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82화
“…….”
할 말을 잃어버린 사내들이 침묵한다.
“마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사라지다니.”
“아무리 B급 마신이라지만…….”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이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중년의 사내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는 젊은 사내를 향해 역정을 부렸다.
“이를 어찌 할겁니까! 충분한 준비도 없이 저들에게 존재를 들킨 것과 다를 바 없어요!”
“괜찮습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습니다.”
“하면 더더욱 신중하게…….”
“신중하게 기다리다가 일망타진 당할 겁니까? 잊지 마십시오. 지금 저희들은 어떤 이들의 시선에는 다시는 용서받지 못 할 짓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 성공하기만 하면, 우리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막대한 힘과 안전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왜 다른 세상의 인간이 지구에서 자꾸 이 난리를 부리는지 원…….”
“저희가 하는 일이. 지대한 위협이 된다는 뜻이겠지요.”
그 말에 중년 사내는 이를 악물었다.
“마나 아티펙트를 쓰지는 마세요. 그는 무슨 방법을 쓰는지 마나를 감지해낼 수 있습니다. 그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유일하게 같은 인간의 틈 사이에 숨는 것이지요.”
“정말 괜찮을는지…….”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난장판이 되어버린 커피집을 바라보았다.
젊은 사내는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온 지령을 확인했다.
[B급 마신의 데이터는 충분히 확보했다. 특이체질의 데이비 올 라운의 부인 중 하나이며 유일하게 무력을 소유하지 않은 자. 이제 그만 돌아오도록.]
지령을 확인한 젊은 사내가 고개를 돌린다.
“한데. 티오니스 성자가 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거요?”
“모르지요. 그자는 치밀한 자입니다. 뭔가 저희들을 한 번에 몰아붙일 계책을 꾸미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
“그러니 지금부터는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이도록 하지요.”
* * *
“푸앳취! 누가 내 이야기라도 하나?”
재채기한 나를 보며 륀느가 대자로 누운 채 물어왔다.
“데이비 님. 감기. 이것을 륀느가 고소하다 평가.”
“널 참기름에 버무려서 고소하게 만드는 수가 있어.”
감기에 걸릴 일이 있으면 덜 이질적이겠지만 현재 내 육신은 병환이 올 수가 없는 상황이다.
내 말에 륀느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벌떡 일어나버렸다.
“경기를 당신 하나 때문에 미룰 순 없잖아.”
“내 눈…… 내 눈…….”
“그러니까 내가 당신 눈을 되찾아줄게. 다만 조건이 있어.”
눈을 되찾아준다는 말에 그가 허둥지둥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정말입니까?!”
“그래. 당신에게 당분간 사용할 의안을 달아줄게. 물론, 눈 자체는 멀쩡하니까 이식 수술을 하진 않을 거야.”
내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본다.
“대체…… 당신이 누구시길래…….”
“내 목소리 기억 안 나?”
내 물음에 그가 잠시 멍하니 있다가 눈을 크게 떴다.
“아! 당신은 설마!”
“데이비 올 라운, 티오니스 성자다.”
티오니스 성자!
그 한마디에 그는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티오니스 성자라니…… 설마…….”
“말했잖아. 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 부작용은 사실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지만, 이 시술 자체가 처음이야. 그러니 본인 동의가 필요하다.”
내 말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첫 수술인 만큼 실패라는 가능성을 잡아야 했다.
2주만 기다리면 눈은 회복되지만 그렇게 하면 그는 대회를 포기해야 한다.
“생각할 시간을 좀…… 주세요.”
“그래 얼마든지.”
빙그레 웃자 그는 심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 *
“여긴 누구…… 나는 어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간다아아…….”
거의 제정신을 놓아버린 마가와 포도맛의 상태는 예정된 결과였다.
성공확률 800만 분의 1.
노가다로 했을 때 횟수만 채워도 800만 번을 제작해야 한다.
그들의 레벨이 더 오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지금에 이르러서 레벨을 올리는 것도 보통 난이도가 아니니까.
“저, 데이비 오라버니.”
“응?”
앞치마를 입은 채 양손에 쿠키가 든 쟁반을 가져와 내 입에 떠밀어주는 에이리아였다.
“맛있네.”
“헤헤. 그런데 왜 거짓말하셨어요?”
“응?”
“치료방법…… 있으신 것 같아서.”
눈치 빠르기 그지없다.
그녀의 물음에 나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있지. 시간의 정령 알타이르를 이용해서 저놈의 시간만 2주 가까이 빠르게 흐르게 할 수도 있고, 뇌를 속이는 것도 최면이나 세뇌를 이용하면 해결돼.”
“한데 왜…….”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세상에…….”
“우와…… 악랄해.”
“좀 악랄하긴 하지.”
내 스스로 생각해도 그렇다.
“그래서 이식 수술을 하지 않는 거야. 지금 내가 해주려는 건 의안을 구상해서 만드는 안경이나 다름없어. 뇌가 속고 있는 시신경을 제외하고 다른 시신경을 통해서 뇌에 직접 정보를 전달하게 만드는 거.”
“그러다 실패하면?”
“뭐, 며칠간 두통에 휩싸이겠지. 그땐 따로 치료해줄 거야.”
단순 욕심도 욕심이지만 눈이라는 건 인간에게 너무도 소중한 부위라 할 수 있다.
안정화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시력을 찾을 수 있으니까.
“게다가 안구 자체가 상하지 않는 이상 시력이 떨어질 걱정도 없지.”
“그거…… 인간개조…… 즉 금기 아니야?”
“인간의 육체를 바꾸는 금기에도 범위가 있어. 지금 내가 하는 건 단순 인간의 안구를 바꾸는 게 아니라 안경을 쓰는 것과 같아.”
눈이 완전히 망가진 자는 인공의안을 써야 하지만 그렇지않은 이는 눈을 굳이 다치게 할 이유는 없다.
“자자. 힘내라.”
“으으으으…… 죽여줘…….”
죽는 소리를 내면서도 손은 멈추지 않는 한유나를 보며 나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기간 내에 완성하려면 좀 빡시게 굴려야겠네. 페르.”
“응?”
“피로회복제라도 먹일까?”
“제발 잠들게 해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그 각성제…… 그대 대체 저 두 아이를 얼마나 괴롭히려고.”
“글쎄다.”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후 나는 현재 지구의 현 상황을 감시하고 있는 넬타리드의 사자 케인과 프레이아를 만났다.
“금기를 어겼다고 했지? 정확히 뭘 어긴 거야.”
“생명진화. 인간 고유의 정보를 변경하려 했습니다.”
“멍청한 새끼들. 자멸을 아주 작정했구나.”
생체진화는 여러 분야가 있지만, 일전 서윤과 윤석이 균열 속에서 찾았던 정보를 토대로 하면 이놈들은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들이다.
“그래서 당신이 나서…….”
“내가 왜?”
“네?”
“지구의 일은 니들이 해결해. 난 티오니스 사람이야.”
내 말에 케인과 프레이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당신이 나서주지 않으면 겨우 평화를 찾아가는 이 차원에 큰 혼란이 올 겁니다.”
“그것도 너희들이 할 일이고.”
실제로 내가 이곳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 건 이곳이 타차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곳은 넬타리드의 영역.
다른 세상은 몰라도 지구에서만큼은 내가 영향력을 넓히면 곤란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저흰 쉬이 나설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이 문제를 뛰어넘기를 바랄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게 넬타리드의 결정이냐?”
“넬타리드 신께선 네가 만든 그 달의 힘이 지구에 악영향을 끼치지 못하게 막는 것이 전부야.”
“반으로 갈라져서 작살났으니까?”
“불경한!”
이를 부득 가는 프레이아의 이마를 쿡 밀어버리자 그녀가 으르렁거리며 내게 덤벼들려 한다.
하지만 순식간에 케인이 그녀의 몸을 붙잡고 늘어졌다.
“저희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이게 전부입니다.”
“지치지도 않고 음모를 꾸며대네.”
“전에 그런 말씀을 하셨지요.”
악인을 해치우면.
제 2의 악인이 나오고 그다음엔 제 3의 악인이 나온다고.
흉신과 일루미나티가 사라진 지구에 또다시 거대한 무언가를 노리는 놈들이 나타났다.
“이들의 목적은 저희도 확인된 바 없습니다만. 당신이 만든 달의 힘을 이용해 몬스터를 진화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무슨 힘이 있어서 놈들을 진화시키는 건데?”
“매개체요.”
매개체?
“이겁니다.”
케인이 꺼낸 것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었다.
새하얀 빛을 내는 돌멩이.
몬스터들을 진화시키고 있던 힘을 방출하던 돌멩이다.
“우연찮게 균열을 조사하던 중 찾아낸 겁니다. 거기서 인간의 흔적을 발견했지요.”
진화의 힘이라…….
“짚이는 게 있습니까?”
“아니. 짚이는 건 아닌데 비슷한 힘을 지닌 놈을 하나 알고는 있었거든.”
이놈은 울드에게 물어봐도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길이 없다 하였다.
애초에 그녀의 잠식에 가장 먼저 빠져들었지만 스스로 그 잠식을 풀어내 버린 유일한 환수왕이니까.
잠식의 조건은 상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세뇌시킨다.
다만 그 세뇌시킬 이성이 없을 정도의 빡대가리라면…….
잠식이 힘을 발휘할 수가 없다.
가능성 정도는 염두에 둬놔야겠지.
셰인은 베헤모스가 아직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 정도만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비록 강신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닌 터라 직접 찾아 헤맬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우우웅…….
그때 스마트폰이 짧게 울렸다.
[코오나입니다. 데이비 성자님. 지금쯤이면 당신이 이곳으로 왔을 거라 판단하여 두리안 톡을 보냅니다.]
예언의 힘을 지녔던 아비트의 사역인.
일본인 각성자인 코오나.
어눌한 한국어 타이핑으로 문자를 보내온 그녀였다.
[두 가지 예언을 했습니다. 검은 존재들이 당신의 주변을 노리고 있어요.]
일리나가 이미 한차례 습격을 받은 바 있다.
[아무래도 범인은…… 아무래도 생각 이상으로 당신보다 가까운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나와 가까운 이?
그럼 정말로 베헤모스가 맞다는 건가.
[마지막으로, 도와주세요.]
그녀의 말에 나는 스마트폰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에게 통화를 보냈다.
“나다. 이건 또 무슨 뜻이냐.”
-역시. 지구로 오셨군요.
“다 알고 있으니까 문자 보낸 거 아니야? 그런데 내 주변인이라고?”
-인간인지 인외의 존재인지는 확실하게 볼 수 없었어요. 하지만.
어눌한 한국어로 그녀가 열심히 설명했다.
-거대한 무언가라는 건 분명했습니다. 바닷속에서 섬뜩한 존재감을 숨기고 있어요.
“실화냐.”
베헤모스.
당첨이다.
그놈이…… 대형사고를 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