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876화 (876/1,559)

제 876화

“귀찮은 양반들.”

질린 표정이 절로 나온다.

나는 현재 계승권을 포기한 왕족으로서 어느 정도 그 불안을 억눌러놓은 상황이지만 턱 까놓고 말하자면 라운 왕국의 왕실 귀족 중 일부는 차기 국왕인 바리스보다 내가 더 권위가 강해져 있는 이 상황을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긴다.

아무리 내게 호의적이던 귀족만 남은 대숙청이 이루어졌다곤 하지만 사람이라는 게 시간이 흐르면 변하는 법이니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테라리아 왕국의 왕족을 내 독단으로 망명시킨 것에 대한 일이었다.

국가 간에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던 말.

그들의 우려에 나는 이로 인해 문제가 생기면 직접 책임을 진다는 카드를 그들에게 건네주고 나서야 그들의 우려를 잠재울 수 있었다.

반면 크리아네스 국왕은 내게 수고했다는 한마디만 던져줄 뿐이었다.

그 한마디가 귀족들에게 제법 큰 파장을 줄 수도 있음을 잘 알 텐데.

그동안 쌓인 것들을 풀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의 행동은 거침없었다.

막시모스가 망명 보냈던 두 사람. 시녀 로이사와 막시모스의 동생 라티아나는 조금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당분간 여기서 편하게 지내도록 해.”

“하지만…….”

“막시모스가 자리를 잡으면 그때 다시 너희들을 데리러 올 거다.”

내 말에 로이사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라티아나는 조용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너희들은 귀빈으로 대접해줄 테니 걱정 말고.”

“저, 왕자님.”

“할말이 있나?”

“저는 역적의 가문의 여식일 뿐입니다. 그런 제게 이렇게까지 할 이유는…….”

“테라리아 왕국의 역적 같은 건 관심 없어. 내막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하인스 영지가 너희 두 사람조차 받지 못할 정도로 빈곤한 영지처럼 보이게 하진 말았으면 좋겠는데.”

단호한 발언에 로이사가 움찔한다.

하지만 그녀의 고집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곳에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왕녀 저하의 몫까지 제가 이곳에서 밥값을 하겠어요.”

“흠…… 그럼 이렇게 할까.”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시녀가 되기 전 넌 아카데미에서 의술학과를 전공했었지?”

“그걸 어떻게…….”

“다 아는 수가 있어. 그럼 이렇게 하자. 하인스 아카데미에 의술학과 대학원생들 수가 부족하다더라.”

“대학…… 원생이 뭔가요?”

“하인스 아카데미에서 성적이 좋았던 이들이 앞으로도 더 나아갈 수 있게끔 교수진이 직접 이끌어주는 자리라 할 수 있지.”

듣기로는 대학원생들이 있는 기숙사에선 날마다 비명이 들려온다는데 상관없으리라.

“맡겨주세요!”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의욕을 불태우는 눈빛을 보내왔다.

“그리고…… 우선 왕녀님은 진찰부터 받지.”

내 말에 라티아나 왕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리번거리고는 손에 쥔 작은 지팡이를 이용해 바닥을 톡톡 두드렸다.

나를 찾고 있는 것이리라.

이에 내가 지팡이를 쥔 손을 잡아주자 그제야 내 위치를 특정한 듯 그녀가 올려다본다.

“진찰이요? 따로 아픈 곳은 없는데…….”

“그건 의원이 판단해.”

그녀를 자리에 앉힌 뒤 나는 그녀의 안대를 벗기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급히 손을 뻗어 그것을 만류한다.

“저, 보기 흉해서…….”

“전쟁터에서 말이야. 이보다 더 흉한 것들을 수도 없이 봐왔어.”

“그렇지만…….”

눈을 잃었다 해도 결국 제 나잇대의 소녀였다.

남에게 자신의 흉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할 수밖에.

이에 나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감싸듯 잡았다.

휙!!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안대를 벗겨버렸다.

“아앗!”

“괜찮다고 했잖아.”

내 말에 그녀가 입꼬리를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은 상상 이상으로 끔찍한 몰골이었다.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인두로 막무가내로 지졌구만? 상태가 심각하네. 후유증도 제법 남았겠어.”

“휴…… 흉하죠? 그러니까 어서 돌려주세요!”

허겁지겁 손을 뻗어 내 손에 쥐어진 안대를 다시 돌려받으려 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 상태를 살폈다.

이건 마리아 공주와는 다른 케이스로 보인다.

이미 하인스 영지에는 그녀를 포함한 눈이 보이지 않는 공주가 또 한 명 있다.

한 명은 병과 관련된 것이라면 한 명은 악의에 의해 망가진 케이스.

나는 짓무른 상처로 가득한 그녀의 눈에 손을 뻗어 더듬었다.

“제발…… 제발 그러지 말아요!”

“좀 믿어봐. 이래 봬도 최고의 의사니까.”

“…….”

내 말에 그녀는 한참 동안 고민하는 듯하더니 결국 저항을 그만두었다.

“사이코패스 같은 새끼.”

“…….”

그녀도 그 대상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저…… 괜찮은가요?”

“뒤처리가 엉망이야. 후유증이 남을 수밖에 없어, 그냥 뒀으면 너, 10년 안에 절명했을 거다.”

그렇게 말하며 내가 신성 마법을 끌어올려 그녀의 눈 주변에 퍼뜨렸다.

“우선은 후유증만 남지 않게 처치해줄게.”

“감사합니다…….”

“네 오라버니를 보고 싶나?”

내 물음에 그녀는 잠시동안 고민했다.

확실히 그녀가 눈을 잃은 이유는 막시모스가 패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게 과연 막시모스의 잘못이라 할 수 있을까.

“보고 싶어요.”

그녀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보고 싶어요. 하지만 저는 앞이 보이지 않는걸요. 오라버니가 곁에 있어도 만지고 느낄 수만 있지 오라버니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가 없어요.”

서러움이 치고 올라왔는지 그녀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흐느끼는 그녀를 보며 나는 쓰게 한숨을 내쉬며 비슷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네가 원하면 빛을 찾아줄 방법을 찾아볼게, 앞을 보고 싶니?”

이윽고 내가 다시 묻자 그녀가 흠칫한다.

“그런 말로 저를 안심시키지 말아 주세요…… 기대했다가 절망에 떨어지는 것만큼 비참한 것도 없으니까.”

이 작은 아이가 대체 어떤 일을 겪었기에 이토록 비관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일까.

겁을 먹은 소동물.

그녀를 보면 떠오르는 표현이었다.

언 듯 보면 에오니샤와 닮았지만, 에오니샤는 예전에 비하면 지금은 참 많이도 변했다.

실제로 얼마 전엔 자신의 기획서를 통과시켜달라면서 집무실까지 찾아와 박력 넘치게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리치고 브리핑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사람은 변할 수 있다.

외부의 요인으로 위축된 사람은 외부의 요인으로 인해 얼마든지 회복할 수 있다.

“기대했기에 배신을 당하고 비참해진다라…….”

내 중얼거림에 그녀는 고개를 돌리고는 다시 안대를 썼다.

“죄송합니다. 혼자 있고 싶어요.”

“그래 일단 쉬어.”

지금은 눈을 치료해줄 수 있다 해도 쉬이 믿을 것 같지 않았다.

그저 이쪽 준비가 확실해지면 후진 없이 수술하는 수밖에.

* * *

“잘 풀리지 않나 보네.”

페르세르크가 내가 앉아있던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복장은 평소와 다를 게 없다. 분명 페르세르크가 입기로 한 옷은 저게 아니었다.

“내가 협상은 없다고 했는데.”

“본녀는 가위바위보에서 이겼을 뿐이야.”

“뭐?”

“오늘의 패배자는 일리나지.”

그녀가 킥킥 웃어 보였다.

“기대해도 좋을 게야. 본녀가 선물을 같이 동봉해두었으니.”

그녀의 말에 내가 벌떡 일어난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내 어깨를 잡아 눌렀다.

“하던 것부터 마저 하는 게 어때?”

단호한 그녀의 말에 나는 본성과 이성이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이성이 본성을 억눌렀다.

“후우…… 그래. 시간은 많으니까.”

내가 다시 설계도면을 검토하자 그녀는 그중 한 장을 들어보았다.

“의안이로구나. 그것도 생체의안.”

“그래. 라티아나 왕녀의 눈을 되찾아주려고. 겸사겸사 마리아 공주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굉장히 괴로운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신경이 괴사했기 때문에 이어붙이는 게 본녀의 육신을 만드는 것보다 어려울지도 모르는데.”

“착각하는 모양인데. 네 육신을 만들 때가 배는 더 어려웠어.”

내 물음에 그녀가 키득키득 웃어 보였다.

그렇게 페르세르크는 내가 작업을 완전히 끝낼 때까지 곁을 지켜주었다.

혹여라도 내가 놓치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면서 말이다.

밤늦은 시각.

생각보다 일을 집중해버린 탓에 새벽이 되어버린 탓에 나는 잔뜩 처진 몸을 이끌고 침실로 향했다.

밤하늘은 오늘따라 유난히 어둡게 느껴졌다.

시녀 한 명 돌아다니지 않는 어두운 복도를 지나 침실로 들어서자 달콤한 향기가 코끝을 찔러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형체를 찾았고 천천히 다가가 그것을 들춰냈다.

“꺅!”

동시에 누군가가 짧게 비명을 지르며 양팔로 몸을 가렸다.

“약속, 지켰네?”

“데이비.”

이불 속에 숨어있던 건 다름 아닌 일리나였다.

그녀는 약속대로 바니걸 의상을 입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새까만 천과 망사로 이루어진 옷, 그리고 새하얀 귀 장식과 같은 색의 동글동글한 꼬리가 인상적인 복장이었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새하얀 장식들이 시선을 잡아끈다.

그녀는 붉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거, 생각보다 많이 부끄럽네…….”

“와우…….”

절로 탄성이 흘러나온다.

부부 사이에 서로 볼 것 다 본 사이라곤 하지만 입고 있는 게 더욱 부끄러운 것도 있는 법이다.

까만 바니걸 의상을 입고 있는 그녀는 당장이라도 숨어버리고 싶다는 듯한 얼굴을 한 채 움찔움찔했다.

종아리 부분을 드러내지 않는 의상을 고집하던 그녀다.

그런 그녀가 망사로 가득한 바니걸 의상을 입고 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본능적으로 다리를 숨기려 들지만,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더 불을 지른다.

“내기에서 졌다며?”

“이, 일부러 진 거거든? 빠, 빨리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네 마음속에서는.

평소라면 진심으로 믿어줬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평소의 저돌적인 애정 공세를 펼치던 게 거짓이라 느낄 만큼 부끄러워하고 있다.

마치 그녀와 보냈던 첫날밤처럼 말이다.

머리 위에 끼운 토끼 귀가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느낌을 전해준다.

“내가 웬만한 건 다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이건 좀…….”

그녀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확실히 의상 자체가 상당히 노출이 많은 편이다.

“지구의 인간들은 이렇게 파, 파렴치한 옷을 입고 잘도, 돌아다니는데 왜!”

“알고 구해온 거 아니야?”

“실제로 입어보니 다르니까 하는 소리잖아!”

그녀의 외침에 나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저게 예전의 성격이 나오게 할 만큼 부끄러운가?

잠깐만. 간혹 매체를 통해 보는 것과 다른 느낌이 든다.

그제야 나는 그녀가 뭔가를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너, 설마, 그 안에 아무것도…….”

그런 그녀를 보던 내가 경악한 듯 묻자 그녀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더욱 붉어진다.

“조…… 조용히 해! 언니가 이게 맞다고 해서…….”

페르세르크.

은혜는 잊지 않으마…….

그녀가 기대해도 좋다고 했던 것이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격하게 외친 그녀가 부끄러움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나를 끌어안고는 그대로 침대로 다시 몸을 던졌다.

쓰러진 내 위에 교차하듯 포개진 그녀가 토끼처럼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계속해서 입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힘겹게 말을 꺼냈다.

“자, 잡아먹지 말아 주세요…….”

그 한마디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대단하다.

“사냥꾼……님.”

전래동화에서나 나올법한 토끼가 이런 느낌이었던가.

내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조심스레 변명하듯 말했다.

“페르 언니가…… 이렇게 하면 된다고…….”

“와…….”

행동과 상반되는 대사에 이성이 날아가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