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13화
228. 검게 물든 용의 절규 (2)
광기! 집착!
그 외에 숨겨진 무언가.
몸을 낮게 숙인 채 거대한 해머를 쳐 올릴듯한 자세로 몸을 웅크린 데이비가 스산하게 웃었다.
“너만 죽이면 돼.”
광기보다 더 진득한 뒤틀림이 느껴진다.
“너 때문에.”
이내 안광을 번뜩인 데이비가 한 발 내딛자 거대한 풍압이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다.
“내가 고생을 좀 많이 했어요.”
히죽거리며 그가 지면을 완전히 박살 내며 파고들었다.
[읏!]
쩌어엉!!!
다시 한 차례 공격이 가해진다.
반사적으로 이클립스가 유형의 장막을 만들어 낸다.
동시에 그녀의 뒤편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며 거대한 용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의 반격이었다.
공간을 찢어발기며 날아든 용의 앞발은 당장이라도 데이비를 찢어발겨 버릴 것처럼 파고들었지만 그에게 닿기 직전 무형의 장막이 그것을 그대로 먹어치워 버렸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물어뜯은 것처럼 용의 앞발이 사라진다.
진짜 현신된 고대룡의 발톱이 아닌 만들어진 발톱이다.
“흐…… 흐흐…….”
스산한 웃음을 흘리며 데이비의 망치가 또다시 그녀를 후려친다.
쩌엉!!!!
벌써 세 번의 공격을 허용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클립스, 아니 타나토스는 급히 양손을 부딪쳐 자신의 신격을 발현해낸 뒤 입을 열었다.
[절대용언]
[물러…….]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 용언이 완성되지는 못했다.
그보다 빠르게 파고든 데이비가 그대로 그녀의 머리를 낚아채 지상에 처박아버렸기 때문이었다.
작은 소녀에게 하는 것치고는 거칠기 짝이 없는 손속이라 외려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였지만 그 어떤 이도 그 행동을 저지하는 이가 없었다.
끼어들 여력이 안 되는 것도 있고 실제로 저 작은 소녀가 저지른 만행이 얼마나 끔찍한지 다들 알기 때문이었다.
[오빠…… 아파…… 이클립스 아파.]
“약 팔지 마라, 타나토스.”
그 말과 함께 이클립스의 몸 주변에 드러났던 방패문양이 완전히 갈라진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머리를 짓누른 채 데이비가 그대로 사령 마나를 끌어 올린다.
화아아아악!!!
동시에 데이비의 전신 뒤로 검붉은 날개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기이한 형태로 생긴 칼날 같은 날개는 곧이어 섬뜩한 빛을 내뿜었고 데이비의 눈동자에 검은 안광이 스며 나온다.
“혈마공.”
본능적으로 위협을 느낀 타나토스가 몸을 빼려 데이비를 걷어차 올렸다.
대체 그 짧은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신인 그의 눈으로 보기에도 이해할 수 없는 프리아 여신의 대리자가 보여주는 모습에 타나토스는 일단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잘못되었다. 프리아 여신이 뭔가 수작을 부렸구나!
데이비가 아무리 강해져 봐야 그는 타나토스라는 신 그 자체에 어떤 타격도 제대로 준 적이 없다.
헤라클래스의 힘은 조금 거슬리지만 그가 가진 힘의 총량으론 타나토스에게 타격을 주기엔 미미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금기의 힘을 사용하지 않고도 지금 타나토스 그 자체에 타격을 주는 공격 방식을 그가 터득했다.
소멸의 공포.
타나토스는 의지를 가진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소멸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떨어져라!!!]
쩌엉!!!
무형의 기운이 데이비의 전신을 강타한다.
하지만 데이비는 그 용언을 먹어치우며 파고들어 왔고, 그 과정에서 입은 부상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녀의 머리를 낚아채 수차례 지상에 처박았다.
막대한 신력이 타나토스의 신격을 관통하고 밀고 들어와 타격을 입힌다.
[천마신공]
[검격파쇄진천무]
[무화낙섬]
과거 천중원에서 자성과 지희의 스승이자 어버이였던 천열문주가 가르쳐준 일자전승의 무공.
그 무공의 진짜 원류인 천마신공의 무화낙섬이 신격이 열린 데이비의 몸에서 신력을 쏟아내며 펼쳐진다.
손에서 만들어낸 기검이 이클립스의 육신을 튕겨 올린다.
타나토스가 급히 추격해오는 기검을 쳐내려 들지만 기검들은 자비 없이 타나토스, 아니 타나토스가 잠식한 이클립스의 육신을 베어 넘겼다.
거대한 망치, 코로나 디스트로이어로 인해 방어능력이 부서지고, 신격이 개방된 신력이 타나토스의 근본을 헤집어 놓았다.
고작해야 햇병아리 신격 주제에. 쌓아온 업이 만년에 달한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번 한 번의 공격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소멸의 공포를 안겨다 주는 위력에 타나토스의 혼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게다가 데이비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한두 번 공격 후에 무너질 수준도 아니었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소멸당한다!
그의 섬뜩한 미소에 공포를 느낀 타나토스는 급히 자신의 신위를 끌어냈다.
자신은 죽을 생각이 없기에 이렇게 불리한 것도 감수했는데, 이런 식으로 소멸하게 된다면 본전도 건질 수 없다.
그렇다면 신격이 흔들리고, 위계가 더 추락하는 한이 있어도…….
그를 여기서 소멸시켜야 한다.
[내가 말하노라.]
[네 운명의 끈을 잘…….]
급히 신의 언어를 내뱉으려던 찰나였다.
[여신의 이름으로 명하니.]
[규율을 이행하라.]
타나토스의 의념보다 더 빠르게 태초 신의 의지가 그녀의 행동을 막아낸다.
순식간에 신격의 일부를 금지당한 타나토스의 눈이 크게 뜨여진다.
이럴 리 없는데.
심연의 공간이 있는 이상 프리아 여신이 이렇게 간섭할 수 없을 텐데?
마치 심연 그 자체가 무언가에 의해 급속도로 붕괴되고 있는 것처럼…….
타나토스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타나토스의 의지와 이어진 심연의 공간이 맹렬하게 뒤틀리고 있다.
뭔가 잘못되었다.
이클립스의 육신이 비틀리며 작은 소녀의 이가 악물렸다.
“아…… 아아아아아아아!!!”
격렬한 외침 끝에 그녀의 눈이 번뜩이며 전신에 검은빛이 휩싸여 데이비를 몰아낸다.
갑작스런 막대한 힘에 충격을 받은 데이비가 튕겨 나가며 부드럽게 착지했다.
“하, 반항하네?”
이게 얼마 전까지 타나토스와 목숨을 걸고 싸우던 그가 맞단 말인가.
그가 예전에 보였던 광기와는 다른 이질적인 광기. 저것은. 불구대천 원수를 죽이기 위해 철저하게 갈리고 갈린 칼과 같았다.
이윽고 이클립스를 감싼 거대한 흑빛의 회오리 속에서 눈동자가 번뜩이자 무형의 피어가 쏟아져 나왔다.
“커헉?!”
살아남은 인간들은 피를 뿌리며 무너져 내린다.
많은 수의 인간이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었고 몇몇은 내상으로 인한 피를 토하며 고통스러워했다.
“이…… 이게 무슨…….”
본래라면 일개 인간은 그 자리에서 즉사해버릴 위압의 피어였다.
하지만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데이비가 내뿜고 있는 투기가 이클립스의 그런 방대한 피어를 짓눌러버렸다.
터엉!!!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흑빛의 회오리를 찢어발기며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드래곤이 어마어마한 성량으로 포효를 터뜨리며 입에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에 데이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콰직!!
그리고, 놀랍게도 이클립스의 브레스는 방출되기도 전에 데이비에게 차단당했다.
기이한 사령 마나가 브레스를 생성하는 마나를 역류시켜버린 것이다.
이건 이클립스의 브레스를 수차례 맞아보지 않고서야 도저히 할 수 없는 분야의 일이다.
분명히 이클립스의 브레스는 처음 사용한 것일 텐데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가.
게다가 데이비는 브레스 자체를 완전히 역류시킨 게 아니라 브레스를 구성하는 마나의 흐름 중 일부를 뒤틀어 그 여파를 모조리 이클립스의 본체가 받게 만들었다.
브레스를 쏘는 게 이클립스 본인이었다면 몰라도 그녀의 육신을 잠식한 타나토스는 신급에 다다른 고대룡의 육신을 아직 완전히 제어하지 못했다.
“이리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하며 데이비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간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이기에 이클립스의 브레스가 방출되기도 전에 파훼 되어 역류한단 말인가.
과거 강제로 폴리모프 해제를 막아버린 괴물 같은 마법사는 본적이 있지만, 그 마법사는 이미 소멸했다. 그리고, 눈앞에 프리아의 대리자는 그 정도 힘이 없었다.
그런데.
대체 무슨 수로!
본체가 되었음에도 아직 모든 힘을 끌어낼 수 없다면 브레스로 승부를 봐야 했건만. 그 브레스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외려 이클립스의 육신에 큰 부상을 남긴 꼴이다.
이대론 안 된다.
프리아 여신의 힘과 저 괴물처럼 변해버린 대리자의 힘을 계속해서 받아친다면 자칫 목적을 이루기도 전에 소멸할지도 모른다.
도망.
신의 의지로써 절대 생각해 본 적 없던 도망과 소멸에 대한 공포가 타나토스라는 신을 옭아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끝장을 내려는 데이비의 손에 검은 기운이 머금어진다.
신격을 머금은 사령 마나!
위험하다는 본능에 급히 몸을 굴리지만 애석하게도 타나토스의 정신체는 육체적인 움직임이 딸릴 수 밖에 없었다.
감히 창조된 신이 직접 몸을 움직여가며 싸울 일은 사실상 없으니까.
다급히 거대한 꼬리를 이용해 폭풍을 일으켜 그의 전진을 늦추고 몸을 빼려 했다.
거대한 육신도 지금 그의 공격에 직격당하면 점점 제어가 어려워진다.
이클립스의 정신이 만약 조금이라도 깨어나면, 그땐 정말로 치명적인 틈을 만들어낼 것이다.
완전히 잠식했다 하였지만, 고대룡의 정신력은 놀라울 정도로 질겼으니까.
“하…… 하하…… 도망가지 마. 타나토스. 너 도망가면…….”
내가 다시 그 지옥같이 끔찍한 훈련을 해야 한다 이 말이야.
스산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보며 타나토스는 급히 거대한 앞발로 지상을 내리쳤다.
동시에 꿀렁꿀렁하며 늪지대가 마치 파도처럼 쏟아져나오며 데이비를 막아섰다.
물론, 시간 벌이에 불과한 저항이다.
너무 뼈아픈 실책이었다.
데이비라는 대리자를 너무 쉽게 본 탓에 너무 손쉽게 목숨줄을 내어줘 버린 것이다.
대비하고 있었다면, 신으로서 자신도 소멸될 수 있다는 두려움을 알고 대비했다면 이토록 일방적이진 않았을 터인데.
신격을 뚫고 상위차원에 도달해 직접 신격을 공격하기 시작하는 데이비라는 존재는 이전 만났던 다른 방해꾼인 영웅이라는 존재와 같이 공포심을 충분히 불러일으켰다.
[두 번은 없어.]
검은 늪지대를 사령 마나로 튕겨 내버린 데이비가 타나토스를 끝장내기 위해 파고들자 타나토스는 그의 전진을 막기 위해 이판사판이 된 듯 신력을 마구잡이로 끌어올려 흑창을 쏘아 보냈다.
위험을 알면 물러나겠지.
하지만 그 판단 또한 잘못된 판단이라는 사실이 신의 의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데이비가 멈추지 않은 채 그대로 흑창을 쳐내버린 것이다.
물론, 그 대가로 뱀처럼 갈라진 흑창이 데이비의 복부를 뚫고 스며들었지만 그럼에도 데이비는 멈추지 않았다.
[아…… 아아!!]
타나토스가 빙의한 이클립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타나토스는 이때 처음으로 피조물에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멸의 공포를 느꼈고, 두려움과 경악을 느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신으로서 해본 적도 없던 선택을 내렸다.
그 자리에서 도망친 것이다.
당연히 타나토스를 놓친 데이비의 표정 또한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이 새끼가 도망을 가?”
몇몇 도시국가를 고작 몇 시간 만에 멸절시켜버린 괴물을 쫓아내고도 만족스럽지 못한지 데이비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신성력과 사령 마나, 원소 마나 등등 수많은 힘이 병합되어 쏟아져 나오며 그를 보는 이들을 두렵게 만들었다.
물론 그 폭주는 오래가지 않았다.
허공이 찢어지며 튀어나온 은발의 소녀가 순식간에 데이비에게 날아들었고 그를 끌어안듯 안아 몸을 날린 것이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데이비를 끌어안은 페르세르크는 그대로 다시 열리기 시작한 공간으로 몸을 던져 사라져버렸다.
남은 것은 좀 전 데이비와 타나토스가 벌인 재앙과도 같은 싸움을 지켜보았던 이들이 전부였다.
“폐…… 폐하…… 방금 그자는…….”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가 누군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그렇게 한참을 고민했을까. 국왕은 문득 자신이 왜 그걸 모르고 있었지라는 표정을 지으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데이비…… 올 라운…… 대륙의 성자.”
“대…… 대륙의 성자요? 그가 데이비 왕자란 말입니까 폐하?”
“그래…… 분명히 대륙 회의에서 본 적이 있다. 한데…….”
왜 기억이 안 나다가 갑자기 난 것일까. 아직 치매 증상은 없었을 터인데.
마치 무언가가 기억을 강제로 지웠다가 다시 떠오른 것 같은 괴리감에 국왕은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한 채 멍한 표정으로 난장판이 된 성을 바라보았다.
* * *
이공간으로 다시 빨려 들어온 데이비가 철푸덕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페르세르크와 일리나가 그의 양팔을 붙잡았고 다프네가 달려왔다.
“이 갯강구 같은 자식이 가지가지 한다 진짜!”
빠악!
거침없이 데이비의 뺨을 후려갈긴 그녀가 양손을 포개어 데이비의 심장에 손을 올렸다.
“제 힘에 스스로 휘둘리는 멍청한 새끼! 그렇게 하다가 비명횡사하면 누가 묘비라도 박아준다던? 그새 땅속에 파묻힌 기억이 그리웠냐? 어?!”
치이이잉!!!!
“으읍!! 쿨럭! 쿨럭!”
거친 기침을 토해내며 데이비의 복부에 박혔었던 뱀처럼 꿈틀거리던 것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꿈틀거리던 검은 뱀은 이내 다시 모여들며 흑빛의 창으로 변했고, 이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타나토스가 도망치기 직전 데이비의 전진을 막기 위해 박아넣었던 흑창이였다.
그 당시엔 그것이 무엇인지는 파악할 겨를이 없었다.
눈앞에 타나토스를 쳐죽인다는 하나의 목적 아래에 계속해서 움직였으니 말이다.
“야 이 간땡이가 부어서 배 밖으로 튀어나온 x라이 자식아. 이런 거 몸에 달고 싸워? 죽으려고 작정했어?”
“바쁜데 그런 것까지 어떻게 신경 씁니까.”
“그렇게 뒤져도 주둥아리만 관짝 밖으로 나올 x끼! 관을 어깨에 지고 춤이라도 춰주랴?!”
“크…… 고건 몰랐네.”
상대를 마냥 우습게 본건 타나토스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하…… 그래도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야. 타나토스도 설마 네가 신격까지 개방했을 거라곤 생각 못했을 테니.”
이제 신격을 개방한 건 들켰지만 그만큼 얻어낸 것도 많으니 결국은 플러스마이너스 제로인 상황으로 회귀한다.
“그런데 정말 이런 방법으로 타나토스를 죽일 수 있는 건가요?”
“그게 불가능하면 시도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네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닌 것 같은데.”
다프네의 물음에 일리나가 조심스레 대답했다.
“그동안 타나토스의 위계를 추락시키려고 그렇게 많은 노력을 했…… 잖아요? 그런데.”
“결론만 말해 결론만.”
“그러니까 너무 쉽게 해결되는 건 아닌가 해서…….”
쉽게?
다프네가 피식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일리나를 노려본다.
“일리나라고 했나?”
“아…… 네, 일리나 데 팔란이라고 해요. 팔란 제국의 황녀…….”
“세상에는 말이야, 공짜 같은 건 없어.”
공짜는 없다.
그 한마디가 너무 무겁게 다가온다.
“그…… 그럼 데이비 오라버니께 무슨 문제라도 생겼다는 건가요?”
당황한 에이리아의 외침에 다프네가 그녀를 바라보고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떤 걸 잃어버린 거죠?”
그 물음에 다프네가 무덤덤하게 답해주었다.
“업.”
“업?”
“그동안 저놈이 쌓아온 것 그걸 업이라고 하지?”
업이라는 것이 사라진다는 말이 그렇게 큰 문제인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어지는 로 아이아스의 대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업이라는 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그 사람이 살아온 존재 그 자체의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답니다. 그게 사라진다면, 그 사람의 존재가 사라진다는 뜻이에요. 기록, 기억, 그 외에 손에 닿은 모든 흔적까지.”
“…….”
데이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그런 케이스를 겪은 이를 이미 보았으니까.
“그, 그럼 지금 우리가 전부 데이비를 잊어버린다는 소린가요?!”
“처음엔 연이 작은 순서대로 서서히 없어질 거야. 그리고, 데이비의 신격이 완벽해졌을 때, 그때 전부 잊히는 거야.”
인간이자 반신이었던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존재는 사라지고, 신격화된 데이비가 깨어난다.
“어때, 비슷하지? 누구랑?”
데스 로드 로 아이아스 그녀가 사라지게 된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로 아이아스가 인간으로 죽을 수 있었던 건 그녀가 완전한 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데이비는 다프네의 말을 곱씹었다.
사실상 타나토스를 막을 방법은 이것만큼 확실한 게 없다.
절대보옥을 통해 위계를 추락시키는 건 사실상 너무 위험한 도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쌓아온 업이 사라진다는 건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런 데이비의 심란함을 다프네는 아무렇지도 않게 흩어버렸다.
“물론, 네 동의도 없이 너를 세상에서 지울 린 없잖아? 넌 걱정하지 마. 혼선은 있어도 당장 널 잊는 이는 없을 테니.”
다른 영웅이 희생되었다는 말이다.
“누굽니까 그게.”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 룩스대륙의 영웅이며, 네게 환수들에 대해 가르쳐 준 양반.”
그가 사라졌다.
“그 양반은 네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가르칠 수 없다고 판단했고 스스로 소멸했다.”
“이게 말이야 막걸리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처 지껄이는 겁니까?”
“깝치지마. 데이비. 그건 셰인이 내린 선택이고 그걸 네가 뭐라 할 자격은 없어.”
반대로 데이비의 인생에 그들이 멋대로 희생할 권리도 없다.
하지만 뻔뻔하게 그것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들이 누구 때문에 그렇게 소멸한 건지 가장 잘 알기 때문이었다.
“헤라클래스는 네게 완전한 신이 되라 말했지. 그게 최선책이고, 그런데 말이야. 난 그런 교과서를 보면 꼭 반대로 하고 싶은 습성이 있거든.”
“저도 이번만큼은 같은 생각이에요 데이비.”
로 아이아스가 첨언하며 데이비의 뺨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러니까. 신격을 각성시키지 않고 간을 보는 거야. 한번 각성하면 그땐 대체할 업이고 나발이고 인간이었던 넌 반드시 잊혀지니까.”
신격을 완성시키기 직전까지 몰아붙여 타나토스를 소멸시키고 다시 신격을 봉인하면 데이비라는 인간도 잊혀지지 않고 신의 힘이 있어야 소멸시킬 수 있는 타나토스도 죽일 수 있다.
그 과정인 험난하고 당연히 불완전한 신이기에 어렵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는 건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이 다프네가 제시한 방법이며 선택이었다.
하지만
“다프네, 당신은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그건 한 가지 사실을 완전히 제외할 경우에나 가능한 방법이었다.
세상에 남은 3년이라는 시간.
애초에 세상의 수명은 고작 3년 남짓 남았다.
데이비가 신이 되어 세상을 리셋하고 생명력을 순환시키지 못하면 결국 세상은 개념, 공간, 시간 물질, 생명, 신. 어떤 것도 남지 않는 허무가 되리라.
결국은 신이 되어야 하는데. 이렇게 희생할 필요는 있는가.
그 질문에 다프네는 예상외의 답변을 내어주었다.
“왜 쓸모가 없어, 네가 뭘 시도하건 기회 정도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그때까지 우리가 시간을 벌어주는 것뿐이야.”
“대체 왜요!!”
데이비의 외침에 로 아이아스가 그를 뒤에서 감싸듯 끌어안았다.
“저흰 이미 천수를 누리고 죽은 망령이에요 데이비.”
환수 소환사 셰인 스크리프트는 데이비에게 주어질 짧은 시간을 위해 주저 없이 자신을 희생했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른 영웅들이 계속해서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인간의 업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업을 희생시킬 것이고.
그 한마디에 속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드는 데이비였다.
그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것일까. 다프네는 씁쓸한 표정을 애써 숨긴 채 말했다.
“로 아이아스. 이 자식 보니까 아직 멀쩡한 거 같은데. 계속하지.”
“네? 데이비는 아직 좀 더 쉬어야…….”
“괜찮습니다. 계속하죠.”
휴식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로 아이아스의 말을 끊으며 데이비가 일어났다.
“데이비. 책임을 느끼지는 마. 급하다고 더 급하게 가다간 엎어지는 법이야.”
“알아서 합니다.”
그 대답에 다프네가 한숨을 내쉰다.
“데이비.”
“방법, 하나 찾을 것도 같으니까요.”
방법?
그 말에 모두가 의아하게 쳐다보던 그때. 데이비가 짧게 중얼거렸다.
“다만 그 전에 좀 더 간섭력을 키워야 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확신이 서렸다.
“시련, 출구 없는 시련은 없다. 당신이 한 말이잖아.”
“……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해봐.”
그저 믿어주면 되는 것이니.
다프네가 그 말을 끝으로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