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5화
에반젤린의 손을 꼭 잡은 채 기사들과 함께 대동한다.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것이다. 도련님께서는 자비로우시다. 전후 사정을 듣고 합당하다 판단하신다면 기사 종군하는 것으로 용서를 해주실지도 모른다.”
기사의 엄한 목소리에 에반젤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빠. 기사 종군이 뭐에요?”
순수한 눈망울로 물어오는 그 모습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에 가볍게 손을 올렸다.
“별거 아니야. 이 아저씨들이 아빠에게 일을 시키겠다는 거야.”
“아빠가요? 왜요?”
“글쎄다? 잘못한 게 있나 보지.”
“우웅…… 아빠는 잘못한 게 없는데요!”
“에반젤린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헤헤헤. 아빠. 그럼 정말로 저랑 같이 여행해주시는 거예요?”
“우선 영지로 돌아갔다가.”
“부우…….”
뺨을 부풀리는 그 모습에 좀 전부터 기사들의 반응이 심상찮다.
“저…… 혹시. 귀족이십니까.”
“그럼 뭘로 보이는지 물어도 되겠나?”
“후우…….”
내 말에 기사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이내 표정을 지우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좀 전과는 딴판인 분위기였다.
“우선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딱히 마음에 들어서 하는 짓은 아닌 모양이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군의 가신입니다. 시킨 일을 하지 않을 순 없습니다.”
저 멀리 저택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 냄새가…… 난다.
“사실 저희 도련님께서는 야망이 좀 큰 분입니다. 그래서 가능한 모든 수를 사용해 강자들을 휘하에 두고 싶어 하시죠.”
기사의 말에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물론 귀족이라 해서 타 귀족의 휘하로 들어가는 전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황실 시종이나 시녀들은 대부분 귀족가 출신이니 말이다.
“그래서. 숲을 박살 낸 것을 빌미로 족쇄라도 채우려 했나?”
“뭐……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련님은 야망이 크고 조금 아둔하시지 성미가 나쁜 분은 아닙니다.”
“흐음?”
“실제로 도련님께서는 폭넓게 용병 평민 가리지 않고 실력자를 받아들이시지요. 그 과정에서 조금 과격함이 없잖아 있지만 한번 자신의 사람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시는 분입니다.”
그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그래서 이런 걸 따르고 있었다라.
“두 분께서 귀족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면 도련님께서도 최대한 예우를 차리실 겁니다.”
“그건 힘들어 보이네.”
저택에 가까이 왔을 때 나는 조용히 에반젤린을 내 뒤로 숨기며 저택에 손을 뻗었다.
“저…… 무슨.”
“물러나 있어.”
[디스펠]
와장창!!!!
동시에 저택 전체에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흔적이 나타나며 괴기스러운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피 냄새를 보면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이네. 멀쩡한 저택의 형상을 씌우고 내부에는 이미 난리가 났다라…….”
“뭐…… 뭣들 하나!! 백작님과 도련님을 찾아라!! 2분대는 이 사태를 일으킨 자들을 찾아라!!”
“예!”
그 외침과 동시에 기사들이 저택 내부로 진입한다.
“아빠…….”
“에반젤린.”
이윽고 표정을 굳힌 에반젤린이 내 팔을 꼭 잡자 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세상이…… 그렇게 예쁘지만은 않아.”
“…….”
“네가 용사가 되고 싶다면 이런 것들을 보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진짜 용사는.
이런 것보다 더 끔찍한 것을, 또 더러운 것을 보고도 자신의 신념을 꺾으면 안 되니까.
그런 점에서 레이나는 나름대로 존경받을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생을 모조리 대륙의 평안. 자신이 그토록 바라온 평온에 쏟아붓고자 맹세했으니까.
그 신념을 십 년 동안 꺾지 않았다.
그것이, 대륙 유일 용사라 불리는 칭호의 무게였다.
“겁나니?”
“……아뇨. 전 결심했어요. 아빠처럼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용사가 아니더라도, 저는 아빠의 딸이니까요.”
“그래 정말 착하다.”
엄하게 가르칠 땐 엄하게.
결국, 내 교육 방침은 바뀌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에반젤린에게 도움이 되기를.
“찾았다! 도련님을 찾았다!”
그때 저택 안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찾아! 습격자를 찾으란 말이다!!”
분노에 찬 목소리.
나는 어둡고 고요해진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사들 사이에 둘러싸여 있는 무언가를 볼 수 있었다.
“……세상에.”
에반젤린이 입을 틀어막자 나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가렸다.
“아빠…….”
에반젤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럴 수밖에.
눈앞의 참상은 끔찍하기 그지없었으니까. 바닥에 쓰러진 시신은 도저히 인간이라 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지고 불타 있었다.
그리고.
시신의 머가 위치한 곳 위에는 프리아 여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단장님! 이것 좀 보십시오!”
“이건…… 이단심문회의 인장!”
기사의 눈에 불이 튀었다.
“이단심문회가 정녕…….”
“아니. 심문회는 아니야.”
그렇게 말한 내가 한걸음 내디뎠다.
“공자?”
“이단 심문회는 이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아. 과거 과격파였던 심문회도 이렇게 암살하는 경우는 없었어.”
외려 대놓고 일을 크게 벌린 후 당당하게 처형했지.
그 말인 즉.
“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그 물음에 나는 조용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새하얀 빛의 입자들이 회전하듯 손끝으로 모여들었다.
‘그래. 뭐. 시작이 좋진 않았지만 죽은 놈 명복 정도는 빌어주마.’
빛의 입자는 처참하게 찢긴 시신의 영혼 조각을 하나둘 모아 붙이기 시작했다.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영혼 자체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이윽고 빛과 함께 도련님이라 불리던 소년의 모습이 혼령으로 떠올랐고 이내 조용히 빛이 되어 흩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다른 시신도 똑같은 상황인가?”
“그…… 그렇습니다만…… 대체 당신은 누구시기에…….”
“라운 왕국 제 1왕자이자 성국 공인 대륙의 성자.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그때 누군가의 난입으로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제가 괜한 말을 했나요?”
“아니. 잘해줬어.”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창문으로 난입한 이를 향해 말했다.
“이…… 이단심문회!!”
동시에 기사들이 검을 그녀에게 겨눈다.
그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에반젤린을 도와 몬스터를 막아섰던 이단심문회의 3군단, 집행관. 힐데스노바였다.
“뒤늦게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당신은…….”
“말했을 텐데? 이건 이단심판이지만 이단심문회가 한 게 아니야.”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이단심문회의 문양을 남긴 범인입니다! 실력 있는 이들을 이렇게 참살할 수 있는 건 암살자도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쉽게 말해줄까?”
담담하게 말한 나는 프리아 여신의 문양을 발로 밟아 문질렀다.
화르륵!
동시에 화염이 일어나 그 문양을 지운다.
“범인은 프리아 여신의 이름을 빌린 사이비 새끼들이라고.”
* * *
요시아를 노린 존재와 백작가를 참살한 존재는 동일범이다.
그것도 한둘이 아닌 다수.
들은 정보에 따르면 평범한 평민 소녀가 손도끼로 기사 수십을 도륙할 정도로 강했다고 했던가.
기사들은 자신들이 명을 받고 떠나기가 무섭게 끔찍한 참상을 당해버린 저택을 보며 허망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실력 있는 용병들을 많이 영입했다 했던가.
하지만 저택에 살아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닥치는 대로 짓이기고 찢어발긴 흔적.
누군가의 저항 흔적.
낭자한 선혈.
조용히 핏자국이 묻은 벽면에 손을 올렸다.
뒤늦게 합류한 이단 심문관. 힐데스는 이것이 사이비 집단과 관련되었음을 확실히 인지했고, 시신을 처리하고 조사에 나섰다.
에반젤린은 이런 대참사의 몰골을 보곤 창백하게 질려버린 터라 륀느에게 잠시 맡겨 저택 밖으로 내보낸 후였다.
“요시아를 그 지경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면 보통 수준으론 어림도 없는데.”
뱀파이어 로드.
다른 뱀파이어와 다르게 로드 급 뱀파이어. 그것도 불완전한 게 아닌 이터널 뱀파이어 로드인 요시아 프랑소스다.
그녀가 힘을 다 깨워낸 게 아니라 할지라도 그녀가 가진 혈기가 그녀를 보호했을 텐데.
그녀는 그들에게 한번 살해당했다가 부활했다.
그마저도 부활이 더딜 정도로 치명상을 입은 상황.
범인이 이단 심문관과 관련된 힘을 사용한다고 생각하면 요시아에게 타격을 입힐 순 있다.
이단심문회가 사용하는 신념은 특히나 뱀파이어에게 상극의 힘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반 뱀파이어지 상위 귀족급 이상의 뱀파이어에겐 제대로 먹히지도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물며 로드에게?
웃기는 소리.
“기억을 좀 짚어봐야겠네.”
꼴에 철저하게 기억을 지워놨지만, 시간이 부족해서 도망친 이상 완전히 지우진 못했으리라.
나는 조용히 벽면에 손을 뻗어 마나를 끌어 올렸다.
대부분 박살 난 기억의 흐름.
하지만 역시 예상대로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뒤쪽 정원이라…….”
나는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어지간한 고위 마법사나 정령사들도 알아채지 못할 아주 잠깐의 흔적. 그 흔적을 쫓아 오자 조금씩 흔적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수가 새겨진 로브를 입은 이들이 정원을 통해 빠져나갔음을 확신한 내가 느긋하게 걸어 나가던 찰나였다.
쉬리리리릭! 콰아아앙!!!!
숲속에서 갑작스레 새하얀 화염이 일렁이더니 검은 신관복을 입은 남녀 몇몇이 공격해 들어왔다.
순식간에 내 목을 노리고 낮게 날아든 공격이다.
보통 익스퍼터급 기사라면 반응도 못 하고 마스터라 할지라도 흠칫할 정도의 속도와 예리함. 하지만 사람 몸집만큼 길고 거대한 도끼는 내게 닿지 못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로 한쪽 다리를 들어 가볍게 그것을 밟듯 막아버린 것이다.
…….
자신의 공격이 너무 가볍게 틀어막혔다는 판단이 섰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두려움 따위 느끼지 않는다는 듯 연계 공격을 가해왔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빠르게 영창하기 시작했다.
[빛으로 함께 하사 자애로우신 태초의 주신 프리아 여신이시…….]
“주기도문? 선 넘네. 이것들이.”
콰득!!
영창과 함께 신성 마법을 발현하려던 신관 하나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손도 대지 않았음에도 한 명이 순식간에 당해버렸음에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었다는 소리였다.
“그럼 장단에 맞춰서 북이라도 쳐줘야지.”
화르륵!!
다시금 도끼에 백열의 화염을 피워올리는 소녀가 다시 맹렬한 속도로 나를 교란시키며 파고들기 위해 움직인다.
콰직!!
하지만 소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그녀의 머리통을 움켜쥔 내 손뿐이었다.
퍼엉!!!
잔혹하기 그지없는 일격이었다.
전신의 뼈가 박살이 나고 뇌출혈을 일으켰는지 피를 울컥 토해내는 소녀가 그 자리에서 죽어버렸다.
나를 습격한 존재는 총 셋. 그중 하나가 남은 것이다.
정보를 캐내기 위해선 한 놈은 살려놔야 했으니까.
저놈은 죽이지 말고 제압을 해야 했다.
그래도 조금 이상한 점은 존재한다.
“이상하네. 고작 이 정도 실력이면 요시아가 당할 리가 없는데.”
요시아가 단순 요행으로 당할 존재는 아니다.
물론 이놈들은 겉껍데기일 뿐이라곤 하지만 그 기본적인 뼈대는 분명히 보였다.
정확히 말해서 이 수준으로 요시아를 죽였다는 건 말도 되지 않았다.
이놈들 뭔가 더 숨기고 있는 듯한…….
그때였다.
지직…….
갑작스레 주변에 이질적인 비틀림이 느껴졌다.
그리고.
내 귓가로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널, 완전히 파멸시키겠다. 데이비 올 라운.
“…….”
-얌전히 심판을 기다려라.
마치 비웃는듯한 말투였지만 나는 이질적인 무언가를 느꼈다.
숨길 수 없는 격한 증오를 말이다.
-내가 누군지 궁금하겠지. 걱정 마라.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의지 아래에 모였고 그에 따라 심판자가 된 자들이니.
“뭔지 말은 해주지?”
내 말에 소녀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서렸다.
-우린. 모두 네가 죽인 생명의 업이다. 네가 가볍게 죽여온 생명에게는 가족이 없는 줄 알았나?
그 한마디에 내가 멈칫했다.
“…….”
-넌 우리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우리 또한 널 이해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는다. 어떤 이유였건 우리의 소중한 가족을 앗아간 널 파멸시켜버릴 것이다.
“이건 또 뭔…….”
동시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
그리고. 목소리가 사라진 직후 내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서렸다. 이 목소리가 의도한 게 뭔지 깨달은 것이다.
“이 x년이…….”
순식간에 차가운 분노가 주변을 휩쓴다.
“x년? x년이 뭐야 아빠?”
주둥아리가 화근이었다.