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7화
일리나는 과도한 도발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그러게 함부로 끼를 부리면 쓰나.
그녀는 자신이 하는 행동이 사람을 얼마나 달아오르게 만드는지를 아직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하나하나가 페르세르크에게 놀아난 꼴이지만 나는 나대로 덕을 봤으니 상관없는 문제다.
결국, 완전히 녹초가 되어 뻗어버린 일리나였다.
이후 나는 나머지 두 명의 보상은 잠시 미루기로 결정을 내렸다.
즐거운 것도 즐거운 것이지만 언제까지고 하려던 일을 미뤄놓을 순 없었다.
단순히 선행의 범위를 넘어 이게 잘만 성공하면…….
하인스 영지는 또다시 발전할 수 있다.
“여기는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오라버니의 설계는 다 좋은데 재료가 너무 고가에요.”
“당장 뇌가 익어버리는 걸 보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될 거다.”
“윽…….”
에오니샤가 침몰한다.
“그럼, 여길 이렇게 하는 건…….”
“뇌사상태에 빠뜨리고 싶냐?”
“윽…….”
이번엔 티아라가 침몰했다.
내가 며칠간 공방에 틀어박히자 흥미가 일었는지 비공정 아스가르드의 함장 티아라와 에오니샤가 공방에 들이닥쳤다가 순식간에 침몰당했다.
사람의 육신에 무언가를 적용시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짓이다.
페르세르크의 육신처럼 강제 환골탈태를 시키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마나 하나 없는 그녀의 육신을 강제로 환골탈태시킬 때 그녀가 과연 견뎌낼 수 있는가가 의문스러웠다.
그렇기에 나는 이미 완성된 계산도 몇 번이고 검산하며 재확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됐어, 완벽하네.”
“네? 아직 의안을 구성할 메인 소재는…….”
“생각해둔 게 있어.”
“어떤 건데요?!”
놀란 두 사람의 물음에 나는 의안의 설계 도면과 계산식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블랙 슬라임의 코어.”
내 말에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더니 이내 눈을 부릅떴다.
“설마!”
“그러네! 그 방법이 있었네! 아…… 아니지! 그게 어떻게 해결책이에요!”
“잠깐 블랙 슬라임의 코어?!”
그제야 뭔가 이해한 듯 소리치는 두 사람이었다.
“그래 블랙 슬라임 코어.”
“그런데 블랙 슬라임이라면 정말 희소한 개체잖아요. 돈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닐 텐데. 게다가 독성 때문에 인간의 몸과는 상극 아닌가요?”
“맞아요. 오라버니.”
“많이 서식하는 곳을 알고 있어. 그리고 독성 가공에 천부적인 놈들을 좀 알고 있거든.”
블랙 슬라임은 사기가 많은 곳에서 서식하는 젤리형 몬스터다.
그래서 티오니스에서는 공동묘지나 전쟁이 있었던 장소에서 간혹 발견되곤 했지만, 그 수가 매우 적다.
돈이 있어도 구하기 힘든 것.
현재 하인스 영지에서 팔고 있는 달의 꽃 잎사귀와 같은 물건이기도 했다.
달의 꽃 잎사귀도 환경이 맞지 않아 제대로 못 키우는 거지 없는 게 아니다.
나는 이 블랙 슬라임 코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곳을 알고 있다.
사기가 강한 곳에서 자란다는 말은 정확하게 말해서 틀린 표현이니 말이다.
놈들의 주식은 마기.
즉 마족의 힘이니까.
공방을 빠져나온 뒤 영지의 번화가로 빠져나온 나는 상단을 통해 팔고 있는 마법 도구들을 몇 가지 직접 산 뒤 걸음을 옮겼다.
보통 이런 일은 시녀나 시종을 시키는 게 일상이지만 영지민들은 내가 직접 와서 물건을 고르고 사가는 일에도 딱히 이상함을 느끼지 않는 모습이다.
“저하! 다음에도 들려주세요!”
“넌 일 좀 적당히 해라. 그러다가 쓰러지면 네 어머니는 누가 모시냐. 주인장이 괴롭히든? 내가 혼내줄까?”
“베에~ 잘 알고 있거든요? 그리고 맥버드 아저씨는 엄청 친절하시니까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맥버드가 얼마 전에 제 아들놈을 너랑 어떻게 엮어보려고 하던데.”
“으와아아아악! 저하! 그건!”
“살펴 가세요. 저하!”
발랄하게 웃는 소녀와 뒤늦기 비명을 지르며 튀어나오는 중년 남성을 뒤로한 채 걸음을 다시 옮겼다.
적당한 공간이 있는 곳에서 공간을 뛰어넘을 생각이었으니까.
손을 흔들며 배웅하는 작은 소녀를 뒤로한 채 걸어 나가던 도중 누군가가 골목길 너머에서 급히 뛰어나오다 나와 부딪혔다.
“아, 아으으…….”
“넌?”
“죄…… 죄송합니다. 저하!”
당황한 소녀는 허겁지겁 몸을 일으키며 내게 수차례 고개를 숙여댔다.
“넌, 타디아…… 였나?”
“앗! 네. 저하! 타, 타디아입니다! 저를 어떻게…….”
그는 내가 자신을 알아본 게 놀라운 듯 보였다.
내가 한번 본 이를 잊지 않는다는 걸 녀석은 모른다.
“아카데미생이잖아. 학장이 돼서 아카데미생 얼굴도 기억 못 할까.”
보통 그게 불가능하다.
학생의 수는 한둘이 아니니까.
하지만 타디아는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 게 그리 신기하고 감격스러운지 나를 부담스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주 잠깐이지만, 녀석의 눈에 고민 같은 것이 스쳐 지나갔다.
“무슨 일인데 그 몰골로 급하게 뛰는 거야. 다치면 어쩌려고.”
“그…… 그게 워낙에 급한 일이라.”
“그래?”
“예 죄송합니다. 저하! 급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얼른 들어가 봐라.”
말하지 않겠다는데 어쩌겠는가.
미묘하게 신경 쓰이는 표정이다.
다만 녀석의 얼굴은 상당히 다급해 보였던 탓에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뭐 상관없겠지.”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나는 그녀를 지나쳤다.
* * *
타르타로스 지하 산맥을 지나 도착할 수 있는 마계에 도착한 나는 마왕성 곳곳에 보이는 새하얀 무리들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저것들.”
2미터에서 3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구, 터질 것 같은 근육질을 자랑하며 돌아다니는 것들은 다름 아닌 토끼였다.
“뀨!! 뀨!!”
토끼.
끔찍한 토끼들이 장악하고 있다.
2발로 서서 쉬지 않고 벌크업을 해대는 이 미치광이 토끼들의 모습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놈이기도 했다.
“니들은 아주 자리를 잡았구나.”
[어머나 오빠. 이곳엔 무슨 일로?]
“오빠 소리 한 번만 더하면 네 가죽을 벗겨서 박제하는 수가 있다.”
[이런 과격해라.]
묵직한 목소리로 오빠 오빠 거리는 게 상당히 부담스럽기 그지없다.
한때 마족들을 위협했던 고대 마수 중 하나인 보팔레빗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그래서. 넌 여기서 뭘 하는 거야.”
[말했잖아? 당신을 따르겠다고. 당신은 마왕이라던데. 이 마족이라는 생명체들의 왕. 그래서 지켜주고 있었어. 겸사겸사 단련도 할 겸…….]
보팔레빗의 본체는 사실상 누가 진짜인지 알 수 없다.
다만 무수하게 분열하는 저 끔찍한 토끼 하나하나가 전부 보팔레빗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여긴 가능하면 오지 말아야겠다.
눈 건강에 매우 좋지 않아.
“기가 막히네, 진짜…….”
[저기 마족이 오는데?]
내가 일부러 퍼뜨린 마나를 느꼈는지 상당히 긴장한 얼굴로 예쁘장한 마족 소녀가 성에서 뛰어내렸다.
“마왕!”
“별일 없었나?”
“당신만 오지 않는다면야.”
“거 까칠하기는.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성에 블랙 슬라임 코어를 가공해놓은 게 있나 해서.”
“블랙 슬라임의 코어? 마침 블랙 슬라임들이 태동하는 시기라 어느 정도 보관은 해놨는데.”
“전부 내놔.”
당당한 요구에 그녀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뭐?”
“다 내놓으라고.”
“완전 날강도 아냐?!”
“그래서 못 주겠다고? 내가 마족을 구해주려고 고대 마수만 몇 마리를 때려잡았는데?”
권능을 끌어올리며 내가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자 그녀가 움찔거렸다.
“준다 줘! 에이씨! 야! 니들 창고로 가서 블랙 슬라임 코어를 가져와!”
그녀가 마족 근위병을 향해 외치자 그들은 서로 시선을 마주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주머니에 블랙 슬라임 코어를 가득 담아 가져왔다.
“대체 이건 어디다 쓰려고…….”
“좋은 일에 쓸 거다. 앞으로도 종종 가지러 올 테니까 준비해놨으면 하는데.”
“진짜, 폭군도 이런 폭군이 없어!”
악악거리는 알리타의 이마를 손가락을 툭 밀어버리자 그녀가 씩씩거리며 소리친다.
“이 날강도 같은 자식아!!”
“물론 공짜로 뜯어가는 건 아니야. 지금은 가져온 게 없지만, 다음에 올 땐 식량과 의약제 정도는 다량 챙겨와 줄게.”
“시, 식량? 그리고 의약품?”
“그래. 안 그래도 마계 식량 부족 현상 상당하지?”
“어떻게 알았어?”
마왕인 입장에서 이들을 방치한 적은 없다.
어느 정도 신경을 쓰고는 있으니 말이다.
내가 미련 없이 돌아가려 하자 그녀가 급히 나를 붙잡는다.
“야!! 마왕!!”
“또 왜.”
귀찮다는 티를 팍팍 내며 내가 다시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가 조심스레 말했다.
“저 미치광이 근육 토끼들 좀…….어떻게 해주면 안 돼?”
그 한마디에 고개를 돌리니 한켠에서 괴성 아닌 괴성을 지르며 벌크업을 하고 있는 토끼들이 보였다.
성 곳곳의 구조물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벌크업을 하는 모습을 보면 굉장히 부담스럽기 짝이 없다.
성 자체는 아름다운데…… 새하얀 재앙이 묻은 느낌이 든다.
물론,
내 알 바는 아니다.
“왜, 보기 좋잖아.”
“내 눈 똑바로 보고 말해 이 자식아!!”
“됐어, 당분간 니들을 지켜줄 거다.”
“이익…….”
“그럼 간다.”
“다, 다음에 올 때 식량 보내준다는 약속 꼭 지켜!!”
“오냐.”
씩씩거리는 그녀는 끝내 나를 쫓지 않았다.
* * *
라티아나 왕녀는 손을 더듬거리며 자신의 앞에 놓여진 잔을 들었다.
“드셔보세요. 맛이 있답니다.”
부드럽게 웃는 엘프는 다름 아닌 유리아 헬리샤나였다.
“와…… 향이 정말 좋아요…… 대체 이건 뭔가요?”
“이번에 새로 만든 홍차랍니다. 참고로 하인스 영지에선 인기가 정말 많지요.”
유리아 헬리샤나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윽한 향과 함께 깊은 맛이 우러나오는 것이 신기한지 라티아나는 조심스레 잔을 잡고 차를 홀짝였다.
우아한 티를 내려 하지만 아직 어려서 그런지 엉성한 부분이 제법 보인다.
“이건 대체 뭘로 만든 건가요?”
이윽고 용기를 낸 그녀의 질문에 유리아는 웃는 얼굴 그대로 천천히 대답했다.
“숲에서 자라는 소량의 곡물과 제 특제 비법이 들어갔지요.”
“아아…… 정말 대단해요! 이런 홍차는 살면서 한 번도 마셔보지 못했어요!”
“그렇지. 못 마셔봤겠지. 정령수의 타액을 넣어서 만든 홍차인데.”
그 한마디에 라티아나의 표정이 우뚝 굳어버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머, 은공, 언제 오셨어요?”
“좀 전에. 이 녀석 좀 데려가려고. 그리고 하인스 영지에서 인기가 많다고?”
“그럼요.”
“재료는 알렸냐? 하인스 영지민은 알 권리를 보장한다.”
데이비의 물음에 유리아가 말없이 웃어 보였다.
“알 권리야 있지만, 영업비밀인 메인 재료까지 알려줄 수는 없답니다.”
“넌 언제 한번 내가 감사 넣어서 탈탈 털어버릴 거다.”
“쿡쿡 기대할게요.”
이러나저러나 즐거운 표정을 지어대는 그녀와는 말싸움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뮤우는 보셨나요?”
“안 그래도 밖에서 만났다.”
“자주 찾아주세요. 은공을 보고 싶다고 매번 노래를 부르던 아이이니.”
“그럴게.”
하프 엘프 뮤우를 키우고 있는 건 유리아지만 뮤우가 가장 따르는 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가 아닌 나였다.
질투가 날 법도 하지만 유리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다.
대신 그녀는 차를 마시던 라티아나에게 말했다.
“왕녀님.”
“네?”
“다음에 깨어났을 때 선물이 마음에 들길 바랍니다.”
“그게 무슨…….”
텅!! 풀썩!!
손에 쥔 잔을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기절해버리는 라티아나를 본 유리아가 말했다.
“정령의 축복도 같이 심어두었어요. 수술 후유증을 줄일 수 있을 거예요.”
“그래.”
그녀는 그저 미소지어준다.
* * *
끝없는 어둠 속은 그녀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오래전 끔찍하게 눈을 빼앗긴 이후로 그녀에게 빛은 다시는 볼 수 없고, 시야에 담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고 말았다.
괴로움에 몸서리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왜 자신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이게 다 오라버니 때문이다.
어린 나이의 소녀는 그렇게 한때 자신의 오라버니를 원망하기도 했다.
빛에 익숙했던 몸이 빛과 완전히 동떨어진 이후 그녀는 극심한 우울증과 틈만 나면 찾아오는 끔찍한 통증에 몸서리쳐야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한동안 막시모스가 찾아오면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악다구니 섞인 저항에도 막시모스는 그저 미안하다. 미안하다고 말할 뿐이었다.
가장 좋아했던 사람이었다.
그 숨 막히는 왕실의 견제 속에서도 유일하게 그녀를 웃게 해주고 즐겁게 해준 오라버니였다.
결국, 그녀는 빛을 빼앗기고도 그를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신께 빌고 빌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 아니 아주 잠시만이라도 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아주 잠깐만이라도 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
그게 불가능한 기적임은 알지만, 그녀는 밤마다 그렇게 기도를 올렸다.
까마득한 심해 속에 처박힌 것 같은 두려움 속으로 그렇게 빠져들어 갔을까.
그녀는 물속에서 무언가가 격하게 움직이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심해로 빠져들어 가는 그녀의 팔을 누군가가 강하게 붙잡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핫!!”
잠들어있던 그녀는 그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듯 빠져들어 가던 바닷속에서 눈을 떴다.
그리고.
“어……?”
그녀를 내려다보는 작은 청은발의 소녀를 볼 수 있었다.
나른한 듯, 혹은 맹한듯한 무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는 소녀의 등허리엔 새하얀 날개가 돋아있었고 머리 위로는 헤일로 같은 원 고리가 존재했다.
천사님, 혹은 신의 사자.
죽은 이들을 인도한다는 신의 전령.
“나는…….”
본능적으로 눈앞의 존재가 신의 사도이며 자신은 죽었구나 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였다.
“륀느, 대상의 정신상태가 이상함을 감지.”
하지만 그런 그녀를 상념에서 강제로 끌어내 버리는 륀느의 언어 폭행은 무자비했다.
“이를 바보라고 판단해.”
무표정으로 입꼬리만 피식 끌어올리는데. 미묘하게 사람의 기분을 극도로 나락에 처박는 재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