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9화

“하아…… 하아…….”

전신에 상처가 가득하지만 승리했다.

윤석과 서윤은 쓰러진 특A급 몬스터 도올의 시체에서 마나 기관인 마석을 뜯어내며 얼떨떨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설마. 두 명이 도올을 잡을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

소수의 인원으로 도올을 잡을 수 있는 이는 지구에도 그리 많지 않다.

사실상 서윤과 윤석 두 사람이 해결하기엔 무리가 있는 적이라는 소리였다.

아무리 새하얀 빛이 활력을 돋구어주었다지만 설마 이만한 괴물을 잡아낼 거라곤 전혀 생각지 못했다.

짝! 짝! 짝!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려오자 반사적으로 두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쒜에에에엑!!! 쩌어엉!!

동시에 순식간에 날아온 데이비가 그를 향해 발차기를 날리자 윤석은 반사적으로 수분을 압축하듯 모아 방벽을 쳐 막아냈다.

동시에 충격파가 주변을 뒤흔들었다.

긴장감으로 가득했던 윤석의 표정에 미소가 어린다.

“오, 제법이네.”

“흥! 이제는 당신에게도 지지 않아.”

“그래. 이 정도면 됐다.”

그렇게 말하며 데이비가 미련 없이 몸을 돌리자 그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허공의 수분이 모여져 만든 물의 칼날들이 데이비를 스치듯 지나갔다.

“이건 뭐 하는 짓인지 물어도 되나?”

“그동안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좀 갚아줘야겠어.”

“오빠?!”

서윤이 놀라 소리치지만, 윤석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당신이 그 잘난 성자라면 이 정도 투정을 가지고 뭐라 하진 않겠지?”

“흐음…… 뭐, 작정하고 굴리긴 했지.”

“빌어먹을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그럼 여기서 네가 내게 몇 대 맞는다고 뭐라 하진 마라!”

“오빠 뭐 하는 거예요! 이제 와서 다 망칠 건가요?!”

자신의 힘에 심취한 윤석에겐 들리지 않았다.

“왜, 겁나? 미안하지만 이제 와서 쫄아도 난 너를 흠씬 패지 않으면 화가 안 풀릴 거 같은데.”

이에 서윤이 다급히 그를 말리기 위해 움직이려던 찰나. 데이비가 팔을 들어 그녀를 저지했다.

“그래. 논리가 웃기긴 한데. 자신감이 있는 건 좋은 거지. 덤벼봐.”

담담하게 말하며 데이비가 한걸음 내디뎠다.

“하! 예전과 다르다 이 말이다!”

촤아아아악!!

물줄기들이 거대한 창이 되어 쏟아져 내린다.

그런 모습을 보며 데이비가 숨을 짧게 골랐다.

[잠든 프리아 여신께 고하오니. 이미 잠들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를 거, 그 은총, 내가 좀 가져다 씁시다.]

우웅!!

새하얀 기운이 일순간 스며든다.

그리고.

“어?”

창을 내게 쏘아 보낼 준비를 하던 윤석이 눈을 크게 뜨며 얼빠진 소리를 냈다.

아주 잠깐 시간이 느려지는 듯하더니 데이비가 어느새 그의 품 안까지 파고들었기 때문이었다.

“잘됐다. 연습할 샌드백도 필요했는데.”

조용한 그 목소리에 윤석이 뭔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그 순간.

데이비의 손에 검붉은 기류가 서린다.

성자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흉포한 기운이었다.

팔을 뻗을 수도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접근한 거리였다.

기역으로 접은 팔을 아주 천천히. 그리고 날카롭게 후벼 파듯 쑤셔 박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아주 찰나였다.

“안 죽게 패는 게 죽도록 패는 것보다 어렵다.”

퉁! 쩌어엉!!

상상도 못 할 충격음이 울려 퍼지며 윤석의 몸이 그대로 튕겨 나가 수차례 바닥을 구르고 침묵했다.

죽은 게 아닌가 의심이 될 정도로 막대한 파괴력은 고작 조금 강해졌다고 우쭐하던 그들이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손끝으로 거리를 재고 일순간 손가락을 접으며 주먹을 찔러넣었다.

그 거리는 고작 1~2인치 정도로 매우 짧았으나 그 위력은 정반대에 해당했다.

“쥐뿔도 없는 게 까불기는.”

자세를 풀며 데이비가 조용히 손을 내렸다.

그리고는 서윤을 바라보았다.

“너도 할래?”

“아뇨.”

“겁먹지 마. 방금 일로 트집 잡을 생각은 없으니까. 힘 조절했으니까 죽진 않았을 거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미동도 하지 않는 윤석을 보며 데이비가 피식 웃어 보였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물어봐.”

“왜 저희를 강하게 만드신 거죠?”

그녀가 조용히 데이비를 직시했다.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했어요. 생트집에 꼬장에 불과하다고 생각될 정도의 일을 시켰으니까요. 그저 단순히 핑곗거리를 찾기 위해 고생을 시키는 거다. 그래서 오기가 생겨서 해냈어요.”

“그래서?”

“그런데 몇 차례 반복되면서 알기 싫어도 알게 되네요.”

당신이.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단시간에 그녀 자신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힘의 총량은 차이가 없어요. 하지만 그 작은 힘으로 낼 수 있는 힘은 예전의 수배. 아니 수십 배로 늘었어요. 그 검은 용과 화룡이 했던 말. 처음엔 빈정거리는 건 줄 알았는데. 그들의 말 하나에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변해있었죠.”

그 물음에 데이비는 하늘을 바라보다 조용히 답했다.

“착각은 네 자유지만 난 따로 한 게 없어. 처음부터 네가 가진 힘이라는 거다.”

“그건…….”

“됐고. 이쯤 하면 충분할 듯하니까 따라와. 왜 너희를 그렇게 굴렸는지 납득시켜 줄 테니.”

쓰러진 윤석을 버려둔 채 데이비가 숲속으로 걸어가자 서윤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그녀 역시 윤석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 *

“이게 대체…….”

기겁한 얼굴로 서윤은 눈앞의 거대한 균열을 바라보았다.

“처음 정보를 전해 듣고 발견했을 땐 사람 무릎 정도밖에 안 왔어.”

“정보를 전해 들어요?”

“있어. 너희들과 다르게 지구를 지키고 있는 놈들이.”

발키리아.

파괴가 사라진 평온의 신, 넬타리드의 사자.

케인과 프레이아다.

“이 균열은 몬스터를 뱉어내는 균열이 아니야. 반대로 진입하는 균열이다.”

“진입하는 균열…….”

“그래. 문제는 말이야.”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균열에 손을 뻗었다.

파직!!

그러자 옅은 스파크가 내 손을 튕겨냈다.

“몬스터의 수준이 높아졌다. 알고 있지?”

“……네.”

“그 이유에 대해 파악하지 못하면 영원히 제자리걸음이야. 그러니 기회를 줄 때 받아. 너희 둘이서 저 균열에 들어가 이 사태의 근본을 조사하고 오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는 작은 마석 두 개를 건넸다.

“영상석과 음성석이다. 목소리와 영상을 저장하는 거니까. 단순히 캠코더라 생각해.”

“……왜 저희 둘이죠?”

“그나마 제일 생존 가능성도 있고, 문제를 일으킨 게 너희였으니까.”

“이런 균열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어요. 당연히 국재원에 보고 후, 국제 연맹에 알려야…….”

“아니, 진입은 너희 둘만 한다.”

“어째서죠?! 내부에 뭐가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단둘이서 진입한다는 건!”

“사람을 구하겠다며, 머리카락 다 뽑히고 그 자리에서 절명해도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면 하겠다면서.”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해. 누군가를 구하는 건 여유가 있는 놈들이 하는 짓이니까.

그래서 나는 너희의 성격을 둘째치고 경의를 표한다.

윤석의 적의에도 그를 죽이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며, 손수 그들의 잠든 잠재력을 깨운 것도 그 이유였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이걸 알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야. 첫째. 이걸 알리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 존재가 드러난다. 그렇게 되면 너희가 숨기려 했던 것도 자연스럽게 나올 수밖에 없어.”

그것이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두번째 이유는 더 간단해.”

내가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스마트폰이 이유와 관련이 있나요?”

“여기 폰게임이라는 게 있지? RPG 혹은 수집형 게임.”

“네? 아아…… 네 있죠.”

“거기서 뽑은 캐릭터를 자동사냥을 보내놓거나 파밍을 보내면 보통 얼마나 걸리는지 기억해?”

“보통 자동사냥을 돌리면 멈출 때, 혹은 스태미너라는 비용을 다 쓸 때까지 하거나 파밍의 경우 몇 시간 후에 돌아온다고 하죠. 그동안 캐릭터를 조작할 수 없…….”

“그래. 두 달 동안 한국에 몬스터가 안 나오는 게 아니잖아?”

“두 달? 설마?!”

그 말과 함께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동시에 나는 언제 데려왔는지 모를 기절한 윤석을 균열로 던져넣어 버렸다.

“두 달 후에 보자. 거기서 얻은 것들 전부 기록하고 가져와. 그 정보는 내게도 필요하지만, 너희들에게도 중요할 거다.”

“갑자기 상위 몬스터가 나타나게 된 이유…… 그건 당신과 관련이 있나요?”

“그걸 알아보는 거다.”

내 말에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내가 건네준 가방을 받아들었다.

“안에 필요 생필품이나 식량과 물을 담아놨어, 넉넉하게 쓸 수 있을 거다. 너희 둘에게 버프 마법을 걸고 유지되는 시간은 정확히 두 달. 그 안에 빠져나오지 못하면 너흰 죽은 것이라 판단하고 균열을 부술 거다.”

“알겠어요.”

“너희가 없는 동안 적어도 지켜줄 사람 정도는 파견해줄게.”

그렇게 말하며 내가 손짓한다.

그러자 그 뒤로 누군가가 스으윽 나타났다.

연한 분홍빛 머리칼이 감도는 아름다운 엘프와 무표정한 남성이었다.

그녀가 서윤을 바라본다.

“인사해 에나벨과 메라몽이라고 한다.”

“사람…… 은 아니군요.”

“둘 다 골렘이야.”

“골렘이요? 그, 돌로 만들어진 가디언?”

“비슷하지?”

“세상에…….”

이름의 섬뜩함을 느꼈는지 서윤이 움찔거리자 에나벨은 조용히 손에 쥔 종이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같이 놀자.]

천진난만한 한마디였지만 섬뜩함을 느꼈는지 서윤이 나를 본다.

“장난기가 좀 심하긴 한데. 그래도 누군가를 함부로 해치진 않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나벨과 메라몽이 서로를 바라보다 기이한 각도로 목을 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에나벨을 따라 하듯 메라몽이 반대편으로 목을 꺾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메라몽의 육신을 뒤틀어 꺾어버렸다.

“꺅?!”

“또 시작이네, 야야! 싸우지 말랬지!”

어벤저편대는 디셉티콘 편대와 다르게 인공지능 부분이 상당히 다양하게 발달해있다. 문제는 저 둘이 굉장히 사이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저게 그냥 노는 건지 싸우는 건지는 모를 일이지만.

보이지 않는 손을 이용해 메라몽을 꺾어버리던 에나벨이 휘적휘적 걸어 어디론가 향한다.

그리고는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흔들의자에 앉아 기이한 노래를 부르며 끼익끼익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 정말 괜찮은 거예요?”

“음…… 륀느 이 자식은 인공지능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몸이 꺾인 채 움찔거리다 액체처럼 흩어진 메라몽이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메라몽. 에나벨과 협력해서 프레이아나 케인이 가져오는 정보에 따라 움직여. 멀쩡한 사람 해치지 말고.”

내 말에 어벤저편대의 초기 프로토타입 생체 골렘인 메라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윤은 균열 속으로 들어갔다.

“접니다. 약속한 대로 두 달 후에 돌려보내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염전 노예마냥 어디 가둬놓고 때리고 괴롭히는 게 아니니까. 자발적으로 들어갔어요. 아마.”

그리고 돌아올 땐 흥미로운 것들을 가져다줄 겁니다.

제작 노예가 아닌 파밍 노예들이니까요.

사실 서윤에게 알려준 이유 이외에 숨겨진 진실이 있지만. 본인에게 그것을 알려봐야 이득이 될 것은 없었다.

* * *

빠악!! 빡!!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기사들이 바닥을 뒹군다.

“끄응…….”

통증을 호소하는 사내들 사이에 홀로 고고하게 선 소년은 느긋한 걸음을 내디뎠다.

여심을 울릴 듯한 부드러운 미소가 어린 얼굴에 균형 잡힌 체격, 그리고 움직임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익스퍼터급 이상의 무투가들이 10대 소년 한 명을 당해내지 못하고 모조리 다운된 것이다.

“격서를 얻은 뒤로 너무 시시해졌어, 어디 좀 재밌게 해줄 만한 실력가가 없나.”

“저하! 곧 대회준비를 위해 떠나셔야 한다니까요!”

“귀찮아. 어차피 거기 오는 놈들이라고 해봐야 죄다 약한 놈들뿐이야. 관심 없어.”

곧 있을 대륙 무투 대회의 참가 권한을 가진 소년은 오만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녀 로이사는 그를 오만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아는 한에서 피스트마스터 둘 이상을 상대하고도 여유롭게 이겨낼 정도의 강자는 없으니 말이다.

실제로 눈앞의 소년은 압도적으로 강한 무투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나저나 예쁜 사람도 많이 오나? 멋진 모습 보여주면 나도 연애해볼 수 있을까?”

“저하…….”

“이번 대회에 나를 즐겁게 해줄 실력자가 와줬으면 좋겠는데.”

“그러고 보니 이번 대회에 성자가 출전한다는 말이…….”

“누가 출전해?”

“라운 왕국 1왕자 데이비 올 라운 성자 말이에요 저하.”

시녀 로이사의 말에 소년이 씨익 웃었다.

“대륙 최강자? 있지 로이사. 지금 내가 그놈하고 붙으면 누가 이길 거 같아?”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다. 환하게 웃어 보인 시녀가 대답한다.

“그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