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2화
“…….”
피투성이가 된 채 침묵하고 있는 예쁜 소녀를 보며 몇몇 소년 소녀들이 격분을 토했다.
“이 개새끼들!!”
가장 분노하는 건 티미 렌다로그. 요시아와 같은 샤쿤탈라의 동급생으로 공작가 출신의 불 마법사였다.
“요시아 양…….”
흐느끼는 소녀는 알리사 요스포크. 티미와 단짝수준으로 같이 붙어 다니던 소녀였다.
“흥. 멍청하게 당하기나…….”
“셀비스 입 닥쳐.”
“…….”
소년 소녀들 모두가 샤쿤탈라의 동급생들이었다.
물론 이제 와서 대부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굉장한 스펙을 지닌 마법사들이지만 그렇다고 과거의 기억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덜컥!!!
내가 진입한 건 녀석들이 그렇게 이를 악물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피습당한 채 발견된 장소는 볼티즈 왕국의 북부 쪽이었다.
에반젤린에게 줄 선물을 만들었다며 호위 하나 없이 홀로 떠난 그녀였다.
물론, 어린 소녀가 홀로 대륙을 횡단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짓이지만 그녀가 어디 보통의 존재이던가.
완전 각성만 이루면 그녀는 대륙의 절대적인 힘의 상징 중 하나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니까.
정확히는 그녀의 힘이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그런 존재였다.
살아남은 뱀파이어들의 수장.
분열을 꿈꾸던 과격파와 다른 공존을 택한 온건파 뱀파이어이자 전대 뱀파이어 로드가 각성시킨 존재.
그녀의 개인 힘은 아직 미숙하다.
하지만 그녀를 이 꼴로 만들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였다.
본능이 그녀를 보호하고 있으니 말이다.
즉. 그녀를 이 지경으로 만들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이 맞아야 한다.
요시아가 상대를 적이 아니라 판단해야 하고.
또 하나 본능적으로 그녀를 보호하는 피의 보호를 뚫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나 신성력이 필요하다는 것.
“선생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티미가 달려와 내 멱살을 잡았다.
“쟤 왜 저러냐고요! 누가 쟤들 저 꼴로 만들었냐고 묻잖아요!!”
“이거 놔. 티미 렌다로그.”
“하! 이 와중에도 선생 노릇…….”
“닥치고 물러나.”
그 말에 나는 조용히 쓰러져 있는 요시아의 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번 죽었다.
하지만 불사의 힘이 그녀를 다시 되살려냈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극도로 쇠약해져 있다.
[자신들을 심판자라고 하더군요.]
문득 살리반 황제가 했던 말이 떠오른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이단심문회를 한 번 처리했더니 또 같은 놈들이 나온 것이다.
질리지도 않고 나오네.
그렇게 중얼거리며 나는 티미에게 시선을 보냈다.
“선생님! 요시아 괜찮은 거 맞아요?!”
“선생님은 뛰어난 의술실력을 지니고 계시고 성자잖아요! 그러니까!”
아니. 그녀에게 가장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혹시…… 저희 때문에 치료를 못하는 건가요?”
그때 티미가 조용히 물었다.
“…….”
“괜찮아요. 해주세요.”
그 말에 내가 녀석들을 둘러본다. 티미부터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이 멍청이랑 몇 년을 알고 지냈는데요. 우리도 알아요. 얘가 우리와 다르다는 거.”
그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가 입을 열었다.
“로드 오브 기어스.”
치이이이잉!!!
그 말과 함께 대량의 마나가 방출되자 학생들이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굳이 영창은 필요하지 않아도 영창을 한 것은 이 녀석들에게 인지시키기 위해서였다.
“너희들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대륙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
“…….”
“또 내 지금의 삶이 박살 날 가능성도 있다.”
“선생님.”
“그러니까 지금부터 너희는 요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내가 여기서 한 것들에 대해서 모두 함구해.”
차가운 시선으로 녀석들을 향해 말하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목숨. 까짓거 걸게요.”
모두가 이견 없이 기어스 마법을 심장에 새기기가 무섭게 나는 티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티미 검 관리는?”
“잘하고 있는…… 왜요?”
“내놔.”
그렇게 말하며 검을 받은 나는 그대로 기검을 덧씌웠다.
소드마스터도 쉽게 할 수 없는 엄청나게 얇게 진동하는 막을 덧씌운 나는 망설임 없이 내 팔뚝을 세로로 팔뚝까지 그어버렸다.
“꺄악?!”
“미…… 미쳤어요?!”
보통 사람이라면 동맥이 잘려 피를 터뜨리며 쓰러져야 한다.
하지만 나는 팔뚝으로 향하는 혈압을 강제로 낮춰 피가 뚝뚝 흐르게 만든 뒤 망설임 없이 요시아의 입에 피를 흘려 넣었다.
그녀에게 가장 큰 힘을 주는 것은 막대한 힘이 서린 피.
즉. 내 혈액이다.
창백하던 그녀의 목 너머로 피가 주르륵 흘러 들어간다.
새빨간 피가 흐르는 것을 학생들이 경악스레 바라보던 그때였다.
스르륵.
죽은 듯 쓰러져 있던 그녀가 내 팔을 낚아채 당기더니 그대로 입에 물어버린 것이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으나 본능에 가까운 자기 반사였다.
“세상에…… 피를…….”
“잠깐만 피를 빠는 건 설마…….”
“그 설마다.”
이놈들 요시아가 다른 무언가라는 건 알았지만 진짜 뱀파이어라곤 생각 못 한 듯 보였다.
“니들 동기였던 요시아는 이런 녀석이다. 다만 우리가 아는 그럼 뱀파이어와 달라 공존을 꿈꾸는 온건파 뱀파이어.”
“…….”
“너희는 이 녀석이 무섭나?”
“선생님은…….”
티미가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요시아를 미워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확실히 나도 뱀파이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일리나는 과거 친모의 일로 뱀파이어라면 아주 학을 떼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시아는 관계없어.”
담담하게 말하며 나는 눈을 감은 채 내 피를 계속해서 빠는 요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만 빨아 이년아. 이거 혹시 의식 찾은 거 아니야?”
인상을 찡그리며 팔을 빼내려 하지만 그녀는 마치 젖을 처음 문 아이처럼 놓지 않으려 했다.
이에 나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원하는 만큼 힘을 흡수할 수 있도록 피를 제공해주었다.
그렇게 원 없이 흡혈을 한 그녀가 다시 잠들자 나는 신성 마법으로 팔을 회복시켰다.
“선생님…… 괜찮아요? 방금 사람이면 거의 죽을 정도의 피를 빨리셨는데…….”
“괜찮아.”
피가 없다고 죽기엔 몸이 너무 많이 변해버렸으니까.
내 혈액은 마나의 흐름을 원활하게 만드는 요건에 불가하다.
그렇기에 지금 피가 부족해져서 마나의 흐름이 둔해진 것을 제외하면 사실 별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너희는 돌아가.”
“싫어요. 요시아를 이 지경으로 만든 놈들. 그놈들에게 복수할 겁니다.”
“니들 모두 너희가 할 일이 있다 틀렸나?”
“…….”
“그러니 돌아가.”
“싫습니다. 이대로 못가요.”
티미의 결연한 외침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그래. 지금 요시아의 일만 중요한 게 아니야.’
“제 목숨은 알아서 챙겨.”
그렇게 말하며 나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말했다.
“아이나.”
“네.”
“불닭이와 함께 동쪽 대양을 넘어 알라시스 대륙으로 가라. 거기에 뱀파이어 놈들이 있을 거다.”
알라시스 대륙.
티오니스 대륙보다 한참 작지만, 티오니스 대륙에서 동쪽 대양을 항해하면 보이는 거대한 대륙이다.
놀랍게도 이 땅은 사람이 살 여건이 전혀 되지 못하기에 아직까지 인간이 없는 곳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 뱀파이어들이 은신하고 있는 대륙이기도 했다.
“하지만 알라시스 대륙은 크기가…….”
“아니 아마 알아서 마중 나올 거다. 가서 놈들에게 정보를 모조리 캐내. 하나도 남김없이.”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내 표정이 극도로 싸늘해졌다.
* * *
“에반젤린. 오늘도 의뢰를 보러왔나?”
“네? 아 네!”
환한 미소를 지으며 흑발을 흩날린 에반젤린이 배시시 웃어보였다.
자신을 구하러 온 아빠에게 밉다고 소리치고 벌써 이틀이 지났다.
그 날 이후 에반젤린은 아빠가 다시 자신을 찾아와 주지 않자 침울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아가씨. 왜 표정이 갑자기 죽을상이야.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아빠가…… 아빠가 안 와요.”
그 말에 용병은 짧게 헛기침을 하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는 아빠가 대륙의 성자라고 했나?”
“네에.”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륙 최강자의 공녀가 이런 곳에서 용병일을 하고 있는것도 웃긴 노릇이니 말이다.
“그래…… 그 대륙의 성자님이 아가씨를 데리러 오지 않는다고?”
“네에…….”
“저런.”
“아빠한테 밉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오질 않아요. 전 미움받는 걸까요.”
침울한 그 말에 용병은 주변 동료에게 눈치를 보냈다.
이미 이 용병 길드에서 에반젤린은 명물이나 다름없었다. 지능이 안타깝지만 굉장한 실력을 지닌 귀여운 아가씨라고 말이다.
“하하하. 그래? 그랬구나. 그 인간이 나빴네.”
“…….”
“데이비 왕자가 못됐네! 암!”
“그래! 이렇게 귀여운 아가씨나 울리고 말이야!”
용병들은 그녀의 정신이 안쓰럽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다.
그냥 망상에 빠져있다고 말이다.
없는 곳에선 왕도 욕한다 하였나. 용병들은 일치단결하듯 에반젤린을 두둔하며 데이비 올 라운을 신나게 씹어 돌렸다.
“하하하! 기분 풀어! 내가 오렌지 음료를 사줄 테니까 아가씨!”
“우웅…… 자…… 잘 먹을게요.”
오렌지 음료를 쭉쭉 빨며 에반젤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를 만나면 사과하고 싶어…….’
그 갑옷을 입은 괴물의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역시 아빠는 아빠며 소중한 사람이다.
지금이야 용사가 되겠다며 가출해있는 상황이지만 언제고 아빠가 찾아와 자신을 안아주었으면 싶은 그녀였다.
“애초에 뭐야. 이런 귀여운 딸을 여기 홀로 던져놓고 잘하는 짓이다.”
“대륙의 성자는 얼어 죽을.”
에반젤린을 다독이기 위해 신나게 용병들이 대륙의 성자를 욕하기 시작했다.
이에 에반젤린은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아 아빠 욕…….”
덜컹!!!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걸어들어온다.
흑발에 제법 고풍스러운 정복을 입은 사내였다.
이 근방에선 본 적이 없는 인물이 들어서자 용병들은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새로운 신입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오? 의뢰라면 저쪽 창구에…….”
“의뢰는 아니고.”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가 에반젤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봐. 우리 공주님은 지금 기분이 많이 안 좋아. 뭔 이야기를 하고 싶으면 나중에 하지?”
“그래.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말이야.”
“그래. 데이비인지 개이비인지 하는 망할 놈이 우리 공주님을 저렇게 슬프게 했다고.”
앞을 막아서는 거구의 용병들을 보며 청년이 시선을 돌렸다.
“험한 꼴이라.”
“어? 이놈 봐라. 한판 해보자는…….”
비웃음이 담긴 표정에 용병하나가 화가 나 소리치려던 순간.
누군가가 눈을 부릅뜨며 후다닥 달려와 용병의 팔을 잡았다.
“그…… 그만!!”
비명을 지르며 그가 소리 질렀다.
“아니, 왜 이래 이 인간이.”
“그만해 미친놈아 죽고 싶어 환장했어?!”
“응? 이 인간이 누군데.”
본래 용병 길드에 귀족들이 찾아오는 일은 드문 편이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대…… 대대대대…….”
“대?”
“대륙의 성자…….”
이윽고 용병하나가 와들와들 떨며 말했다. 동시에 에반젤린이 고개를 들었다.
“어…….”
굳어버린 에반젤린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대륙의 성자?”
“데이비…… 올…… 라운…….”
그 한마디에 주변의 분위기가 침묵에 빠진다.
방금 말한 용병이 누구인지 다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과거 전쟁이 벌어졌을 때 데이비 왕자의 곁에서 싸웠다던 용병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다는 건…….
“아…… 아빠.”
“에반젤린. 미안하지만 가출은 그만하고 돌아가자. 아빠가 잘못했다.”
그 말에 에반젤린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기 시작했다.
“미안해 에반젤린.”
그 말에 에반젤린은 한참 동안 제 아빠를 바라보았다.
다시 만나면 사과한다고 했는데. 아빠의 품에 안기겠다고 했는데.
“아빠 미워!!”
아이의 치기라는 게 그렇게 쉽게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
빽 소리를 치며 도망가버리는 에반젤린을 보며 길드 내부가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뭐야…… 아빠라고?”
“무슨…….”
“잠깐. 그럼 그게 거짓말이 아니라…….”
아빠가 대륙의 성자. 데이비 올 라운이 아니라고 했던 게…….“
전부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용병들은 방금 전까지 데이비를 신나게 씹어 돌리던 자신들을 떠올리고 파랗게 질렸다.
“이야기 잘 들었어. 몰상식한 놈에 별거 없는 놈팡이라고.”
도망쳐버린 에반젤린을 바라보며 데이비가 입을 열었다.
“괜찮아. 없는 곳에선 왕도 욕한다고 그런 거로 내가 화를 낼까.”
그렇게 말하는데.
데이비의 미소에 싸늘함이 감돈다.
“이봐.”
“흐끕!”
고개를 돌려 데이비의 붉은 눈동자를 직시한 용병은 전신을 옭아매는 어마어마한 기세에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빛이 용사가 더 강하다고?
개소리! 이건 인간이 아니라 무슨 괴물을 보는 기분이다!
격이 다른 포식자의 위세.
용병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곳을 날려버려도 이상하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분위기였다.
자신들은 이렇게 죽는 건가.
“제…… 젠장 전날 의뢰가 끝나면 돌아가서 결혼한다고 하지 말았어야 했어…….”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도화선이 되듯 용병들의 표정이 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위압이 점차 짙어지자 용병들은 눈동자만 데굴데굴 글렸다.
그때였다. 갑자기 위세가 사라진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리를 감싸 쥔 데이비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봐. 보리 맥주 하나만 줘. 그리고, 에반젤린과 같이 의뢰했던 양반들. 잠깐 시간 되나?”
지금.
대륙에서 최강자라 불리는 절대 억제력.
빛의 용사 이상으로 유명하며 거대한 일인군단.
황제조차 만나기 쉽지 않다는 절대적인 존재가 이런 누추한 용병 길드에 대뜸 찾아와 맥주를 주문한 것이다.
“뭐합니까. 앉아요.”
“저…….”
“우리 딸. 나 없는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좀 듣고 싶은데.”
그 말에 용병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니까.
머리가 안쓰러운 아이라고 생각했던 에반젤린이 늘 하던 말.
아빠가 대륙의 성자라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 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