인지.
씁쓸한 감정을 숨긴 채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바로 가야 한다곤 했지만 새 왕자가 태어났다는 소식과 함께 각국을 초청해 여는 연회는 약 나흘 후에 열릴 예정이었다.
본래 하잘것없는 작은 소왕국이었던 라운 왕국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각국에서 사절단은 물론, 직접 왕위계승권을 지닌 이들도 참석하는 진풍경을 연출해냈다.
“자. 데이비. 완벽해.”
페르세르크가 내 넥타이를 매주며 예쁘게 웃어 보였다.
“으으…… 지구의 복장을 입다가 다시 드레스를 입으니 적응이 안 돼…….”
“쿡쿡 지구의 복장은 참 아름다운걸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일리나와 푸른 빛의 드레스를 입은 에이리아의 대화는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본래 왕태자가 정해지건 아니건 왕국에서 남아의 순산은 경사로운 날이 된다.
실제로 태어난 그 순간부터 왕족의 생일은 휴일로 지정될 정도이니 말이다.
“어…… 어서 오십시오! 폐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하!”
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빳빳하게 소리치는 기사의 모습에 내가 베르닐 시종장을 향해 물었다.
“내가 없는 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없었습니다. 저하.”
“그런데 아직도 이래?”
“정확히 말하자면 저하께서 가진 입장도 입장이지만 하인스 영지는 현재 라운 왕국 내에서 가장 발달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요. 실제로 기사들 중 대다수가 하인스 영지로 발령받는 걸 원한다는 말도 우스갯소리로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눈앞에 있는 신입기사는 미래에 직속 상관이 될지 모르는 나를 보고 얼어붙었다.
뭐 이런 뜻인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계신 곳에서 그 누구에게도 함부로 경례를 올리지 마라. 나는 폐하의 신하이지 폐하께 반기를 들 생각은 없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파랗게 질린 얼굴로 대답하는 그를 보며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알았으면 문 열어.”
담담하게 말하자 그가 바짝 얼어붙은 행동거지로 고개를 숙여 보이며 문을 열어젖힌다.
라운 왕국의 연회장은 사실 그리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하인스 영지에서 매 분기 보내는 세금 때문에 여유라도 생겼는지. 아니면 국제외교가 활발해진 탓인지 이놈의 겉멋에 충실한 귀족 놈들이 이토록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연회장을 만들었다는 게 학교의 점심…… 아니 학계의 정설이다.
거대한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들어서자 수많은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따로 호명하지 않는 건 국왕 크리아네스 올 라운이 이미 연회장에 있기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침묵으로 휘감긴 내부를 느긋하게 걸어 들어간 나는 상석에 앉은 크리아네스 올 라운 국왕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왕국의 태양께 영광이 있으시기를. 1왕자 데이비 올 라운, 그리고 왕자비. 페르세르크 폰 라운.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어서 와라.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보거라.”
상당히 피로해 보이지만 아직까진 건강한 모습이었다.
내가 고개를 들자 크리아네스 올 라운 국왕의 얼굴이 보인다.
마나의 흐름은 큰 문제가 없다. 그의 죽음은 단순 기우였던 모양이었다.
그래. 아직 당신은 죽으면 곤란합니다. 좀 더 살아서 당신 해온 것들을 청산해야 할 테니까요.“
“어서 오거라 아가. 오는 길이 힘들지 않았더냐.”
“폐하께서 주신 넓은 아량으로 인해 힘든 줄도 몰랐답니다.”
내 옆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예쁘게 웃어 보이자 주변에서 아주 작게 탄성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티오니스 대륙의 인간들은 대륙 6대 미녀라는 사실 웃기지도 않은 칭호를 달기를 좋아하던 이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6대 미녀보다 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 잡는 페르세르크를 보니 시선을 빼앗길 수밖에.
좋든 싫든 예쁜 보석은 소문이 나기 마련인 법이다.
“일어나라. 오늘 새 왕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와주어 정말 고맙다. 팔란 제국의 황녀와 에이리아 예비 왕자비도 와주어 정말 고맙네.”
“왕국의 경사를 축하드립니다. 폐하.”
드레스를 불편해하던 일리나였지만 언제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냐는 듯 여유롭게, 황녀의 품위를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정말 와줘서 고마워요. 데이비 왕자. 페르세르크 왕자비.”
“왕비저하. 몸은 괜찮으십니까.”
“왕자께서 보내주신 약이 효과가 있었답니다. 이제는 조금 무리하게 움직여도 숨이 차지 않네요.”
그러니 아이를 순산한 것이겠지.
연회의 분위기가 다시 무르익는다. 에이리아는 린디스 제국에서 온 사절단인 카트린느 대공을 만나기 시작했고 일리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타국의 수많은 귀족들은 하인스 영지와 어떤 연줄을 만들어내기 위해 접근하려는 모습을 보였지만 당장은 아니샤 왕비가 방패막이가 되어주고 있는 꼴이다.
“귀엽네요.”
아니샤 왕비의 품에 안긴 너무 작은 아기의 모습에 내가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예뻐라…….”
페르세르크는 그런 아이를 부럽다는 듯 쳐다보았다.
그녀는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니 말이다.
아마 그것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렸으리라.
“한번 안아보시겠어요. 왕자비?”
“그리해도 괜찮을는지…….”
“그럼요.”
화사하게 웃는 녹발의 왕비의 미소에 페르세르크는 발그레해진 얼굴로 아이를 품에 안아보았다.
그리고는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벌써 몇몇이 심정지라도 온 것마냥 굳는 게 보이는데. 부탁이니 임자 있는 몸에 들이대는 간 큰 짓은 하지 않기를.
그때 내 시야에 문득 젊은 사내가 보였다.
테가 얇아 잘 보이지 않는 안경을 쓴 부드러운 인상의 사내.
“오랜만이네요. 데이비 왕자.”
페르세르크에게서 잠시 떨어진 나는 와인잔을 건네는 시종에게 고개를 저어준 뒤 아직 어린 영애나 영식들이 마시는 음료를 손에 쥐었다.
“저하?”
“난 술 끊었다.”
왕족이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게 어디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일인가.
나는 가능하다.
벙찐 얼굴로 나를 보는 시종을 돌려보낸 채 나는 싱글거리고 있는 카트린느 대공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만입니다. 대공.”
“그러게요. 짧은 시간인데 엮인 일이 많아서 그런가 정말 오랜만에 만난 기분이니까요.”
“린디스 제국 사절로 오신 겁니까?”
“우리 귀여우신 황녀저하도 만나고 싶었고. 제가 혼자 온 것도 아니니까요.”
그녀의 말에 내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남성에게 시선을 돌렸다.
“반갑습니다. 데이비 왕자님. 이미 이야기는 익히 들어 언젠가 한 번쯤 만나 뵐 날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미는 사내의 말에 내가 조용히 악수를 해준다.
묘하게 힘이 느껴진다.
“린디스 제국의 리리 공작가의 가주. 네토 라 리리입니다.”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린디스 제국의 일축을 담당하는 대귀족을 만나 영광이군요.”
“대륙에 이름을 떨치시는 왕자님에 비하면 허름한 반딧불이일 뿐이지요.”
호감형의 미소. 사람의 호감을 사게 만드는 부드러운 목소리. 다 좋은데.
왜 이상하게 거북한 느낌이 드는지.
“사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오늘은 이렇게 인사만 나누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군요. 그럼 두 분 즐겁게 말씀 나누시기를.”
그렇게 말하며 물러나는 그를 보며 내가 조용히 침묵하고 있자 에이리아와 합류한 카트린느가 내게 조용히 말했다.
“어때요?”
“예?”
“저 인간 어떻냐고.”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평소의 모습을 보여주며 그녀가 물어왔다.
“글쎄요.”
“저 사람 참 깨끗한 사람이에요.”
“그래 보이네요. 소문도 이미 들어 알고는 있고.”
사랑하는 부인과 일찍이 사별한 남자로, 성품도 좋아 명망이 자자한 사내다.
어지간한 이들도 다 아는 인물이라는 소리였다.
게다가 매너까지 좋은데.
“너무 깨끗하니까 오히려 부담스럽습니까?”
“솔직히…… 그렇네요.”
“사람이 베베 꼬이면 안 되는 겁니다.”
“누가 누구보고 꼬였데. 선의를 베풀어도 의심부터 할 양반이.”
키득거리며 그녀가 잔을 내밀었다.
짠!
맑은소리와 함께 두 개의 잔이 부딪치자 카트린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웬 음료? 어디 아픈가 봐요?”
“아뇨. 술 끊었습니다.”
내 대답에 카트린느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에. 왕자가 성자였다는 사실보다 더 놀랍네요.”
이 여자가…….
경악하는 그녀의 말대로 놀랍긴 하지만. 그럴 수밖에.
술 때문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
“데이비 왕자님. 오랜만입니다.”
카트린느와 대화하던 사이 내게 다가온 살리반 황태자가 보인다.
“그동안 일리나를 보호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뭐. 서로 돕는 거지요.”
“사실 제국 내의 일로 인해 일리나를 다시 본국으로 귀환시킬까 합니다. 그동안 일리나를 보호해주신 점에 관해서는 제국 측면에서 합당한 보상을…….”
“보상받으려고 한 일은 아닙니다.”
애초에 그녀는 하인스 아카데미 학생으로 위장한 상태지만 실제 학생은 아니었다.
그녀가 수업에 나간 횟수는 사실상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까.
검에 관련해서 어떤 누가 그녀를 가르칠 수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
그의 말에 내가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방금 만나 보셨지요? 네토 라 리리 공작. 리리 공작가에서 이번에 일리나와의 혼담을 주제로 이야기가 오가고 있으니까요.”
그 말에 시선을 돌려 일리나를 찾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하는 리리 공작과 떨떠름하게 맞장구를 쳐주고 있는 일리나가 보였다.
“재력도 좋고 인망도 두텁지요. 딱히 문제 되는 성품도 아니고, 일리나에게 제법 호감도 있는 듯하니 그라면 녀석을 잘 지켜줄 겁니다.”
“지켜준다라…….”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 보는 눈 많이 낮아지셨네.”
“예?”
내 말에 살리반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본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이 없다.
그 말의 다른 뜻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만큼 잘 숨겼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