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05화
[특수 흑마법]
[소울 리서치]
저항하는 대상의 기억을 뽑아내는 마법은 있지만, 그 영혼조차 기억 못 하는 영혼의 최 심층부까지 들어가 그 영혼의 근본까지 손을 대는 건 데스 로드의 영역이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새로이 변환된 사령 마나를 이용해 데스 로드의 고유마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였다.
서서히 심층 기억으로 스며든다.
시작은 기이한 노랫소리였다.
정체불명의 노래지만 귓가에 남아 입에 맴도는 멜로디를 지닌 음악을 들은 그는 저택으로 돌아오면서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거기까진 기억에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저택의 시녀들 사이에서 그가 흥얼거리던 노래가 간간이 울려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끊어질 듯 말 듯 계속해서 이어지기를 몇 달.
국정 회의를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온 그는 저택 내부에 감도는 기이한 냄새에 인상을 찌푸리며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저택에서 그를 반겨줄 시종과 하녀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가.
저택은 대부분 불이 꺼져 인기척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상함을 느낀 그는 마치 홀린 것처럼 뛰어들어갔고, 반사적으로 자신의 부인이 있는 침소로 향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침대에 누운 채 헐벗은 채로 혀를 깨물고 죽어있는 그의 부인의 모습을 말이다.
그녀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대체 몇 명의 흔적이 오간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방안은 난장판이었다.
살해당한 부인의 몸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했고 얼굴에는 수치심과 고통이 서려 있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는지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다.
대체 어떤 미친놈이 수도 귀족의 저택에 침입해 자작부인을 강간 살인할 생각을 하겠는가.
부인의 죽음에 이성이 나가버린 그는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 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당장 나오라고, 당장 튀어나오라고.
부인의 상태에 미쳐버린 그는 피눈물을 흘리며 미친 듯이 허공에 검을 휘두르고 악을 썼다.
하지만 부인에 대한 복수에 이어 아직 살아있을지 모를 딸아이에 대한 걱정이 앞선 그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딸아이의 방으로 향했다.
방에 가까이 갈수록 정체불명의 독특한 냄새가 짙어졌다.
그렇게 서서히 속도를 줄여 딸아이의 방에 도착했을 때.
그는 그곳에서 진범을 만날 수 있었다.
기절한 딸아이를 납치하고 있는 수많은 복면인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새하얀 사내를 말이다.
“이런. 벌써 돌아왔습니까.”
기이하게 뒤틀린 목소리로 말한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네…… 네놈…… 네놈이!!!”
괴성을 내지르며 자작이 그를 향해 덤벼든다.
하지만 복면인들이 순식간에 나서 자작을 제압하고 그를 무릎 꿇렸다.
“걱정 마세요. 딸아이는 죽지 않습니다. 부인은 감정을 증폭시키기 위해 제 하수인들에게 조금 거칠게 손을 쓰라 하였는데 참지 못하고 혀를 깨물었다더군요.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개자식! 개자식!!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는 것이냐!! 대체 네놈이 누구란 말이냐!!!”
절규하며 악을 쓰는 그를 향해 가면이 빙그레 웃는 기분이 들었다.
“무엇을요. 당신의 새 주인이 되실 분입니다.”
그 말과 함께 저택에 한때 나돌던 노랫소리와 기이한 냄새가 짙어진다.
동시에 그의 시각을 마비시키는 빛이 퍼져나갔고.
그것으로 자작의 기억이 한차례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졌다.
굴란 백작 영식에게 아버지의 사업을 도와줄 테니 부탁하나만 들어달라며 굴란 백작가 영식에게 접근하는 기억.
공포에 질려 살려달라 비는 굴란 백작 영식을 단검으로 찌른 뒤 천으로 기이한 힘을 내뿜은 단검을 회수하고 롱소드만을 남겨둔 채 도망가던 기억.
[사…… 살려…… 끄륵…….]
공포에 질린 채 고통스러워하는 굴란 백작가 영식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듯 보였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치 본능이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듯 그는 움직였다. 세뇌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이일의 진짜 배후는 자작을 통해 내 발목을 묶으려 한 것이다.
나름대로 이중 함정까지 친 건 제법 칭찬해줄 만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힘에 제압당하면서도 딸아이를 구해야 한다는 집념이 그의 불안정한 힘을 뚫고 틈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내가 가진 힘이 어떤 수준까지 이르러있는지도 모른다.
“저하?”
천천히 눈을 뜨는 나를 페일트리스 후작이 바라본다.
“후작. 얼마나 시간이 흘렀습니까.”
“이미 밤중입니다. 왕성에는 제가 직접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이제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이라도 돌아가지 않으면……”
“10시간 정도…….”
짧게 침묵한 내가 싸늘한 표정을 지은 채 몸을 돌렸다.
“연회에 참석한 인간 중에 범인이 있다고 했지요.”
내 말에 그가 고개를 주억거린다.
“그 범인, 한번 끄집어내 보죠.”
워낙에 끔찍한 사고라 며칠 정도 귀족들이 이곳에서 머무르고 있으니 다행이다.
그 안에 이 개 같은 짓을 저지른 자가 있으니까.
놈이 이전에 나를 함정에 빠뜨렸다면. 이번엔 내가 함정에 빠뜨릴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내가 살기 등등한 시선을 거둔 채 바닥을 가볍게 굴렀다.
자작의 분노와 슬픔이 그대로 전해져서 내 감정을 어지럽게 만든다.
그래서 함부로 배우면 곤란한 마법이구나 싶은 느낌이 든다.
투웅!!
동시에 빛이 퍼져나가며 마법진을 만들었다.
“저…… 저하?! 마나 구속구를 찬 상태로…….”
“있으나 없으나. 별 차이도 없는데 무슨 상관입니까.”
마나 구속구를 찬 채로 마법을 다시 발현하는 내 모습에 페일트리스 후작이 경악한 듯 소리쳤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바닥을 다시 굴렀다.
[워프]
번쩍!!
빛과 함께 그와 내 신형이 순식간에 왕궁으로 복귀한다. 당연히 내가 돌아오지 않으니 왕궁은 혼란 그 자체였다.
“저하!!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던 것입니까!”
“재판이 시작되었음에도 저하께서 사라지셔서 난리가 났습니다!”
내 모습을 발견한 기사장 오르파의 외침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겼다.
“안내해. 기사장.”
“저하?”
“나름대로 수확도 얻었으니까. 이제 무죄 입증하러 가야지.”
배후는 하나.
그리고, 놈은 여기 있다.
“피…… 피고 데이비 올 라운 왕자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술렁이는 재판장 내부로 조용히 걸어 들어간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범인의 증거를 찾느라 늦었군요.”
“저하. 아무리 저하라 할지라도…….”
“꼬리라도 잡아 왔으니 걱정 마시오. 법관.”
“예? 그게 무슨…….”
이윽고 재판장에 들어서자 법관들과 심문관. 그리고 스스로 돕겠다 나선 다수의 타국 귀족들이 증인석에 앉아있는 게 보인다.
“저하. 그게 무슨…….”
“영식을 살해한 범인은 베트소프 자작이더군요. 그를 잡았으나 이미 죽은 후였습니다.”
“베…… 베트소프 자작이란 말입니까? 그렇다면 증거는…….”
심문대에 올라선 내가 품 안에서 꺼낸 보석을 강하게 올려놓았다.
“그의 기억입니다. 그리고, 이 안에 범인이 있는데…….”
잠시 침묵한 내가 사납게 웃어 보였다.
“꼴에 가면을 쓰고 있더군요. 그래서 배후를 바로 알아내진 못했습니다.”
내 말에 주변이 술렁인다.
증거라고 내가 무언가를 떡하니 가져와 버렸으니까.
“조작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 마냥 증거품으로 채택하긴…….”
“그건 보면 알 테고, 우선 무례에 대한 양해를 먼저 구하겠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전신에 힘을 끌어올린다.
동시에 어떠한 향이 내 주변으로 풍기듯 주변을 감싼다. 후각을 통한 자극의 파장이 퍼져나간다.
이 힘의 원리는 간단하다. 청각 시각 후각을 통해 감각을 자극하고, 그 파장을 조종하여 대상의 영혼과 육신에 변화를 일으킨다.
마치 세뇌처럼.
“당신들은 지금부터 끊임없는 자살 충동을 느낄 거다. 스스로의 목에 손톱을 박아넣고 핏줄을 끊고 싶을 터.”
내 말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이 눈을 부릅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토 라 리리 공작. 공작은 내가 뭘 했는지 이해한 거 같은데.”
“…….”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는 그를 보며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당신이 자작에게 한 짓이야. 개자식아.”
“…….”
급히 그가 몸을 튕겨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내가 섬광처럼 날아들어 그의 가슴을 짓밟으며 그를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커헉?!”
“어딜 도망가려고.”
“다…… 당신이 어떻게 그 힘을…….”
그의 표정에 드물게 당혹스러움이 묻어난다. 그가 끝은 아닐 거라 생각은 들지만 당장은 그가 이일의 원흉이라는 건 변함없다.
“데이비 왕자저하! 이게 대체 무슨?!”
“다들 냄새를 맡았습니까?”
침묵이 인다.
당연했다. 아무도 냄새를 못 맡았으니 말이다. 이 냄새는 맡게 하고자 하는 대상만 맡을 수 있으니까.
나를 함정에 빠뜨린 것처럼.“
“저하. 그게 무슨…….”
“오감의 제어를 넘어 세뇌에 가까운 힘. 시각, 청각, 후각을 이용해 인간의 심층을 자극하고 충동을 일으키는 특질능력. 난 사실 당신들이 아닌 단 한 명에게만 이 거지 같은 힘을 발현했습니다.”
내 말에 그들이 침묵한 채 나와 네토 라 리리 공작을 본다.
“근데 웃기죠? 이미 알고 있지 않고서야. 그렇게 갑자기 창백하게 질려서 반응한다는 게 말입니다.”
“저하. 그게 무슨…….”
“처음부터 이 힘이 뭔지 아는 놈이라는 소리.”
짧게 일축한 내가 쏘아붙였다.
“이 힘이 어떤 현상을 유도하는지 아는 것. 단 한 가지 경우밖에 없지요. 이 힘의 본래 주인이거나. 이 힘에 대해 아는 놈이거나.”
총도 맞거나 쏴보거나 쏘는걸 본 놈만이 위험성을 아는 법이다.
어느 쪽이건 이놈에겐 외통수다.
“어때. 제 힘에 당해본 기분이.”
내 빈정거림에 주변이 침묵한다.
“제 힘에 당해본 기분이라…….”
조용히 침묵한 그가 피식 웃는다.
“뭔가 잘못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저는 그 힘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던 입장입니다. 당연히 기밀이라곤 하나 알 수밖에 없지요.”
그래. 잡아떼면 사실 해결이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래요. 그렇게 잡아떼면 이 힘을 발현한 전례가 생긴 내가 범인이 되겠지.”
범인에 사용된 힘을 다루는 건 현재 나를 제외하고 입증되지 않았으니까.
“왕자님. 저는 왕자님이 범인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습니다만…… 그 힘을 사용한 게 왕자님이라면…….”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나는 그의 퇴로를 단숨에 틀어막았다.
“그걸로 안 되면 납득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명해드릴게.”
내가 꺼낸 것은 흉기로 추정되는 망고슈였다.
“자작이 가지고 있던 검입니다. 백작 영식을 죽인 흉기죠.”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검으로 향한다.
제대로 닦지도 않았는지 피가 묻은 단검이다.
“이 검이 어디서 만들어진 건가 생각을 해봤는데 말입니다. 이거, 하인스 영지에서 만들어진 결계 검이더군요.”
특정 힘을 담아 결계를 펼치게 만드는 검이다.
“사건 현장은 나를 제외한 어떤 마나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고, 혈향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퍼져나갔습니다. 뭐, 결계 검으로 피 냄새를 잠시 가두는 것을 이용하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마나를 흩어버리는 건 결계 검의 능력 밖이거든요.”
내 말에 그가 나를 노려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요지는 이겁니다. 마나를 흩어버린다, 라는 사실.”
장점처럼 보이지만 어떤 의미로는 힘을 발현하는 조건 속에서 그가 제어할 수 없는 절대 증거가 된다.
특히, 특질 능력은 마치 인간의 육체처럼 본인의 의지를 벗어나 제어가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동시에 다시 내 몸에서 오감제어의 힘이 퍼져나가며 그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하는 오감제어의 힘이 그의 몸에서도 흘러나와 저항한다.
몸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
그의 표정이 굳는다.
“힘을 거둬들이기 힘들 겁니다. 공작. 그 힘은 내게서부터 당신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일 테니.”
“데이비 왕자.”
“자, 지금부터 내가 당신의 주변에 마나를 퍼뜨릴 겁니다. 만약 당신이 이 힘을 지니고 있다면.”
특질능력이 지닌 제어가 안 되는 그 특징에 의해 내가 퍼뜨린 마나가 흩어질 것이다.
완성된 마법을 파훼할 순 없으나 흩뿌려진 마나는 얼마든지 흩어버린다.
“그 외에도 당신이 지금 서 있는 그 자리에 정령사 불러와서 기억을 조사해보라 시키면 당신의 주변만 기억이 사라졌을 텐데. 한번 확인해보시던가.”
이것 하나로 놈을 옭아맬 생각은 없다. 기어스 마법부터 신의 은총까지.
나는 이놈을 이 자리에서 반드시 끌어낼 생각이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침묵하던 그가 피식 웃었다.
“역시 쉬운 대상은 아니군요.”
“쓸데없는 저항은 안 해서 다행이네. 저항하지 마라. 공작.”
“그만두십시오. 당신은 나를 죽이면 반드시 후회할 겁니다.”
그가 나를 보며 비웃었다.
“제가 죽는 그 순간 당신이 아끼는 세 여인은 다시는 당신의 곁으로 돌아갈 수 없을 테니까요.”
세 여인.
페르세르크와 일리나. 그리고 에이리아다.
마지막 최후의 카드를 꺼내든 그가 나를 협박해왔다.
“자작의 정신개조가 완벽하지 않은 게 덜미였군요. 뭐. 숨겨 뭣하겠습니까. 왕자의 말이 전부 맞습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당신의 부인이 무사한지에 대한 여부는 전부 제 손에 달린 것을.”
담담하게 말한 그가 내게 짓밟힌 부분을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그러니 좋은 말 할 때 이 발 치우시지요.”
“네토 라 리리 공작… …대체 무슨…….”
타국귀족들이 의아해하자 그가 킥킥 웃어 보였다.
"별거 아닙니다. 각자 다들 취미 하나씩은 가지고 있으시지요. 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들의 몸에 특수한 약물과 제 힘을 이용하면 놀라운 결과가 나오니까요. 특히 고결한 여인이 정조를 빼앗기고 정신이 망가졌을 때 나오는 그 효과는 보통 흔해빠진 실험체와 궤를 달리합니다. 그래서 노렸습니다. 일리나 황녀도, 당신의 부인도."
그의 말에 내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바보같이 속아주더군요. 이번 일의 진범에 대한 단서를 찾았다며 제 별장으로 초대했더니. 겁도 없이 호위병도 대동하지 않고 찾아오는 모습이란…….”
“보통 호위병이 없다는 건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단 뜻으로 볼 텐데.”
“마스터도 제압하는 약을 먹였습니다. 보기 좋게 쓰러지더군요. 지금쯤이면 그녀들을 구속하고 그 앞에 제 부하들이 대기하고 있을 겁니다.”
이제 숨길 것도 없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신의 힘에 미친놈들의 행동이야 뻔한 법이다
“어이 사이코패스.”
내 부름에 그가 눈을 꿈틀한다.
“물러나세요. 내게 거스르지 말고 물러나세요. 그리하면…… 당신이 사랑하는 세 사람은 살려 보내주겠습니다.”
“물론 멀쩡히 보내주진 않겠지.”
“죽는 것보단 나은 것 아니겠습니까.”
“집념도 대단하네.”
“그만한 실험체는 찾기 힘들지요. 아. 걱정은 마십시오. 조용히 물러나 있으면 페르세르크 왕자비만큼은 안전하게 돌려보내 주겠습니다. 그녀는 정말 실험체로 쓰기도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우니.”
그의 부드럽던 미소가 사이한 웃음을 띤다.
“공작!! 그게 무슨?!”
침묵하는 나와 별개로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들은 다른 이들은 경악하며 그를 향해 소리 질렀다.
하지만 네토 라 리리 공작은 전에 없던 스산한 웃음을 지으며 내게 말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를 보호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군요.”
그의 눈이 마치 고양이 눈처럼 세로로 찢어진다.
“그…… 그를 당장 포박하시오!!”
“하…… 하지만 린디스 제국의 귀족을…… 게다가 왕자비님과 두 황녀님의 안위가!”
“린디스 제국의 귀족이라는 명분은 집어치우세요. 저 자식은 현 시간부로 직위해임 밑 데오르트 황제 폐하의 황녀이신 에이리아 황녀저하를 시해하려 한 행위로 사형 확정이니…….”
재판장 문이 벌컥 열리며 살리반 황태자와 불여우 대공 카트린느가 들어온다.
“카…… 카라벨라 대공.”
그녀의 표정이 섬뜩해진다.
“개자식이 감히 우리 황녀님을 건드려?”
“데이비 왕자!! 일리나는……내 동생을 대체 어디로 보낸 겁니까!! 당신 이런 식으로 일리나를 이용하면 내 손에 죽는 거야 알아들어?! 당장! 일리나를 내 앞에 데려…….”
“살리반 황태자.”
내 목소리에 그는 그제야 주변을 파악하고 눈을 부릅떴다.
세간에 일리나와 살리반은 사이가 굉장히 안 좋다고 평이 나 있다. 그런데 방금 그가 보인 모습은…… 마치 소중한 동생이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하는 오라비 그 자체가 아닌가.
이에 나는 가볍게 손뼉을 쳐 그들을 재워버린 뒤 잠시간의 기억을 망각시켰다.
“쯧쯧. 하여튼 여동생 하면 사족을 못 쓰는 제국답네. 빚진 겁니다.”
“크…… 크흠!!”
당황한 그가 언제 그랬냐는 듯 불편한 헛기침을 흘렸다. 그리고는 잠들 듯 쓰러진 그들을 보며 깨어난 이가 없는지 유심히 살폈다.
“일리나는 파……팔란 제국의 유일한 황녀이며 황족. 팔란 제국의 황태자로서 황족의 목숨은 당연 소중한 것입니다. 왕자!”
“이제 보는 사람 없으니 연기하지 마시고.”
“내 동생!!!”
격하게 소리치는 그를 보며 그를 수행하던 기사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내 곁에 있던 유일한 소드마스터. 페일트리스 후작이 천천히 고개를 들며 내게 말했다.
“살리반 황태자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달라지는군요…….”
“조용히 하세요. 후작.”
“허…….”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무시한 채 내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짓밟힌 네토 라 리리 공작이 그를 향해 빈정거린다.
“계속 이렇게 있을 겁니까? 빨리 나를 안전한 곳으로 이동시키세요. 안 그러면 당장에라도 세 여자를 다시는 일어날 수 없게 망가뜨리…….”
빠악!!
그의 머리를 걷어찬 내가 스산하게 웃어 보였다. 그의 이가 몇 개 부러졌는지 피가 고인다.
“저 빌어먹을 놈…… 반드시 살려서 우리가 데려가도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데이비 왕자. 원하는 건 다 내드리지요. 저 개자식의 신변은.”
"괜히 손댔다간 피를 보겠지만 일단 저자는 린디스 제국의 귀족입니다. 우선권은 저희에게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주면 고맙겠네요."
카트린느 대공이 싸늘한 시선으로 공작을 노려본다
카트린느 대공의 경우 일차적으로 물러나지만, 마냥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인다. 반대로 살리반은 방금전의 도발이 아주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뭘 원하십니까.”
그 말에 나는 미소를 거두고 쓰러진 공작을 밟던 발에 힘을 준다. 그리고 말했다.
"잡은 건 이쪽이니까요. 물론, 뭐 대가만 지불하면 이쪽이 소유권을 포기해줄 수도 있습니다."
내 미소에 그의 표정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낸다.
“파…… 팔란 제국의 재정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누가 돈 달랍니까?”
“팔란 제국의 땅은 모두 백성의…….”
“땅 달라고도 안 했는데.”
“팔란 제국의 백성들이 피땀 흘려 쌓아 올린 연구결과를…….”
“연구결과도 필요 없고.”
내 대답에 그가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전쟁 동원은 안 됩니다.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 순 없습니다.”
“전쟁 군사도 필요 없습니다.”
“그럼 뭘 원하는 겁니까.”
“그건 말입니다.”
딱히 요구할 건 사실상 없지만. 원하는 바를 말하라니 이야기해줘야겠지.
그때였다.
-치익…… 데이비. 그대의 상상 이상으로 일이 끔찍해…… 제압은 해두었으니 어서와서 확인해봐.
페르세르크의 무전이 수정구를 통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