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5화
249. 빛을 본다는 것의 축복
“데이비 왕자…….”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냉각된 것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어떤 연유에서건 강제침입에 가까운 행동이지만 기사들이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정체 모를 압박감이 그들을 강제로 묶어두고 있는 것이다.
투기나 살기와는 다른 본능적인 무언가.
그것이 반신, 아니 신격을 얻은 존재와 인간의 격에서 나오는 것임을 아는 이는 없다.
테라리아 국왕은 조용히 나를 노려보았다.
그가 나를 향해 적대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유야 훤했다.
저기 매달려있는 막시모스 녀석이 내게 보낸 두 사람이 원인이었을 테니까.
그 외에도 갑자기 자신의 행동을 방해한 것도 한몫하리라.
“미안하지만 데이비 왕자. 연고도 없이 이리 불쑥 들이닥치는 건 상당한 무례가 아닌가.”
“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례를 무릅쓰고서라도 폐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담담한 내 말에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검을 보다 노려보았다.
“나중에 다시 부르도록 하지. 물러가게.”
아무리 집착이 강한 존재라도 함부로 밀어내기엔 그 존재감이 너무 거대했던 모양일까.
그는 당장 나를 끌어내기보단 돌려보내는 쪽을 택했다.
“외람되지만 지금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폐하.”
“뭐라?”
“중요한 일이라서요.”
내 얼굴을 마주 보던 그가 짧게 고민한다.
그리고는 돌아섰다.
“만약 왕자의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라운 왕국은 그에 따른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라운 왕국이라.
뭐, 상관없나.
“좋습니다.”
차갑게 웃으며 내가 매달려있는 막시모스를 지나친다.
“야, 데이비 너 미쳤냐……?”
지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막시모스의 시선에 복잡함이 서려 있다.
“걱정 마. 네가 보낸 두 사람은 하인스 영지로 이미 보냈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야…… 대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몸이나 추슬러. 난 개인적인 볼일을 보러 온 것뿐이야.”
그렇게 말하며 내가 그를 지나치자 그는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부탁이니까 괜한 무리한 짓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해.”
* * *
“그래. 짐에게 할말이 있다고. 어디 해보라.”
어전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근엄한 얼굴로 옥좌에 기대어 앉으며 내게 말했다.
“주변을 물려주시지요. 단 한 명도 남김없이.”
“뭐요?!”
“왕성에 무단으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주변을 물리라니!”
귀족과 근위대가 당연히 반발한다.
하지만 나는 차갑게 미소지을 뿐이었다.
“그들이 들어도 상관없지만. 그땐 협상이 불가합니다.”
“협상이라?”
“그땐 통보가 되겠지요.”
“통보라…… 하하하하하하!! 이곳은 테라리아 왕국이다! 이곳에서 짐을 위협할 수 있으리라 보는가!”
“사람이 무언가 제안을 하는 데엔 이유가 있는 법입니다. 선택은 폐하의 몫입니다.”
내 말에 그는 웃음을 멈추고 나를 한참 동안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물러가라.”
“하…… 하오나 폐하!”
“물러가라 했다.”
그의 단호한 명령에 결국 모두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기왕이면 저기 숨은 이들도 다 내보내시지요.”
내가 아무것도 없는 옥좌 뒤편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가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절대 충신들이다. 신경 쓰지 말고 말하라.”
“뭐, 상관없다니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쉬운 건 제가 아니니.”
그렇게 말하며 나는 품 안에서 작은 서류뭉치를 꺼내 들었다.
“우선 쓸데없는 잡론은 팽개치고 본론부터 말하겠습니다.”
“본론이라.”
“우선 라운 왕국으로 망명한 두 사람에 대한 현재 추적과 향후 모든 간섭을 멈추십시오.”
“뭐라?”
“또한, 막시모스에 대한 어떤 간섭도 멈춰주십시오.”
“왕자…… 지금 그걸 짐이 받아들이리라 생각…….”
“이걸로 봐 드리겠습니다.”
그 말에 그는 조용히 나를 노려본다.
“왕자. 죽고 싶은가?”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딴 헛소리나 하려면 당장 돌아가라! 짐이 은혜를 베풀어 오늘 이 같은 무례는 못 본 것으로 하겠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지요.”
수긍하듯 대답한 나는 품 안에서 꺼낸 서류뭉치를 허공에 확 던졌다.
일국의 국왕에게 하는 것치고는 경악스러운 무례였지만 내 표정은 더욱 차가워졌다.
종이들이 한 장 한 장 흩날리자 그가 격분한 듯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곧 허공을 날아오른 종이들이 빛에 휩싸여 멈춰선다.
그리고.
그것을 본 그의 눈이 부릅 뜨여졌다.
“참, 많기도 하던데요.”
“…….”
“테라리아 왕국은 왕권이 강한 국가입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그 과정에 의문점이 많더군요.”
“네놈이…….”
“뭐, 사실 이건 입가심에 불과합니다. 테라리아 왕국 내의 일에 제가 이런 사실을 퍼뜨려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동시에 몇몇 종이들이 모여들어 그에게 날아들었다.
“그런데 말이죠. 성국이 엄격하게 금하는 짓을 하셨던데.”
“…….”
“막시모스에게 유별날 정도로 집착하는 이유가 그겁니까?”
“네…… 네놈이 이걸 어떻게…….”
그가 눈을 부릅뜬 채 부들부들 떨었다.
“금기였으면 테라리아 왕국은 그 자리에서 박살 냈을 겁니다. 축하합니다. 다행히 금기를 어기진 않으셨네요. 다만!”
“…….”
“성자의 권한으로 이걸 성국 발샤스의 교황께 보내면.”
“…….”
“재밌어지겠지요?”
성국은 삼제국과 다르게 중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위세가 상상 이상으로 강력하다.
테라리아 왕국은 중부왕국이다. 발샤스의 군사 영향력이 미치는 위치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도 이는 성국과 국제연합이 맺은 조약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행위이기도 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다 하셨습니까.”
“…….”
“폐하, 저는 분명 기회를 드렸습니다.”
“이…… 이것들을 대체…….”
그의 눈이 사정없이 흔들린다.
그로썬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단순히 정보 길드 같은 곳에서 찾아낼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으니 말이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지만, 아이나가 우연찮게 테라리아 왕국을 조사했던 것들이 타이밍 좋게 내 손에 들어왔다.
“제가 이걸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게 중요하진 않죠.”
담담하게 말하며 손을 휘젓는다.
그러자 서류들이 흩날리며 다시 내 손으로 모여들었다.
“완벽을 추구하시다 보니 자연스레 생긴 치부입니다. 이해해드리지요. 하지만 성국이 이해할지는 미지수네요.”
“…….”
“폐하. 저는 아니, 저를 포함한 라운 왕국은 굳이 테라리아 왕국과 척을 질 생각이 없습니다.”
“협박을 하고도 사이가 좋기를 바라는가.”
“그러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거, 전부 못 본 척하겠습니다. 성자 입장에서 이걸 알고도 넘어가는 게 상당히 큰 부담이 되는 건 아시겠지요.”
내 말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처음엔 분명 두 가지만 들어주시면 제가 이것들을 전부 묻어드린다 했습니다만. 그걸 거부하신 건 폐하시군요.”
“…….”
“이를 어쩐다…… 공적으로 무언가를 받아내면 당연히 말이 남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 받아낼 수 있는 건 테라리아 왕국 내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왕실의 기밀이나 보물이라도 받아낼까요.”
그의 그런 물음에 나는 미소지어 보였다.
* * *
“데이비!!”
테라리아 국왕과의 면담을 마치고 떠날 준비를 하던 내게 막시모스가 찾아왔다.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냐?!”
“왜.”
“아, 아니 대체 뭔 짓을 했길래 폐하께서…….”
“그냥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것뿐이야.”
물론, 터놓고 그를 설득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테라리아 국왕은 전형적인 소시오패스.
즉, 자신의 성공을 위해 어떤 비윤리적인 것도 서슴지 않고 저지를 인간상이다.
그러니 그런 미친 짓들을 저지른 거겠지.
다만 정보의 부족이었는지 소시오패스 경향이 그나마 적었기 때문인지 금기까지 어기인 않았기에 여기서 멈춘 것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좀 많은 걸 뜯어내긴 했다만.”
“…….”
내 중얼거림에 그가 질렸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본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향후 5년간은 어떤 것도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라.”
5년에 가까운 퇴보.
완벽을 추구하는 그이기에 막시모스가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마다 채찍을 들었지만,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입장에선 5년만 참았다가 다시 막시모스를 다그칠 생각이겠지만 이미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5년 후엔 국왕이 함부로 할 수 없을 정도의 거물이 될 것이다.
그 한마디에 나는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핫!! 결국, 그걸 선택했나 보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하인스 영지로 올래?”
내 물음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대체 어떻게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수년간 내가 싸워서 쟁취해야 될 것을 네가 안겨줬으니. 대륙을 유랑하러 나갈 거다.”
그의 말에 나는 아공간을 열어 가죽장갑과 목걸이를 꺼내 그에게 던져주었다.
“이건, 테라리아 왕가의?!”
그는 그것들이 뭔지 눈치챈 듯 눈을 부릅떴다.
“너희 테라리아 왕국의 보물이라던데. 왕실에서 비밀리에 전해져오는 보물이라 반출 반입 자체가 극비라더라.”
“……너 진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묻는 시선에 나는 그를 무시했다.
“가지고 가. 한번 뜯어내면 확실히 뜯어내는 게 내 성격이라 받긴 했는데 나는 필요 없어.”
테라리아 국왕에게서 받아낸 것들은 전부 막시모스에게 주어버렸다.
필요도 없는 거 사실상 그에게서 받아낼 건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받아낸 건 신뢰의 문제였다.
이 정도로 받은 이상 국왕 또한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을 거라는 각서를 받아낸 것과 다를 바 없다.
테라리아 국왕은 성국이나 국제연합과 마찰을 빚을 수 있는 문제를 묻는 조건으로 내게 그것을 건네줌으로써 나와 물질적으로 계약을 맺은 셈이다.
“데이비.”
“네 동생과 그 시녀는 당분간 하인스에서 보호할 테니 네 맘대로 해라.”
“내 동생 말이야…… 눈을 잃고 많이 위축되어서 살아온 아이야. 잘 부탁한다.”
“그래.”
친구의 여동생 하나 신경 못써줄까.
그나저나. 눈을 인두로 지졌다고 했던가.
작은 아이에게 너무 처참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태어날 때부터 앞이 안 보인 건 아니라 이거지.”
“데이비?”
“한 달 정도 뒤에 하인스 영지에 들려. 선물을 줄 테니까.”
* * *
하인스 영지로 돌아온 직후 일리나는 한때 자신이 했던 약속을 후회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막상 입으려니까…… 좀 그렇네…….”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검은 옷을 들어 올렸다.
몸의 절반은 알몸이나 다름없는 이 옷을 입어주겠다고 한 건 그녀 자신이었지만 막상 입으려 드니 전신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살찌진 않았지?”
불안스레 중얼거리며 그녀가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지만 의상 자체가 워낙에 달라붙고 노출이 많은 터라 괜히 그녀를 신경 쓰게 만들었다.
반면 페르세르크는 자신의 몫인 고양이 꼬리와 귀여운 앞발을 낀 채 꺄르륵 거리는 다리안과 놀아주고 있는 게 보였다.
“보거라. 보거라. 푹신푹신한 고양이 앞발이로구나.”
“꺄르르르륵!”
꺅꺅 웃으며 버둥거리는 다리안과 놀아주는 페르세르크를 보며 일리나가 물었다.
“언니는 부끄럽지도 않아요?”
고양이 앞발이나 꼬리도 꼬리지만 그녀가 입고 있는 의상도 상당히 트임이 많으면서도 깜찍한 디자인의 의상이었다.
우아함보다는 발랄함이나 깜찍함이 가득하다.
본래 이미지에 상당히 상반되는 듯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약속은 지키는 게지. 또한, 데이비 말고 볼 이도 없는데 무에 그리 부끄러울까. 데이비는 왕성에 보고 후에 볼일을 보고 돌아온다고 하니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하면 되는 게야.”
“세상에. 데이비가 밤마다 언니가 무서워진다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