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5화
“와 진짜…… 장난기가 많은 건 알았지만…….”
일리나가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 세 살짜리가 가출을 할 줄이야…….”
물론 그 세 살짜리가 익스퍼터 최상급에 경험만 쌓이면 마스터를 넘어서는 존재라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내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가녀린 딸아이였다.
그런 딸아이가 가출해버린 것이다.
문제는 에반젤린의 특성에 있었다.
그녀는 태생부터 마나의 축복을 받고 태어난 터라 마나에 굉장히 민감했고, 내가 그런 녀석을 보호하기 위해 추적 마법을 걸어 놓은 장신구도 모조리 벗어 놓고 도망쳤다.
백금화가 잔뜩 든 돈주머니도 사라졌다.
청단이 홍단이는 어떻게 꼬드김을 당했는지 같이 탈출해버렸고, 페르세르크가 매일 애지중지하던 초월의 종언도 가져가버렸다.
“그나마 다행인건 아이나가 따라붙었다는 것이겠지.”
겉으론 드러낼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나가 있다면 녀석의 안전을 어느 정도 보장할 수 있다.
다만 그렇다고 내가 안 움직인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저하, 아이나 양으로부터 소식이 도달했습니다. 현재 북쪽 유적지대로 향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하…… 골 때리네. 진짜.”
베르닐 시종장의 보고에 내가 인상을 팍 찡그렸다.
“에반젤린을 보호하라고 붙여 준 애들은 다 어디 갔어?”
“그게…… 아가씨께서 전부 따돌리신 터라…….”
“그것들 전부 나중에 내가 직접 훈련시킨다고 그래.”
“저런…… 명복을 빌어 둬야겠군요.”
씁쓸하게 웃으며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괜히 소문내지 말고. 금방 데려올 테니까.”
“명 받잡겠습니다. 저하.”
따라오겠다는 이들을 다 놔둔 채 륀느만 대동시키고 하인스 영지를 벗어난 나는, 아이나가 보고했던 방향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 * *
“흠흠~.”
라운 왕국의 국경을 넘어 북쪽으로 향하던 도중, 그녀는 다국가에 공통적으로 설치된 길드로 향했다.
한 달 전, 서재에서 찾은 책을 보고 모험이라는 것에 굉장한 흥미를 품어버린 깃이 일의 화근이었다.
하인스 영지는 그녀에게 아주 행복한 곳이었다.
소중한 아빠와 엄마가 있고, 자신을 보면 늘 미소를 지어 주는 영지민들도 가득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겁 없이 다가와서 시비를 걸던 이가 있었지만 보통 그녀의 아버지, 데이비 올 라운의 손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거나 아주 분질러지기도 했다.
그랬다.
그녀가 원하는 영웅, 혹은 용사의 상은 다름 아닌 데이비 올 라운이었다.
꼭 자신도 아빠처럼 멋진 영웅이 될 거라는.
부푼 꿈을 애써 숨긴 채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 주는 가면을 눌러썼다.
아빠와 함께 있을 땐 상관이 없지만, 혼자서 돌아다닐 땐 가능하면 가면을 쓰고 다니라던 엄마의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지금쯤이면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아빠가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높은 확률로 그녀를 잡으러 올 터!
이번에 잡히면 굉장히 크게 야단을 맞고 다시는 이런 모험을 즐기러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가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전날 밤 쪽지를 남기고 그동안 준비한 여러 물건들을 챙겼다.
혼날 거라며 안 된다던 청단이와 홍단이 언니를 설득하고, 아공간 가방에 짐을 마구잡이로 쑤셔 박은 뒤 용돈을 가지고 탈출했다.
기적적으로 성공하기까지 정말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은 그녀였기에 절대 잡혀서 돌아가거나 자신의 소재를 아빠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수?”
“모험가 겸 용병이 되려고 하는데요.”
“허어…… 요즘에도 이렇게 꿈만 쫓는 멍청한 젊은이가 있었구먼.”
“증표를 발급해 주세요.”
그녀는 담담하게 최대한 목소리를 깔고 요구했다.
이에 대머리 사내는 말없이 에반젤린을 내려다 보다 조용히 말했다.
“아가씨. 피부가 고운 걸 보니 어디서 곱게 자라오신 분 같은데. 요즘 용병이나 모험가나 거칠기 짝이 없수다.”
“그래서요?”
“내 딸자식이 생각나서 하는 이야기지만 웬만하면 그냥 돌아가시오.”
험상궂은 외모와 다르게 굉장히 친절하게 대답해 준 그가 고개를 까딱였다.
“다음.”
“뭐…… 뭐라구요? 잠깐만요!”
“됐수다! 아가씨 같은 젊은이들이 치기로 들이밀었다가 죽은 걸 어디 한두 번 본 줄 아시오? 일없소.”
길드 직원은 손을 절레절레 저으며 그녀의 가입을 막으려 했다.
이에 에반젤린은 이를 악 물고 허리춤에 찬 검을 그대로 뽑아 들었다.
스창!!!! 서걱!!
동시에 그의 앞에 있던 거대한 책상이 반으로 갈라졌다.
“으억?!”
그녀는 가면을 쓴 채 시뻘건 검기가 넘실거리는 검을 사내를 향해 겨누었다.
“증표! 주세요!”
당당한 요구.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던 사내가 중얼거렸다.
“이…… 익스퍼터…….”
“빨리!”
“아…… 알겠소. 익스퍼터인 줄은 몰랐소이다.”
세상에 소드마스터도 다수 존재한다지만 그것은 극히 일부일 뿐이다.
실제로는 익스퍼터급만 되어도 용병들 사이에선 알아 주는 실력가가 되곤 하니까.
“아가씨…… 헌데 겉보기엔 굉장히 젊어 보이는데, 혹시 그거 마법검이오?”
“아뇨.”
정확히는 마검이다.
당당하게 말한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증표. 안 줄 거예요?”
“알겠수다. 뭐, 뭐가됐건 검기까지 쓰는 이를 밀어낼 수야 있나. 다만 이것부터 서명하시오. 향후 의뢰에 관한 일로 큰일을 당하거나 죽었을 경우 모든 책임은 스스로 지도록 한다.”
그가 그렇게 적힌 서류를 내밀자 에반젤린은 작고 흰 손으로 제 턱을 쓰다듬으며 서류를 이리저리 쏘아 보았다.
그리고는 이내 깃펜을 꺼내 들고 망설임 없이 이름을 썼다.
에반젤린.
에반젤린이라는 이름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사내는 복잡한 표정으로 서명이 된 서류를 품에 넣은 뒤 조용히 말했다.
“그래서, 정확히 어떤 의뢰를 찾으시우.”
“북쪽으로 가는 호위 의뢰나 퇴치 의뢰요.”
“마침 몇 개 있구먼. 한번 보시오. 혹시 모르겠다 싶으면 물어보시우.”
그렇게 말하고는 신경을 끄는 그를 보며 에반질린은 고민했다.
아빠가 쫓아오지 못하게 하려면 몬스터 토벌 의뢰보단 역시 장기간 수송 임무를 거쳐야 했다.
“참고로 조심하시오. 용병 놈들은 거칠기 짝이 없으니까.”
“이걸로 할게요.”
에반젤린은 순수한 미소를 지은 채 콧노래를 부르다 천천히 의뢰서중 하나를 내밀었다.
다름 아닌 동대륙의 북부로 향하는 행렬을 호위하는 임무였다.
“이걸로…… 할 거요?”
“네!”
“보수야 좋다만 꽤 강행군일 텐데…… 뭐, 좋수다. 한다고 한 이상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지. 기다려 보시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붉은색의 도장을 꺼내 에반젤린의 이름을 쓴 곳에 쾅!! 하고 찍었다.
“자 다 됐수다. 마침 출발이 6시간 후요. 준비하기에 빠듯할 텐데.”
“괜찮아요!”
그녀의 얼굴엔 정말로 해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다그닥. 다그닥!
동부 대륙의 북부로 가는 행렬은 상단과 학자 집단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북부 지역의 유적지에 조사를 위해 떠나는 학자들과 그런 그들에게 물건을 조달해 주는 상단의 행렬이었다.
마차의 끝에 쪼그려 앉아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로 콧노래를 부르던 에반젤린은 문득 주변의 분위기가 생각 이상으로 무겁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으응? 왜 표정이 그렇게 죽을상이에요?”
에반젤린은 이제 세 살짜리다.
아무리 많은 것을 배워도 그녀 특유의 천진난만함이 사라질 순 없었다.
“이봐. 꼬맹이. 우리가 지금 놀러가는 줄 알아?”
“망할. 이런 꼬맹이를 누가 데려온 거야.”
당연히 용병들은 그녀를 못미더워 할 수밖에 없었다.
특유의 천진난만함은 귀엽게 보일수도 있지만 이런 상황 속에선 왠지 모르게 모자란 아이가 따라 붙은 느낌이었으니까.
“길드 접수원도 한물갔나 보군 젠장. 뭐 저런 애송이에게 이런 의뢰를 넘긴 건지.”
대놓고 못 미더워 하는 이.
적의를 드러내는 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게 세상이 어둡다는 사실에 조금 당황한 에반젤린이었지만 그녀는 애써 미소 지었다.
“이봐 꼬맹이. 좋은 말로 할 때 그냥 돌아가는 게 어때. 이 일대는 몬스터가 엄청나게 많다고. 대체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는 모르겠다만 괜히 우리 발목을…….
쾅!!!
“아코…….”
갑작스런 충격음에 마차들이 일제히 멈춰 선다.
바로 옆에 있던 거한의 등에 코를 처박은 에반젤린이 울상을 지으며 제 코를 감싸 쥐었다.
“히잉…… 아파…….”
“허…… 진짜 돌아버리겠구만…….”
저들끼리 중얼거린 용병들이 에반젤린을 노려보았지만 에반젤린은 눈물이 고인 눈으로 끙끙거릴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용병들은 역정을 내고 화를 내야 했건만.
어째서일까.
그녀를 향해 마구잡이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몬스터다!!”
이윽고 마차를 멈춘 범인이 무엇인지 드러났다.
챙!! 챙챙!!
그 소리를 들은 용병들은 순식간에 무기를 뽑아 들고 마차에서 익숙하게 뛰쳐나갔다.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용병들이 모두 뛰어나가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에반젤린은, 이내 그들을 따라 허겁지겁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언니.”
[헤헤. 에린이는 괜찮아. 홍단이가 지켜줄 거야.]
홍단이의 의지가 전해져 오자 에반젤린은 가면을 문지르며 옅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가죽 끈을 이용해 긴 흑색의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는 고개를 들었다.
호위를 위해 움직이는 용병의 수는 약 20명 정도였다.
-끼히히히히힉!!
-끽끽!!
습격 몬스터는 다름 아닌 녹색의 작은 악귀인 고블린들이었다.
허름한 넝마를 걸친 고블린들은 끽끽 거리며 순식간에 상단원들을 포위하기 시작했다.
“히익! 고…… 고블린!”
젊은 여성학자들이나 상인들은 겁에 질린 얼굴로 두려움에 떨었다.
“젠장 고블린이 50마리가 넘잖아! 대체 어디서 이만큼 굴러 나온 거야.”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도 그 수가 많으면 골치 아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에반젤린은 첫 모험이라는 사실이 기꺼웠는지 가면 아래로 보이는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와아…… 고블린이야.”
“이봐 꼬마 아가씨! 뒤로 물러나! 괜히 앞에서 나대지 말고!”
“네? 왜요오?”
“왜요? 이게 미쳤나! 고블린 놈들은 여자만 보면 아주 환장하니까 그렇지!! 물러나!!”
그 말대로였다.
고블린들은 다른 용병들을 무시한 채 에반젤린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읏?!”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 보는 끔찍한 악의.
에반젤린의 몸이 굳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힘은 그녀가 일방적으로 강하다.
하지만 그 끔찍한 악의에 에반젤린은 홍단이를 뽑아 들고도 나설 생각을 하지 못했다.
몸이 저도 모르게 파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악의로 인해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녀였다.
-끽끽!!
-케헤헤헤헤!!
고블린들은 그녀가 주춤한 사실을 깨닫고는 더욱더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녀가 한발 물러나려던 그 순간이었다.
쿠우웅!!!
무형의 무언가가 주변을 강하게 강타한다.
-끽?!
-께르르르륵?!
갑작스런 힘에 당황한 고블린들이 눈을 부릅뜨며 주춤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모종의 힘이 그들을 방해한다.
동시에 악의가 집중된 상황에서 해방된 에반젤린은 자신이 최상위 포식자임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두려움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그릉…….
“언니! 가자!”
그렇게 말하며 에반젤린이 든 검에 붉은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거…… 검기?!”
“세상에! 익스퍼터라고?!”
파앙!!! 투쾅!!
그야말로 포탄이 쏘아지듯 바닥을 박찬 에반젤린은 특유의 부드러운 유연함과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오는 엄청난 힘을 바탕으로 종횡무진 고블린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한번 악의에서 해방된 에반젤린은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고블린들의 사이를 날듯이 뛰어 다니며 놈들을 순식간에 베어 나갔다.
앗! 하는 사이에 고블린 서너 마리가 피를 뿌린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순간 고블린 대여섯 마리가 비명을 지른다.
가장 짐 덩어리라 생각했던 작은 소녀가.
고블린들의 악의를 받자마자 초짜를 티내기라도 하듯 굳어버렸던 소녀가 실은 엄청난 실력가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용병들도 쉬이 겪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카아앙!!!
반격하듯 에반젤린을 향해 고블린 하나가 검을 휘둘렀다.
두두두두두두두!!!
동시에 더 많은 고블린들의 행렬이 습격하기 위해 나타난다.
“다들 뭣들 하나!! 저 젖먹이 꼬맹이도 싸우고 있는데 언제까지 두려워할 거냐!! 가자!!”
“우와아아아아아!!”
그 말과 함께 에반젤린을 보고 경악하던 용병들은 이내 자신들의 일을 떠올리고 맹렬하게 고블린들을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투시작을 알린지 약 10분도 채 되지 않아 고블린 대다수가 도망치고 남은 놈들은 에반젤린의 검에 썰려 나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
“거보세요. 생각보다 경험이 되죠?”
“내가 보여줄 수 없는 것이니까…….”
악의에 노출되는 것.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느끼게 해 주고 싶은 소중한 딸이지만.
그렇게 너무 오냐오냐하는 건 좋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는 장면이었다.
“잠깐만…… 뒤에서 지켜봐 주지.”
에반젤린을 향해 악의를 내보내던 고블린들을 강제로 경직시키고 그들에게 디버프를 건 것은 다름아닌 데이비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바로 옆에서 아이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엔 바로 데리고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만…… 잠깐 지켜보는 것도 괜찮다는 판단. 이래도 틀렸나요?”
“아니. 잘했어. 내가 생각도 못한 부분이네 이건.”
용병들은 몰랐다.
익스퍼터급 실력을 지닌 에반젤린의 뒤에 누가 있는지.
상인들은 몰랐다.
자신이 고용한 어떤 어린 용병으로 인해 누가 자신들을 뒤에서 보호해 주고 있는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