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6화
청단이 홍단이는 여기 있는데.
눈앞에 있는 초단이는 어떻게 된 것인가.
“초단아.”
“아…… 아버지.”
거 아바마마라고 불러주면 소원이 없겠는데.
장난칠 상황이 아닌 만큼 나는 어쩔 줄 몰라하는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해줄래?”
“저…… 저를 믿어주시는 건가요?”
“부모가 자식을 못 믿으면 어떻게 하나.”
생물학적은 아니지만, 초단이든 청단이 홍단이든 결국은 내 손에 태어난 아이들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초단이의 모습은 확실히 내가 검으로 구현했을 때와는 조금 달랐다.
머리카락 색의 위치가 변했고, 눈동자의 색도 짙은 오드아이로 바뀌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초단이와의 링크 자체는 여전했다.
“아버지!!”
흐느끼며 내게 안겨드는 초단이의 등을 토닥여주자 떨림이 천천히 잦아드는 게 느껴졌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거야.”
내 물음에 그녀는 조심스레 손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해왔다.
“하…… 한 달 전쯤부터 밤만 되면 이렇게 돼서…….”
홍단이 청단이의 검 본체는 내게 있으나 초단이의 자아만 빠져나왔다.
그래도 자아가 육신을 가지는 경우는 조금 뜬금없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왜 이렇게 된 건지는 아는 게 있어?”
“그…… 마나가 갑자기 넘치기 시작하더니.”
“마나?”
“네에.”
초단이의 설명은 간단했다.
초단이는 청단이와 홍단이가 융합하면서 만들어진 복합인격이다.
초단이가 청단이 홍단이 이며 청단이 홍단이가 초단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청단이와 홍단이가 잠을 자고 꿈을 꾸면서 흥미를 느낀 것들이 서로 동화되며 초단이가 되었고 그렇게 초단이가 깨어났다.
“이상한데.”
“뭐가 이상한데요?”
앨리스 대주교의 질문에 나는 담담하게 답해주었다.
“홍단이 청단이가 초단이가 되려면 보통 많은 마나가 필요한 게 아니라서요.”
“흐음?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적어도 적은 양은 확실히 아니겠네요.”
“단순히 마나 증폭 현상 때문에 이렇게 되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저…… 죄송해요. 아버지…….”
“아냐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그래서? 아카데미엔 무슨 일로?”
“저……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요. 음악도 하고 싶고, 아버지가 하시던 연구란 것도 해보고 싶었어요.”
귀신소동의 전말은 참 간단하면서도 허무했다.
“말을 하지.”
“저 때문에 신경 쓰실까 봐…….”
소극적인 성격이나 행동력은 화끈한 것이 초단이다.
홍단이의 행동력과 청단이의 소극적인 마인드가 합쳐진 결과였다.
“흠…… 그럼 아빠랑 같이할까?”
“네? 아…… 네!”
내 미소에 초단이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세요. 오늘 아카데미 당직이 저니까요.”
“늘 고생이 많아요.”
“뭘요. 돈도 많이 주고 이쪽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도 맞고. 성국 대주교 자리 벗어나면 할 일 없는 백수 신세인데 잘됐죠. 뭐.”
쿡 웃으며 돌아서는 앨리스 대주교를 뒤로한 채 나는 초단이의 손을 잡으며 녀석을 데리고 실습실을 돌기 시작했다.
“뭐부터 해보고 싶어?”
“저, 악기가 정말 재밌었어요!”
초단이는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현악기를 꺼내 들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이 좋은 걸 나만 들을 순 없지.”
급기야 한밤중의 음악회가 열린 꼴이다.
다리안을 안아주던 페르세르크와 영지의 일을 처리하는 것을 도와주던 일리나. 그리고 피로로 인해 잠들었던 에이리아와 륀느까지.
초단이의 상태를 듣고 다들 놀란 모습들이었지만 크게 그것을 문제 삼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초단이가 곧 연주할 곡을 듣고 싶어 하는 느낌이었다.
“저…… 부끄러운데…….”
“괜찮아. 그동안 연습했잖아?”
“네에.”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면서도 신이 난 얼굴로 초단이는 현악기를 들고 자세를 잡았다.
제법 자세가 살아 있…….
끼기기기기기긱!!!!
“으아아아아악!!!”
“꺄아악!”
지옥의 세레나데가 펼쳐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 * *
초단이의 본의 아닌 일탈은 당연히 단기간에 수습될 문제가 아니었다.
밤만 되면 청단이 홍단이가 잠들고 초단이가 깨어난다.
이미 한 달 이상 초단이는 밤마다 홀로 아카데미에 와 시약 연구흉내를 내보고 책을 읽고 악기를 연주해보았다.
“어쩐지…… 소문에 음악이 괴기스럽다더니…….”
징징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일리나가 쓰게 중얼거렸다.
“죄, 죄송해요!”
“아니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배우면 다 잘 될 거야.”
초단이의 사과에 일리나가 허둥지둥거리며 그녀를 달래준다.
하지만 자신이 악기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이 못내 슬픈 모양이었다.
“데이비, 어때?”
고민하던 페르세르크의 물음에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초단이를 바라보았다.
겉보기엔 문제가 없다.
오히려 깔끔하기 그지없는 자세였다.
하지만, 결과물은 충격적이었다.
이건 엉성한 아이를 가르치는 것 이상의 난이도를 요구한다.
“음…… 좀 오래 걸리겠는데.”
가르치라면 못할 것은 없지만 단시간 안에 초단이가 펼치는 지옥의 하모니를 개선하긴 힘들어 보였다.
“역시 악기는 그만둘래요. 대신 아버지가 연주해주세요!”
초단이는 손에 쥔 현악기를 내려놓았다.
타악기는 두드리면 면을 찢어버리고 현악기는 지옥의 하모니가 울려 퍼진다.
관악기에선 음의 높낮이가 사라지고 삑사리가 본음이 되어 마치 지옥의 아귀처럼 게걸스레 청각을 물어뜯었다.
초단이의 포기에 나는 음악의 화신이라 불리던 내 스승이었던 뮤트에게 그녀를 맡겨볼까 고민했지만 이내 초단이가 건네주는 현악기를 받아들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뭐 어렵다고.”
가볍게 자리를 잡고 현악기의 줄을 튕긴다.
투웅…….
청명한 소리가 내부에 우웅우웅 울려 퍼지자 초단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손에서 공기가 파르르 떨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래 노래는…… [캐논]으로 가자.
잔잔한 음악이 시작되자 일리나는 노래를 들어본 경험이 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아, 이거 지구에서 들어봤는데.”
“파헬벨, 캐논 변주곡…….”
“언니 알고 있어요?”
“데이비의 기억은 거의 가지고 있으니까.”
그녀의 말에 일리나가 헤실거렸다.
“난 이 노래가 정말 좋더라.”
잔잔한 음악이 부드럽게 이어지자 초단이는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까딱이며 음악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된 음악회가 끝이 났을 때 초단이의 표정은 이전보다 훨씬 후련해져 있었다.
동시에 초단이의 몸이 아주 잠깐 흐려졌다가 본래대로 돌아온다.
“아직 미련이 남았나?”
“미련?”
“초단이가 이렇게 나온 이유가 미련 때문인 것 같아서 말이야.”
초단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미련을 품은 상황에 대륙에 퍼진 막대한 생명력의 영향을 받으면서 현신했다.
그게 지금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원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초단이의 미련을 해소해주면 끝날 일이었다.
“사실 꼭 가보고 싶었던 곳도 있어요.”
“가보고 싶은 곳?”
“네! 꿈에서도 한 번은 꼭 가보고 싶은 요정의 낙원이라는 곳이에요!”
내게서 떨어진 초단이가 언제 챙겼는지 모를 잡지를 꺼내 들었다.
“앗! 그건 내가 가져온 거!”
일리나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치자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한다.
“한 권이 없어져서 어딜 갔나 했더니.”
“헤헤헤.”
“휴우.”
배시시 웃는 초단이에게 화낼 수도 없는지 일리나가 한숨을 내쉰다.
“아버지. 이런 곳이 있다는 게 사실인가요?”
이윽고 초단이는 눈을 반짝이며 잡지에 찍힌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것은 밤하늘을 환하게 비추는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놀이공원의 모습이었다.
티오니스에는 없고, 그나마 차원 상황이 나은 편인 지구에나 있는 것이다.
“가보고 싶어?”
“네!”
“흠…….”
“사실 나도 한번 가보고 싶었어.”
일리나가 거든다.
“본녀도 마찬가지.”
“저…… 저도 여기 하늘정원이라는 곳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내가 모르는 새에 이 세 소녀는 이미 잡지를 통해 의기투합한 적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차원을 여닫는 건 현재 나만 가능하다 보니 나를 통해야 하는데 최근 들어서 내가 계속해서 영지 일에 바쁜 모습을 보여준 터라 지구로 가자고 말을 꺼내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그럼 가면 되지.”
“영지가 한창 바쁠 이 시기에?”
일리나가 제정신이냐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이에 나는 한없이 당당하게 대답해주었다.
“걱정 마라. 대신할 사람은 널렸다.”
내 한마디에 누군가가 오한에 떨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후의 일이었다.
* * *
지구, 부산의 한 공항의 입구.
비행기를 타고 나타난 건 아니라지만 적당한 공간을 찾다 보니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다.
초단이가 가고 싶어 했던 지구의 놀이공원은 다름 아닌 한국에 새로 생긴 유원지였다.
듣기로는 중동의 어떤 부자가 갑자기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부자들의 심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게 내 결론이다.
운이 좋다면 좋은 것인지. 유원지의 위치는 몬스터의 습격을 받은 적이 없던 남쪽의 도시였기에 파괴되는 불상사는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와아…… 말이 없이 마차들이 달리고 있네요! 저건 마나를 이용한 마차인가요?!”
“마법적인 요소가 아니라 화력발전으로 돌아가는 차라고 생각해.”
“화력발전이요?”
“가솔린이라는 연료를 태워서 만드는 힘으로 굴러가는 거야.”
“호오…….”
보통이라면 마나 없이 돌아가는 차라고 간단하게 설명하겠지만 에오니샤는 놀라울 정도로 천재성을 지니고 있는 연금술사다.
이렇게 설명해줘도 충분히 이해하리라.
“충분히 가능성이 있네요. 티오니스에 돌아가면 한번…….”
“안돼.”
“네? 어째서요?”
“안돼.”
단호한 내 말에 내 막냇동생이나 다름없는 에오니샤 올 라운이 입을 삐쭉인다.
그녀의 시도는 나쁘지 않지만, 티오니스에 가솔린으로 돌아가는 차량 같은 건 문명 레벨에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차원의 벽이라는 게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티오니스에서 넘어왔던 이들에게 절대 지구의 문물을 머릿속에 기억하지 말라 말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새하얗고 개방적인 원피스가 익숙지 않은지 에오니샤는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번잡한 곳이라 주변의 시선이 몰리는 게 영 익숙지 않은 듯 보였다.
확실히 리네스 왕비가 집권하던 시기에도 남들의 앞에 나서거나 누군가를 짓밟기보다는 홀로 조용히 책을 읽는 것을 더 좋아하던 녀석이니 당연한 일이다.
“에헴. 지구는 참 신기한 곳이에요 왕녀님.”
“왜 니가 자랑스러워하는데.”
“전 이미 한번 와봤으니까요.”
대륙 6대 미녀이자 기술고문 에디손의 손녀, 그리고 비공정 아스가르드의 함장인 티아라의 이유 모를 자신감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본래 이번 지구행 여행에 에오니샤나 그녀의 곁에 있는 티아라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전날 어디서 이야기를 들었는지 자신도 꼭 데려가 주면 안 되냐고 용기 내 말하는 에오니샤를 두고 가기에도 애매했던 터라 휴가를 줄 겸 데려온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가 지구네요.
낮에는 초단이가 육신을 유지할 수 없다.
그렇기에 내가 직접 두 아이를 융합시켜놓은 결과 초단이는 육신 대신 영체 상태로나마 내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어때?”
-공기가 조금 탁해요. 하지만 신기한 곳이에요.
눈을 반짝이는 그녀가 어서 그곳으로 가보자는 시선을 보내왔다.
-아, 아버지! 어서 가요! 어서 가서 보고 싶어요!
지금 당장은 영체지만 놀이공원에 도착하면 그녀에게 대량의 마나를 부여하여 육신을 깨워낼 생각이었다.
칭호 별부수미를 통한 꼼수인 만큼 보통 마법사라면 꿈도 못 꿀 짓이지만 내겐 통용되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흥분한 채 두리번거리는 초단이를 보며 킥킥 웃어 보인 내가 걸음을 옮겼다.
초단이는 이번에 보는 경치들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하나하나 세심하게 시선에 담았다.
초단이의 모습은 평소의 새하얀 원피스 그대로였다.
물론 지금의 초단이를 볼 수 있는 이는 없는 만큼 무엇을 입어도 상관없는 상황이다.
반면 다른 이들은 달랐다.
“왜 그래?”
주변을 말없이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선글라스를 휙 벗으며 물어왔다.
라인이 살아있는 청바지에 베이지색의 작은 반팔 티셔츠.
그리고 새하얀 캡을 쓰고 있는 그녀는 어디서 보면 공항 패션이냐 라고 물어도 될 정도로 느낌이 살아있었다.
물론 그런 그녀를 신비롭게 만들어주는 것은 캡의 양쪽에 돋아난 뿔과 길게 늘어뜨린 새하얀 은발이지만 말이다.
“거 아닌 척해도 꽤 기대했나 보다?”
내 물음에 그녀는 선글라스를 슬쩍 내려 보이는 눈매를 장난스레 휘었다.
“본녀도 이런 걸 싫어하진 않으니까. 그대는 어디 하와이라도 가는 게야?”
오래된 느낌의 반바지에 알로하셔츠 그리고 선글라스를 낀 내가 고민하듯 턱을 어루만졌다.
“놀러 가기엔 이만한 복장도 없다.”
“쯧, 직접 겪어본 게 아닌 매체를 통해 배운 것이니 누굴 탓하겠느냐마는…….”
“아니 이게 뭐가 어때서.”
“잘 어울리는 게야.”
놀리듯 말하며 앞장서는 그녀를 뒤따라 걸음을 옮겼다.
각기 목적은 다르지만, 유원지라는 목적지는 다들 같았다.
“그런데 이제 어떻게 해? 괜히 요란스러운 거 싫어서 이렇게 온 거잖아? 길은 알아?”
“모르면 지금부터 불러야지.”
그렇게 말한 익숙하게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그건 또 어디서 난 거야.”
“전에 받아놨던 거.”
담담하게 답하며 내가 통화버튼을 눌렀다.
-오빠야?
“나다. 어디냐.”
-회사, 지금 회의 중…….
“소환한다.”
대뜸 마나를 이용하기 시작하자 수화기 반대편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스팡!!
동시에 깔끔한 정장을 입은 현아가 놀란 얼굴로 내 앞에 툭 하고 떨어졌다.
“꺅! 아야야…….”
“안내 잘 부탁해.”
“이…… 이 미친놈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 그녀가 나를 노려보았다.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하긴 소환했지.”
“나 지금 회의 중이라고…….”
“걱정 마. 일 끝나면 다시 돌려보내 줄게.”
“회사가 무슨 놀이터인 줄 알아?!”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소리치는 현아의 머리에 기념품으로 산 밀짚모자를 푹 눌러 씌운다.
오피스 정복에 밀짚모자는 참 괴리감이 드는 조합이 아닐 수 없다.
“좀 도와주라.”
내 말에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래서? 어디 가는데?”
“알프랜드. 여기서 멀지 않을 텐데?”
내 말에 그녀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본다.
“알프랜드? 지금 거길 가려고 이렇게 몰려온 거야?”
“휴가나 즐길 겸.”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물었다.
“오빠. 지금 거기 못 들어가.”
“응?”
한창 기대하고 있던 초단이의 영체가 움찔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