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3화
259.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더니
“와…… 이 섬 엄청 크고 좋은 곳이었는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져버린 섬을 아쉽다는 듯 바라보던 소야가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데이비는 떠났고, 베헤모스와 그녀는 당연히 이곳에 남았다.
소야에게 지구는 고향이나 다름없었고, 베헤모스도 그녀의 곁을 떠날 생각은 없는 듯 했으니 말이다.
“선물도 많이 쌓아 뒀었는데…….”
인간 친구로부터 선물 받았던 여러 물건들 중 대부분이 증발해버렸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흥. 별의별 걸로 다 고민이군.]
퍼엉!!
베헤모스의 거대한 꼬리가 한차례 요동치며 거대한 물보라를 만들어 냈고, 그것들을 모조리 소야에게 쏟아버렸다.
그 거친 행동에 흐느적거리듯 추욱 늘어진 그녀가 침울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베헤모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징징대지 마라 멍청한 것! 감히 내 앞에서 목소리를 키우는 거냐?]
“흐어어어엉…….”
울먹거리는 소야의 얼굴을 본 베헤모스가 크게 움찔거렸다.
[우…… 울지마라 했다!]
“흐어어어어엉!”
[망할! 따라와라! 멍청한 녀석!]
“어…… 어디 가시는데요오!”
[이곳에서 서쪽으로 가면 산호가 괜찮은 곳이 있다. 거기 가서 놀든지!]
베헤모스는 그리 말한 후 그녀가 흔들리지 않게 부드럽게 유영했고, 그의 등 위에 올라타 있던 소야가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는 배시시 웃어 보였다.
“수호자님! 정말 좋아요!”
[이…… 이놈!! 떨어져라! 머리 비비지 마라!!]
“에이 좋으시면서!”
[다…… 닥쳐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베헤모스는 절대 그녀가 떨어지지 않게 유영해 나갔다.
닥치는 대로 삼키고 부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셰인의 말도 듣지 않던 심해의 폭군이었으나, 지금의 그는 이전과 달랐다.
[떨어진다! 얌전히 있어라! 멍청한 것!]
“헤헤헤헤헤! 수호자님! 더 빨리 가요!”
[이것도 빠르다! 멍청한 네가 너무 약한 탓이 아니냐!]
* * *
“에반젤린, 이리와 보려무나.”
“빠…… 빠빠…….”
손가락을 쪽쪽 빨며 아장아장 걸어 크리아네스 국왕에게 다가간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올려다본다.
이에 크리아네스 국왕은 말없이 아이를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안았고 등을 토닥여 주며 말했다.
“옳지. 정말 착하구나.”
“…….”
그런 그와 에반젤린을 보면서도 나는 조용히 침묵했다.
곤히 잠든 다리안과 다르게 에반젤린이 인간을 흉내 내도 고대룡이라는 점은 변치 않는다.
그런 탓에 에반젤린은 확실히 다리안에 비해 체력이 좋다.
“옳지. 옳지. 할아버지다. 말해 보겠니?”
“빠…… 빠빠.”
옹알이를 하면서 시선을 마주치고 뭐라 뭐라 말하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에반젤린, 이리 오렴.”
이윽고 조용히 침묵한 채 기다리고 있던 내가 양팔을 내밀자, 크리아네스 국왕에게 안겨 있던 에반젤린이 눈을 반짝이며 나를 향해 양 팔을 뻗어 온다.
어서 와서 안으라는 듯한 자세로 칭얼거리듯 나를 향해 손을 뻗은 녀석을 품에 안자, 곧이어 내 품에 머리를 기댄 채 옹알옹알하며 손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제법 표정이 좋구나.”
“폐하.”
“그래. 어떠하더냐.”
그의 물음에 나는 거짓 없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인간의 수명은 어찌할 방법이 없습니다. 정사에서 물러나 이제는 요양하셔야 합니다.”
나는 한때 그에게 그가 저지른 모든 과오를 스스로 청산하고, 바리스에게 왕위를 물려주라고 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많이 누그러졌다.
정확히는 누그러졌다고 할지, 아니면 그의 상태를 매번 확인하면서 더는 안 되겠다 여긴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리 부정해도 그가 내 아버지였다는 사실은 변함없으니까.
“얼마나 남았느냐?”
“길어야 5년입니다.”
너무 지쳤다.
너무 오랜 시간 곪아왔기에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다.
씁쓸하게 중얼거린 그가 창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 아비는 그리 슬프지 않구나.”
“…….”
“속이 시원하느냐?”
그 물음에 나는 또 다시 침묵으로 일관했다.
“아니면, 기분이 언짢더냐.”
“어느 쪽도 아닙니다.”
담담함이라고 할까.
그러면서도 속에서 기분 나쁜 뭔가가 쿡쿡 쑤시는 기분이 들었다.
“이 아비가 죽으면 이 나라는 바리스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그렇겠지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왕위에…… 욕심은 없느냐.”
그의 질문에 나는 조막만한 손을 뻗어 내 뺨을 콕콕 건드리는 에반젤린을 내려다보았다.
“제 걱정은 하나뿐입니다. 바리스가 왕위에 오르면 녀석이 얼마나 고생할지 훤히 보이니까요.”
“그런 바리스를 위해서 네가 왕위에 오르는 것도 방법이다.”
“거절하겠습니다. 그렇게는 절대 안 되지요.”
내 말에 그는 조용히 와인을 들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바리스가 아닌 네가 라운왕국의 국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바리스는 알고 있습니까?”
뛰어난 형이 있다.
아무리 동생이 성군의 기질을 지니고 있어도, 형인 내가 왕위를 포기한다고 해도 귀족들의 입장에선 바리스보다는 내 쪽에서 왕위를 물려받는 걸 더 원할 것이다.
“이미 알고 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게지.”
바리스는 한때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상당히 오랜 시간 고뇌를 한 적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녀석은 나를 믿었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녀석에게 심적으로 부담을 계속 가하는 꼴이 된다.
아무리 괜찮다, 괜찮다 할지라도 자연스레 열등감이 생길 수밖에 없으니까.
“네 어미와 리네스 바리에타는 과거 절친한 친구였다. 서로를 챙기며 언제까지고 행복할 줄 알았다.”
그 이야기에 나는 멈칫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그 이야기는…….”
“하지만 많은 분야에서 이름을 떨친 리네스보다 레니가 더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다.”
회상을 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말에 나는 하던 말도 멈추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리네스도 가여운 여자였다. 결국 자신의 자리를 레니에게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그것을 보고도 그냥 두신 건 폐하이시죠.”
“지금 너와 바리스의 사이가 그들과 무엇이 다르더냐.”
그의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바리스는 너를 따르고 있다. 너 또한 바리스를 아껴 주고 있지.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언젠가 바리스에게 지워진 짐이 녀석을 짓눌러버릴 게다.”
데이비였다면 더 잘하지 않았을까.
데이비였다면 문제없었을 텐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아도 귀족들의 그런 분위기를 모를 리 없을 바리스다.
“아무리 너를 믿고 따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변해가는 게 인간의 본성이다. 언젠가 녀석이 지칠 수도 있다는 말이지.”
“폐하.”
“네게 부끄러운 아비인 내가 더 말해 뭐 하겠느냐.”
“귀족들의 그런 반응은 제가 나선다고 해결될 게 아니겠죠.”
“그렇겠지. 당장 억눌러도 그런 분위기는 언제까지고 이어질게다.”
“허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살아 온 시간으로 따지면 내가 정작 내 아버지인 크리아네스 국왕의 수십 배를 더 살았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이런 분야에 관해선 그를 따라갈 수 없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폐하께선 아직 제가 왕위를 이어받길 바라십니까. 그리되면 바리스는 섭섭할지언정 평생을 비교당하며 살지 않을 테니까요.”
“그것도 방법이겠지.”
“아니면 제가 광증을 보여 귀족들의 신뢰를 잃어버리길 바라십니까.”
“그 또한 방법이다.”
왕위, 왕족의 삶이란 참 더럽고도 치사하기 그지없다.
“국왕의 자리는 그런 것이다. 아니. 세상일이라는 게 그런 것이지. 아무리 본인이 잘하려 해도 주변에서 그것을 놔두지 않으니까.”
내가 폭압적인 분위기를 내비쳐 귀족들을 억눌러도 결국 임시방편일 뿐이다.
“아이와 부모의 관계도 비슷한 게다.”
“…….”
“넌 에반젤린과 다리안을 동일선상에 놓고 대하고 있느냐?”
당연하다 말하지만 그것이 입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둘 다 소중한 아이지만…….
나는 어쩌면 다리안을 친아들로, 에반젤린을 내가 품은 양녀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리안보다 에반젤린을 더 신경 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고.
다리안은 나와 에이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
그리고 에반젤린은 피가 섞이지 않았지만 내가 자식으로 받아들인 아이다.
둘 다 내게 소중하지만, 과연 나중에 에반젤린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도 알 수 없다.
“언젠가 이 아이가 자라서 핏줄이 이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상심할 수도 있을게다.”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땐 네가 이 아이를 얼마나 사랑해 주는지. 그깟 핏줄이 무슨 소용인지 보여 주려무나.”
자신처럼 후회하지 않도록.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느끼는 건 이미 늦은 후의 이야기다.
다른 이도 아닌 크리아네스 국왕의 말이었기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끝끝내 나는.
“폐하.”
그를 아바마마라 부르지 않았다.
* * *
황도 12궁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당분간은 조용할 것이다.
금우궁 타우르스는 그야말로 독특한 놈이었고, 거해궁은 그래도 움직이긴 했지만 내가 놈의 피조물을 작살내버린 이후 눈치를 살피는 입장이었다.
깨어난 별자리는 아직 둘.
이외에는 놈들이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다.
검신 거해궁 캔서를 상대할 땐 검이 가장 효율적이고, 무식한 힘 바보인 타우르스는 격투술이 가장 효율적이다.
웃긴 말이지만, 그들에게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공격 방식이 그게 전부라는 소리였다.
검을 쓰는 거해궁을 상대로 마법을 쓰면 큰 효과를 보지 못한다.
오로지 그의 주 분야인 검으로, 그리고 더 뛰어난 실력으로 이겨야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놈들은 아주 사기 캐릭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놈들을 처리하기 위해선 최소 12분야의 힘을 모두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반신급. 그것도 별자리정도의 존재를 나를 제외한 다른 이가 처리할 수 있을까.
냉정하게 말하면 불가능하다는 게 내 평가였다.
시간도 부족하고, 그 과정이 쉽지도 않다.
정령계에 들렀을 때 대정령을 통해 달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에겐 은퇴했으니 딴 데 알아보라 했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다시 나서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차라리 제자를 하나 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
단순히 손을 살짝 봐준 이들 말고.
진짜 아주 말려 죽일 작정으로 엄하게 키울 진짜배기 제자.
내 모든 것을 전수해 줄 그런 존재를 말이다.
“어휴, 하다못해 그놈들끼리 싸우건 말건 피해만 안 오면 그만인데. 쯧 텄다 텄어. 내일은 애들 데리고 소풍이나 가야겠다.”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나는 내 기척을 스르륵 파고들어와 내 등을 끌어안는 무언가에 눈을 부릅떴다.
내 기감은 내 상황이 어떻건 상대적으로 발현해 모든 것을 확인한다.
반신급 상대조차 주변에 있음을 눈치챌 정도로 기감이 뛰어난데 그런 기감을 파고든다?
시공을 베는 일리나도, 8서클 이상의 마법사인 페르세르크도, 심지어 프리아 여신이 봉인했던 별자리 놈들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기감이 완전히 돌파당했다.
“흡?!”
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나는 경악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소녀는 옷도 입지 않은 채 새하얀 실크 이불만 두르고 있었다.
그녀의 손엔 에반젤린의 애착인형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쥐어져 있었다.
“…….”
입이 벌어졌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막상 겪어보니 이건 좀 과하게 충격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잔뜩 졸린 눈을 보니 아직 잠에서 깨지도 못했다.
허리 아래까지 검은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다름 아닌 에반젤린이었다.
“성장통이 끝나면 좀 자란다곤 들었다만…….”
자라도 너무 자라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