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39화
태초의 영역.
프리아 여신의 떨어진 신격이 존재하는 공간에 들어올 수 있는 영웅은 생존전문가이자 회랑 최강의 존재. 그리고 단신으로 한 세계의 규약까지 비틀어 부숴 버린 헤라클래스를 제외한 단 한 명뿐이다.
“…….”
말없이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뺨을 쓸어내려 주던 여성, 로 아이아스가 고개를 들었다.
“이게…… 당신이 생각한 시련인가요?”
빛이 모여들며 나타난 프리아 여신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로 아이아스가 끌어안고 있는 소녀, 로 사우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로 사우란의 육신이 서서히 입자로 변하며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입자는 곧 로 아이아스의 몸에 스며들었다.
[신격에 이르러 지워진 자가 힘을 행하였을 때.]
“알고 있어요. 이 아이가 태어난 건 제 탓이라는 것을.”
[…….]
“그래서 약속을 한 것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제가 묻고 싶은 건 다른 문제랍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데이비는 실패할 거예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간과하고 있으니까요. 정말 당신이 내놓은 그 길에. 성공의 가능성이 존재하나요?”
[…….]
그 물음에 프리아 여신은 눈을 감고 침묵으로 대답했다.
“당신은 괴로운가요? 아뇨. 질문은 의미가 없겠네요. 부디. 슬퍼하지 말아요.”
로 아이아스는 그렇게 떠났다. 프리아 여신은 그런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남게 된 프리아 여신은 차갑디차가운 얼굴로 어두컴컴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신의 감정, 이 세상이 어두워진 것은 꽤 되었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왔다.
손가락 끝이 바스러지듯 흩날린다.
어마어마하게 큰 그녀의 날개가 천천히 흩날린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고, 이내 양손으로 제 팔을 교차하듯 감싸며 몸을 웅크렸다.
툭…… 투툭…….
투투투툭…….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신의 감정을 드러내는 이 세상에.
비가 오기 시작했다.
옅은 보슬비는 이내 점차 거세졌고.
너무도 신성한 이 신의 공간에는 강렬한 빗소리만이 가득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그런 빗방울 속에서 프리아 여신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 * *
대량의 마나.
더 많은 마나가 필요하다.
x라게 큰 마나!
마나를 보관하기에 최적이 되는 물건은 무엇인가.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말 그대로의 절대적인 마나 창고라 부를 수 있는 드래곤 하트, 그리고 현자의 돌 정도가 있겠지만 그게 없다면 그다음 순서는 마정석이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마정석은 백여 개 이상 되는 마나석이 모여 특수한 환경에서 소량 정제되는 말 그대로 돈 먹는 하마 그 자체였다.
아무리 하인스 영지의 자금력이 좋다고 해도 그런 짓을 했다간 피를 보는 건 다름 아닌 영지민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큰 문제가 또 존재했다.
“전 차원을 비추는 달을 만드는 건 좋은데 그 땅을 어디서 구하냐는 건데.”
단순히 달을 구현하는 것으론 불가능하다.
중력이 거의 없는 거대한 암석이며, 이 작은 티오니스를 공전하는 주제에 모든 차원에 비치는 달.
그 정도 크기의 달을 만들기 위해서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의 바위와 모래, 흙을 뭉쳐야 하는가.
‘지도가 확 바뀌어 버릴 수준일 텐데.’
리셋을 막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땅이 좁아지면 지금 대륙의 인간들이 살아갈 터전을 잃게 되고 황폐해질 테니까.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마나 수로의 정교한 흐름을 세상 전체에 패치하기 위해서는 그 본판이 되는 달 자체도 마나의 움직임이 빨라야 한다.
그렇다면…….
세계수가 있는 신목의 성지라도 약탈해야 하나.
* * *
하인스 영지에 있는 개인연구실에 틀어박힌 지 일주일.
나는 그동안 쉬지 않고 수식을 써 내려가며 정리하고 계산했다.
머릿속으로 어마어마한 수치를 계산하고 있으면서도 손까지 움직여야 할 만큼 바쁘지만 내 손은 멈추지 않았다.
“후우……. 이쪽은 안 되겠네.”
[계약자. 대체 왜 그만큼 많은 양의 바위와 흙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이정도 양이 사라지게 되면 대륙 자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최대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만한 지역을 모조리 계산해 보지만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달을 만드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어떻게 방법이 없나?”
[흐음…….]
맞은편에 앉아있는 손바닥만 한 작은 흙의 인간이 고심하듯 턱을 어루만졌다.
[계약자, 네가 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것이 없지는 않다.]
“어디?”
[정령계.]
그의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가능해?”
[그전에. 대체 왜 그만한 흙이 필요한지부터 말해 줘야겠군.]
“……달을 만들 거다.”
내 대답에 그가 멍하니 나를 바라본다.
동시에 그의 곁으로 물방울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물라임?”
[당신, 드디어 돌았어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 부분을 빙글빙글 돌리며 물어오는 그녀는 정말로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살다 살다 달을 만들 생각을 하는 인간이라니……. 아니, 이젠 인간이라 부르기도 애매하겠네요.]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나왔어.”
[흥. 당신이 강해진 것 때문에 우리들의 제약이 상당량 줄어든 건 알고 있나요?]
“흐음 그거 좋은 소식이네.”
[엘라임. 지금 이야기 중이지 않나.]
[저 허황되고 미친 이야기를 듣겠다고?]
[언제 계약자가 멀쩡했던 적이라도 있나?]
티격태격하는 두 정령왕을 보며 내가 손뼉을 쳤다.
“그래서 가능해 불가능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불가능하다.]
“그럼 왜 말한 거야.”
[정령의 말은 끝가지 들어라, 정령계엔 이 세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양의 대지가 존재한다. 계약자가 말하는 정도는 조금 타격이 있어도 불가능하진 않아.]
“그게 무슨 상관인데.”
[문제는 그 많은 양의 대지를 계약자의 앞에 가져다 놓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지. 정령계에서 이곳으로 넘어올 수 있는 건 정령뿐이니까.]
“그래서?”
[힘을 내놓아라, 계약자.]
“…….”
“내가 노움들을 통해 정령계의 지반을 계약자에게 옮겨 주겠다.”
그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녀석을 노려보았다.
정령 계약자로서 단순히 정령 마나를 제공하는 것과 나는 다르다.
그는 지금 내게 추가적인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내겐 크게 문제가 되는 요소도 아니긴 했지만.
미묘하게 께름칙한 느낌이 든다.
“정말이냐?”
[내가 거짓말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노아스가 한 손으로 제 뒷목을 긁적이는 모습에 나는 조용히 엘라임을 바라보았다.
“저거, 사실이야?”
내 물음에 엘라임 또한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정령계의 다른 정령들이 반발하겠지만…… 불가능한건 아니죠.”
“…….”
이놈 이거…….
“구라치고 있는데…….”
[정령이 거짓말하는 걸 봤나? 계약자.]
“……아니.”
응, 너 구라치고 있잖아.
정령여제 유리아나는 겉으론 툴툴 대도 제 정령들의 특징 하나하나 모두 알고 있을 만큼 계약 정령들을 사랑한 존재였다.
노아스가 거짓부렁을 할 때 보이는 태도에 대해선 들은 바 있다.
살다 살다 정령이 거짓말이라니.
조용히 중얼거린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뭐 그게 무슨 상관일까, 뭐가 되었건 결과만 같으면 그만인 법이다.
“좋아. 마나를 제공해 줄게.”
[그럼, 바로 움직이도록 하지.]
그 말과 함께 흩어지는 노아스를 향해 내가 대량의 마나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크흠!! 양이 많군!]
상상을 초월하는 마나가 주입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량의 마나를 제공받은 노아스는 사라졌고 나는 대량의 마나를 빼낸 탈력감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멈추지 않고 엘라임에 손을 뻗었다.
[당신? 무슨…….]
“너도 받아.”
너희 지금 거짓말을 해서라도 마나가 필요할 만큼 다급한 상황이잖아.
내 말에 그녀가 굳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계약자…… 대체 당신은…….]
“반신 우습게 보지 마라. 거짓말하는지 안 하는지 보는 걸로도 알지만, 너희들을 봤을 때부터 정령계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고 있어.”
내 말에 그녀가 파르르 떨리는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고…… 고마워요. 이 정도의 힘이라면…….]
말 그대로 대량의 도핑.
그녀의 얼굴에 자신감과 당혹스러움이 서렸다.
[최대한 빨리 해결할게요. 그리고 정령계의 정령들을 설득해서……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 놓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 또한 흩어지려 한다.
다만 나는 그런 그녀를 향해 한 가지 요소를 더 당부했다.
“물라임.”
[네?]
“정령계에 무슨 일이 생긴 지는 꽤 됐을 거다. 만약에 너희가 감당이 안 될 정도라면.”
[안 될 정도라면?]
“이걸 사용해라.”
나는 아공간을 연 뒤 신마의 카드첩에서 카드를 한 장 꺼냈다.
그 카드는 푸른 십자가 같은 것이 그려져 있었다.
[이게…… 뭐죠?]
“뭐긴. 개사기 카드지.”
[개…… 사기 카드?]
“써 보면 알아.”
빙그레 웃으며 내가 손짓했다.
그러자 엘라임은 불안해하면서도 이내 사라졌다.
“킥…….”
그런 그녀가 사라진 곳을 보며 스산하게 웃어 보인 내가 손뼉을 가볍게 친 뒤 손바닥을 마주쳐 비비적거렸다.
“정령계 구경이 쉬운 일은 아니지.”
제아무리 잘난 정령이라도. 결국은 내 손바닥 안이다.
내가 준 카드가 무슨 카드인지 알게 되면 아마 그들은 후회를 할까. 아니면 황당해할까.
무엇이 되었건 간에 결과는 금방 나올 것이다.
사실 정령계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리고 내가 페르세르크와 일리나, 에이리아에게 충실한지 약 나흘.
정령계로 돌아간 물라임. 아니, 물의 정령왕 엘라임으로부터 내가 준 영혼의 힘이 서린 개사기 카드가 발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