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4화
대규모 생명 순환진.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마나 수로는 놀라울 정도의 우연이 집약된 무언가였다.
아마 이 천만분의 일 아니, 억분의 일의 가능성으로 성공한 이 마나 수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면 페스리사 대륙이 이토록 무너지는 일도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러니하네.”
한 세상이 멸망의 위기에 놓임으로 인해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생긴 꼴이다.
완전히 미라가 되어버린 추락자의 왕. 그런 그들에게서 강제로 뽑아낸 생명력이 대량의 순환을 이룬다.
제대로 된 구성과 변화를 보고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륀느. 이게 뭔지 알겠어?”
내 물음에 누군가의 것으로 추정되는 뿔을 가지고 이리저리 쿡쿡 찌르고 있던 륀느가 다가온다.
륀느가 쫓아갔던 추락자의 왕들이 재앙이라 이르던 그놈의 것이리라.
“륀느, 마법적인 지식에 관해선 정보가 상당량 부족하다 판단.”
“그냥 좋은 거야.”
확인을 마친 나는 망설임 없이 청단이와 홍단이를 합쳐 초단이로 변형시켰다.
그리고는…….
쩌억!!
망설임 없이 균열을 베어버렸다.
“헉! 규…… 균열이!”
오랜 시간 이곳의 사람들을 괴롭혀온 균열이다.
균열의 끝이 이게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곳에 넘쳐나는 세상의 생명력은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리라.
“괘…… 괜찮은 겁니까. 분명 그걸 찾고 계셨던 걸로…….”
“다 기억해놨으니 괜찮아.”
완전 기억능력의 장점은 스치듯 보고 지나간 것조차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는 점이다.
거대한 균열을 포함하여 위쪽에 있던 작은 균열까지 이어진 거대한 마나 수로.
마치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끝도 없이 복잡한 마나 수로의 위치와 구성은 모두 기억해두었다.
이대로 이것을 차원의 중앙인 티오니스와 연결하여 각 차원으로 뻗어져 나가도록 만든 뒤 타나토스의 생명력을 모조리 때려 박으면 된다는 소리였다.
다만 지금 당장 사용할 순 없었다.
이 마나 수로는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순환진이지만 너무 완벽하기 때문에 지금 페스리사 대륙 같은 사태가 벌어졌다.
당장 티오니스에 이걸 그대로 설치하면 벌어질 일은 페스리사 대륙에서 벌어진 일의 확대판이 될 뿐이다.
그래도 붉은 공허에서 넘어온 힘이 무언가 작용을 한 줄 알았는데.
그쪽에서 넘어온 건 마나 수로를 통해 유입된 생명력뿐 그 어떤 것도 없다.
붉은 공허. 그곳에서도 생명력이 상당량 있다는 게 놀랍지만 중요하진 않았다.
“아트렐리아 대륙까지 갈 필요는 없겠네.”
마법 대륙 아트렐리아도 조사해보려 했지만, 페스리사 대륙에서 복권이 터진 이상 시간을 낭비할 순 없다.
“원하는 바는 다 이루신 겁니까?”
“그러네요. 더 이상 여기 볼 일은 없네요.”
더 이상 이 땅에 남아있을 이유도 없다.
원하는 바는 모두 이뤘으니 말이다.
방해꾼이 사라진 이상 이곳에 남을 이유는 없었다.
이후 나는 주변 정리가 끝나는 대로 생존지로 복귀하는 행렬에 올랐다.
그리고 생존지에서 기다리고 있던 슈바이츠 장로의 도움을 받아 커다란 부지가 존재하는 연구실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추락자의 왕에 대한 이야기가 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한쪽에선 말도 안 되는 헛소리라며 믿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추락자의 왕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왕을 사칭하는 추락자일 것이라는 게 그 이유였다.
물론 그들이 어떻게 떠들건 내겐 상관없는 일이지만.
“흐음…… 이게 이런 식이면 방출은 줄어드는데 유효기간이 생겨나네.”
가히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마나 수로인 만큼 조금만 잘못 손을 대어도 여기저기서 문제를 일으킨다.
그렇기에 나로서도 신중하게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공터의 바닥과 허공에 균열에서 본 것과 비슷하나 내가 개량한 방식의 마나 수로를 설치하고 타나토스의 신격을 이용해 순환시켜보길 수차례.
이곳에서 지낸 지 벌써 일주일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시도 횟수만 이미 백번이 넘었지만 원하는 결과는 쉬이 나오지 않았다.
“골치 아프네…….”
이 정도 마법진에 관한 조언을 얻을만한 존재는 사실상 회랑의 영웅뿐이지만. 이제 회랑의 영웅들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오로지 내 힘으로 알아내야 했다.
“데이비 님. 부탁하셨던 마나 회로 증폭 장치입니다.”
홀리곤은 그런 내 연구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해주곤 했다.
허공에 붉은빛을 내며 떠오른 거대한 마나 수로는 단순히 구조를 해석하는 데에만 해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감사합니다. 거기 내려주세요.”
“예. 그리고 또 도와드릴 건…….”
“굳이 은혜를 갚는답시고 그럴 필요는 없네요. 본래 하던 일을 하면 될 겁니다.”
“하지만 목숨을 구원받은 입장에서…….”
“괜찮습니다.”
솔직히 귀찮아요.
내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생존지 내에서 내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무언가가 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자도 있는 듯하지만, 그거야 사람 사는 곳은 어딜 가든 존재하는 법이다.
삐릭…… 삑!
거대한 마나석들이 부착된 장치를 이리저리 만져본 나는 그대로 뚜껑을 열어 내부를 확인한 뒤 부품들을 빼내기 시작했다.
“데…… 데이비 님?!”
“개조하는 겁니다. 다 쓰고 본래대로 되돌려놓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 아닙니다! 원하시는 대로 쓰셔도 됩니다! 한데…… 처음 보는 물건인데 내용물을 파악하신 겁니까?”
“고위 마법 디스펠이 이것보다 어려웠으면 더 어려웠을 겁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마나석을 뜯어내고 마나 술식을 변경시키는 내 모습을 보며 홀리곤이 복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데이비 님은 마법사라 하셨지요.”
“예.”
“한데…… 왜 마나를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숨겨요?”
“예. 제 눈엔 아직도 데이비 님의 몸에선 마나가 한 줌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물론 그곳에 있던 모두가 보았습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거운 마나를요.”
일부만 털어놓은 건데 새삼스럽기는.
“숨긴 적 없습니다.”
삑!!
개조가 완성된 장비를 이용해 마법진과 연동시키자 대량의 반응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역시 이쪽이 문제였네.
“숨긴 적이…… 없다고요?”
“예.”
그의 얼굴엔 의문이 서린다.
마나를 숨긴 적이 없는데 마나에 민감한 마법사들, 그것도 6서클 급 이상의 마법사들조차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으니까.
그건 아예 마나가 없을 경우에나 해당하는 소리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퍼져있는데 못 느끼는 겁니다.”
내 말에 그가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는 이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너무…… 방대해서…….”
“비슷하죠?”
“세상에…….”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며 나는 장치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 마나 수로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한 번만 완성하면 된다.
그때까지 수차례의 도전을 아낄 순 없다.
“그럼…… 데이비 님은 대체 몇 서클 마법사이신 겁니까.”
“서클이라…….”
이제 와서?
“9개네요.”
기본적으로 9개. 하지만 지금 내가 돌리는 서클은 그 9개의 서클을 넘어선 다른 무언가다.
내 한마디에 그가 멈칫했다.
“아…… 아홉 개요? 설마…… 9서클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보통 그렇게들 부르죠?”
내 웃음소리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한번 보세요. 어떤 거 같습니까?”
혼란스러워하는 그에게 내가 질문을 던졌다.
“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진입니다. 실제로 붉은 균열에서 나온 것과 동일하죠.”
“…….”
“그런데 이런 방식이면 상당히 큰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예를 들어 지금 이 페스리사 대륙에 펼쳐진 재앙처럼.”
“…….”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바꿔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 거 같습니까?”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저로선 이해할 수도 읽을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마법진이라는 것도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이게 정상이지.
“후우…….”
방법이 없나.
필요한 게 있다면 더 가져다주겠다며 물러가는 그와 다르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져 왔다.
별로 고운 시선은 아니지만 미련 없이 무시한다.
벌써 일백이 넘는 수정을 거쳤지만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는 건 좀 씁쓸한 일이었다.
오로지 이 방식이 아니면 해결방법이 없는 것일까.
바닥에 설치된 원형태의 마법진.
그리고 바닥에서 3차원으로 펼쳐진 거대한 마나 수로.
겉보기엔 거대한 마나의 줄기 같지만 엄연한 마법진이다.
“우와아…… 예쁘다!”
그때 륀느의 팔을 잡아끌며 아장아장 뛰어다니던 홍단이가 다가와 탄성을 흘렸다.
“잘 놀다 왔어?”
“응! 홍단이 막! 막! 륀느랑 놀다와써!”
해맑게 웃는 홍단이를 끌어안아 준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녀석의 볼을 비비며 물었다.
“그래 그래 잘 놀고 있구나. 아빠 조금 바쁘니까 조금만 있다가 다시 와주겠니?”
보통 아이라면 싫다며 땡깡을 피우겠지만. 홍단이와 청단이는 아이 같아도 아이와 다르다.
“네에!”
홍단이가 해맑게 웃으며 소리쳤다.
그리고는 내 품에서 내려와 다시 륀느에게 뛰어간다.
이미 내 연구는 슈바이츠 장로나 탑주도 한차례 본 바가 있다.
그들조차 이것이 마법진이라는 것을 쉬이 믿기 힘든 모양이라 그들에게도 제대로 된 정보를 얻어내기엔 힘들어 보였다.
대체 뭐가 문제일까.
다 왔는데 이제 와서 이렇게 방해가 된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이를 가볍게 악물며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본다.
그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청단이가 내 옷깃을 잡아당긴다.
“청단아?”
“아빠 아빠…… 뭐 하는 고에여?”
귀엽게 눈을 반짝이며 물어오는 청단이를 보며 나는 실소를 흘렸다.
“멋진걸 만드는 거야. 그런데 잘 안되네.”
“우웅…… 어엄청 커!”
청단이의 말에 내가 잠시 멈칫한다.
“청단이보다 몇 배는 커!”
당연하다 미로에 가까운 거대한 마법진의 크기는 어지간한 저택 수준의 크기를 자랑하니 말이다.
“막막 미로 같아! 엄청 헤매는 미로!”
청단이의 말에 나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잠깐. 크다고?
조용히 중얼거린 내가 눈을 부릅떴다.
설마.
짧게 중얼거린 나는 곧바로 마법진 전체를 뒤틀기 시작했고. 이내 달처럼 거대한 원형태로 바꾸었다.
그리고.
“오…… 지져스.”
나는 그대로 청단이를 끌어안고 볼을 마구잡이로 비볐다.
“청단아! 네가 최고다!”
“우우 아빠아아…….”
“우웅! 홍단이!! 홍단이도 안길래!”
홍단이의 질투와 의아한 표정을 짓는 륀느.
그리고, 이해를 못 해서 울상을 짓는 청단이까지.
하지만 내 얼굴엔 환한 미소가 걸렸다.
왜 자꾸 문제가 발생하는지 알았다.
너무 거대한 마나 수로다.
그러니까.
필요한 시간에 생명력이 움직이는 거리가 너무 길다.
그렇다면.
“3차원으로 안 되면 접어야지.”
나는 망설임 없이 거대한 마법진을 띄웠고 그대로 그것을 마치 달처럼 둥글게 말았다.
우우우우우웅!!!!
동시에 변화가 일어난다.
무식한 양을 방출하는 재앙이 아닌 완전히 조율된 완성된 마법 수로가 말이다.
“애들 시선은 어른과 다르다더니…….”
실실 웃으며 내가 마법진에 손을 뻗으려던 찰나였다.
쉬리리릭!!! 콰앙!!
갑작스레 날아든 검은 마탄이 마법진을 박살 내버렸다.
“어떤 새끼야.”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상당히 껄렁해 보이는 인상을 지닌 젊은 마법사들이 대여섯 서 있었다.
“악마 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기에 와서 봤더니.”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