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4화
“일리나 언니는 유독 데이비 오라버니 앞에서만 그러는 걸요?”
“어?”
“그대가 볼 때만 그런다고. 당장 얼마 전만 해도 가관이었지.”
내가 영지를 비웠을 때. 영지에서 소란을 피운 타국의 한 귀족을 어떻게 작살을 내버렸는지 말해주는 걸 보면 거짓은 아닌 듯 보였다.
에이리아와 페르의 증언에 나는 상상의 나래를 가볍게 펼쳤다.
그리고 탄성을 흘렸다.
“워우, 이건 좋다.”
“좋긴 뭐가 좋아. 남들 앞에서 가벼운 모습을 보이기 싫은 것뿐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와이프가 남편에게만 이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데 거부할 이가 누가 있을까.
“별 쓸모는 없어 보이는데.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문양의 목걸이이니까. 외관상은 괜찮네.”
“그런데 나만 받아도 되는 거야?”
일리나가 남은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묻자 페르세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라곤 하지만 본녀는 취향에 맞지 않아.”
“저…… 저도…….”
“흐음…… 난 괜찮은데…….”
무투 대회의 1등에게 주어지는 미스릴제 장식은 명성의 상징이다.
그래, 이건 그나마 예쁘니까 그렇다 치자.
함께 주어지는 부상인 건틀릿은 어지간한 국보급에 해당한다고 알려진 고가의 물건이라곤 하지만…….
“난 필요 없는데.”
사실 내 눈에 이정도 부상은 눈에 차지 않았다.
결국, 짧은 고민 끝에 나는 이 휘황찬란한 건틀릿의 사용처를 정할 수 있었다.
“황색 바위 드워프 마을에 있는 장인들 연습하라고 줘야겠다.”
제작한 드워프가 들었다면 피눈물을 흘릴 소리지만 내 기준에서 이건 그리 마음에 드는 작품이 아니었다.
“그래도 무왕의 상징인 미스릴 장식은 도움이 될걸? 그거 부가효과는 알고 있어?”
“뭔데?”
“버스터 콜.”
그 한마디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일리나를 바라보았다.
“그건 또 뭐야.”
“아냐? 지구의 인터넷에선 저거 한마디면 사람들이 입을 쩍쩍 벌리던데?”
“아니 그러니까 뭐냐고.”
“삼 제국 황제의 지지. 단 한 번이지만 삼 제국 황제가 타당하다고 판단했을 때. 그때 국제연합의 특수 권한을 발동할 수 있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에게 주는 물건이니까.”
“흐음?”
“실제로 이전에 검술대회에서 이긴 사람은 자신의 영지에 몰린 몬스터들을 토벌하는 데 다수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해. 그래서 각기 수많은 국가의 소드마스터가 차출되어서 아주 영지 근방의 몬스터의 씨를 말렸다더라.”
그만큼 큰 보상을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것은 아니나 싶은 생각도 든다.
“별로 필요는 없네.”
“하하, 형님의 기준에서는요?”
내겐 필요 없는 게 맞긴 하다.
“형님. 라운 왕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끝났는데. 혹시 더 머무르실 건가요?”
“아니. 돌아가야지.”
내 말에 바리스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럼 가서 채비를…….”
“다만 그전에 처리할 일이 좀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 바리스.”
“네? 할 일이 남았나요?”
“별건 아니고.”
대회 당시 나를 바라보던 테라리아 국왕의 얼굴이 떠올랐다.
“먼지나 좀 털어보려고…….”
* * *
지하 격투장.
과거 막시모스가 상당한 영향력을 보여주던 곳이기도 했다.
“왕자님, 소식 들었습니다요. 낄낄낄.”
대놓고 비웃는 지하 격투장을 관리하는 인물인 밴을 보며 막시모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주 신나게 털리셨다면서요.”
“좀 닥쳐줄래?”
평소처럼 쏘아붙이는 모습이지만 밴은 의아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저, 왕자님. 괜찮은 겁니까?”
“뭐가.”
“이번에도 패배하면…….”
“이봐 밴.”
그가 조용히 웃는다. 가늘게 뜨여진 실눈이 천천히 뜨여지며 그의 눈동자가 번뜩였다.
“어떻게든 될까?”
“왕자니이임!”
“이제부터라도, 바로잡을 거다.”
그 말에 막시모스를 만류하던 대머리의 사내가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
“오래전 내게 찾아와서 했던 말 기억해?”
“……예 기억하고 있습죠.”
“시작하자.”
그 한마디에 대머리 사내 밴은 껄렁하던 모습도 지워버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진심이십니까?”
“그래. 몽상가도 그만둘 때가 됐다.”
* * *
“꼴 좋구나.”
막시모스는 자신을 비웃는 형제들을 보며 유쾌하게 웃어 보였다.
“그러네요. 또 졌으니 저는 대륙 무투 대회에서 결국 어떤 성과도 이루지 못한 셈이네요.”
“흥, 모자란 것. 태생부터가 그 모양이니 되는 것이 없지.”
비웃음이 서린 형제들의 얼굴이 보인다.
어전에서 국왕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막시모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 태생이 글러 먹은 놈도 못 이겨서 질투하는 꼴 하고는.”
“뭐…… 뭐라?!”
의외의 발언에 당황한 형제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막시모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형제들이 어떻게 미워하든 가족이라며 감싸려 했다.
하지만.
이제라도 바로잡아야 해.
그의 마음에 결심이 선 후였다.
“폐하께서 드십니다!!”
이윽고 국왕이 들자 어전이 고요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차가운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그의 어깨부터 늘어진 두꺼운 코트가 질질 끌린다.
“또 졌더구나.”
그의 말에 막시모스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예. 패배했습니다.”
“못난 놈…….”
“예 못난 놈이지요.”
“잘도 낯짝이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이제부터라도 바로잡을 생각입니다.”
“마음가짐은 마음에 드는구나.”
짧게 일축한 그가 옥좌에 비스듬히 눕듯 기대었다.
그리고는 차갑게 일갈했다.
“분명히 말했을 터다. 대회에서 패배한다면, 어찌 될지.”
“적어도 라이벌 국가는 아니었지요.”
“라운 왕국은 제대로 된 무투가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낙후된 국가다! 네놈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그 낙후된 국가의 왕자가 세상을 몇 번이고 구했습니다.”
고개를 든 막시모스의 말에 국왕이 이를 악물었다.
“벌을 내린다 하셨지요. 어찌하시겠습니까. 저를 죽이시렵니까?”
“막시모스!!”
막시모스의 변한 모습에 주변에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론하지 않고 모두 따랐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의 막시모스는 눈을 똑바로 마주한 채 당당하게 맞서고 있었다.
“아니지요. 죽일 수 없겠지요. 저 쓸모없는 놈들 다 합쳐도 저 한 명을 못 따라오니까요.”
제 형제들을 무시하는 발언에 다른 왕자들이 부들부들 떨었지만, 국왕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하면,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저를 죽일 수 없으니 제 약혼녀의 목을 베고, 제 어미를 베어 죽이고.”
“막시모스.”
“그것도 모자라서 폐하의 혈육이자 폐하를 끝까지 믿고 사랑했던 제 여동생의 눈을 뽑고!!”
그 외침에도 국왕은 차갑게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죽고 싶은 것이냐?”
“그다음은 뭡니까. 제 마음을 개 박살 내고 싶어 하시는 폐하께서 다음으로 죽이고 부술 건 무엇입니까. 폐하께서 자결이라도 하시렵니까?”
차가운 모습을 고수하던 그였지만 이번엔 달랐을까.
결국, 국왕은 근처의 근위 기사에게서 칼을 빼 들고 검 끝을 막시모스에게 겨누었다.
“닥쳐라. 패배자인 네놈이 정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폐하!!”
“명심해라! 세상은 승자에게 모든 것이 주어진다! 네놈을 이긴 성자 또한 모든 것을 거머쥐었다. 명예 승리! 모든 것을!”
그렇게 외친 그가 귀족들에게 말한다.
“아직 남지 않았더냐.”
“…….”
“뭣들 하느냐!! 저 못난 놈이 부탁해서 살렸던 시녀와 라티아나의 목을 베어라!!”
그 외침에 귀족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경악한다.
“폐…… 폐하!! 이는 너무 과한 처사이십니다! 명을 거둬주소서!”
“그, 그렇습니다. 폐하! 비록 패배하였다곤 하나 왕자께선 같은 나잇대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성취를 이뤘사옵니다! 이번 패배 또한 가슴 아픈 일이나 상대가 대륙의 성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밖에 없사옵니다! 명을 거둬주시옵소서!!”
“명을 거둬주시옵소서!!”
귀족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숙여 외친다.
하지만 국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동파 서파 나눠서 싸우던 그대들이 언제부터 짐의 말에 토를 달았나!! 뭣들 하느냐! 어서 둘을 끌어내지 않고!”
“폐하!!”
“이 나라의 국왕은 짐이다!! 짐이 테라리아의 국왕이란 말이다!”
목에 핏줄을 세우며 소리 지르는 그를 보며 귀족들은 그를 말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저 안타까운 시선을 보낼 뿐.
이윽고 국왕의 명령을 받아 기사들이 떠나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겁지겁 돌아온 그들이었다.
“폐, 폐하!!”
“무슨 일이냐.”
귀찮다는 듯 다시 옥좌에 기댄 그가 묻자 기사들이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없겠지.”
그 한마디에 모두의 시선이 막시모스에게 향한다.
“폐하.”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슨 짓이냐니까요. 폐하의 폭정에 희생될 두사람을 망명시켰습니다.”
“네이노오오오옴!!!”
그 말에 다시 격분한 그가 성큼성큼 달려와 막시모스의 멱살을 잡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막시모스는 가늘게 뜬 실눈의 꼬리를 부드럽게 휜 채 제 아비이자 국왕을 바로 보았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죽여보시지요. 폐하는 미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어떻게든 폐하께서 저를 알아주시리라 믿었습니다만…… 아무래도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퍼억!!
급기야 국왕은 막시모스의 뺨을 쳐올렸다.
“못난 놈!!”
“자!! 이제 어쩌시겠습니까.”
“추적하래! 둘을 추적해 당장 끌고 와! 아직 이 나라를 벗어나지 못…….”
“이미 도착했을 텐데요.”
“뭐라?”
“폐하. 제 친구가 누구인지 아십니까?”
막시모스는 대회 이후 만나지 못했던 제 친구를 떠올렸다.
처음엔 서로의 정체도 몰랐지만 그건 상관없었다. 술을 붓다 보니 서로 말이 통했고, 친구가 되었으니까.
“데이비 올 라운. 대륙의 성자입니다.”
데이비에게 보냈다는 말인즉슨. 그가 망명을 받아들였다면 어떤 경로로든 되찾아오는 건 불가능하다.
테라리아 왕국의 국력은 라운 왕국과 큰 차이가 나지 않지만 단 한 명 때문에 파워 밸런스가 뒤틀려있기 때문이었다.
부들부들 떨며 막시모스를 노려보던 그가 소리쳤다.
“저놈을 끌고 가 매달아라! 살려달라 애걸할 때까지 밥 한 끼 물 한 모금 주지 마라!”
“예…… 예!”
기사들조차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천천히 다가온다.
“죄송합니다. 저하.”
양팔을 포박하듯 붙든 기사들이 그를 끌어내려 한다.
“채찍을 준비해라! 내 직접 저놈의 버릇을 고쳐놓고야 말겠노라!!”
그의 외침이 고래고래 울려 퍼졌다.
막시모스는 저항하지 않은 채 성의 입구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양팔을 단단히 밧줄로 묶어 포박된 뒤 상의를 벗었다.
“못난 놈!!”
철썩!!!
이윽고 뒤따라온 국왕은 채찍을 들고 그대로 막시모스를 후려쳤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그의 몸이 크게 흔들렸지만, 막시모스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열이 받은 것일까.
국왕은 수차례 채찍을 직접 휘둘러 막시모스를 때렸다.
하지만 막시모스 또한 끝까지 비명 한 번 지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웃어 보였다.
가늘게 뜬 그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여지며 보랏빛 눈동자가 국왕을 담는다.
“멍청해서 약혼녀를 잃었습니다.”
“…….”
“바보같이 겁을 먹고 어머니를 잃고 동생 라티아나의 눈도 잃었습니다. ”
“이놈이 아직도!”
“제가 멍청이인 줄 아십니까? 두사람을 지킬 작전도 짜지 않게.”
“나는 네 아비다!!!”
“폐하께서 언제부터 저를 아들로 생각하셨습니까!”
“이…… 이놈이!!”
철썩!! 철썩!
미친 사람처럼 채찍을 휘둘러대지만, 막시모스는 양팔이 포박되어 매달린 채로도 그를 노려보며 자신의 할 말을 끝까지 했다.
철썩!!
“폐하 전 말입니다. 이 미쳐버린 왕실을 바로잡을 겁니다. 아니, 미쳐버린 왕족들을 바로잡을 겁니다.”
거의 역모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아무리 욱했다고 해도 막시모스가 할 발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무슨.’
“그런데 어쩌실 겁니까? 폐하께서 절 죽일 수 있으십니까? 아니. 격투술에 필요한 팔다리라도 잘라낼 수 있으십니까? 아, 혹시 혓바닥이라도 뽑으실 겁니까? 폐하께 저는 아들이 아니라!!”
“…….”
“단순히 폐하의 완벽주의에 가까운 욕심을 채울 유일한 존재 아니었습니까?”
그의 도발에 국왕이 부들부들 떨었다.
하지만 곧이어 눈을 부릅 뜬 막시모스의 섬뜩한 표정이 그를 움찔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이토록 오랫동안 비참하게 만드시고도 제게 아직도 아버지를 향한 사랑과 충심을 기대하시다니. 너무 하시는 거 아니신지요.”
“네이노오오옴!!!”
분을 참지 못한 그가 채찍을 버리고 검을 다시 빼 들었다 그리고 그를 베어버리기 위해 달려든다.
“폐…… 폐하?!”
이미 검은 휘둘러졌다. 검을 휘두르고 나서도 자신이 절대 그를 죽여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국왕이었기에 눈이 부릅 뜨여졌지만 검을 거둘 순 없었다.
카아아아앙!!!
그리고, 검이 막시모스의 몸을 내려치기 직전. 무언가에 의해 검이 박살 나며 튕겨 나가버렸다.
좌중이 침묵한다.
모두가 바라보는 상황에서. 맞은편에 존재하는 문 너머로 누군가가 느긋하게 걸어들어오는 게 보였다.
“저…… 저자는?!”
놀란 모두가 웅성대고 형틀에 매달려 고개만 천천히 돌린 막시모스는 피가 흘러내리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이를 향해 피식 웃어버렸다.
“언제는 친구 아니라더니.”
피식 웃은 그를 향해 나타난 인물은 조용히 그를 무시한 채 테라리아 국왕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대륙의 동부. 라운 왕국의 제 1왕자이며 성국 공인 성자. 데이비 올 라운입니다. 테라리아 왕국의 태양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느긋한 미소 아래 숨겨진 차가운 미소가 주변을 짓누르는 것처럼 무겁게 퍼져나간다.
같은 시각.
바리스와 윈리는 다크엘프 미녀가 찾아와 건네주고 갔던 서류 중 일부를 서로 바라보다 시선을 마주쳤다.
“야 멍청아. 오라버니께서 뭘 하시려는 걸까.”
윈리의 살벌한 말투에 바리스는 익숙한 표정으로 고민했다.
“모르지, 다만 형님이 이만큼 먼지를 털었다면…….”
짧게 침묵한 그가 다시 말을 이었다.
“뭘 뜯어내도 뜯어낼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