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1화
“이젠 지구 문명에도 어느 정도 익숙해졌네.”
처음 지구로 넘어왔을 때 보았던 충격은 상당히 신선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의 복장은 티오니스와 다르게 굉장히 예쁘면서도 간편하기 그지없었고, 어떤 의미로는 굉장히 창피한 느낌까지 전해주었다.
그 외에 지구의 문물은 마법 없이 이런 세상이 존재하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참 갈대같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어느새 지구의 문명에 익숙해진 그녀는 종아리나 발목을 보이는 옷은 입지 못해도 편한 바지 같은 것을 어렵지 않게 입을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 반갑습니다! 시우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일리나라고 해요.”
무슨 선을 보는 것마냥 쭈뼛거리며 인사해오는 눈앞의 사내를 보며 일리나가 담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사라졌다.
일리나의 경우 데이비라는 존재를 제외하고는 굳이 나서서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스타일이 아니었고 시우의 경우 다른 이유로 굳어있었기 때문이었다.
“커피라도 한잔할까요?”
“아. 좋죠! 제가 사겠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얻어먹는 건 한 명이면 족해서.”
“네?”
“혼잣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아…… 네.”
미묘하게 침울한 표정으로 뒤따라오는 시우를 보며 일리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그때 이후로 좀 정신이 없었거든요.”
“저를요?”
“네. 일리나 씨를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그였다.
“아시다시피 아마추어경기에서 저를 무참히 짓밟으셨으니까요.”
그 말에 일리나가 쓰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하려던 건 아닌데. 죄송합니다.”
“아, 아뇨! 사과하실 일은 아니에요! 제가 모자랐고 일리나 씨가 생각 이상으로 대단한 거죠. 실제로 그때 이후로 인터넷에서 얼마나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리오리 프로게이머 방송에선 그걸 따라 해보겠다고 했다가 죽을 쓴 프로게이머만 상당하죠.”
그가 하하 웃어 보였다.
“그때 이후로 한 번도 접속을 안 하시던데…….”
“아. 네, 목표도 이뤘고, 굳이 더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요.”
“목표요?”
“설욕전.”
우아하게 커피잔을 살짝 음미하던 일리나가 움찔거렸다.
그리고는 보이지 않게 혀를 살짝 빼고 울상을 지었다.
“윽 써…….”
그 모습에 시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쿡쿡 웃어댔다.
“왜…… 왜 웃으시죠?”
“아뇨. 일리나 씨가 너무 귀여우셔서요.”
“…….”
그의 말에 일리나가 무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감사합니다.”
깔끔하게 선을 긋는 그 모습에 시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아쉽네요. 결혼한 분만 아니셨다면 제가 대쉬를 했을 텐데.”
“죄송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라면 그만 일어났으면 해요.”
“아 아닙니다. 못들은 걸로 해주세요. 뭐, 마음이 없다는 건 거짓말이지만 저도 결혼한 분을 건드리는 막무가내 짓은 하지 않아요.”
당황하며 저지하는 그였다.
“실은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거든요.”
그가 쓰게 웃어 보였다.
“세계 정상이니 탑의 황제이니 전설이니 저를 부르는 별칭은 참 많아요.”
“네. 이미 들어 알고 있어요. 정말 대단하신 분이라고.”
자신을 자랑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속 보인다고 뭐라도 할 수 있을 테지만 눈앞의 사내는 좀 달랐다.
“그런데 말이죠. 사람들은 그 이름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가 해야 하는 의무에 관해선 잘 아는 사람이 없어요.”
그 말에 일리나는 잠시 침묵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말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해가 너무 잘 되었다.
남들이 부르는 별칭이 많아질수록 그것들은 짐이 되어 모조리 어깨를 내리누른다.
“지칠 정도로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죠. 치고 올라오는 사람들을 모두 짓밟고 정상에서 계속 버텨야 하니까. 계속해서 실망하지 않는 플레이를 보여줘야 하니까.”
복싱 챔피언이 되는 것보다 방어전을 치르는 게 더 힘들다는 말.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일리나는 데이비가 참 어마어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깨에 지고 있는 명성만 보통수준이 아니건만, 그 어떤 것에도 틈을 내주지 않았으니까.
심지어 일리나 그녀에게조차 말이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그 자리를 고집하는 거죠?
“일리나 씨는 혹시 자신을 보기 위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적이 있던가요?”
“…….”
“그 사람들을 보고 있으면 말이죠.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가 없어요. 단순히 제 입신양명의 문제를 떠나서…… 하나의 기둥이 되어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더 빠르게 지쳐갔죠.”
흥미로운 생각이 든다. 데이비도 그럴까.
“일리나 씨는 그런 제 인생의 경로에 거대한 바위를 던진 꼴이었죠. 그때 정말 오랜만에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재밌다. 라는 생각을.
“…….”
검의 공주.
일리나에게 그의 사정은 제법 비슷했다.
그녀의 그런 목표는 데이비와 엮이면서 완전히 박살이 나버렸지만 그게 다른 이도 그러리란 법은 없다.
“그래서 일리나 씨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어요.”
“유나 언니를 통해서요?”
“네. 조금 우연이긴 했지만, 일리나 씨의 사진을 보자마자 이 기회를 놓칠 수가 없었거든요. 제가 성장할 가능성과 그때 느낀 것들을 다시 느끼게 해줄 만한 사람. 일리나 씨 밖에 없어요. 일리나 씨와 저는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비슷하니까요.”
참 단순하고도 어이없는 이유긴 했다.
프로게이머가 아마추어를 만나기 위해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나온 것도 웃기지만 말이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저와 게임 딱 세 판만 해주세요. 그 대가는 꼭 지불하겠습니다.”
“고작 세 판이요?”
“네. 첫 번째는 제가 느낀 벽을 뚫을 힌트를 찾기 위해서.”
첫 번째 판의 이유였다.
“두번째는 유저 대 유저로써. 제가 잠시 느꼈던 그 재미를 다시 느껴보고 싶기 때문이고요.”
그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세 번째는요?”
“이래 봬도 탑라이너 패황 소리 듣던 프로게이머에요. 지고 그냥 못 넘어가죠. 설욕전입니다.”
세계 최고의 탑 라인 프로게이머가 설욕전이라니 누가 들으면 웃을 말이지만 그의 얼굴엔 시원한 미소가 서려 있었다.
“덤으로 아리따우신 분과 게임을 같이 할 기회가 많진 않잖아요? 골대에 골키퍼가 있으면 옆에 있는 예비골대를 노려볼 수도 있는 거고.”
“쿡, 재밌는 분이네요.”
“하하, 제가 지금 긴장을 해서 이상한 소리를 막 늘어놨네요.”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일리나는 조용히 그를 동질감 어린 시선으로 보다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때였다.
콰아아앙!!!
전조도 없이 엄청난 충격파가 주변에 터져나갔다.
마나를 다루는 이에겐 아무 효과도 줄 수 없는 미약한 충격파.
하지만 일반적인 인간이나 가구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유리가 박살 나고 사람들이 쓰러져 나갔다.
눈앞에서 기뻐하며 말하던 시우가 마치 총을 맞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쓰러지는 것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던 그녀가 황급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쓰러진 그를 붙잡고 소리쳤다.
“시우 씨? 시우 씨! 정신 차려요!”
의식을 확인해보지만 돌아오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치명상은 아니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일리나가 품은 마나가 그 짧은 순간 퍼져나가 그를 보호한 것이다.
다만 워낙에 소량이었던 터라.
깨진 유리창의 파편이 그의 눈을 훑고 지나 가버리는 것까진 막지 못했다.
“어떤 자식이…….”
지구는 상당히 평화로운 차원이다.
아니, 정확히는 이 한국이 유별날 정도로 치안이 좋다.
그렇기에 한가로이 커피를 마시다가 습격을 당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뿌득…….
일리나는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일대를 난장판으로 만들어버린 원흉을 바라보았다.
“파장이 없었어.”
아무리 방심을 풀고 있었다 해도 그녀가 마나 파장하나 느끼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짜드득…… 짜득!!
이윽고 균열이 서서히 확장되며 그 안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온다.
노란빛의 화염으로 일렁이는 인간의 형체는 형태만 인간일 뿐 도저히 생명체라고 보기 힘들었다.
눈코입이 있어야 할 자리엔 마치 달걀처럼 맨들맨들하고 단단한 표면만 존재했고 마치 스크린으로 장면을 연출하듯 7개의 별이 마치 국자처럼 펼쳐져 있었다.
지잉…….
마치 좀비처럼 삐거덕거리며 튀어나온 형체는 곧 일리나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기이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펄럭!!
동시에 빛으로 이루어진 날개가 서서히 펼쳐지며 막대한 힘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네가 원흉이야?”
놈이 내뿜는 힘은 너무도 순수한 생명력이었다.
그래. 데이비가 정령계에서 만든 달, 타나토스에서 흘러나오는 생명력을 말이다.
하지만 반대로 조금 이질적인 면도 보였다.
저벅…… 저벅…….
명백히 자신을 노리는 괴물을 보며 일리나는 침묵했다.
쉬리리리릭!!!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려던 그 순간 놈의 날개가 마치 사슬처럼 날아들어 일리나의 목을 조르고 팔다리를 구속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막는다.
“죽이는 게 아니야?”
일리나의 질문에도 괴형체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데리고 균열 너머로 들어가려 들었다.
일리나 그녀에 대한 경계는 한점 전에 누그러졌다는 듯한 오만한 태도였다.
이에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뭔진 몰라도 너희들. 내가 필요하구나. 그렇지?”
움찔.
그 말과 함께 괴물의 몸이 크게 움찔한다.
일리나의 말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막대한 마나 때문이었다.
“전에 데이비에게 들은 적 있어. 일루미나티도 흉신도 다 죽어 나자빠진 이곳에서 아직도 헛된 꿈을 꾸는 놈들이 있다고.”
서걱!!
동시에 형체가 없던 사슬 같은 날개가 일순간 잘려나간다.
“그거 니들 맞지?”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손을 옆으로 뻗자 그녀의 손아귀에서 빛이 터져 나오면서 백은의 거검이 서서히 나타난다.
그녀의 키만 한 대검이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올린 그녀는 칼디라스의 검 끝을 괴형체에게 겨누었다.
촤르르르르르륵!!
순식간에 괴형체의 공격이 시작된다.
속도도 상당하고 그 힘도 마스터 급 존재들조차 움찔할 만큼 위험한 축에 속했다.
하지만 칼디라스를 든 일리나는 아주 천천히 한 발 내디딜 뿐이다.
“나에 대해 자세히 알지도 못해.”
[시공격검]
[천공 크레바스]
쩌엉!!
생전 처음 듣는 기이한 소리가 퍼져나가며 마치 크레바스가 열리듯 공간이 세로로 길게 갈라졌다.
그와 동시에 그 사이로 생겨난 어마어마한 힘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며 괴형체를 찢어발기고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공간의 틈 너머로 생겨난 균열의 인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놈이 버둥거리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찢겨 사라진다.
“나를 잘 알고 있었으면 적어도 이렇게 허술하게 나오진 않았을 거 아냐?”
그렇게 순식간에 괴형체를 제압해버린 그녀는 검을 거둬들인 채 다시금 쓰러진 시우에게 달려갔다.
에에에에엥!! 에에에에엥!!
이윽고 저 멀리서 기다렸다는 듯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지자 그녀는 고민하다 조용히 그를 짐짝처럼 둘러메고 일어섰다.
다른 이들의 부상은 크지 않다. 다들 간단한 타박상과 쇼크 정도.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리리라.
하지만 폭발의 근원지 바로 옆에 있었던 시우는 달랐다.
목숨에 큰 지장은 없지만, 치료를 빨리 받지 않으면 상당한 후유증이 남을 것처럼 보였다.
이에 그녀는 급히 그를 데리고 빠르게 커피집을 빠져나갔다.
지금 상황에 이런 모습을 보여서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CCTV가 첫 폭발과 함께 뒤틀려버린 건 불행 중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가 어떤 인물이건 눈앞에서 그가 죽게 둘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사고현장을 남들이 보지 못하게 빠져나온 그녀는 마침 그녀를 마중 나온 데이비를 볼 수 있었다.
“데이비! 심각한 부상이야!”
“이리 넘겨줘.”
작은 체격으로 둘러메고 있는 모양새가 퍽 우스웠는지 데이비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일리나의 손에서 시우를 받아 둘러멘 뒤 그대로 공간을 찢었다.
“어떤 놈인지 봤어?”
“자연현상치고는 너무 이질적이야. 그 외에 이상 현상은 전혀 감지하지 못했어.”
아무리 탐지가 민감해도 수많은 사람들 하나하나를 다 파악하는 건 그녀에게 불가능하다.
가능하다면 아주 미약한 살기를 감지한다든지 하는 정도니까 말이다.
“그렇단 말이지.”
“다만, 내가 해치운 녀석 말이야. 이전에 네가 봤다던 그 괴물과 비슷하게 생겼던 것 같아. 그 괴물보다는 조금 약한 거 같기도 한데.”
알에서 깨어난. 괴물.
달의 힘을 이용한다는 신이라 불리던 존재.
신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지만, 인간들에겐 재앙에 가까운 힘을 지닌 괴물이다.
“케인과 프레이아를 좀 달달 볶아야겠는데…….”
별장으로 돌아오자 수많은 이들이 당황한듯한 시선을 보내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투성이가 된 시우를 눕힌 데이비는 가볍게 손뼉을 쳐 신성력을 활성화 시켰다.
[8위계 성마법]
[하이리커버리.]
우우우우웅!!!
동시에 새하얀 빛의 깃털들이 흩날리며 그의 자상들이 하나둘 치료되기 시작했다.
“세상에 프로게이머 시우잖아? 대체 무슨 일이…….”
현아가 창밖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그곳에는 트럭이 있었는데 그 트럭의 옆에는 광고용으로 찍혀진 시우가 보인다.
익살스레 웃으며 화장품을 들고 있는 사진 속의 인물이 눈앞에 있으니 당황할 법도 하지만 사실 현아의 놀람은 처음 이후 금방 사그러들어버렸다.
프로게이머가 대단하다곤 하지만 국제 굴지의 기업인 신성의 공주님이라 불리던 그녀만 할까.
“몬스터 현상이 일어난 모양이더라. 바로 옆에서 터져서 그대로 휩쓸린 거 같고.”
“그럴 수가…… 분명 감지기의 경보도 울리지 않았잖니.”
떠날 채비를 했다가 이 사태를 보고 잠시 체류했던 삼촌의 물음에 데이비가 조용히 답했다.
“글쎄요. 그걸 지금부터 알아봐야 하는데. 아마 파장이 없었다가 맞겠죠.”
“그게 무슨…….”
“파장이 조금이라도 있었으면 이 사람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테니.”
일리나가 파장을 확인하고도 그걸 그냥 방치했을리 없으니 결과만 놓고 보면 해답은 간단하다.
“맞아, 마나 파장이 전혀 없었어. 그야말로 한순간에 터진 것처럼 말이야.”
시공격검을 익힌 일리나와 데이비에게 있어서 시간의 균열, 및 흐름의 부조화는 바로 눈치챌 수 있는 분야다.
즉 시간적인 문제도 아니고 정말 전조 없이 터졌다는 건데.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가 라는 의문이 든다.
“끄윽…….”
그때 쓰러져 있던 시우가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하기 시작했다.
“이봐요! 정신이 들어요?”
급히 일리나가 그의 팔을 잡으며 소리치자 그가 움찔 몸을 떨었다.
“이…… 일리나 씨?”
“그래요.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어요. 어디…….”
“잠깐만 비켜봐.”
그 말에 일리나가 의아한 듯 데이비를 보았다.
이후 데이비는 조용히 그를 직시하다 물었다.
“이봐. 이게 몇 개로 보여?”
“네? 아, 저기. 눈이 떠지질 않는데요…….”
그 말에 일리나가 놀란 듯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조금 독특한 방식인데 이건.”
“무슨 소리야?”
“회복마법이 살리지 못하는 건 두 개야. 완전히 죽어버린 것과 살아있는 것.”
라티아나 왕녀의 눈은 완전히 괴사했다.
재생의 강도에 따라 회복마법은 떨어져 나간 팔다리도 아무렇지 않게 붙일 수 있는 게 회복마법이다.
부상 정도에 따라 팔이 잘려나가 유실되어도 재생시킬 수 있는 것이 회복마법이다.
“회복마법의 강도를 떠나서 단순히 뇌가 속고 있는 거야. 아마 충격파 속에 있던 생명력이 모종의 영향을 끼쳤겠지. 재수도 없지. 보통 이런 경우는 거의 없는데 아무래도 일리나 네가 죽인 그 노란 대머리가 출현하면서 영향을 미쳤나 보다.”
재수가 없어도 이렇게 없을까.
“걱정 마. 못해도 이 주 정도면 다시 본래대로 돌아올 테니.”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내가, 내가 지금 장님이 되었다 이 말입니까?!”
“당분간이라니까.”
“장님이라니, 이익, 내가, 내가 장님이라니!! 이건 말도 안 된다고! 으흐흐흑!!”
비참하게 쓰러져 우는 시우를 보며 괜히 책임감이 들었는지 일리나가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굳이 따지자면 그녀의 잘못은 아니지만, 같이 있다가 사고가 난 것에 무게를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어떻게 안 돼?”
“그냥 시간 지나면 낫는다니까? 치료는 다 했어. 시간을 조금 당겨줄 수도 있긴 한데. 이걸 유도한 놈이 정확히 어떤 놈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그러기엔 위험하지.”
그 말에 시우의 절규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말없이 그를 보던 데이비가 스산하게 웃는다.
“이봐.”
“안돼…… 안돼! 곧 세계 대회가 있어요! 지금 여기서 제가 이렇게 돼버리면…….”
그러고 보니 알하자드가 후원해서 주최했던 아마추어 대회는 프로선수들이 세계권 챔피언십을 놔두고 손을 풀기위해서 나왔다는 말이 있었다.
곧 세계 대회가 시작되는데 메인 게이머인 그가 눈을 잃었다?
팀 바시리안에겐 재앙과도 같다.
세계 최고라는 이름값의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꿋꿋이 버티던 그 모습을 떠올린 것일까.
일리나가 그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
데이비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당장 치료하는 방법이 있긴 한데. 어때. 해볼래?”
그 말에 두 눈을 감싸 쥐고 끙끙거리던 시우가 벌떡 일어났다.
“할게요!!”
“환영해.”
씨익 웃는 그를 보며 륀느가 에이리아의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데이비 님, 임상시험 개체를 찾지 못해 곤란해하던 상황. 아주 악랄함을 륀느가 높게 평가해.”
휘리릭!! 퍼억!!
순식간에 날아든 쿠션이 륀느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히자 다리를 쭉 펴고 앉아있던 륀느의 상체가 그대로 뒤로 넘어가 버렸다.
멍한 얼굴로 바닥에 대자로 쓰러진 채 녀석이 눈을 끔뻑거린다.
쉿.
데이비가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륀느가 눈을 가늘게 뜬다.
“한데 데이비. 그곳을 따로 조사하지 않아도 되겠어? 본녀가 보기엔 이건 단순 자연현상이 아닌데.”
일리나를 죽이려는 게 아니라 노렸다는 점. 그리고 과거 알에서 깨어난 비슷한 몬스터가 인간과 관련이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범인은 하나뿐이다.
“혹, 일루미나티의 잔당이…….”
페르세르크의 그런 물음을 데이비는 깔끔하게 일축했다.
“그놈들은 아니야. 그냥. 욕심이 과한 놈들이지.”
그 말에는 이상할 정도로 확신이 서려 있었다.
“확신하는 이유라도 있어?”
외려 궁금해진 일리나의 질문에 데이비가 그녀를 가리켰다.
“너 때문에.”
“나?”
“그래. 너에 대해 거의 모르잖아.”
페르세르크와 일리나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프레이아가 말한 그놈들이 이놈들인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