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1화
대륙 무투 대회.
라운 왕국에서는 참가한 이가 극소수였다.
마법이나 검술에 관해선 제법 참가 전적이 있지만, 격투에 관해선 그리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바라보는 웅장한 경기장은 이번 대회를 테라리아 왕국이 얼마나 깊게 생각하는지 잘 보일 정도였다.
“형님! 응원하고 있습니다!”
“오라버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꼭 승리하셔요!”
윈리와 바리스가 똑같은 자세로 주먹을 모아 보이며 응원해온다.
왠지 옛날 기분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분이었다.
2년도 더 전에 펠리스티 공국에서 윈리와 바리스를 데리고 이렇게 대회에 참가했으니까.
물론 그땐 내가 아니라 바리스가 참가자였지만.
“그래.”
대회에 참가하는 이가 하나둘 경기장에 오르기 시작한다.
제각각 특징이 있는 이들이지만 하나같이 평범한 소년 소녀와는 다른 느낌의 기류를 풍기고 있었다.
하나같이 익스퍼터에 준하거나 그 위로 올라선 이들이 대부분이었으니까.
사실상 이런 국제대회는 각 국가의 자존심 싸움으로 직결되기도 하는 편이기도 하다.
“어서 오시도! 테라리아 왕국에 온 것을 환영하오.”
이윽고 대회에 참가하는 모든 이들이 올라서자 기다렸다는 듯 높은 곳에서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 바비스 반 테라리아는 이번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를 매우 축복하는바. 가진 모든 역량을 이용하여 정정당당하게! 또 남김없이 자신들의 재능을 뽐내주길 바라오!”
형식적인 말이 쏟아져 나온다.
하지만 관중도, 경기에 참가하는 이들조차도 그의 말보다는 서로를 바라보며 전의를 불태우기 바빴다.
“하면, 바로 시작하도록 하지!!”
이윽고 경기가 곧바로 시작된다.
내 경기는 중간쯤부터 시작되는 터라 곧바로 경기장에서 내려와 참가자 관중석으로 돌아오자 기다렸다는 듯 바리스와 윈리. 그리고 페르세르크와 일리나가 보였다.
“형님, 첫 경기가 우승 후보라는 테라리아 12 왕자의 경기네요…….”
“막시모스라…….”
“뭐, 형님이 정확히 어느 수준인지 확신하는 이가 없으니까요.”
이 경기는 마법의 사용, 혹은 신성력의 사용을 엄금한다.
아무리 뛰어난 마법사라도 여기서 제대로 역량을 드러낼 수 있을 리가 없다.
덕분에 나의 실체에 대해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는 이는 드물었다.
당연히 나를 제외하고 가장 우승 확률이 유력한 막시모스에게 관심이 가는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바실 왕국의 후작가 장남인 트루바시아 레이펜과 테라리아 왕국의 12 왕자 막시모스의 경기가 첫 경기로 시작되었다.
먼저 경기장에 오른 트루바시아는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려 들었다.
하지만 곧 그의 상대인 막시모스가 올라오자 인상이 구겨질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아!!”
“꺄아아악! 왕자님!”
트루바시아와는 비교도 안 되는 함성이 껄렁껄렁하게 걸어들어오는 막시모스를 향해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입장부터 밀려버린 트루바시아는 기분이 상한 듯 눈을 찡그려 보였지만 반대로 막시모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제 짧은 회색 머리칼을 흩날리며 손을 흔들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이내 경기장으로 올라온 막시모스는 웃는 미소 그대로 걸어 나가 트루바시아에게 팔을 내밀었다.
“재밌게 해봅시다.”
“흥!”
파악!!
악수를 권하는 막시모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트루바시아는 거친 손으로 그의 팔을 쳐내버렸다.
그리고는 방긋방긋 웃는 막시모스를 향해 말했다.
“우승 후보인지 뭔지 모르겠다만. 오늘 여기서 넌 패배하여 내려갈 것이다.”
“어이쿠 무서워라.”
느긋하게 말하며 물러나는 막시모스를 보며 혀를 찬 트루바시아였다.
첫 경기부터 우승 후보로 점쳐진 한 명인 막시모스의 경기인 탓에 대회장의 분위기는 거칠게 달아올랐다.
가볍게 몸을 푸는 두 사람이 이내 한 귀족이 걸어오자 일정 거리를 유지한다.
몇 가지 명심할 점을 알린 귀족은 곧이어 경기준비를 선언했고, 동시에 트루바시아가 몸을 가볍게 숙여 자세를 취했다. 시작부터 파고들겠다는 듯한 거친 마나였다.
반면 막시모스는 마나도 발현하지 않은 채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있었다.
“시작!!”
투쾅!!!
이윽고 경기를 알리기가 무섭게. 트루바시아가 바닥을 박살 내며 그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그야말로 섬뜩할 정도의 속도로 파고든 그의 발차기가 정확히 막시모스를 향해 날아들었지만, 막시모스는 가볍게 발을 튕겨 그의 공격 범위를 벗어나듯 도망쳤다.
쩌엉!! 쩡!
첫 번째 공격이 빗나갔다고 당황하진 않는지 트루바시아의 맹공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것을 막시모스가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하지 않고 피하기만 한다.
군중들은 트루바시아가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공기가 찢어지는 듯한 묵직한 공격을 쏟아붓는 트루바시아와 스륵스륵 피하기만 하는 막시모스의 경기를 보면 트루바시아가 우세하게 보일 정도였다.
“형님. 트루바시아 레이펜도 제법인데요? 속도도 상당하고, 위협적이네요.”
흥미롭다는 듯 바리스가 트루바시아를 칭찬하자 윈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페르세르크와 일리나가 차갑게 일축해버렸다.
“경기 끝났구나.”
“제법인데? 저 느끼한 회색 머리. 그런데 너무 오만해.”
“예? 누님들 그게 무슨…….”
퍼어어어엉!!!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거대한 충격음이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놀란 바리스와 왼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하품을 쩍쩍하는 막시모스의 도발에 화가 난 트루바시아가 뭐라 중얼거리기가 무섭게 막시모스가 팔짱을 낀 채로 오만하게 상대를 걷어차 일격에 기절시켜버렸기 때문이었다.
막대한 충격파가 터져나가며 좀 전까지 우세하다 여겨졌던 트루바시아가 손도 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자 장내가 침묵에 휩싸인다.
연습도 한번 하지 않았으나 강하다. 단순히 재능만으로 저런 경지에 오른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재능보다는 업 같은데.”
내 중얼거림에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업? 재능? 그건 다른 거야?”
“재능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게 재능이고.”
업은…….
“쌓아온 거지. 그동안. 영혼이든 육체든. 어딘가에 쌓여있는 거야. 물론 환생을 하면 업은 지워지는 게 대부분인데…….”
내가 본 막시모스의 힘이 업이라면 저건 1, 2년 쌓인 업이 아니다. 최소 100여 년 가까이 쌓인 업이었다.
대부분 익스퍼터나 그에 준하는 실력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만큼 압도적인 힘의 격차는 그야말로 관중들을 환호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애초에 차이가 날 수밖에. 그는 아무리 약하게 처도 마스터 급조차 긴장하게 만들 수준이니까.
“세상에, 방금 무슨…….”
“다만 업의 깊이에 비해선 너무 약한데.”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느긋하게 웃어 보이며 군중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막시모스를 파악하듯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그때 군중에게 손을 흔들던 막시모스의 시선이 정확히 내게 꽂혔다.
그리고는 이내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 * *
막시모스와 나는 대진표부터가 서로의 끝에 배치되었다.
괜한 변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당장 그와 부딪힐 일은 없으리라.
“리…… 릴리아 오펜무 백작 차녀입니다. 대륙의 성자이자 영웅을 만나 영광이에요! 자, 잘 부탁드립니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여 보이는 오펜무 백작가 차녀의 모습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갈색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묶어 내린 귀여운 인상의 소녀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릴리아 영애.”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소동물처럼 작아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녀는 투박하기 그지없는 일자형 너클을 손에 끼고 있었다.
괴리감의 극을 불러오지만 나는 그녀의 움직임을 보며 반사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인파이팅에 최적화된 몸이라…….”
인파이팅 즉, 치고빠지는 아웃 파이터와 다르게 지근 거리까지 파고들어 무식하게 힘겨루기를 하는 터프한 계통이다.
그 탓에 외모와 실력의 괴리감이 보통이 아니다.
그녀의 움직임과 마나의 흐름은 치고 빠지는 식의 무투가들과는 달랐다.
무식하게 파고들어 상대를 뭉개버리는 인파이터의 기질이 짙게 배어있으니까.
막시모스가 없었다면 어쩌면 우승 후보는 그녀가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당장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일 것 같은 외모를 한 주제에.
수많은 이들이 나의 존재를 주목한다.
성자이자 마법사로 유명한 내가 이 대회에 참가한 것도 의문스러우니 과연 어느 정도의 실력을 지니고 있는가 보고자 하는 것이다.
반면 한켠에서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는 막시모스의 시선도 보였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내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자극을 줘볼까.
삐이이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와 함께 그녀가 포탄처럼 쏘아져 들어온다.
쩌어엉!!!
주변을 짓누르는 듯한 폭음이 울려 퍼졌다.
릴리아 영애는 그야말로 속전속결을 노렸는지 엄청난 속도를 내비쳤다.
쩌엉!!!
그리고, 그녀의 너클이 정확히 내 급소를 향해 파고들어 온다.
외모와는 전혀 다른 터프한 스타트에 군중의 놀란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투웅!
“어?”
그녀의 주먹이 가른 것은 내 급소가 아닌 허공이었다.
정확히는 내 급소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순식간에 힘의 방향을 강제로 제어 당해 애꿎은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쉬이이익!!
동시에 마치 물 흐르듯 그녀에게 그대로 파고든 내 손으로 검푸른 기류가 모여들었다.
혈마공과는 다른 또 다른 방식의 내공이 모여든다.
손바닥에 모여든 힘을 순식간에 응축시킨 나는 그 손을 회전시키듯 그대로 그녀의 복부에 장법을 찔러넣었다.
[천마태극공]
[구름 밟기]
쩌어어어엉!!!
무형의 충격파와 함께 그녀를 중심으로 경기장의 바닥에 무수한 금이 일순간 생겨났다.
잠시 멈춘 것처럼 허공에 있던 그녀는 경기장 바닥이 완전히 갈라지고 난 후에야 튕겨 나가 쓰러져 버렸다.
그리고 미동하지 않는다.
좌중에 침묵이 일었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그리고 압도적인 힘 차이를 보이며 끝나버린 것이다.
“시, 시합 종료!! 마법의 사용 여부를 확인하겠습니다!”
워낙에 당혹스러운 경기라 모두가 어리둥절한 가운데 이내 마법사들이 고개를 저었다.
“마법의 흔적이 없습니다!! 데이비 올 라운 왕자!! 승!”
당황한 귀족이 뛰어나와 경기 종료를 선언한다.
상대를 가지고 놀 듯하다 끝내버린 막시모스와 다르게 나는 한치의 기회도 주지 않고 상대를 쓰러뜨려 버렸다.
그녀가 약한 게 아니라.
이쪽이 너무 강한 차이.
하지만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는 상대를 가지고 봐주는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끄윽…… 끅……”
쓰러진 그녀에게 다가가 회복마법을 걸어준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격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영애.”
“아…… 아니에요.”
그녀는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아직도 쉽게 믿기지 않는지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경기장이 박살 나버렸네요.”
이에 나는 심판을 보는 귀족을 불러 무언가 말한 뒤 마법을 발현했다.
그러자 갈라진 바닥이 본래의 형태로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환호가 터져 나온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릴리아 영애와 함께 경기장을 내려갔다.
와아아아아아아아!!
수많은 환호성이 쏟아져 내린다.
팔짱을 낀 채 나를 보던 막시모스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내게 팔을 흔들어 보이고 있는 바리스와 윈리만이 보였다.
“조금 봐주면서 하지.”
“거기서 봐주는 게 더 매너 없는 짓이지.”
내 대답에 페르세르크는 조용히 나를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였다.
“그래. 그래 잘했어. 데이비.”
한차례 놀라울 정도의 경기를 보여준 탓에 대회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한켠에는 나와 릴리아 영애가 경기하던 모습을 저장한 영상석을 통해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경기를 재상영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 여파 때문일까.
막시모스는 마치 자존심에 불이라도 붙은 것마냥 첫 경기 이후 압도적인 힘과 속도로 상대를 일순간에 기절시켜버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파고들어 상대의 얼굴을 걷어차 날려버리는 건 기본이고 폭풍처럼 쏘아져 들어오는 공격들을 모조리 걷어낸 뒤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려 버렸다.
그 외에 참가한 이들의 경기는 서로 박빙을 방불케 할 정도로 뜨거운 경기였지만 나와 막시모스는 일방적인 경기를 계속해서 고수해나갔다.
“1등 포상 잊지 마라?”
진짜 1등의 포상은 사실 육신의 마나를 활성화시켜주는 단약과 드워프가 만든 미스릴제 건틀릿이 포상이지만 내겐 그런 건 관심 없었다.
그런 부상은 됐고,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읏?!”
“바니걸.”
내 미소에 일리나가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내 정강이를 걷어찼다.
“아…… 할 테니까 여기서 그런 소리 하지 마!”
어지간히도 부끄러운지 그녀가 시선을 회피하며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귀엽게 삐쭉였다.
그 말에 페르세르크는 한숨을 내쉬었고 에이리아는 덩달아 붉어진 얼굴로 당황한 듯 이리저리 눈동자만 굴렸다.
첫날 경기가 끝나고 남은 인원은 총 8명.
사흘 후에 나머지 경기가 지속되며 결승전까지 치르게 된다.
“오라버니. 테라리아 왕실에서 연회를 연다는데. 안 가보실 건가요?”
“가야지.”
가긴 가야겠지.“
대회에 참가한 이상 멋대로 구는 건 예의상 맞지 않으니 말이다.
“빠아! 빠아!”
나를 향해 작디작은 양손을 펼치며 매달리는 에반젤린의 웃음에 나는 함박웃음을 짓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
태생이 고대룡인 그녀지만 부모로 인식한 내 모습이 인간형이라 그 형태부터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
나중에 어느 정도 자라면 본래의 모습도 되찾겠지만 그전엔 아마 보통의 아이와 다를 게 없으리라.
“에반젤린. 이리 오렴. 아빠는 가봐야 한단다.”
에이리아가 그녀를 받아들자 에반젤린이 울먹거리며 계속해서 내 품에 안기려 든다.
“쟤는 아빠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보통 딸아이는 아빠를 많이 좋아한다니까.”
그게 나중까지 이어질지는 미지수지만.
결국, 우아앙 울음을 터뜨려버린 에반젤린
“저는 여기 남아도 될까요? 연회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라서…….”
“본녀가 같이 남을 테니 다녀와 데이비.”
“그래.”
연회장에 참석한 이후의 일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그저 언젠가 자라서 국가의 기둥이 될 이들답게 벌써부터 서로 안면을 트고 친분을 쌓거나 아름다운 남녀가 모여 서로 달콤한 분위기를 풍기는 게 대부분이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일리나의 인기가 상당하다.
사실 연회에 일리나만 참석하게 된 이유는 참 간단했다.
가위바위보.
그 한방에 결정이 나버린 것이다.
셋 다 연회를 마냥 좋아하진 않지만 가장 익숙한 일리나가 스스로 지면서 이렇게 된 것과 같다.
“그거 알아? 지금 동안은 오로지 내가 널 독점할 수 있다는 거.”
장난스레 중얼거리면서도 그녀는 특유의 차가운 표정을 고수했다.
“이렇게 굳은 얼굴로 있으면 사람들이 잘 다가오지 않아.”
힐끔거리는 이는 많지만 다가오는 이는 확실히 적었다.
“아. 데이비 왕자님.”
“릴리아 영애?”
“기억해주셨네요!”
물론 그중에서도 심지가 소 힘줄마냥 질긴 이들도 존재한다.
“정말 멋진 경기였어요! 왕자님의 크고 굵은 한방이 제 안으로 들어왔을 때 전…… 아…….”
그런데 활발하고 저돌적인 건 둘째치고 굉장히 작은 체격에 귀여운 인상을 한 소녀가 하는 말이 좀 음란하게 들려온다.
“흐음…….”
“아 참 내 정신 좀 봐. 릴리아 오펜무라고 해요. 오펜무 백작가의 차녀랍니다.”
“반가워요. 일리나 데 라운이라고 해요.”
페르세르크도 성이 팔란이었고 일리나도 팔란이지만 그들은 굳이 자신들의 성을 버리고 라운의 이름을 사용한다.
애초에 성을 바꾸는 건 개인의 의사이니 말이다.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으셨습니까?”
“아아…… 헤헤 저도 바로 송환 명령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요오…….”
릴리아가 해맑게 웃어 보였다.
“상대가 데이비 왕자님이라 별수 없었다는 식의 분위기가 많더라구요. 모르셨죠? 저희 왕국 국왕 폐하께서 예전에 데이비 왕자님과 같이 전장에 선적이 있었는데…….”
마족과의 전투 때인가?
싸움이 한두 번 있었어야 알지.
“그래서 괜찮다고 연락이 왔어요. 좋은 경험 했으니 앞으로 더 매진하시라고.”
너무 일방적인 적.
국가의 위신을 위해 나선 그녀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가능한 게 있고 불가능한 게 있다는 것은 잘 아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정말 아무런 문제 삼지 않는 건 아마 그녀가 자국 내에서 상당한 입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심기일전해서 다음번엔 꼭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드릴 거에요.”
“기대하겠습니다. 아마 다음 경기에선 우승할 수 있을 겁니다.”
“4년 뒤엔 네가 없을 테니까?”
일리나가 남이 듣지 않게 장난스런 어조로 물어왔다.
실제로 릴리아 오펜무, 그녀는 제법 실력이 있는 인파이터였다.
한차례 부딪혀본 결과 어느 정도 실력이 있음이 입증되었으니까.
“언젠가 하인스 영지에 한 번 찾아오세요. 하인스 아카데미는 실력 있는 교수를 우대하니까요.”
“헤헤. 그럼 혼인에 실패하면 꼭 취직하러 찾아갈게요.”
귀엽게 웃으며 나를 떠나가는 그녀였다.
“아 참. 내가 말 안 했나?”
“음?”
“하인스 아카데미의 교수가 되려면 기존 교수 밑에서 대학원생 시절을 2년 이상 보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걸 말 안 했네.
릴리아 영애가 스타트를 끊자 그동안 눈치만 보는 이들이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막시모스만큼은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관심 없다는 듯 주변의 영애들과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연애사업에 몰두할 뿐이었다.
물론 그에게 직접 찾아가 뭐라 할 상황도 아니었기에 나는 굳이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 * *
고요한 정원.
테라리아는 무식한 근육 뇌의 국가라 불릴 만큼 무술에 심취한 국가이지만 저 나름대로 예술적 감각은 신비로운 편이었다.
“끝내주지?”
계속되는 친분 공세에 지쳐가는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윈리와 바리스의 경우 바리스는 라운 왕실에 보고를 위해. 윈리는 그녀의 아이를 돌보기 위해 먼저 연회장을 떠났다.
결국, 남게된 것은 일리나와 나로 일리나는 이런 기회 잘 없다며 나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름답다.”
밤하늘을 비추는 빛나는 꽃들을 보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테라리아의 명물인 태양화야. 밤에도 마치 태양이 뜬 것처럼 환하게 비친다 해서 붙은 이름이지. 중부대륙에서도 여기서만 자라기에 팔란 제국에서도 인기가 많았어.”
“흐음. 몇 개 키워볼까?”
“그럴까?”
키득거리며 그녀가 주변의 돌멩이를 들어 정원의 호수에 가볍게 던졌다.
퐁당!
그러자 조용한 소리와 함께 물이 튀었다.
그녀는 자리에 앉은 채 나를 눕혔고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면서도 자신의 허벅지에 내 머리를 베게 했다.
“예전에 말이야. 페르 언니가 자주 네게 이렇게 해줬지?”
아마 페르세르크와 결혼하기도 전의 일일 것이다.
“한 번씩 피곤할 땐 빌리곤 했지.”
“정말 부러웠거든. 그때 당시엔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긴 했는데. 언제고 이런 일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고 있더라.”
“아직도 아이 가지고 싶어?”
“당분간은 괜찮을 거 같아.”
에이리아가 아이를 가진 뒤로 일리나는 자신도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티를 냈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그 생각을 고칠 수밖에 없었다.
“괜한 배려는 페르세르크에게 실례일 텐데.”
“천천히 생각하자. 난 너와 내 아이가 괜한 권력다툼에 휘말리는걸 원치 않아.”
어찌 되었건 나는 거대한 세력의 수장이 되었다.
언젠가 나의 아이가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일리나의 아이가 다리안과 반목할지도 모른다며 그녀는 아이를 가지는걸 미루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다리안과 에반젤린에 청단이, 홍단이. 참 많잖아? 지금은 그 아이들에게만 사랑을 집중해주고 싶어.”
키득거리며 그녀가 내 뺨을 꼬집었다.
그때 어디선가 누가 실랑이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따로 사람이 올 만한 장소가 아님을 인지하고 있던 내가 몸을 일으키자 일리나가 눈을 가늘게 뜬다.
“싸우는 소리?”
“가봐야겠네.”
평소라면 관심 없어 할 나였기에 그녀가 의아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는 목소리라서.”
이윽고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가자 한 신관과 그런 신관의 멱살을 틀어잡고 있는 막시모스가 보였다.
“명심하십시오. 이번에도 4년 전처럼 1등을 하지 못하시면 폐하께서는 더욱 큰 진노를 보이실 겁니다.”
“흥. 내가 알아서 해.”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저하. 과거 로이나 남작 영애가 어떻게 됐는지 잊으셨습니까?”
“이봐. 발트 신관. 내 앞에서 로이나의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분명 말했을 텐데?.”
“하오나 저하! 이번에도 1등을 하지 못하시면 저하께서 지키고 계신…….”
“닥치라고!”
“……알겠습니다.”
거칠게 멱살을 놓은 막시모스는 신관이 사라진 후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데이비.”
그리고는 조용히 그를 바라보던 내게 말했다.
“우리, 아직 친구지?”
“그렇지?”
우연스레 마을에서 만났던 소년, 오만하기 그지없지만 그 안에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소년이 내게 말한다.
“친구로서 부탁 한 번만 들어줘라.”
일리나가 의아한 듯 나와 그를 번갈아 보았다.
“한판 붙자.”
동시에 그의 전시에 막대한 내공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가 쌓아온 업은 티오니스의 업이 아니었다.
그래. 천중원의 업이다.
“솔직히 네게는 숨기고 싶지 않아. 그래. 난 무술이나 격투술 같은 걸 극도로 증오해.”
내가 묻지 않았음에도 그는 내게 말한다.
“그래서 연습도 하고 싶지 않아. 주먹을 뻗는 행동 자체가 구역질 나니까.”
“그런 것 치고는 대회엔 나오지 않나?”
“조금 다르긴 하지?”
“다르긴 얼어 죽을.”
연습을 안 해도 업이 있으니 자연스레 강해진다.
“웃기지 않아? 누군 평생을 노력해도 닿을 수 없는 게. 누군 놀면서 닿고 있으니까. 천재인 너라면 잘 알겠지?”
그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고 싶은 말은 들어줄게.”
생각해보면 나는 동일한 나잇대의 친구가 없다.
그래서일까.
사실 웃긴 이유로 만난 친구지만 막시모스가 밉지 않았다.
내 눈에 비친 그는 웃는 얼굴과는 다르게 벼랑 끝에 내몰린 작은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